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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등산사진후기☞/♤ 경기도의 기타산

[20140221]광명 성채산ㆍ서독산 연계산행하고 광명역사 거쳐 안양석수 와룡산에 오르다 - 2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14.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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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2월 21일(금)

맥가이버의 낭만산보 - 광명 성채산ㆍ서독산 연계산행하고 광명역사 거쳐 안양석수 와룡산에 오르다.
 

 

맥가이버의 낭만산보 - '광명 성채산ㆍ서독산 연계산행하고 광명역사 거쳐 안양석수 와룡산에 오르다' 이야기

 

 맥가이버의 낭만산보 - '광명 성채산ㆍ서독산 연계산행하고 광명역사 거쳐 안양석수 와룡산에 오르다' 코스

 

석수역→안양천 세월교→서해안고속도로 굴다리→광명메모리얼파크→운암사→광명터널 공사장→남원양씨묘→밤농장울타리따라→삼각점

→성채산 정상(83m:산불감시초소)→휴먼시아 사각정→오리이원익기념관→제2경인고속도로 굴다리→삼천리CNG충전소→보물창고가는길

→삼거리쉼터→서독산 정상(222m)→돌탑→도고내고개 갈림길→서독산 전망대(215m)→포켓쉼터→절골약수터→무의공 이순신장군 묘

→이순신장군묘 입구→호봉골 버스정류장→KTX광명역사→광명종합터미널→화창교→안양천생태이야기관→와룡산 들머리→와룡산 정상

→와룡산 둘레길→석수도서관→석천약수터→만석중앙교회→우방유쉘아파트→삼막교→삼막천 산책로→경남아파트앞삼막3교→관악역 

 
오늘은 광명 성채산ㆍ서독산 연계산행하고 광명역사 거쳐 안양석수 와룡산에 오른다.
 
며칠 전 안양 석수동에 있는 미답의 3개 산 - 석수산ㆍ와룡산(충훈산)ㆍ꽃메산 - 을 답사하다가
석수산에서 석수하수처리장으로 내려서서 와룡산(충훈산) 들머리를 찾아 이어갈 때 약간 벗어난 길이 있었기에 그 숙제를 겸해서...
 
광명시의 산 中 아직 미답의 산인 성채산(83m)의 들머리를 찾아보고, 서독산과의 연결머리도 찾아보고자 길을 나선다.
그리고 서독산에 있다는 이순신장군 묘(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아닌 무의공 이순신장군)도 찾아볼 겸해서...
맥가이버의 낭만산보 - '광명 성채산ㆍ서독산 연계산행하고 광명역사 거쳐 안양석수 와룡산에 오르다'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누군가가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臥死步生)'고 했다.
맥가이버는 '산 따라 강 따라 길 따라' 걷는 것을 죽고사는 차원이 아닌 즐기는 차원에서 걷는다.
즉, 좋은 길을 걷다가 새로운 환경이나 상황,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되고, 느끼고, 감동 받고, 깨닫는 것을 즐긴다.
 
 
 

'모든 만남은 걷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길을 걷다보면 새로운 풍광을 보게 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맥가이버가 '때론 함께, 때론 홀로' 산행이나 여행, 도보를 하면서 후기를 주로 사진으로 작성함은
인간의 만남이 또한 유한함을 알기에 어떤 연유로 비록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추억 속에서 함께 하고자 함이고,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걸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하는 무능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든다면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자 할 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 맥가이버의 낭만산보 - '광명 성채산ㆍ서독산 연계산행하고 광명역사 거쳐 안양석수 와룡산에 오르다' - 2부를 시작하며...

 

 

15시 03분 - 광명역세권휴먼시아2단지 공원 정자

 

 

 

 

 

 

 

15시 07분 - 제2경인고속도로

 

 

15시 08분 - 오리로

 

15시 09분 - 오리서원(오리이원익기념관)

 

 

 

 

 

 

오리이원익기념관[梧里李元翼記念館]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1055-3[오리로 287]
전화 02-2680-6307

 

[정의]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에 있는 오리 이원익 기념관.


[건립경위]
오리이원익기념관은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의 청백리 정신과 충효 정신을 널리 알리고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며, 사회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2001년 5월 10일 개관하였다.


[변천]
2001년부터 2006년까지 광명문화원에서 위탁 관리하였고,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재단법인 충현에서 위탁 관리하였다.

2010년부터 광명시청에서 직영으로 운영하고 있다.


[구성]
대지 면적 5,504㎡, 총면적 1,128.60㎡로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이다.

전시실, 교육용 강당, 유물보존실, 사무실, 화장실, 기타 부대시설로 이루어졌으며

전시실에는 이원익의 유품과 이원익의 4세손 이존도(李存道), 5세손 이인복(李仁復)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오리이원익기념관 외부에는 경기도 기념물 제85호인 이원익 선생 묘 및 신도비가 있다.


[현황]
오리이원익기념관은 오리 이원익 관련 자료의 연구·수집·보존·관리·전시를 주요 업무로 하고 있다.

이 밖에 이원익의 청백리 정신을 선양하고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을 위한 사회 교육,

관내 초, 중, 고등학교 학생들과 주민을 대상으로 역사 현장 체험 교육을 하고 있다.

광명시 문화관광해설사가 상주 근무하여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며 매주 월요일과 신정·설 연휴 기간에는 휴관한다.

관람료와 주차료는 무료이며 관내로 음식물을 들여올 수 없고 애완동물도 출입할 수 없다.

2010년 5월 내부를 새로이 단장하고 재개관하였다.


출처 : 디지털광명문화대전

 

 

이원익(李元翼)
공려(公勵),오리(梧里),문충(文忠),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서울특별시
성별 남
생년 1547년
몰년 1634년
본관 전주
대표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후기 광명 지역의 대표적인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태종의 아들인 익녕군 이치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함천군 이억재(李億載)이다.

이원익의 가계는 익녕군 이치-수천군 이정은-청기군 이표-함천군 이억재-이원익으로 이어진다.


[활동사항]
이원익(李元翼)[1547~1634]은 1573년(선조 6) 성균관전적이 되었으며,

그해 2월 성절사 권덕여(權德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그 뒤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거쳐 이듬해 가을 황해도도사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병적(兵籍)을 정비하면서 실력을 발휘하였는데, 특히 이이(李珥)에게 인정받아 여러 차례 중앙 관직에 천거되었다.

 

1575년(선조 8) 가을 사간원정언이 되어 중앙관으로 올라온 뒤,

사헌부지평·사헌부헌납·사헌부장령·수찬·교리·경연강독관·응교·승정원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87년(선조 20) 이조참판 권극례(權克禮)의 추천으로 안주목사에 기용되었다.

이때 양곡 1만여 석을 청하여 기민을 구호하고 종곡(種穀)을 나누어 주어 생업을 안정시켰다.

또, 병졸들의 훈련 근무도 연 4차 입번(入番)하던 제도를 6번제로 고쳐 시행하였다.

이는 군병을 넷으로 나누어 1년에 3개월씩 근무하게 하던 제도를 1년에 2개월씩 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줄인 조치였다.

 

안주 지방에서는 뽕을 심어 누에를 칠 줄 몰랐는데,

이원익이 권장하여 이공상(李公桑)[이원익에 의하여 계발된 잠상(蠶桑)이라는 뜻]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그 뒤 임진왜란 전까지 형조참판·사헌부대사헌·호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겸도총관·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조판서로서 평안도도순찰사의 직무를 띠고 먼저 평안도로 향하였고,

평양이 함락되자 정주로 가서 군졸을 모집하고 관찰사겸순찰사가 되어 평양성 인근에서 왜군에게 공격을 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595년(선조 28) 우의정겸사도체찰사로 임명되었으며, 주로 경상북도 성주에 설치된 영남체찰사영에서 일하였다.

이 시기에는 구미의 금오산성, 창녕의 화왕산성, 함양의 황석산성 등 영남 지역의 산성을 수축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곽재우(郭再祐) 등의 의병장과 교류하며 영남 지역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도 긴밀히 협조하여 한산도에 주둔하던 부대를 격려하여

사기를 올리는 데 힘썼으며, 이순신이 파면되자 적극 옹호하여 다시 천거되는 데 기여하였다.

1599년(선조 32) 영의정이 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사직하고 도성을 떠나 소하리 선산으로 물러났다.

 

광해군 즉위 후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며, 전쟁 복구와 민생 안정책으로 국민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하여

경기도 지방에 한하여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토지 1결(結)당 16두(斗)의 쌀을 공세(貢稅)로 내도록 하였다.

 

임해군(臨海君)이 처형되고 대비 폐위론이 나오자 반대 상소문을 올려

1615년(광해군 7) 결국 홍천(洪川)으로 유배되었으며 73세이던 1619년(광해군 11) 풀려나 여주에서 머물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되고 인조가 즉위하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반정으로 성내의 민심이 불안하였는데 이원익이 영의정에 임명되자 안정되었다.

한편,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인조에게 자신이 광해군 밑에서 영의정을 지냈으므로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면 자신도 떠나야 한다는 말로 설복하여 광해군의 목숨을 구하여 유배지에 머물게 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80세에 가까운 노구로 공주까지 왕을 호종하였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도체찰사로 세자를 호위하여 전주로 갔다가

강화도로 와서 왕을 호위하였으며, 서울로 환도한 뒤 훈련도감제조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고령으로 체력이 쇠하여 사직을 청하고 낙향하였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원익은 성품이 소박하여 과장이나 과시할 줄을 모르고, 소임에 충실하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그의 집은 두어 칸짜리 오막살이 초가였으며 퇴관 후에는 조석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하였다고 한다.

 

1623년(인조 1) 9월 인조가 77세 되는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궤장을 하사하고 잔치를 열어 주었으며,

1631년(인조 9) 초가로 된 거처의 누추함을 보고 정당을 하사하여 내려 주었으나 극구 사양하다가 받았다.

이원익은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한양의 여러 곳에 거처하였으나,

물러나서는 오늘날의 광명시 소하동 선산이 있는 오리곡 인근에 머물렀다.

 

이원익의 호를 딴 오리(梧里)는 현재 광명시 소하동에서 가학동으로 넘어가는 곳의 이름으로 이원익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옛 지도인 「군부인조씨이하십삼세족장분산도(郡夫人趙氏以下十三世族葬墳山圖)」에도 지명이 나온다.

 

또한 소하동 설월리[또는 서월리(鋤月里)]는 구전에 따르면, 이원익이 달빛 아래 호미로 김을 매던 곳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이원익의 영정을 모시고 제를 지내던 사당인 오리영우(梧里影宇)와 인조가 하사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불탄 것을 다시 복원한 관감당(觀感堂)을 비롯하여 이원익 묘소 및 신도비 등이 남아 선생의 정신을 전하고 있다.


[학문과 사상]
이원익은 공리공론에 머물지 않고 실제적으로 정치 및 행정에 활용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 같은 사상은 최초로 대동법 시행을 정책적으로 실현한 면모를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연풍현감으로 부임하는 손자에게 내려준 지침에는 마음가짐을 비롯하여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방법, 쓸데없는 일을 벌이지 말 것을 당부하는 내용 등 실질을 숭상하는 모습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유서를 비롯한 유훈에는 풍수설에 구애받지 말고 소하동 선산에 안장할 것을 당부하였고,

재물로 가족들이 화목하지 못함을 경계하여 불의한 재물을 모으지 말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오리집(梧里集)』, 『속오리집(續梧里集)』, 『오리일기(梧里日記)』와 「고공답주인가(雇工答主人歌)」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광명시 소하동 1059-9번지[오리로 325]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01년(선조 34) 청백리에 천거되었으며,

1604년(선조 37) 임진왜란에서 세운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녹훈되었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출처 : 디지털광명문화대전

 

15시 13분 - 제2경인고속도로 밑으로...

 

15시 16분 -

 

 

15시 17분 - '보물창고 가는 길'로...

 

 

 

 

 

 

 

 

15시 24분 -

 

 

 

 

 

15시 29분 - 삼거리 쉼터

 

 

광명역사가 보이네...

 

 

15시 31분 - 삼거리에서 '보물창고 가는길'이 아닌 서독산 정상 방향으로...

 

 

15시 33분 -

 

15시 34분 -

 

 

 

15시 42분 - 서독산 정상(간혹 '서독산 전망데크'가 있는 곳을 서독산 정상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서독산[書讀山:180m
서덕산,청덕산 
 

[정의]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과 안양시 만안구 박달동에 걸쳐 있는 산.


[개설]
서독산은 광명시 소재의 야산 중에서 가장 안정된 물리적 환경을 유지하고 있다.

해발 고도는 비교적 낮아 180m(220m)에 불과하지만, 자연 자원의 부존 가치가 대단히 높으며,

특히 멸종으로 치닫고 있는 반딧불이의 서식처로 널리 알려진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만, 인근의 안양시 도시 팽창과 광명시의 개발 압력으로 인해 현재의 자연환경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을지는 의문시되고 있다.

인공으로 식재된 식생 군락이 적으며, 교란 요인이 적다는 점은

지역의 환경 자원으로서의 안정성 및 고유성을 지닌 우수한 자연 자원임을 반증하고 있는 셈이다.


[명칭유래]
서독산은 일명 서덕산 또는 청덕산이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과거 많은 선비들이 이곳에서 과거 급제를 위해 책을 읽고 공부에 몰두했었다 하여

글 ‘서(書)’자와 읽을 ‘독(讀)’자를 써서 서독산(書讀山)이라 명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연환경]
서독산은 광명시의 남단 끝에 자리 잡고 있으며, 광명시 소재의 야산 중에서 사람의 간섭이 가장 적은 것으로 알려진 산이다.

자연환경은 전반적으로 우수한 편이다. 안정된 기반의 자연환경에 비해 식생이 다양하지는 않은 편이며,

산정 부근으로는 떡갈나무와 팥배나무·때죽나무·굴참나무·갈참나무 등이 우세한 교목활엽 식생을 보이고 있다.

중간층으로는 밤나무와 물박달·때죽나무 및 산사나무 등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일부 지역은 이입 및 식재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시나무의 하나인 은사시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이외에도 관목류로는 가장 흔한 조팝나무·국수나무·화살나무·보리수나무·병꽃나무 등이 서식하고 있다.

 

하층을 구성하는 초본식물로는 노루귀·은방울꽃·둥굴레·꿩의바람꽃·족도리풀·꽃마리·현호색·고깔제비꽃·흰제비꽃·천남성·돌나물·애기나리

·큰애기나리·개감수·홀아비꽃대 등이 분포하며, 지역적으로 보호되기 어려운 환경에서도 법정보호종인 삼지구엽초가 서식하고 있다.

 

무엇보다 양지천을 중심으로 한 수계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어

최근 복원의 노력을 위한 대상으로 떠오른 반딧불이의 서식 환경이 갖추어진 곳으로 유명하다.

산림 생태가 안정되어 있고 포유류인 너구리와 파충류인 살모사·유혈목이·장지뱀 등이 서식하고 있으며,

박새와 딱새·멧비둘기·까치·오목눈이·붉은머리오목눈이·쇠딱따구리 등의 텃새류와

호랑지빠귀·소쩍새·꾀꼬리 등의 철새들도 자주 출몰하는 안정된 환경을 유지하고 있다.


[현황]
높이는 180m이다.

서독산은 광명시 소재의 야산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자연환경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 같은 가치를 살리려는 시민들의 노력이 가시화되고 있어 다행스럽다.

다만, 도심을 끼고 있으며 안양시와의 경계를 이룬 지점에 위치한 지정학적 특성으로

언제 개발의 압력으로 인해 교란에 노출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지역이다.

장기적으로 종의 다양성을 증진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핵심 지역이므로

지역 지자체와 관련 기관 및 시민 단체들의 적극적인 보호 보전 방안이 요구되고 있다.


출처 : 디지털광명문화대전

 

15시 43분 - '서독산 전망대'로 가는 길...

 

 

15시 44분 - 서독산 정상부근의 돌탑

 

 

15시 44분 -

 

15시 46분 - 도고내고개로 가는 길...가학산과 바로 이어지는 길

 

15시 46분 - 서독산 전망대로 가는 길

 

 

 

15시 49분 - 서독산 전망데크

 

 

 

서독산 전망데크 우측 '도고내5거리'로 가는 길

 

서독산 전망데크 아래로 내려서는 길...

 

15시 52분 - 무의공 이순신장군묘를 찾아서....

 

15시 53분 -

 

 

 

15시 56분 - 보물창고 가는 길을 만나...

 

 

15시 57분 - 포켓쉼터

 

15시 57분 - 절골약수터를 거쳐 이순신장군묘로...

 

 

 

16시 01분 - 절골약수터

 

 

 

 

 

 

 

16시 04분 -

 

 

 

 

16시 08분 - 다시 만난 삼거리 쉼터(15시 29분에 지나갔던...)

 

 

 

16시 10분 - 다시 만난 삼거리(15시 31분에 지나갔던...)

 

 

16시 13분 - 무의공 이순신장군묘

 

 

 

이순신 묘[李純信 墓]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 에 있는 조선 후기 무신 이순신의 묘소.


[개설]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무신 이순신(李純信)[1554~1611] 장군의 묘소이다.

이순신은 본관이 전주, 자는 입부(立夫)이다. 양녕대군의 6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이귀달(李貴達)이며, 아버지 이진(李眞)과 어머니 복주김씨 사이에서

금천(衿川)[지금의 광명시 일직동]에서 태어났다.

 

1598년(선조 31)에는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서 노량해전에 참전하여 싸우다가

충무공이 전사하자, 전군을 지휘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인조 때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효종 때에는 장남인 이탁이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책록에 따라 우의정과 완천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위치]
이순신 묘는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 산26-7번지에 있다.


[형태]
이순신 묘의 봉분은 정사각형의 호석을 지닌 방형분으로 호석의 앞면은 1.6m와 2m의 장대석 2개를 둘렀고,

측면은 2m가량의 장대석 2개를 놓았는데, 그 규모는 앞면 326㎝, 측면 398㎝이다.

봉분 앞에는 문인석, 망주석, 상석, 향로석, 문방석 등의 옛 석물이 놓여 있다.

문인석은 금관조복형으로 몸통이 두터운 점이 특징이다.

망주석은 운각과 염의를 조각한 전형적인 형태이나 1기는 반파된 상태이며,

상석은 계체석 위에 상석의 앞쪽 끝단이 일치되게 설치하였다.

문방석에는 몸통 정면과 후면에 안상문이, 양 측면에 당초문이, 상면에 연판문이 새겨져 있다.


[현황]
조선 후기의 방형분과 석조물의 양식, 보존 상태 등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7년 9월 10일 광명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 디지털광명문화대전

 

 

 

이순신(李純信)
입부(立夫),완산군(完山君),완천군(完川君),완천부원군,무의(武毅) 
 

[상세정보]

성격 무신
출신지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 
성별 남
생년 1554년
몰년 1611년
본관 전주
대표관직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정의]
조선 전기 광명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입부(立夫).

태종의 첫 번째 왕자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이귀달(李貴達)이며, 아버지는 이진(李眞)이다.

어머니는 복주김씨(福州金氏)로 외할아버지는 진사(進士) 김구수(金龜壽)이다.

부인은 경상도병마우후(慶尙道兵馬虞候) 윤천수(尹天壽)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순신(李純信)[1554~1611]은 어릴 때부터 유업(儒業)보다 기사(騎射)에 흥미를 느껴

25세 때인 1578년(선조 11) 무과알성시(武科謁聖試)에서 을과(乙科)에 급제하였다.

왕이 친전하는 활쏘기 경연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북방에 나가는 것을 면제받기도 하였다.

이후 두 차례 선전관청선전관을 지내고, 이어 비변사낭청으로 뽑혀 강진현감으로 3년을 지내고,

1586년(선조 19) 온성도호부(穩城都護府) 판관(判官)을 지냈다.

 

처음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김성일(金誠一)이 그의 능력을 알고 적극 추천한 것이다.

부친상을 마치고 1588년(선조 21) 의주판관(義州判官)으로 북방을 방위하였다.

이때 사신 가는 사람이 지나치게 물품을 요구하였으나, 노자만 마련하고 들어주지 않았다.

이 일로 파직되었다가 여진족이 운총(雲寵)에 자주 침입하자 1589년(선조 22) 혜산진첨절제사(惠山鎭僉節制使)로 다시 임명되었다.

 

여진족이 또다시 침입하였으나 당도하기 전에 모두 달아났는데,

이 때문에 문책을 받고 원희(元熹)와 이억기(李億祺) 등과 파직되었으나 선조가 특별히 용서하여 다른 곳으로 임용되었다.

1591년(선조 24) 일본 통신사 일행의 보고에 따라 남해안 방어책이 강화되면서 방답진첨절제사가 되었다.

이해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막하에서 성지(城池) 수리와 무기 보충에 노력하고 전선 제작에도 자문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 이순신의 중위장(中衛將)으로

옥포와 고성 해전에 참전하여 세 번 싸워 모두 승리하였다.

그 뒤로 전부장(前部將)으로서 선봉이 되어 당항포(唐項浦) 싸움에서 왜선(倭船)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전부장(前部將)으로 참전하여 한산도(閑山島) 해전과 부산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부산포 해전 이후 1593년(선조 26) 해전의 소강상태가 진행될 즈음 충무공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이순신만 싸운 공은 있어도 싸운 상은 없다고 주장하여 절충장군에 제수되었다.

1594년(선조 27) 충청수사가 되었으나 법규를 어긴 대관(大官)에 대하여

군율(軍律)을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였다는 무고로 구금 조사를 받았다.

무죄로 밝혀졌으나 압록강 변 고령진(高嶺鎭)의 첨절제사로 좌천되었다.

1년 만에 비변사에서 추천하여 유도방위대장(留都防衛大將)이 되어 서호에서 한양을 방위하였다.

 

전주부윤(全州府尹)에 바로 제수되었고,

다시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한양 방위가 중요하다고 하여 그대로 머물게 되었다.

정유재란 때 원균(元均)이 칠천량(漆川梁)과 고성에서 대패하고 충무공 이순신이 다시 수군통제사가 되자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왜란 중에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의 관직을 거쳐 충청도수군절도사로서 장문포(長門浦) 해전에 참전하였고,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서 왜교성(倭橋城) 전투에 참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598년(선조 31)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서 노량(露梁) 해전에 참전하였을 때,

이순신이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자 전군을 지휘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듬해 포도대장(捕盜大將)이 되었으나 무고한 사람을 장살(杖殺)하였다는 죄로 한때 파직되었다.

1600년(선조 33)에 복직되어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황해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으나 재물을 탐냈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이해 다시 수원부사(水原府使)로 나갔으나 또 파직되었다.

 

1602년(선조 35)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재임하다가 파직당하는 등

여러 차례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 면직과 복직을 거듭하였다.

1604년(선조 37) 벼슬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고,

임진왜란 때 활약한 공으로 효충장의선무공신(效忠杖義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며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지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급되었다.

 

1606년(선조 39) 다시 수원부사를 거쳤고, 이듬해 완천군(完川君)에 개봉(改封)되었다.

임해군 옥사에 연루되었다가 무죄로 풀려나기도 하였다.

1610년(광해군 2) 9월 전라도병마절도사로 근무하다가 이듬해 9월 별세하니 향년 58세였다.


[묘소]
묘소는 광명시 일직동[옛 시흥군 서면 일직리]에 있으며,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 허목(許穆)이 명(銘)을 지은 묘갈(墓碣)이 세워져 있었으나, 현재는 망실(忘失)되어 전하지 않는다.

양녕대군의 지덕사(至德祠)가 위치한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도 조선시대에는 금천이었고,

그의 후손인 이순신의 묘소도 금천이었다는 점은 양녕대군 후손의 거주지를 이해하는 데에 시사적이다.


[상훈과 추모]
인조 때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고, 효종 대에는 장남인 이탁의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책록됨에 따라 우의정과 완천부원군(完川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이후 숙종 조에 이르러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적을 꺾고 침략을 막아낸 것’을 무(武)라 하고 ‘용기를 다하여 적을 죽인 것’을 의(毅)라 한 것이다.

 

출처 : 디지털광명문화대전

 

 

 

 

 

 

16시 16분 -

 

 

16시 17분 -

 

 

 

16시 20분 - 무의공 이순신장군 묘 입구

 

 

 

☞ 여기서 맥가이버의 낭만산보 - '광명 성채산ㆍ서독산 연계산행하고 광명역사 거쳐 안양석수 와룡산에 오르다'- 2부를 마치고...

 

 

 

2014년 02월 21일(금)

맥가이버의 낭만산보 - 광명 성채산ㆍ서독산 연계산행하고 광명역사 거쳐 안양석수 와룡산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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