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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의 한국사 - 몽유도원도] 꿈에서 본 무릉도원 풍경을 화폭에 생생하게 펼쳤죠

by 맥가이버 Macgyver 2022. 11. 13.

[뉴스 속의 한국사 - 몽유도원도] 꿈에서 본 무릉도원 풍경을 화폭에 생생하게 펼쳤죠

몽유도원도
안평대군 꿈 듣고 안견이 그려
한국 미술사 최고 걸작 중 하나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넘어가

 /일러스트=유현호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작가의 작품 3점을 오는 14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의 전광판에 송출한다고 해요. 그중 하나는 '몽유도원도'를 동시대 관점으로 재해석한 '신-몽유도원'이라고 합니다. 한편 서경대 산학협력단은 오는 27일 온라인으로 뮤지컬 '몽유도원도'의 메타버스(3차원 가상 세계) 시연회를 연다고 해요. 이렇듯 몽유도원도는 21세기에 와서도 끊임없이 창작의 원천이 되고 있는데요. 이 작품은 과연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됐을까요?

안평대군의 꿈, 3일 만에 그려

"그것참, 기가 막힌 꿈이었어." 1447년(세종 29년) 4월,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1418~1453)이 어젯밤 꿨다는 꿈 얘기를 했어요. "내가 박팽년과 함께 어느 산 아래 이르렀지. 그랬더니 우뚝 솟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가 있고,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보였어. 기암절벽과 구불구불한 냇가 길을 따라가니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나왔는데 참으로 신비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네."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것은 신선들이 산다는 별천지인 '무릉도원(武陵桃源)'이었습니다.

안평대군은 꿈속 풍경을 그와 절친한 화가인 안견에게 그려달라고 했어요. 안견은 사흘 만에 그 별천지를 비단 위에 생생하게 그려냈습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기암절벽, 험준한 바위와 계곡이 복숭아밭을 둘렀고 안개 자욱한 언덕엔 복사꽃이 만발했습니다. 폭포수는 두 줄기로 쏟아지고 물가엔 출렁이는 빈 배도 보입니다.

이 작품이 바로 한국미술사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몽유도원도입니다. '꿈속에서 놀았던 (무릉)도원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죠. 왼쪽에 그려진 현실 세계와 오른쪽의 이상 세계가 절묘하게 배치된 가운데 등장인물을 과감히 생략해 더욱 신비스러워 보이는 작품입니다. 현실 세계는 정면에서 본 듯 그렸고, 이상 세계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법으로 그렸어요.

크기는 세로 38.7㎝, 가로 106.5㎝입니다. 이 그림은 이후 한국 산수화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조선 초 학자인 성현은 "신묘(신통하고 묘함)한 경지에 도달한 그림"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어요.

그림에 글 남긴 선비들의 엇갈린 운명

안평대군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시와 그림을 무척 좋아했던 그는 예술 애호가로 이름 높은 왕족이었습니다. 명필로 이름이 높았을 뿐 아니라 중국 회화의 소장가로도 유명했는데, 그 소장품을 정리한 '화기'라는 책이 있을 정도입니다.

안평대군은 안견의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도화원(화가 양성 기관)의 정6품 벼슬을 지내던 안견은 정4품의 호군(護軍)이란 직책으로 승진했는데요. 여기엔 안평대군의 힘이 상당 부분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안견에 대해선 '총명하고 민첩하며 옛 그림을 많이 봐 여러 대가들의 좋은 점을 총합 절충했다. 못 그리는 것이 없지만 산수화를 특히 잘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몽유도원도에는 안견의 그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평대군의 글과 시, 그와 교유(서로 사귀어 놀거나 왕래함)했던 선비 20여 명이 친필로 쓴 글이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서예사적으로도 큰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죠. 글씨를 남긴 선비들은 4군과 6진을 개척해 두만강까지 영토를 넓혔던 김종서를 비롯해 안평대군과 꿈속에서 도원을 함께 거닐었다는 박팽년, 그리고 신숙주, 정인지, 이개, 성삼문 등이었죠.

그러나 불과 6년 뒤 이들의 운명은 완전히 어긋나게 됩니다. 세종이 1450년 세상을 떠나고 그의 맏아들인 5대 왕 문종도 2년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문종의 아들 6대 단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한 뒤,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1453년 정변을 일으켜 좌의정 김종서 등을 살해한 계유정난이 일어났습니다.

수양대군의 동생이지만 정치적으로 다른 편에 서 있던 안평대군도 이때 반역자로 몰려 귀양을 갔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1455년 수양대군은 7대 임금 세조로 즉위했는데요. 몽유도원도에 글씨를 남긴 인물 중 신숙주와 정인지가 세조를 받든 반면, 성삼문·박팽년·이개는 1456년 단종 복위 운동을 하다 발각돼 사형을 당했어요. 이 세 명을 포함한 여섯 명의 충신을 '사육신'이라 합니다.

일본으로 건너간 비운의 문화재

그럼 안견은 어떻게 됐을까요? 다행히도 살아남아 세조 초기까지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그의 생몰(태어나고 죽음)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이야기가 하나 전해집니다. 안견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자 안평대군은 허락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안평대군이 아끼는 귀한 먹이 사라졌다가 안견의 품에서 발견됐다고 해요. 화가 난 안평대군이 안견을 쫓아냈는데 얼마 뒤 계유정난이 일어났다는 거죠. 이에 사람들은 "안견이 앞날을 내다봤다"고 수군거렸답니다. 이 이야기는 누군가 지어냈을 수도 있지만, 안견이 세조 때에도 활동했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초기의 많은 회화 작품이 사라졌지만 몽유도원도는 다행히도 지금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엔 없고 일본 나라현에 있는 덴리대학이 소장하고 있죠. 어떻게 된 걸까요? 16세기에 국내에서 봤다는 기록이 있으니 적어도 임진왜란 이후에 건너간 것이겠죠. 한때 '임진왜란 때 약탈당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일본 측에서 훔쳐갔다는 분명한 물증은 없습니다. 광복 이후 몇 차례 대여돼 국내에서 전시된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며 이 걸작을 감상했답니다. 현재 남아있는 그림 중에서 안견이 그렸다는 것이 확실한 작품은 몽유도원도가 유일합니다.
기획·구성=조유미 기자 유석재 기자
 
 
출처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