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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보여행 후기☞/☆ 북한산 둘레길

[20240905] 방학역에서 오봉초교/방학골송림 거쳐 방학능선 & 북한산둘레길(방학동길ㆍ왕실묘역길길) 따라 북한산우이역까지 걷기 - 2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24. 9. 5.

9월 05일(목) 

방학역에서 오봉초교/방학골송림 거쳐 방학능선 & 북한산둘레길(방학동길ㆍ왕실묘역길길) 따라 북한산우이역까지 걷기를 다녀와서...

'방학역에서 오봉초교/방학골송림 거쳐 방학능선 & 북한산둘레길(방학동길ㆍ왕실묘역길길) 따라 북한산우이역까지 걷기'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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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방학역에서 오봉초교/방학골송림 거쳐 방학능선 & 북한산둘레길(방학동길ㆍ왕실묘역길길) 따라 북한산우이역까지 걷기'를 위해 길을 나선다.

 

 바가지약수터에서...

 

정의공주 貞懿公主

조선전기 제4대 세종의 둘째 딸인 공주.

 

개설

정의공주는 조선 4대 국왕 세종(世宗)의 차녀로,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세종의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참여하였고,

지장보살 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을 간행하였다.

 

생애

정의공주(貞懿公主, ?1477)는 세종이 즉위 전에 출생하였으나,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오빠 문종(文宗)1414(태종 14)에 출생하였고,

동생 세조(世祖)1417(태종 17)에 태어난 사실에 비추어

1415(태종 15)에서1416(태종 16)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녀는 1428(세종 10)에 정의공주(貞懿公主)에 봉해졌고,

안맹담(安孟聃)과 가례(嘉禮)를 치렀다.

안맹담은 관찰사 안망지(安望之)의 아들로,

1428(세종 10)에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다가 1432(세종 14)에 연창위(延昌尉)로 개봉되었다.

 

정의공주는 연창위와의 사이에서 42녀를 두었다.

아들은 안여달(安如獺) · 안온천(安溫泉) · 안상계(安桑鷄) · 안빈세(安貧世)이고,

1녀는 정광조(鄭光祖)의 부인, 2녀는 한치례(韓致禮)의 부인이다.

 

한치례는 서원부원군 한확(韓確)의 아들로, 덕종비 소혜왕후의 동생이다.

1462(세조 8) 12월에 연창위가 사망하자 2남 안온천이 시묘살이 중 22세로 졸하였고,

1477(성종 8) 2월에 정의공주가 사망하자 4남 안빈세도 시묘살이 중 32세로 사망하였다.

 

정의공주는 세종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세종이 중국에서 사온 안장을 손수 고치려고 칼로 깎다가 칼끝이 다리에 박히자

공주는 술을 만들고 난 지게미[醋粕]를 데워 상처에 붙여 부기가 빠져나가게 한 후

자석(指南鐵)을 가지고 부러진 칼끝을 빼어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안맹담은 계유정난(癸酉靖難)에 협조하여 성록대부(成祿大夫)로 가자(加資)되었고,

1455(세조 1)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으며,

1457(세조 3) 수록대부(綏祿大夫)에 가자되었다.

 

이러한 남편의 공훈에 힘입어 정의공주는 세조로부터 노비와 전토 등을 받았다.

또한 성종은 공주의 건강이 좋지 않자 4남 안빈세를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하였고,

왕비와 함께 친히 문병을 가기도 하였다.

정의공주는 1477(성종 8)에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정의공주는 총명하고 지혜로웠는데, 역산(曆算)에 능하였다.

죽산 안씨 대동보에 따르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에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이 잘 풀리지 않아 여러 대군들과 공주에게 풀어보도록 하였는데,

공주가 이를 풀어 세종의 칭찬을 듣고 노비를 상으로 받았다고 한다.

또한 세종이 창제된 훈민정음을 공주에게 주어 민간에서 시험해 보도록 하자,

공주는 그 결과를 세종께 바쳤다고 전해진다.

 

정의공주는 불교에 조예가 있었다.

연창위 안맹담과 함께 세종 승하 후

소헌왕후와 세종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문수사(文殊寺)를 중창하였다.

 

안맹담도 평소 불경을 읽고, 살생을 싫어하여 양잠(養蠶)도 하지 않는 등

공주 부부는 불교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정의공주는 1469(예종 1) 지장신앙의 기본 경전인 지장보살본원경을 간행하였는데,

이는 죽은 연창위 안맹담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다.

정의공주 간행 지장보살본원경198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묘소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 63-1에 있다.

연창위 안맹담의 무덤과 함께 있으며, 묘역 앞에 연창위 안맹담 신도비가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울 연산군묘(燕山君墓)

 

위치 : 서울 도봉구 방학로 1746

조성 연도 : 1454(단종 2), 1512(중종 7), 1537(중종 32)

묘의 형식 : 묘역

 

연산군묘(燕山君墓) 이야기

 

연산군묘는 조선 10대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이다.

연산군묘는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분의 형식으로,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연산군, 오른쪽(동쪽)이 거창군부인의 묘이다.

 

연산군은 1506(중종 1) 유배지인 강화 교동에서 세상을 떠나 그곳에 묘가 조성되었다가,

1512(중종 7) 거창군부인이 중종에게 연산군묘 이장을 요청하여

양주 해촌(현 도봉구 방학동)인 지금의 자리로 묘를 옮겼다.

 

이후 1537(중종 32) 거창군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연산군묘 옆에 묘가 조성되었다.

묘에는 문석인 2, 망주석, 장명등, 상석, 향로석, 표석을 배치하였고, 묘 근처에는 재실을 두었다.

 

연산군묘역(燕山君墓域) 이야기

 

이곳은 연산군과 거창군부인의 묘를 비롯하여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의 묘,

연산군의 딸(휘순공주)과 사위(능양위 구문경)의 묘가 같이 있다.

 

이 묘역은 원래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땅이었는데,

임영대군은 세종의 명으로 자식이 없던 태조의 후궁 성비 원씨와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를 모셨다.

 

1454(단종 2) 의정궁주가 세상을 떠나자 자신의 땅인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고 제사를 맡았다.

이후 임영대군의 첫째 아들 오산군이 맡았고,

오산군의 묘 역시 이 근처에 조성되어 오산군파에서 묘를 관리하였다.

 

그러다가 1512(중종 7) 임영대군의 외손녀인 거창군부인이 강화 교동에 있던 연산군묘를

자신의 외할아버지 땅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달라고 중종에게 요청하였다.

 

이로 인해 원래 있던 의정궁주묘 위에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묘가 조성되었고,

의정궁주묘 아래에 연산군의 딸과 사위의 묘가 조성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연산군(燕山君) 이야기

 

연산군(재세 : 1476년 음력 117~ 1506년 음력 116,

재위 : 1494년 음력 1229~ 1506년 음력 92)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로 1476(성종 7)에 태어났다.

 

연산군은 1479(성종 10) 생모 윤씨가 폐위되자 성종의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의 손에서 자랐고,

실제로 정현왕후를 생모로 알고 자랐다.

 

1483(성종 14)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94년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연산군은 성종의 능지문(陵誌文, 왕과 왕후의 생애와 행적을 쓴 글)을 읽다가

자신이 정현왕후가 아닌 폐비 윤씨의 아들임을 알았고

윤씨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연산군은 즉위 초 빈민을 구제하고 국경을 강화하기 위해 무기 제조에 힘을 썼고,

종묘에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는 등 왕으로서 위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498(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김일손 등 사림파가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으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원인이 되어 사림이 피해를 본 사건)

1504(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생모 폐비 윤씨의 사사사건을 이용하여

훈구 및 사림파들이 척신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

 

사화 이후에는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아 경연(經筵)을 폐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졌으며 잔혹한 형벌을 시행하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결국 1506년 성희안, 박원종 등의 훈구세력들이 중종반정을 일으켜 왕위에서 폐위되었다.

이후 강화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유배지에서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 이야기

 

거창군부인 신씨(재세 : 1476년 음력 1129~ 1537년 음력 48)

본관이 거창인 거창부원군 신승선과 중모현주 이씨(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딸)의 딸로 1476(성종 7)에 태어났다.

 

1488(성종 19) 왕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494년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거창군부인으로 신분이 낮아져

궁 밖 정청궁(貞淸宮)에서 생활하였다.

1537(중종 32)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의정궁주 조씨(義貞宮主 趙氏) 이야기

 

의정궁주 조씨(재세 : ? ~ 1454년 음력 28)는 본관이 한양인 조뇌의 딸로 태어났다.

1422(세종 4) 상왕 태종의 후궁으로 정해져 입궁하려고 하였으나,

곧바로 태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빈으로 책봉되지 못하였다.

이후 세종은 특별히 의정궁주라는 호칭을 내렸으며, 1454(단종 2)에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의 딸(휘순공주)과 사위(능양위 구문경) 이야기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는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장녀로 태어나 휘순공주가 되었다.

1501(연산군 7) 구문경과 혼인하였으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공주의 칭호를 없앴다.

 

연산군의 사위 구문경은 본관이 능성인 구수영과 길안현주 이씨(세종의 아들 영응대군 딸)의 아들로 태어나,

1501(연산군 7) 휘순공주와 혼인하여 능양위가 되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관직이 취소되었다.

반정 이후 아버지 구수영이 중종에게 휘순공주와의 이혼을 요청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출처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 이것으로 '방학역에서 오봉초교/방학골송림 거쳐 방학능선 & 북한산둘레길(방학동길ㆍ왕실묘역길길) 따라 북한산우이역까지 걷기' 이야기를 마친다.

 

방학역에서 오봉초교/방학골송림 거쳐 방학능선 & 북한산둘레길(방학동길ㆍ왕실묘역길길) 따라 북한산우이역까지 걷기기를 다녀오다.

 

▣ 1부[방학역오봉초교방학골 송림방학능선북한산둘레길쌍둥이전망대바가지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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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바가지약수정의공주묘연산군묘원당샘공원원당마을 한옥도서관북한산우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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