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티재 열두 굽이 돌아 법주사 미륵불과 ‘하이파이브’… MZ들 단풍 성지 된 ‘수학여행 일번지’
[아무튼, 주말] 충북 보은 속리산으로 떠난
晩秋의 ‘리마인드 수학여행’
정이품송 앞에 일렬로 서서 단체 사진 찍고, 법주사에서 보물찾기하다 지쳐 관광버스에서 곯아떨어졌던 추억. 충북 보은 속리산은 경북 경주, 강원도 설악산과 함께 5060세대에게 ‘수학여행 일번지’로 기억되는 곳이다. 그 시절, 버스가 온 힘을 다해 흙먼지 날리며 넘던 말티재 고개는 이 가을 MZ세대들에게 ‘단풍 잘하는 집’ ‘단풍 맛집’으로 떠올랐다. 속리산국립공원 안 법주사의 금동미륵대불은 ‘하이파이브’ 등 재미있는 연출 사진 찍는 명소로 인기다.
만추(晩秋)의 계절, 추억을 곱씹으며 ‘리마인드 수학여행길’에 올랐다. 가는 곳마다 풋내나던 시절이 생각나 “그땐 그랬지~” 하며 입꼬리가 올라가고, “나 때는 말이야~” 소리가 절로 나왔다. 때마침 이번 주부터 속리산 단풍이 절정에 접어들었다는 소식이다.
◇수학여행의 관문 말티고개
“우리 땐 수학여행 간다 하면 속리산이었단 말이야~. 그때만 해도 속리산은 말티재(말티고개) 길이 안 닦여 있어서 버스 타고 고개를 올라가다가 시동이 꺼지면 고개 중간쯤에 아예 버스를 세웠지. 승객들은 강제 하차하다시피 내려 걸어서 말티재 정상까지 올라가고, 빈 버스가 흙먼지 풀풀 날리면서 따라 올라왔는데, 그 마의 코스가 요즘은 ‘핫플’이라네, 하하!”
말티재 전망대에 선 박홍규(66)씨 말에 친구들이 맞장구를 친다. “버스에 다시 탔을 때, 자기 자리 뺏기면 싸움도 났잖아.” “1980년대까지만 해도 길이 하도 험해서 무조건 1박은 해야 했던 곳이지.” 박씨 일행의 만담을 귀동냥하던 다른 여행객들도 고개를 끄덕끄덕. 전망대 한쪽에선 젊은 탐방객 박은지(31)·고은정(30)씨가 단풍 물 드는 말티재를 배경 삼아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저희 땐 수학여행 하면 경주나 용인 에버랜드였다”며 “속리산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속리산 서쪽 자락에 자리한 충북 보은의 말티재는 보은읍 장재리와 속리산면 갈목리를 연결하는 고개 이름이다. 지금은 인근에 ‘동학 터널’과 ‘갈목 터널’이 뚫리면서 굳이 이 고개를 넘지 않고도 속리산과 법주사로 빠르게 갈 수 있지만, 1960~80년대만 해도 속리산 수학여행의 관문으로 반드시 넘어야 했던 고개였다.
험준한 만큼 고개에 얽힌 이야기도 넘쳐난다. 신라 진흥왕 14년에 법주사를 세운 의신조사가 이 고개를 넘었다 하고, 고려 왕건과 조선 세조도 속리산에 가기 위해 이 고개를 피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말티재란 이름은 세조가 법주사 부속 암자인 복천암에 머물던 신미 대사를 만나기 위해 속리산으로 향할 때 가마로는 도저히 갈 수 없어 말로 갈아타고 넘은 고개라 해서 붙었다는 설, 고려 왕건이 박석을 깔아 넘어 ‘박석재’라 불리기도 했다는 설 등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마루(높다)’의 준말인 ‘말’과 고개를 의미하는 ‘티’와 ‘재’가 합쳐진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졌다.
◇말티재 전망대 오르고, 모노레일 타고
추억의 코스는 말티재 입구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말티재 정상(430m)까지는 1.5㎞ 정도로 길지 않은 구간이나, 180도로 꺾어지는 굽잇길을 열두 번도 넘게 ‘곡예 운전’을 해야 고갯마루에 닿을 수 있다. 자동차 동호인들 사이에선 우스개로 ‘S자 코스 연습장’으로 유명하다.
말티재 전망대에 오르면 이 열두 굽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마치 거대한 구렁이가 기어오르는 듯한 길 하나를 두고 주변은 온통 만산홍엽이다. 단풍나무와 더불어 백합나무, 소나무가 어우러져 물감을 뿌려놓은 것 같다. 빨강·주황·초록·노랑의 조화가 아름다워 국유림 명품숲으로도 선정됐다. 폭 16m, 높이 20m의 아담한 전망대는 단풍철 평일·주말 할 것 없이 ‘대목’을 누리는 중. 2020년 코로나 사태가 한창이던 시기에 조용히 개장한 전망대는 거리 두기가 완화된 이번 가을이 사실상 첫 대목인 셈이다.
말티재 전망대로 가는 고갯마루엔 ‘백두대간 속리산 관문’이, 전망대 옆쪽으로는 ‘말티재 꼬부랑길’(둘레길)이 이어진다. 전망대와 연결된 백두대간 생태문화교육장 전시실에선 이달 30일까지 ‘수학여행 1번지 보은 역사 현장 기록사진 공모전시’가 열린다.
말티재 일대에는 즐길거리도 속속 들어서고 있다. 안전줄 하나로 공중에 매달려 내려가는 집라인에 이어 스카이트레일이 모험심 많은 청소년과 젊은 커플들에게 인기라면, 힘들이지 않고 해발 480m 목탁봉 전망대에 올라 백두대간 속리산을 감상하기엔 속리산테마파크 모노레일(1인 7000원)이 제격이다.
20인승 캐빈 2대가 매표소가 있는 승차장에서 목탁봉 카페가 있는 하차장까지 왕복 1.6㎞ 코스를 분당 60m 속도로 오간다. 코스는 짧지만 개울 위를 지나기도 하고, 천천히 숲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30도 경사를 오를 때 역방향으로 몸을 돌리면 맞은편 창밖으로 갈목리 일대 산 능선이 ‘파노라마 뷰’로 펼쳐진다.
모노레일 옆쪽 산길로는 나무 계단이 이어져 걸어 올라갈 수 있다. 하차 후 전망대로 향하거나 통유리창 너머 속리산, 구병산 풍광이 내다보이는 카페에 앉아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카페 야외로 나가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살구나무 목탁’이 있다. 모노레일 승차장 건너편 솔향공원에선 스카이바이크 체험(4인승·2만원)이 기다린다. 높이 2∼9m의 지상에 조성된 레일을 따라 1.6㎞ 소나무숲 사이를 천천히 달리며 솔향기에 흠뻑 젖기 좋다.
◇속리산 랜드마크, 정이품송과 법주사
말티재 전망대에서 차로 10분이면 천년고찰 법주사에 닿는다. 가는 길, 천연기념물인 정이품송의 안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조선의 왕 세조와 연을 맺었다던 지체 높은 소나무다. 세조가 법주사로 행차할 때 연(가마)이 걸리지 않도록 가지를 들어 올렸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600여 년 수령만큼이나 풍파가 느껴진다.
1980년대만 해도 특유의 원뿔형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후 왼쪽 앞 가지는 1993년에 강풍으로, 왼쪽 상부 가지는 2004년 폭설 피해로 훼손됐다. 그래도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은 올곧고 우아한 자태만은 그대로다. 인근 서원리에 있는 정이품송의 부인 나무 ‘정부인송’은 비교적 온전한 상태. 2004년 두 나무를 인공 수분시킨 후계목들은 충북 산림환경연구소에서 자라고 있다.
관음봉부터 천왕봉까지 일곱 개 봉우리가 주변으로 둘러친 법주사는 수학여행의 정점을 찍었던 곳이다. 팔상전·쌍사자석등·석련지 등 국보 3점,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원통보전을 비롯한 보물 13점 등 각 시대의 중요 불교문화유산을 간직한 그야말로 보고(寶庫)다. 2018년 마곡사·선암사·부석사·통도사·봉정사·대흥사와 함께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팔상도 있는 팔상전을 출발점 삼아 경내를 돌며 국보·보물 찾기만 해도 반나절이 훌쩍. 수학여행 기념사진 촬영 명소로 주목받았던 금동미륵대불 앞은 여전히 포토존이다. 중년들은 그 시절과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으며 깔깔댄다. 1970년부터 35년간 법주사에서 기념 촬영을 해왔던 ‘법주사 사진사’ 정석구(82) 문화관광해설사는 “주로 70년대는 수학여행 온 학생, 80년대는 신혼부부들 사진을 많이 찍어줬다”며 “법주사에 다녀간 사람 중 미륵대불 사진이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추억했다. 요즘은 포토존이 살짝 바뀌었다. 젊은 커플들은 원통보전 부근에 금동미륵대불과 마주 보고 선 듯 손을 맞대거나 하이파이브 하는 듯한 연출 사진을 즐겨 찍는다.
법주사에서 보물 찾기했다면 세조길을 거닐어볼 차례다. 법주사에서 세심정까지 2.4㎞의 세조길은 목책로와 흙길, 임도 구간이 고루 섞여 있어 단풍길 걷는 맛을 느낄 수 있다. 눈썹 모양을 닮았다는 ‘눈썹바위’부터는 아름다운 저수지를 곁에 두고 걷는 길이다. 저수지 풍광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는 수상전망대에선 ‘인증샷’ 한 장 필수다.
◇삼년산성, 우당고택··· ‘新수학여행 코스’?
정이품송, 법주사 코스가 전통의 수학여행 코스라면 삼년산성, 보은 우당고택 등은 젊은 세대들에게 새롭게 사랑받는 코스다. 삼년산성은 보은군 최대 곡창지대의 한복판에 자리한 오정산에 있어 산성 어디에 서든 전망이 좋다. 특히 햇살이 느슨해질 무렵 성벽에 오르기 시작하면 보은읍의 황금 들녘, 성벽을 슬그머니 파고드는 일몰과 조우할 수 있다.
신라 자비마립간 13년(470) 축성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완성했다고 해 이름 붙여진 삼년산성은 그 축성 연대와 위치가 명확하게 알려진 유일한 산성이다. 유재관(82) 문화관광해설사는 “요즘은 젊은 층이 많이 찾더라”며 “모르는 이들은 정문인 서문으로 올라와 그 부근에서 사진만 찍고 가는데, 서문 부근 성벽은 1990년대 새로 쌓은 것이고, 전체 1680m 성벽 중 4분의 1에 해당하는 1500년 전 성벽은 북문, 동문 쪽에 있다”고 안내했다. 1시간 정도면 성 한 바퀴를 둘러볼 수 있다.
현존하는 민간 한옥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고 알려진 ‘99칸 전통 한옥집’ 우당고택은 담 너머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드는 계절에 찾는 이가 많다. 보성 선씨 종택으로 오랫동안 ‘선병국 가옥’으로 불려온 고택은 10만㎡(3만평) 부지에 134칸 규모로 지어졌으나 현재 80여 칸이 남아 있다.
장이 익어가는 장독대, 소담한 감나무가 있는 풍경은 규모 때문인지 민속촌 같다. 이곳 정석구 문화관광해설사는 “우당고택은 속리산에서 흘러내리는 삼가천이 큰 개울을 이루고 개울 중간에 삼각주를 이루어 섬이 된 곳에 자리 잡은, 그야말로 명당 중 명당”이라며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숲을 이룬 가운데에 있는 전통 한옥의 기품과 종가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거리가 있긴 하지만 탄부면 어라운드빌리지는 수학여행 추억에 더해 옛 시골 폐교의 감성을 느껴볼 수 있는 명소다. 폐교된 탄부초등학교 사직분교를 캠핑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캠핑이 아니어도 카페나 당일 피크닉장(2만5000원~3만원)은 누구나 이용 가능하다.
[ 대추차 한잔에 가을 물 들고, 대추술빵 한입에 취하네 ]
보은의 향기와 맛을 만나는 공간
이맘때 충북 보은은 어딜 가나 다디단 대추향이 가득하다. 속리산국립공원 입구부터 생대추를 수북이 쌓아놓고 파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는 데다, 대추찐빵과 대추술빵은 속리산 여행에 즐거움을 더하는 별미다. 정이품송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아리숲 보은 대추찐빵은 직접 운영하는 대추농장에서 생산한 대추로 빵을 만든다. 대추 앙금을 품은 대추찐빵(5개, 5000원부터)은 한입 베어 물면 달콤한 향이 퍼진다. 카스텔라처럼 보들보들한 대추술빵(5000원), 대추찰빵(10개, 7000원부터)도 맛있다.
보은 카페는 커피향보다 대추차향이 더 강한 곳. 속리산테마파크 모노레일이 오가는 목탁봉 카페도, 말티재 전망대 부근 꼬부랑길 카페도 대추차 맛집이다. 가성비는 꼬부랑길 카페가 한 수 위다. 대추차 한잔에 3000원. 수제 대추쿠키(4000원)를 곁들이면 더 맛있다.
보은 우당고택과 다리 하나를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복해가든은 또 다른 고택 ‘보은 선병우고가’의 사랑채 등을 식당으로 꾸민 곳에서 버섯찌개, 능이백숙, 닭볶음탕, 삼계탕 등을 맛볼 수 있다. 능이백숙이 베스트셀러지만, 여행객들은 버섯찌개백반(1만3000원)을 부담 없이 찾는다. 옛 모습 그대로인 사랑채에 앉아 먹는 버섯찌개는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버섯향이 우러난다. 곰삭은 김치, 나물로 차린 시골 밥상을 비우고 나면 따뜻한 방바닥에 눕고 싶은 충동이 인다.
보은시장 부근 ‘먹자골목’에 있는 김천식당은 순대곱창전골(1만8000원부터)로 유명하다. 잡내 없이 부드러운 막창으로 감싼 ‘왕순대’는 막창에 비호감이었던 이들도 어렵지 않게 도전해볼 수 있는 맛이다. 참나물을 얹어 푸짐하게 끓여내는 전골을 먹고서 볶음밥은 필수다.
보은의 ‘어머니 산’ 구병산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삼승면 중국집 중앙식당은 문 연 지 반세기가 된 오래된 현지인 사랑방이다. 앙증맞은 크기의 꽃게, 홍합 등을 수북이 얹어내는 해물짬뽕(9000원)은 일부러 찾아가 먹어볼 만하다. 건더기를 건져 먹는 재미뿐 아니라 해물 맛 물씬 나는 국물도 진국이다. 외지인들 방문에 한쪽에서 식사를 하던 한 단골은 “이 집은 알려지면 안되는데···” 하며 아쉬워했다.
박근희 기자
출처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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