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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경기 도보후기☞/☆ 경기옛길 의주길

[20140628]경기 옛길 의주길 中 1길 벽제관길ㆍ2길 고양관청길ㆍ3길 쌍미륵길 이어걷기 - 4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14.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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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6월 28일(토)

맥가이버의 낭만도보 - 경기 옛길 의주길 中 1길 벽제관길ㆍ2길 고양관청길ㆍ3길 쌍미륵길 이어걷기를 다녀오다.
 

 

  맥가이버의 낭만도보 - '경기 옛길 의주길 中 1길 벽제관길ㆍ2길 고양관청길ㆍ3길 쌍미륵길 이어걷기' 이야기

 

 맥가이버의 낭만도보 - '경기 옛길 의주길 中 1길 벽제관길ㆍ2길 고양관청길ㆍ3길 쌍미륵길 이어걷기' 코스

 

삼송역 8번 출입구→삼송초교앞 육교→삼송배수지→숯돌고개(여석령)→김지남묘역→덕명교중수비→벽제교→미타사 입구/지구촌유통

→서울외곽순환도로→유진레미콘→서울시립승화원 입구→대자삼거리→제1대자교→경기유치원→높빛농원→용복교→누리농원→빈정교

→빈정1교→고양1교→이마트 에브리데이 고양동점→성요셉 성당→고양동 사거리→이마트 에브리데이 고양동점→고양동 종합복지회관

→벽제관지→고양근린공원 바닥분수→중남미문화원→고양향교→꽃의숲/쉼터→호랑이굴→LG전자 고양물류센터→중부대학교 고양캠퍼스

→당고개식당→미니스톱→연산군시대금표비→혜덕사→성황당고개→무량선원→영창교회→고골 버스정류장→고읍마을회관→관청고개→한우물

→오죽골→용미3리 버스정류장→용진교→용미3교→용미3리 마을회관→용미슈퍼→옥미교→웅선 비지네스 앞→용암사→용미리 마애이불입상

→용미1리 버스정류장→용미1리 마을회관→정교회 성당→서현추모공원→백마교→은곡교→금자동이→장곡교→장곡리 버스종점→우승슈퍼

→장곡1리 마을회관→쌍둥이매운탕→공릉저수지→우승슈퍼→베들레헴쉼터→이회선생신도비 입구→선덕원→미희농원→부광스톤→이레스톤

→분수2교→왕동1교→신산3교→신산2교→광신교→광탄농협→새술막교→원광사→광탄 공공하수처리장→외화산교→신산5리 버스정류장

 
▲ 위에 있는 '경기 의주길 코스도'를 클릭하면 확대됨.

 

 

 

오늘은 경기 옛길 의주길 中 '1길 벽제관길ㆍ2길 고양관청길ㆍ3길 쌍미륵길' 이어걷기를 나선다.
 
길을 만드는 이가 있고...
그 길을 걷는 이들이 있다.
 
길을 찾아 걷는 이들은 길을 만든 이가 자신들이 불편하지 않게 여러모로 신경을 쓰고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
 
이미 경기 옛길 의주길을 걸은 이들의 호불호를 들었다.
 
오늘 경기 옛길 의주길 中 '1길 벽제관길ㆍ2길 고양관청길ㆍ3길 쌍미륵길'을 이어 걷는다.
 
1, 2, 3길의 거리 합이 27.8km이고, 소요시간 합이 9시간 30분이란다.
 
실제 걸은 길은 27.8km에 알바하며 추가로 걸었던 길이 있었으니 합이 30km는 조금 넘는 듯 하고,
 
08시 45분에 삼송역을 출발하여 17시 40분에 신산5리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였으니 7시간 55분이 소요되었다.
 
맥가이버의 낭만도보  - 경기 옛길 의주길 中 1길 벽제관길ㆍ2길 고양관청길ㆍ3길 쌍미륵길 이어걷기를 다녀오다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누군가가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臥死步生)'고 했다.
맥가이버는 '산 따라 강 따라 길 따라' 걷는 것을 죽고사는 차원이 아닌 즐기는 차원에서 걷는다.
즉, 좋은 길을 걷다가 새로운 환경이나 상황,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되고, 느끼고, 감동 받고, 깨닫는 것을 즐긴다.
 

 

 
 '모든 만남은 걷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길을 걷다보면 새로운 풍광을 보게 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맥가이버가 '때론 함께, 때론 홀로' 산행이나 여행, 도보를 하면서 후기를 주로 사진으로 작성함은
인간의 만남이 또한 유한함을 알기에 어떤 연유로 비록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추억 속에서 함께 하고자 함이고,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걸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하는 무능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든다면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자 할 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 맥가이버의 낭만도보 - 경기 옛길 의주길 中 1길 벽제관길ㆍ2길 고양관청길ㆍ3길 쌍미륵길 이어걷기 - 4부를 시작하며...

 

 

14시 22분 - 용암사 주차장

 

용암사 일주문으로 오르는 계단 아래에 스탬프찍는 곳이 있네...pass...

 

14시 23분 - 장지산 용암사 일주문

 

 

 

 

14시 25분 - 용암사

 

용암사[龍巖寺]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廣灘面) 용미리 장지산(長芝山)에 있는 절.

종파 대한불교조계종
소재지 경기 파주시 광탄면 용미1리 산11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창건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용미리 석불입상(쌍석불)의 조성 배경과

절의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어 석불이 만들어진 11세기(고려시대)를 창건 연대로 잡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 선종(宣宗:재위 1083~1094)이 후사가 없어 고민하던 중,

하루는 후궁인 원신궁주(元信宮主)의 꿈에 두 도승이 나타나 말하기를 "우리는 파주 장지산에 산다.

식량이 떨어져 곤란하니 이곳에 있는 두 바위에 불상을 새기라. 그러면 소원을 들어주리라" 하였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그곳에 실제로 큰 바위가 있어 서둘러 불상을 만들게 하였다.

 

그때 꿈에 보았던 두 도승이 다시 나타나 왼쪽 바위는 미륵불로, 오른쪽 바위는 미륵보살상으로 조성할 것을 지시하며

"모든 중생이 와서 공양하며 기도하면, 아이를 바라는 사람은 득남을 하고 병이 있는 사람은 낫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불상이 완성되고 절을 짓고 나자 원신궁주에게 태기가 있어 한산후 물(漢山侯勿)을 낳았다고 한다.

 

창건 이후 절의 옛 역사는 거의 전하지 않고 있다.

근대의 연혁은, 1936년에 파주군의 유지들이 절을 새로 지은 뒤

백정(白淨) 만월(滿月)과 승려 혜성(慧城)이 중창 불사를 시작하였고, 1978년 대웅전 불사에 착공하여 1979년 완성하였다.

이듬해에 대웅전 안에 지장탱화와 감로탱화를 조성하고,

요사채는 1982년 이후 꾸준히 증·개축하였으며, 1984년에 종각을 지어 범종을 봉안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미륵전·요사채·범종각이 있다.

대웅전에는 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석가모니 후불탱화·지장탱화·감로탱화·신중탱화가 있다.

미륵전에는 칠성탱화·산신탱화·독성탱화 및 작은 범종이 하나 있다.

 

절 뒤에는 석불입상(보물 93)이 있다. 마애불로 쌍미륵이라고도 하며 11세기 작품이다.

바위 사이에 세로로 생긴 자연적인 틈을 이용해 두 개의 불상으로 나누어 새겨져 있는데, 전체 높이가 불두까지 합쳐 19.85m에 이른다.

천연 암벽을 이용해 불신을 만들고 그 위에 목·머리·갓을 따로 만들어 올린 특이한 형태이다.

한때 왼쪽 어깨 위쪽에 대통령 이승만이 세웠다는 동자상과 칠층석탑이 있었는데 1987년 철거하여 요사 뒤편으로 옮겼다.

 

출처 : 두산백과

 

▼ 용암사 종무소

 

용암사[龍巖寺]

 

경기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이 절의 뒤에 있는 석불은 보물 제93호 파주용미리석불입상으로 지정되었다.
 
유형 유적
성격 절, 사찰
건립시기·연도 11세기
소재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 11

목차정의 내용 정의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長芝山)에 있는 절.

 

내용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이 절의 창건은 절 뒤에 서서 서쪽을 향하고 있는 보물 제93호인 파주용미리석불입상(雙石佛)과 관계가 깊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선종이 왕후와 후궁으로부터 아들을 얻지 못하여 고민하던 중,

하루는 후궁인 원신공주(元信公主)의 꿈에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서

“파주군 장지산에 산다. 식량이 떨어져 곤란하니 그곳에 있는 두 바위에 불상을 조각하라. 그러면 소원을 이루어 주리라.” 하였다.

 

기이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파견하여 알아보니 꿈속에서 말한 대로 바위 두개가 서 있었으므로, 서둘러 불상을 조성하였다.

 

그 때 두 도승이 다시 공사장에 나타나서 좌측은 미륵불로 우측은 미륵보살상으로 조성할 것을 지시하고,

모든 중생이 와서 공양하고 기도하면 아이를 원하는 자는 득남하고 병이 있는 자는 쾌차할 것이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 뒤 불상이 완성되고 그 밑에 절을 창건하자, 원신공주에게 태기가 있어 한산후물(漢山侯勿)을 낳았다고 한다.

특히, 이 불상은 예로부터 아기를 낳지 못하는 부인들이 공양을 바치고 열심히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에,

아기를 원하는 부녀자들의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36년 옛 절터 위에 새롭게 중창하였으며, 1979년에 대웅전을 지었다.

1984년에는 종각을 짓고 범종을 봉안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 당우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웅전과 미륵전, 요사채 등이 있으며, 최근에 환경을 정화하였다.

 

또한, 쌍석불 옆에 있는 동자불상과 칠층석탑은

이승만대통령이 1953년에 쌍석불을 참배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건립한 것으로 1987년 철거하여 대웅전 옆에 두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용암사 대웅보전

 

 아래 '용암사 안내문'을 클릭하면 확대됨.

 

 

 

14시 26분 - 동자상과 칠층석탑의 유래

 

 

 

 

 

 

14시 28분 - 쌍미륵불이 있는 곳으로...

 

 

▼ 아래 '용미리 석불입상에 얽힌 전설 안내문'을 클릭하면 확대됨.

 

 용미리석불의 유적의 유래 
 

이 입상석불은 광탄면 용미리 산 8번지 중턱 마애불(磨崖佛)로 고구려 응화(應化) 불기천년(서기 366년)에

상효군(相孝軍)인 차호진(車好鎭)과 심장기(沈長己)에 의하여 천연암벽을 동체로 삼아

불상높이 57척 2촌(18미터)의 기형적 거대한 입상을 영조(靈造)로 조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각부에 토속적인 미풍이 짙어진 명작품으로 전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것으로

왼쪽의 둥근 갓을 쓴 불상 원립불(圓笠佛)은 사각형의 얼굴에 자연적인 미소가 떠오르고

오른쪽의 사각형의 갓을 쓴 불상 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뿐 신체 각부의 조각수법은 두 불상이 같다.

원불상은 남상, 방립불은 여상이라 한다.

 

그리하여 항간에서는 부부상이라는 말들을 하며

오른편 방립불의 자비와 인종이 동양적 신비의 미소를 느낀다면 왼편 원립불은 활발하면서도 장엄수려한 용모를 보게 된다.


또한 방립불과 대치하여 원립불의 오른 어깨위에 작은 동자불이 세워졌는데

이 석벽아래 세워진 7층 석탑과 함께 1953년 10월 11일 이승만박사 내방지시로

박이순(朴彛淳)군수와 이만수(李晩秀), 남궁 연(南宮 鍊) 등 지방 유지들의 후원으로 새로 건립되었으나 후에 철거되었다.

 

이 석불 아래 감노정약수(일명 옷나무 약수)를 석불에다 떠다놓고 축원하면 득남한다는 전설이 오늘까지 내려오며

여름에는 이가 시릴 정도로 차고 겨울에는 온수와 같다 한다.

또한 병약자가 이곳에 와서 10개월만 먹고 요양하면 십중팔구는 완치한다고 하며

최근에 이 석간수(石間水)를 감정한 결과 유명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확실한 문헌이 없어

전설에 의하면 고려 13대 선종조후사가 없어 원신공주를 후궁으로 삼은 후

어느날 공주에게 도승둘이 현몽하여 암벽에 미륵불을 건립 기도할 것을 권유

완성 후 왕자를 얻었다는 설과 여조말 삼각산하 이 지역에 왕기가 서려 있어 미륵불을 세웠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의 전설은 석불앞 양지동 현전(現田)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말할 수 없는 구두방추요 고집쟁이 욕심많은 영감으로 동냥하러 찾아오는 사람에게

학대와 구박을 하여 빈손으로 쫓아버려 인근주민들에게 고약한 늙은이라 소문이 나 있었다.

 

이 말을 들은 한 도사가 하루는 찾아가 시주를 청하니 역시 거절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괘씸히 생각한 나머지 이 영감을 망해 놓겠다는 결심으로

몇일 후 다시 찾아가 공손히 절을 하고 나서 이 뒷산 기암에다 2개의 부처를 조각하여 세워 보시면 만석꾼이 될 터인데 하고 돌아서 오니

쫓아오며 그게 정말이냐고 물어 반문하자 “틀림없습니다”라고 공손히 합장하고 물러났다.

 

옳게 여긴 욕심장이 영감은 많은 돈을 들여 쌍불상을 만들어 모시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흐지부지 재산이 없어져 버리고 영감은 울화병으로 고생만 하다가 죽었다 한다.

 

또한 석불 앞 200미터지점 밭 가운데 장사바위와 말바위가 나란히 있는데

이것을 부처님의 공양미바위로 부르기도 하는데 약 800근이나 되는 두 바위가

밭갈이에 거추장스러워 밭주인이 깨어 없애 버리려고 징으로 바위를 뚫으니 징구멍에서 피가 흘러 나오며 큰 소리가 나와

깜짝 놀라 정신을 잃고 자빠져 수개월동안 병석에서 고생하였다 하며 그후 일절 손을 대지 못하였다 한다. 

 
출처 : 파주문화원

 

14시 29분 - 용미리 쌍미륵불(마애이불입상, 석불입상)

 

용미리 석불입상 및 용암사(파주)

 

장지산 기슭에 있는 용암사는 쌍석불사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절 위에 있는 천연바위에 새겨진 두개의 석불입상(보물 제93호)이 있기 때문이다.

 

구전에 의하면 이 절은 고려 선종(1084-1094년)의 후궁인 원신궁주가

아들을 낳기 위해 지금의 용암사 자리에 석불입상 2구를 만들었다는 곳이기도 하다.

 

《용미리 석불입상은 높이 17.4m로, 천연암벽을 몸체로 삼아 그 위에 목과 머리, 갓을 따로 얹어놓은 불상이다.

그 모습이 우람하고 웅장하다. 원립모자를 쓴 부처는 남자, 방립모자를 쓴 부처는 여자로 전해지는데,

고려시대 선종이 자식이 없어 걱정하던 차에 후궁인 원신궁주가 어느날 밤 꿈을 꾸었다는데,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사는 사람들인데 매우 배가 고프니 먹을것을 달라"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에서 깬 궁주가 이상해서 왕께 고하자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 알아보니 장지산 아래에 큰바위 두개가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왕은 즉시 이 바위에 두 도승을 새기게 하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하였다고 전한다.》

 

이 같은 전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기자전설(麒子傳設)에 불과하지만,

지금도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찾는다고 한다.

 

이 쌍석불은 웅장한 크기에 비해 신체비율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등 서투른 조각수법으로 그 중요성이 널리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우거진 숲 사이로 보이는 토속적인 얼굴과 자연스러운 미소로 방문객을 마을 어귀에서부터 맞이하는 모습이 정겹다.

 

이 쌍석불 아래 산 기슭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용암사는 그 긴 세월의 전설과 불공에도 불구하고

1997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몇 년전에 재건축을 하긴 했으나, 재원이 부족하여 실내장식도, 페인트칠도 못하고 60% 정도만 완성된 대웅전은 지금은 폐쇄 중이다.

현재 임시불전에서 스님들이 거처하고 있으며, 새로 지은 화장실도 시멘트벽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앞뜰에 봉덕사종을 본딴 범종(높이 197㎝, 종입구 115㎝)이 범종각에 안치되어 있다.

 

출처 : 대한민국구석구석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坡州龍尾里石佛立像] 

 경기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있는 화강암 석불입상 2구(軀).

 
보물 제93호.

전체 높이 17.4m, 원립불(圓笠佛) 2.45m, 방립불(方笠拂) 2.36m.

 

화강암 천연암벽을 몸통으로 삼아 그 위에 목 ·머리 ·갓 등을 따로 만들어 얹은 불상이다.

거대한 불상들은 신체의 비율도 맞지 않고 기형으로 생겼으며,

둥근 갓(원립)을 쓴 불상은 자연스런 미소를 나타내 보이고 있으며

목은 원통형으로 삼도(三道)는 없고 통견(通肩)의 납의(衲衣)는 가운 모양으로 몸을 싸고 있다.


양손은 가슴까지 들어올려 연화모양을 하고 있다.

사각형 갓(방립)을 쓴 불상은 합장한 인상이 다를 뿐 각부의 조각수법은 왼쪽 불상과 거의 같고

전설에 의하면 원립을 쓴 불상은 남자이며 방립을 쓴 불상은 여자라고 한다.

 

한편, 1995년에 발견된 명문으로 이 석불입상이 고려시대의 작품이 아니라

1465년(세조 11)에 세조와 정희왕후의 모습을 미륵불로 조각한 것이라는 설도 제기되었으나,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진 않았다.

 

출처 : 두산백과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坡州 龍尾里 磨崖二佛立像) 

종 목 보물  제93호 
명 칭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坡州 龍尾里 磨崖二佛立像) 
분 류 유물 / 불교조각/ 석조/ 불상 
수량/면적 2구
지정(등록)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8, 9번지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파주시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에 대한 설명입니다.
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는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굉장히 거대한 느낌이 든다.
이런 점에서 불성(佛性)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손은 가슴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오른쪽의 4각형 갓을 쓴 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 뿐 신체조각은 왼쪽 불상과 같다.

지방민의 구전에 의하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 한다.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元信宮主)까지 맞이했지만, 여전히 왕자가 없었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을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어 알아 오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다 두 도승을 새기게 하여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 불상들은 고려시대의 조각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탄생설화가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된다.

 

출처 : 문화재청

 

 

 

 

 

 

 

 

 아래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안내문'을 클릭하면 확대됨.

 

 

 

 

 

 

 

 

 

 

 

 

 

 

 

 

 

 

 

 

 

14시 41분 - 쌍미륵불(마애이불입상)을 둘러보고...

 

14시 42분 - 용암사 일주문을 나서...

 

14시 43분 -

 

14시 45분 - 78번 도로(혜음로)를 따라...

 

 

  

 

14시 48분 - 양지가든을 지나...

 

14시 49분 - 용미1리/한민고등학교입구 버스정류장에서...

 

▼ 분수원교까지는 4.8km라고...어느 길이나 이정목의 거리는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고 여기며, 방향이나 제대로 표시해 주면 좋겠다고 여긴다.

 

14시 49분 - 용미1리(양지마을) 입구 표지석 옆에 '한민고등학교'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네...

 

'한민고등학교'는

군(軍) 자녀 기숙형 사립고등학교로 지난 3월 3일 개교했다.

한민고등학교는 직업군인들의 빈번한 근무지 변경으로 인한 군인자녀들의 어려운 교육여건을 개선하고,

경기도민 자녀들에게는 보다 나은 교육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설립한 기숙형 고등학교로서

올해 첫 입학생으로 1학년 남녀 13개 학급에 412명(정원외 9명 포함)을 선발했는데...

전국에서 지원한 군인 자녀가 70%이고, 나머지 30%는 경기도내 중학 졸업생들이라고,

3년 후엔 전학년 정원 1200명을 채울 예정이란다.

 

▼ 접시꽃을 보며...

 

 

14시 51분 -

 

14시 52분 -

 

14시 53분 - '천 천 히'

 

14시 54분 -

 

14시 55분 - 용미1리 마을회관

 

14시 58분 -

 

14시 59분 -

 

15시 01분 -

 

 

15시 03분 - 정교회 주부활성당

 

한국정교회[韓國正敎會]

 
이칭별칭 : 한국그리스정교회, 러시아정교회 

동방교회의 교리를 신봉하는 기독교의 한 교파.

 

초기 기독교의 교리인 니케아(Nichea) 신조를 기본 신조로 삼고 있다.

한국정교회는 러시아정교회로부터 전래하였는데,

1897년 당시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볼랴노프스키가 본국에 사제 파송을 요청하면서 정교회의 한국전래가 이루어졌다.

이에 1900년 초대선교사로 셰헤트코프스키(Shehetkovski,C.) 수사대신부(修士大神父)가 서울에 들어와 첫 성찬예배를 거행하였다.

 

고종으로부터 대지 기증을 받아 영사관의 협조로 1903년서울 정동 22번지에 성 니콜라스 성당을 개관하였다.

그리고 그 해부터 경기도의 문산포(汶山浦), 파주군 교하(交河)·가루개·일산·송촌·마루심이 등에 교회를 세웠으나 얼마 되지 않아 폐쇄되었다.

 

1912년 러시아인 시르게이 부주교로부터 이요한(李約翰)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사제신품을 받고,

가루개교회에서 주관신부로 복무하다가 러시아혁명 직후 만주 하얼빈 관구로 전출하였다.

 

일제 말기에 교회재산이 적산으로 압류되어 있다가

8·15광복 후 그 재산의 복구를 위한 13년에 걸친 소송에서 승소하자,

정동 소재 교회대지 1,000여 평을 팔아 현재의 아현동 424의 1번지에 대지 800여평을 구입,

건평 108평의 비잔틴식 성당을 1968년에 건립하였다.

 

1946년 4월에 비로소 한국인 종무위원회를 조직하고 창립총회를 열어 한국인들로 회장과 위원들을 선출하였다.

한국정교회는 하얼빈의 정교회 관구와 행정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8·15광복 후에는 연락이 두절되었고,

그 뒤로 한국인 신부가 주관신직자(主管神職者)로 계승되어 있다.

 

1956년부터 미국의 남북미정교회 교관구의 한 관구가 되었다가,

1971년 이후에는 뉴질랜드정교회 관구로 이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국정교회의 선교활동은 정치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침체상태에 빠져 있고, 따라서 교세도 약한 편이다.

 

그러나 1982년과 1983년에 각각 부산과 인천에 성당을 설립하여 1994년 현재 전국에 5개의 성당과 1개의 수도원을 두고 있으며,

사제 6명에 총교인 2,000명(남 800명, 여 1,200명)의 교세를 유지하고 있다.

 

주요 활동으로 주교부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교육사업으로 1906년 4월에 초등교육기관인 보정학교(普正學校)를 설립, 운영하였는데 1918년 4월까지 유지되었다.

 

정교회의 신조와 교리에 관한 서적들을 출판한 것으로

≪자암진명 自暗進明≫(1907)·≪세계광명 世界光明≫(1909)·≪제일경 祭日經≫(1909)·≪기도문≫(1912)

·≪성사경 聖事經≫(1914)·≪성사요략 聖史要略≫ (1911)·≪신앙의 기초≫(1969) 등이 있다.

 

이 교회는 제식적(祭式的)인 교회로 성찬식을 위주로 하는 전례(典禮)가 매주 일요일에 거행된다.

특히 성찬식예배에는 성가대의 역할이 중요시되고 있어서, 성가대의 조직과 지휘에 관심을 크게 두고 있다.

 

정교회는 개신교가 주체가 되어 조직한 세계교회협의회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기독교연합운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정교회는 아직 세계교회협의회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

 

정교회는 신도들의 공동협회제도로 운영되고 있으며,

로마 가톨릭교회와 같은 세계적 단일체제와 단일명령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세계의 정교회들은 각국 정교회의 주교들이 모이는 공의회(Synod)를 통하여 신앙과 제도의 일치를 유지하고 있고,

주교들의 예우상 순위로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전 세계의 총대주교이다.

 

한국정교회는 현재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에 속하여 있으면서 뉴질랜드 관구장의 관장 아래에 있으며,

현재 대표자는 1975년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는 소티리오스 트람바스(Sotirios Trambas) 주교대리이다.

 

참고문헌『한국종교연감』(한국종교사회연구소 편저, 고려한림원, 1993)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5시 04분 - 한국정교회 묘지

 

 

15시 05분 - 여기서 분수원교까지 4km라고...16분 전에 출발한 용미1리정류장에서 분수원교까지 4.8km라고 했는데...1.2km는 온 듯한데...

 

 98번 도로(명봉산로)를 따라...

 

15시 07분 - 추모의전당 서현공원

 

 

15시 08분 - 좌측에 보이는 다리는 백마교...우측 안내말뚝에는 분수원교까지는 2.5km 남았다고...3분만에 1.5km를 왔네...

 

늘 바라는 것이 있다면 길을 만드는 이들이 안내표식에 숫자는 틀리더라도 방향표시만이라도 제대로 해주기를...

 

15시 09분 - 그리고 꼭 필요한 곳에 안내표식을 달아주기를...꼭 필요치 않은 직선로에는 있어도...

 

15시 10분 - 꼭 필요할 때인 갈림길에서는 볼 수가 없다.

 

일단 고산천을 따라가는 길로....

 

 

15시 14분 -

 

 

15시 17분 - 쉼터 위에는 버찌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비닐을 쳐놓았네...

 

 

15시 18분 - 은곡교를 건너...

 

15시 19분 - 고산천을 따라 계속 내려가니...

 

 

15시 21분 - 길가에 핀 개망초를 제초하고 있네...

 

 

 

15시 23분 - 2층버스들이...

 

 

15시 24분 - 의주길 리본이 전봇대에 매달려...

 

자귀나무꽃이 시들고 있네...

 

 

 

15시 36분 -

 

제초작업을 마치고 떠나는 새마을운동 트럭...

 

 

 

15시 44분 - 금자동이

 

앞에 보이는 다리는 장곡교

 

여름엔 다리밑이 최고...

 

15시 48분 - 장곡1리 장곡교에서...

 

 

장곡교를 건너...

 

 

☞ 여기서 맥가이버의 낭만도보 - 경기 옛길 의주길 中 1길 벽제관길ㆍ2길 고양관청길ㆍ3길 쌍미륵길 이어걷기 - 4부를 마치고...

 

 

 

2014년 06월 28일(토)

맥가이버의 낭만도보 - 경기 옛길 의주길 中 1길 벽제관길ㆍ2길 고양관청길ㆍ3길 쌍미륵길 이어걷기를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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