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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종주 후기☞/♧ 서대문알프스(자락길)

[20171225]무악재 하늘다리 개통기념 - 서대문알프스(인왕산ㆍ북한산ㆍ백련산ㆍ안산) 자락길 일주 - 1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17.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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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5일(월)

무악재 하늘다리 개통기념 - 서대문알프스(인왕산ㆍ북한산ㆍ백련산ㆍ안산) 자락길 일주를 다녀오다.
 

 

 

  '무악재 하늘다리 개통기념 - 서대문알프스(인왕산ㆍ북한산ㆍ백련산ㆍ안산) 자락길 일주' 코스

 

독립문역독립공원서대문형무소역사관서대문구의회무악재 하늘다리청련사환희사인왕산유아숲체험장

개미마을용천약수북악배수지유원하나아파트옥천암(보도각)북한산자락길(옥천암홍록배드민턴장)

산골고개 생태통로백련산 전망대백련공원→약수터배드민턴장백련사홍연초교서대문문화체육회관

홍은2동주민센터홍연교홍제천 물레방아연희숲속쉼터만우정안산방죽메타세콰이어숲잣나무숲

숲속무대안산체육회금화정능안정안산자락길 전망대이진아기념도서관서대문독립공원독립문역

       


 

  '무악재 하늘다리 개통기념 - 서대문알프스(인왕산ㆍ북한산ㆍ백련산ㆍ안산) 자락길 일주' 이야기


오늘은 '서대문알프스(인왕산ㆍ북한산ㆍ백련산ㆍ안산) 자락길 일주'를 위해 길을 나선다.

20061월에 

서대문구에 있는 4개 산(안산·백련산·북한산·인왕산)의 능선길을 연계하는 산행을 

맥가이버가 임의로 ‘서대문알프스종주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여러 차례 코스를 업그레이드 하면서 서대문알프스종주를 다녀왔었다. 

 

세월이 흘러 걷기열풍이 불고, 

이에 지자체에서는 산자락에 데크로 계단과 무장애길 등을 만든다. 

해서 이제 서대문알프스를 이루는 4개의 산은 능선길 뿐만 아니라 

기존의 '안산 자락길'과 '북한산 자락길',

그리고 새로 만들어지는 '인왕산 자락길',

앞으로 만들어질 '백련산 자락길'을 이어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서대문알프스(능선길) 종주산행과 서대문알프스(자락길) 일주산행으로 나누어야겠다.

    

얼마 전에 1972년 통일로가 생기며 끊어진 무악재고개 위로

안산과 인왕산을 잇는 다리(강아치교)를 개통했다고 한다.

이름은 무악재 하늘다리이다.


2015년 4월에 개통되어 북한산과 백련산을 이어주는 '산골고개 생태통로'와

이번에 개통되어 안산과 인왕산을 이어주는'무악재 하늘다리'를 이용하면

'서대문알프스 능선길 종주나 자락길 일주'가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리라 본다.


오늘은 서대문알프스의 자락길들을 이어가는 '서대문알프스(자락길) 일주산행'이다.


'무악재 하늘다리 개통기념 - 서대문알프스(인왕산ㆍ북한산ㆍ백련산ㆍ안산) 자락길 일주'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 '무악재 하늘다리 개통기념 - 서대문알프스(인왕산ㆍ북한산ㆍ백련산ㆍ안산) 자락길 일주' - 1부를 시작하며...


독립문역 4번 출입구에서...


독립문을 찾아간다.


영은문 주초와 독립문


독립문 [獨立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공원 안에 있는 문이다.

원래는 종로구 교북동(橋北洞)에 있던 것을 1979년 이곳으로 이전하여 복원했다.
 
지정번호 : 사적 제32호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소재지 :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941  
시대 : 1896년(건양 1) 
크기 : 현재 면적 2,640㎡ 
종류 : 문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

1896년(건양 1) 독립협회(獨立協會)가 한국의 영구 독립을 선언하기 위하여

청(淸)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전국민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하여 세웠다.

 

창건 당시의 면적 2,800㎡였으며, 총공사비는 당시 화폐로 3,825원이 소요되었다.

완공일은 1897년 11월 20일이다.

현재의 면적은 2,640㎡이다.

 

프랑스의 에투알개선문을 본떠서 서재필(徐載弼)이 스케치한 것을 근거로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를 하였다.

공역(工役)은 건축기사 심의석(沈宜碩)이 담당하고 노역(勞役)은 주로 중국인 노무자들을 고용하였다.

공사비는 주로 기부금으로 충당, 1897년에 준공하였다.

 

재료는 주로 화강암을 사용하였는데, 구조는 중앙에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왼쪽 내부에서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문 앞에는 구(舊)영은문의 주초(柱礎)였던 두 돌기둥이 있다.

 

1979년 성산대로를 개설하면서 원래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서

북서쪽으로 70m 떨어진 곳으로 이전, 복원하고 예전자리에는 독립문지라는 표지판을 묻어놓았다.
 

-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에서




독립문(獨立門)

 

종 목 : 사적  제32호 
명 칭 : 독립문(獨立門) 
분 류 : 유적건조물 
면적 : 2715.8㎡
지정(등록)일 : 1963년 01월 21일
소 재 지 :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941 
시 대 : 대한제국시대
소유자 :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 서대문구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갑오개혁(1894∼1896)은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던 개혁운동이다.

그러나 외국세력의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나라의 자주독립 또한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게 되었다.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독립문을 완성하였다.

 

화강석을 쌓아 만든 이 문의 중앙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홍예문의 가운데 이맛돌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위의 앞뒤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글씨와 그 양옆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문앞에는 영은문주초(사적 제33호) 2개가 남아있다.

 

원래 남동쪽으로 70m떨어진 길 가운데에 있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에 따라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 문화재청 홈에서



영은문 주초와 독립문



영은문 주초


영은문[迎恩門]

 

유형 : 유적
시대 : 조선
성격 : 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정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문.

 

내용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웠던 문이다.

현재 독립문이 있는 곳의 바로 앞에 있었다.

새 임금이 즉위하여 중국사신이 조칙을 가지고 오면 임금이 친히 모화관까지 나오는 것이 상례였다.

 

1407년(태종 7)에 송도의 영빈관을 모방하여 서대문 밖에 모화루를 세웠다가

1430년(세종 12)에 모화관으로 개칭하여 그 앞에 홍살문을 세웠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金安老) 등 3정승이 계(啓)하여

모화관 남쪽의 홍살문을 개축하여 청기와를 입히고 영조문(迎詔門)이라는 액자를 걸었다.

 

1539년 명나라 사신 설정총(薛廷寵)이 칙사가 올 때에는 조(詔)ㆍ칙(勅)과 상사(賞賜)를 가지고 오는데,

영조문이라 함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고 영은문(迎恩門)이라 써서 걸도록 하여 이에 따라 이름을 고쳤다.

 

임진ㆍ정유 왜란 후인 1606년(선조39) 영은문을 재건한 뒤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와서

액자를 다시 써서 걸었는데, 그 액자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청일전쟁 후인 1896년 모화관은 사대사상의 상징물이라 하여

독립관(獨立館)이라 고쳐 부르고,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독립문을 세웠다.

 

영은문의 기둥을 세웠던 초석은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어 독립문 바로 앞쪽에 있다.

주초석은 방형의 배흘림 장초석(長礎石)인데 4방의 모를 죽여 8각같이 보이고 위에는 가구구조(架構構造)를 고정시켰던 홈이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송재 서재필선생 동상


서재필[徐載弼]


독립운동가.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 개화파의 일원으로

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의사가 되었다.

미국으로 귀화하였으나, 일시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도 독립운동에 여러 방향으로 도움을 주었고, 광복후에는 미군정청고문으로 일하다가 미국에서 영면하였다.   


출생-사망 : 1864.1.7 ~ 1951.1.5
본관 : 대구(大邱)
호 : 송재(松齋)
본명 : 서재필(徐載弼)
별칭 : 영어명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
국적 : 1890년 미국 시민권 획득
활동분야 : 정치(독립운동), 의학
출생지 : 전남 보성
주요수상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77)

 

본관은 대구(大邱)이며, 호는 송재(松齋)이다.

영어명은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이다.

아버지는 서광언(徐光彦)이며, 외가는 성주이씨로 17세기 초 이조참판 이성(李珹)이 보성에 내려와 터를 잡았다.

 

1864년(고종 1) 1월 전라남도 보성군(寶城郡)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에서 출생했으며 보성은 그의 외갓댁이 있는 곳이었다.

5세 경 본가가 있는 충청남도 논산 은진면(恩津面)에서 성장하다가, 둘째 아들로서 7촌 당숙 서광하(徐光夏)의 집으로 양자 입적되었다.

그러나 서재필의 총명함이 나타나자, 안동김씨 세도가 출신인 양어머니의 주선으로 7세 경에 서울로 올라와

양어머니의 동생인 외숙 판서(判書) 김성근(金聲根) 밑에서 성장하며 과거를 준비하였다.

1882년 3월 19세 때 알성시(謁聖試)에 합격하였고, 교서관(校書館)의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명문가에서 성장하여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박영효(朴泳孝) 등

지도층 자제의 개화파 인사들과 교유하였고 개화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883년 김옥균의 권유로 일본의 도야마[戶山]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에 입학하여

 8개월간 현대군사훈련을 받고 이듬해 5월 졸업하였다.

 귀국 뒤 궁궐수비대에 배치되었고 고종을 알현하여 사관학교의 설립을 진언하였다.

그 결과 설립 승낙을 받았고 조련국(操練局) 사관장에 임명되었다.

 

1884년 12월 김옥균이 주도하는 갑신정변에 가담하였고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으며,

갑신정변 신정부조직에서 병조참판 겸 정령관(正領官)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으나

정변의 실패로(3일천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망명객에게 일본이 냉담하게 대하자, 1885년 4월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국내에서는 역적의 가족으로 몰려 부·모·형·아내는 음독자살하였고,

동생 재창(載昌)은 참형되었으며, 아들(2세)은 보살핌을 받지 못해 굶어 죽었다.

 

처음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낮에는 노동 하고 밤에는 영어 공부를 하며 현지에 적응하였다.

그 후 독지가 홀렌백(John Wells Hollenbeck)의 도움으로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어시에 있는

해리 힐만 아카데미(고등학교)(Harry Hillman Academy)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1889. 6).

 

다시 워싱턴시(Washington D.C.)로 이주하여 1889년 컬럼비아대학교(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Columbian Medical College)에 입학하여 낮에는 일하고 야간부에 다녔다.

 

가족도 모두 잃고 역적으로 몰려 귀국도 어려워진 상태에서 1890년 6월에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1893년 6월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

 

이듬해 미국 철도우편사업의 창설자(G.B. Armstrong)의 딸 뮤리얼 암스트롱(Muriel Amstrong)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모교에서 강사를 하다가 유색인 차별의 분위기 때문에 사직하고 병원을 개원하였다.

1898년 하반기에는 미국 육군 군의관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는 갑신정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개혁이 단행되었고 갑신정변 주도자에 대한 역적 누명도 벗겨졌다.

관직에 진출한 박영효(朴泳孝)가 1895년 미국에 들러 권유하여 그해 12월에 귀국하였으며,

이듬해 1월 중추원(中樞院) 고문에 임명되었다.

 귀국한 뒤에는 미국 시민으로 행동하며 이름도 미국명인 '필립 제이손'이나 한국명으로 표기한 '피재손'을 사용하였다.

 

1896년 4월 정부예산을 지원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하였고,

한편 배재학당에서 목요강좌를 진행하여 계몽활동도 병행하였다.

이상재(李商在)·윤치호(尹致昊)·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였고(1896. 7), 이를 중심으로 만민공동회도 개최되었다.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정신을 혁파하기 위해 모화관(慕華館)을 인수·개축하여

독립관으로 바꾸고, 1897년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웠다.

이러한 활동에는 서재필은 외국인 신분이었으므로 앞으로 나서지 않고, 뒤에서 지도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수구파(守舊派) 정부와 러시아 일본측의 추방운동 영향으로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였다(1898. 5).

필라델피아에서 인쇄·문구사업(Philip Jaisohn & Company)을 하다가,

3·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한국 선전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잡지 《The Evening Leisure》와 제휴,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국에 친화적인 성향의 미국인을 규합하는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승만·정한경과 함께 '제1차 한인연합회'를 개최하였고, 한국통신부를 설립하여 Korea Review를 발간하였다.

 

그 후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활약,

1922년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명서를 제출하고,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였다.

한국통신부 활동을 종료하고 국내 신문 및 잡지에 기고활동을 꾸준히 하였다.

 

펜신베이니아 의과대학원에서 의학공부를 1년 더 한 후,

여러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였고, 1936년에는 개인 의원을 개업하였다.

 1942년부터 1945년 4월까지 미군 징병검사 의무관으로 자원봉사활동을 하여 미국회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광복을 맞은 후, 1947년 미군정장관 죤 하지(John R. Hodge)의 초청으로 귀국,

 미군정청고문(美軍政廳顧問)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아 대통령 추대 연명을 받았으나,

국내 정치계와의 불화 및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1948. 9) 여생을 마쳤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1994년 4월 8일 미국에서

전명운(田明雲) 의사의 유해와 함께 옮겨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008년 5월 6일 미국 워싱턴시에 동상이 건립되었고, 워싱턴시에서 이날을 '서재필의 날'로 선포하였다.

같은 해 7월 8일에는 그가 태어난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에 '서재필기념공원'을 열었다.

 

[출처 : 두산백과]




삼일독립선언기념탑




독립관


독립관 안내문


서대문독립공원 안내도


안산자락길 안내도


그림자놀이를 하며...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방향으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울舊서대문형무소[―舊 西大門刑務所]


'서대문형무소'로 통칭되던 근대적 시설을 갖춘 한국 최초의 감옥. 

 


지정종목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324호
지정일 : 1988년 02월 27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현저동 101) 
시대 : 대한제국
종류/분류 : 감옥
크기 : 부지 198,348㎡, 연건축면적 26,446㎡

 

1988년 2월 27일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부지 19만 8348㎡. 연건축면적 2만 6446㎡.

수감 가능인원 3,200명(1987년 경기 의왕시로 이전 당시).

 

1907년 시텐노가즈마[四天王數馬]의 설계로 착공,

다음 해 문을 연 후 80년 동안 약 35만 명을 수감, 숱한 민족의 수난사를 잉태하였다.

 

준공 당시는 감방 480평, 청사 80평의 규모였으나, 1916년 7, 8옥사 및 여사(女舍), 1923년 13옥사와 사형장,

1925년에 중앙사 및 10, 11, 12 옥사, 1934년에 1~6옥사 및 부속 옥사를 증축하여 확장하였다.

 

청사는 전동(典洞)에 있던 흥사단 건물을 이축(移築)한 것으로,

6·25전쟁 휴전 직후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 관사(官舍)로 사용하였다.

 

건축물은 군집형태로 묶여져 있고,

이 중 붉은 담벽·감시탑·출입문·구치감·감방(남사·여사·외국인사)·사형장·일반사무실(보안과·순화교육대)·

교회당·공장·창고·취사당·식당·세면장(목욕탕 등)·운동장 등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함석이고, 주위 벽은 판자 위에 아연판을 두른 목조이며,

2층 옥사는 감시하기 좋게 T자형 부채꼴로 설계하고,

감방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게 되어 있으며,

복도 천장을 뚫어 철망 사이로 위층을 볼 수 있게 하였다.

 

이 구치소의 뿌리는 구한말의 전옥서(典獄署)로서, 1904년 경무청감옥서(警務廳監獄署)로 바뀌고,

 1908년 현저동에 경성감옥(京城監獄)을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6년 경성형무소, 1950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등의 명칭을 거쳐

1967년 7월 7일 서울구치소로 개칭되었고, 1987년 경기 의왕시로 옥사를 이전한 이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주로 민족지도자와 독립운동가,

4·19혁명 이후 1980년대까지는 정치인·기업인·세도가·군장성·재야인사·운동권 학생 등과

이 밖에 살인·강도 등의 흉악범과 대형 경제사범·간첩·잡범 등 다양한 범법자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이곳에는 3·1운동 때 유관순 열사가 갇혔던 지하 여자감옥, 윤봉길 의사가 복역중 만들었다는 붉은 벽돌,

강우규 의사가 처형당한 사형장, 여러 독립투사들이 투옥되었던 1평 남짓한 좁은 감옥들이 남아 있다.

 

1988년 서울시는 이곳을 민족의 수난과 독립운동의 역사교육 현장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구한말의 독립관을 복원하고,

공원을 조성하여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불렀는데, 1995년 '독립공원 사적지 성역화' 계획을 마련,

독립관 복원 공사에 착수한데 이어 구치소의 제9~13옥사·중앙사·나병사·지하옥사 등 8천여 평과

담장 일부·망루 2곳을 원형대로 되살려 1996년 유료공원화하기로 하였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에 있다.

 

[출처 : 두산백과]












무악재 하늘다리가 있는 곳으로...



갈림길에서 좌측...


서대문구 의회 앞을 지나...


위성류와 인왕산 얼굴바위가 보이네...


인왕산 얼굴바위


위성류


무악재하늘다리 방향으로...


위성류
Chinese Tamarisk , 渭城柳 ,


분류 : 위성류과 
학명 : Tamarix chinensis 
   
중국 대륙의 중북부에 있는 산시성의 성도 시안(西安)에서

동북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셴양(咸陽)이란 옛 도읍지가 있다.

지난날의 이름은 위성(渭城)이며,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한 후 수도를 삼았던 곳이다.

이후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와 당나라를 거치면서 바로 옆의 시안이 융성하여 위성은 차츰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위성에 아침 비 내려 먼지를 씻어내니
객사의 버들잎은 더욱 푸러지네
그대에게 술 한 잔 권해 올리니
양관(陽關)을 떠나 서역으로 가면 옛 친구는 아무도 없어지네


중국 당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 왕유가 친구와 이별하면서 지었다는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라는 유명한 시다.


이 시의 내용처럼 위성에는 버들을 많이 심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 버들이 과연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수양버들인지는 잠시 망설여지게 한다.

왜냐하면 생김새가 비슷한 위성류라는 ‘짝퉁 버들’이 있어서다.


위성류는 키 5~7미터에 보통 지름이 한두 뼘 정도 자라는 갈잎나무다.

얼핏 보면 가지가 늘어지는 수양버들과 비슷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버들과는 인연이 먼 식물임을 금세 찾아낼 수 있다.

우선 잎이 잘 보이지 않고 가지가 수없이 갈라지며, 어린가지는 실처럼 가느다랗다.

버들도 흔히 우리가 세류(細柳)라고 할 만큼 가는 가지를 갖지만 위성류에는 미치지 못한다.


식물분류학이란 학문을 알지 못했던 옛 시인들은

머리 썩힐 일 없이 위성류를 간단히 버들 종류에 넣었다.

그래서 위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버들이란 뜻으로 ‘위성류’라고 부르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정작 중국 본토에서는 위성류라고 부르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정류(柳)라고 하며,

우리의 《물명고》에도 같은 한자를 쓰고 ‘당버들’이란 한글명을 병기했다.

다른 이름으로는 비를 내리게 하는 신이란 뜻으로 ‘우사(雨師)’라고도 한다.


중국 최초의 백과사전인 《이아》에는

“위성류는 비가 내릴 기색이 있으면 생기가 돌고 가지가 뻣뻣해진다”라고 했다.


위성류의 영어 이름은 타마리스크(Tamarisk)로, 잎갈나무를 일컫는 타마락(Tamarack)과 거의 철자가 같다.

두 나무 모두 노랗게 물드는 가을 단풍의 모습이 비슷하여 유사한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타마르 강 유역에 많이 자라서 생긴 이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출처 :  우리 나무의 세계 2  / 저자박상진 / 김영사 











무악재 하늘다리가 보이네...









무악재 하늘다리를 건너와서...






앞으로 생길 인왕산 (서쪽)자락길로...










전에 없던 풋살경기장이 보이네...


깔끔한 화장실도...


오늘은 청련사 방향으로...















서부수도사업소가 보이네... 














홍인약수터 방향으로...







청련사 방향으로...


청련사






청련사 가는 길





여기는...청련사와 홍인약수터, 환희사 갈림길


홍인약수터 가는 길


환희사 방향으로...


안산







갈림길에서...


환희사가 보이네...


환희사





이제 개미마을로...





전망바위에서...


안산을 바라보려 했는데...바위 웅덩이 물에서 역고드름이...




안산을 바라보고...



이 바위는...



보현사?...환희사의 옛이름?


기차바위능선 갈림길에서...




기차바위를 당겨보고...


이정묵을 지나쳐 가야...


북한산의 문수보와 보현봉은 상고대가 피어...






인왕산유아숲체험장





북한산 비봉능선은 상고대로 하얗게...







개미마을











개미마을 버스종점









동래슈퍼는 폐업...



개미마을 놀이터



오늘은 홍심약수터 방향이 아닌...




▼ 용천약수/기차바위 갈림길에서...



☞ 여기서 '무악재 하늘다리 개통기념 - 서대문알프스(인왕산ㆍ북한산ㆍ백련산ㆍ안산) 자락길 일주' - 1부를 마치고...

 

 

 

2017년 12월 25일(월)

무악재 하늘다리 개통기념 - 서대문알프스(인왕산ㆍ북한산ㆍ백련산ㆍ안산) 자락길 일주를 다녀오다
 
-▥☞ 1부[독립문역→독립공원→서대문형무소→무악재 하늘다리→청련사→환희사→개미마을→용천약수] 여기를 클릭.☜▥-
 

-▥☞ 2부[용천약수→옥천암→홍록배드민턴장)→산골고개 생태통로→백련산 전망대→백련공원→백련사]는 여기를 클릭.☜▥-

 
-▥☞ 3부[백련사→홍연교→물레방아→안산방죽→숲속무대→안산체육회→금화정→능안정→독립문역]는 여기를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