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4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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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빈 안씨 묘역 [昌嬪 安氏 墓域]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있는 조선시대 신도비와 묘.
지정종목 : 시도유형문화재
지정번호 : 서울유형문화재 제54호
지정연도 : 1983년 11월 11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
시대 : 조선
종류 : 묘
크기 : 높이 약 3m
1983년에 서울시유형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제11대 중종의 후궁(後宮)이며 선조의 할머니인 창빈안씨의 신도비와 묘가 있는 곳이다.
신도비는 1683년(숙종 9)에 세워졌으며 전체 높이가 3m 정도이고 비신(碑身)은 사각으로 특색이 있다.
창빈은 1499년(연산군 5)에 안탄대(安坦大)의 딸로 시흥(始興)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재질과 용모가 뛰어나 1507년(중종 2)에 궁녀로 들어갔다.
행동이 정숙하고 단정하여 중종의 모후인 정현대비(貞顯大妃)의 후의로 31세에 숙원(淑媛),
이어서 숙용(淑容)에 올랐으며 자비로운 성품으로 덕망이 높았다.
중종과의 사이에 영양군(永陽君)과 덕흥대원군(德興大阮君), 정신옹주(靜愼翁主)를 두었다.
1549년(명종 4)에 죽었는데 처음에는 양주(楊州) 장흥(長興)에 예장하였으나 이듬해 3월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덕흥대원군의 셋째아들인 하성군(河城君)이 선조로 왕위에 오르자 1577년(선조 10)에
창빈으로 추존되고 천묘한 곳의 지명에 따라 동작릉(銅雀陵)이라 불렀으며 숙종 때 신도비가 세워졌다.
비문(碑文)은 숙종 때 예조판서(禮曹判書)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낸 신정(申晸 : 1628~1687)이 지었으며
글씨는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간 이정영(李正英 : 1616~1686)이 썼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창빈 안씨 묘역
한자 : 昌嬪 安氏 墓域
이칭/별칭 : 동작릉,창빈안씨신도비부묘소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 유적/능묘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시대 : 조선/조선
집필자 : 엄기석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 안에 있는 조선 11대 국왕 중종의 후궁이자 14대 국왕 선조의 조모인 창빈 안씨의 무덤.
[개설]
창빈 안씨 묘역은 중종의 후궁이면서, 선조의 친조모인 창빈 안씨(昌嬪 安氏)[1499~1549]의 무덤이다.
창빈 안씨는 중종반정에 참여해 반정공신에 오른 안탄대(安坦大)의 딸로 1518년(중종 13) 중종의 후궁이 되었다.
성품이 자비롭고 근검절약하는 생활로 궁중 안에서 덕망이 높았다고 한다.
중종과 사이에서 3남 1녀를 두었으며, 둘째 아들 덕흥군(德興君)[1530~1559]이 선조(宣祖)의 아버지가 되어 훗날 선조의 조모가 되었다.
1544년(중종 39) 중종이 승하하고 전례에 따라 선왕의 후궁들이 머무는 인수궁(仁壽宮)으로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명종(明宗)의 모후인 문정왕후와 평소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궁궐에 더 머무를 수 있었다.
이후 1549년(명종 4) 사저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51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에 있는 장흥리에 무덤이 있었으나 이듬해인 1551년(명종 6)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군이 현재의 위치인 동작동으로 이장하였고, 이후 동작릉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친손자인 선조가 왕위에 오른 후 1577년(선조 10) ‘창빈(昌嬪)’으로 추봉하였다.
[위치]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에 있는 국립현충원 묘역 안에 자리하고 있다.
[변천]
창빈 안씨 사망 이후 처음에는 경기도의 양주 장흥리에 장사를 지냈으나 이듬해인 1550년(명종 5) 덕흥군이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당시 과천 동작리]으로 이장하였다.
1561년 첫째 아들인 영양군(永陽君)[1521~1561]이 1561년(명종 16)에 사망하자 창빈 안씨 묘역 옆에 안장했다가 1581년(선조 14)에 경기도 장단군으로 이장했다.
1683년(숙종 9) 창빈 안씨 묘역에 신도비를 건립하였으며, 비문은 신정(申晸)[1628~1687]이 짓고, 글씨는 이정영(李正英)[1616~1686]이 썼다.
[형태]
봉분 주변에는 담장이 둘러 있고, 봉분 앞에는 묘갈(墓碣)·혼유석(魂遊石)·석등(石燈)과 석인(石人) 2기가 조성되어 있다.
봉분 왼편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금석문]
왼편에 세워진 신도비는 창빈 안씨 신도비라고도 한다.
1683년(숙종 9)에 세워졌고 비신은 화강암 재질에 높이 312㎝, 신고(身高) 204㎝, 폭 63.5㎝이며, 정사각형 형태이다.
상대적으로 큰 옥개석이 비신을 덮고 있다.
[현황]
창빈 안씨 묘역은 신도비와 함께 ‘창빈안씨신도비부묘소(昌嬪安氏神道碑附墓所)’라는 명칭으로 1983년 11월 11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후궁의 원묘 가운데 신도비를 갖춘 보기 드문 사례이며, 조선왕실의 묘 제도를 보여주고 있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창빈 안씨 묘역(昌嬪 安氏 墓域)
창빈 안씨 묘역(昌嬪 安氏 墓域)은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1488∼1544)의 후궁으로
선조(1552∼1608)의 할머니가 되는 창빈안씨(昌嬪安氏, 1499∼1549)의 신도비와 묘소이다.
창빈안씨의 세계는 안산(安山)에서 나왔는데,
아버지 안탄대(安坦大)는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어
적순부위(迪順副尉)가 되고 나중에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어머니 황씨(黃氏)는 정경부인에 증직되었다.
1499년(연산군 5년) 7월9일 출생으로 아홉 살 때인
1507년(중종 2) 궁녀로 들어가 성종의 계비(繼妃)인 정현대비(貞顯大妃)의 각별한 후의로
1518년(중종 13년) 왕의 총애를 받았고,
22세에 상궁(尙宮), 31세에 숙원(淑媛)이 되었으며,
마침내 42세에 숙용(淑容)에까지 올랐다.
중종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영양군(永陽君)이고,
둘째는 나중에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며, 외동딸은 정신옹주(靜愼翁主)이다.
1544년 중종이 사망하자 전례에 따라 인수궁(仁壽宮)으로 물러나 거처하기를 청하였으나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의 특명으로 궁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1549년(명종 4년) 우연히 친정에 나갔다가
10월 13일 51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다.
1568년덕흥부원군의 셋째아들 하성군(河城君)이 조선 제14대 임금으로 즉위하자
1577년(선조 10년)에 창빈(昌嬪)으로 추봉되었고 특명으로
덕흥대원군사당(덕흥궁)에 향사되었다.
숙종은 창빈 안씨가 서거한 지 130여 년이 지나도록 묘도(墓道)에 비석이 없음을 걱정하여
1683년(숙종 9) 12월 비를 건립하였다.
신도비는 묘소의 서쪽 비탈10여 m쯤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다.
비의 형식은 후궁의 묘에서 찾아보기 드문 예로서 정사각형을 기본으로 했다.
대좌(臺座)·비신(碑身)·개석(蓋石)으로 구성되는데,
정사각형의 2단 대좌는 장중한 느낌을 준다.
비신도 사각기둥 모양이며, 개석 또한 4각 지붕 모양으로 꼭대기에
연꽃봉우리를 크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비문은 예조판서 신정(申晸, 1628∼1687)이 지었고,
글씨는 판돈녕부사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으며 머리전서[頭篆]는
오위도총부 도총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썼다.
묘소는 원래 1550년 3월8일 경기도 양주(楊州) 서쪽의 장흥리(長興里)에 장례 지냈으나,
다음해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지금의 자리인 과천(果川) 북면(北面) 동작리(銅雀里) 언덕으로 이장했다.
그때부터 '동작릉(銅雀陵)'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창빈 안씨 묘역 터에는 1956년 국립 서울현충원이 건립되었다.
이에 따라 창빈 안씨의 묘역은 국립서울현충원 내부에 존재하게 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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