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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유적ㆍ유물ㆍ문화재 등

대부해솔길 4코스를 걷다가 '효자 홍정희 효자문(정려)'을 보고...

by 맥가이버 Macgyver 2021. 2. 4.

대부해솔길 4코스를 걷다가 '효자 홍정희 효자문(정려)'을 보고...

 

 

정려 旌閭

국가에서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하여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풍습.

 

내용

 

정문·정려를 세운 것은 신라 때부터이며 고려를 거쳐 조선에 와서는 전국적으로 상당수 세워졌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신라의 경우 삼국사기48 열전(列傳) 8 효녀지은(孝女知恩)삼국유사5 효선(孝善) 9 빈녀양모(貧女養母)의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 신라의 효녀 지은에 대한 포상으로 진성여왕은 조 500석과 집 한 채를 내리고 복호(復戶을 면제해 주는 것)하며 그 마을을 정표하여 효양방(孝養坊)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경우, 고려사기사를 보면 고려 명종·성종·충선왕·충숙왕·공민왕 등은 왕명으로 효자, 조부모를 잘 섬기는 손자, 아내가 죽은 뒤 새로 장가들지 않고 혼자 사는 의로운 남편, 수절하는 부인, 정조를 굳게 지키는 여자 등에 대해서는 마을 입구에 정표하여 그 풍속을 장려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정몽주(鄭夢周김광재(金光載조희참(曺希參) 등이 효자로서, 권금(權金)의 처와 이동교(李東郊)의 처 배씨, 정만(鄭滿)의 처 최씨 등은 열녀로서 정려의 표창을 받았다.

 

조선왕조는 삼강과 오륜을 바탕으로 한 유교적 풍속 교화를 위하여 효··열의 행적이 있는 자에게 사회적 신분의 고하, 귀천, 남녀를 막론하고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정표하였다. 조선왕조의 정려정책은 1392(태조 1) 7월에 그 방침을 밝힌 이래 계속되었다.

 

조선 초기의 정려정책은 고려시대의 충신·효자·순손(順孫의부(義夫절부(節婦) 등에 대한 정려정책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래서 역대 왕들은 즉위하면 반드시 충신·효자·의부·절부에 대해 각 지방에서 보고를 하도록 하여 그 대상자는 문려(門閭)를 세워 정표하고 그 집의 요역을 면제하게 하였으며, 또 일부 사람들은 그 행적에 따라 상직(賞職) 또는 상물(賞物)을 주기도 하였다.

 

따라서 사족(士族)의 경우는 가문의 명예였으며 공사천(公私賤)의 경우는 면천하여 신분 상승을 가능하게 하는 등 실제 생활에 이익을 주어 후손들로 하여금 본받도록 하였다.

 

경국대전3 예전(禮典) 장권조(奬勸條)에 의하면 효도·우애·절의 등의 선행을 한 자(孝子, 順孫, 節婦, 나라를 위하여 죽은 자의 子孫, 睦族, 救患과 같은 등속)는 해마다 연말歲杪에 본조(本曹)가 정기적으로 기록하여 왕에게 아뢰어 장권(賞職을 주거나 혹은 賞物을 주며 더욱 특이한 자는 旌門을 세워주고 復戶를 해 주고, 守信에게도 또한 복호를 해줌)한다.”라고 되어 있다.

 

정표자들의 사례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교화의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유교적 인간상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특히,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의 전쟁중에 삼강의 행실이 뛰어난 효자·충신·열녀의 수는 평시보다 몇 배나 더 많았다.

 

국가에서는 이들을 정려·정문·복호 등으로 포상함으로써 민심을 격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수상을 목적으로 하는 자도 있어 정표자의 진위문제가 자주 논의되기도 하였다. 정려·정문의 유적은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는 곳이 많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한국여성관계자료집-고대편·중세편-(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소, 1985)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