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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현충원·사육신묘

[20241224] 국립서울현충원 참배(상도역에서 중대후문-달마사-서달산 동작대-호국지장사-서울현충원 內 장군묘역ㆍ창빈안씨신도비부묘소ㆍ충혼당ㆍ현충탑ㆍ현충문ㆍ충성분수대ㆍ현충원 정문-동작역까지) - 2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24. 12. 24.

12월 24일(화)

'국립서울현충원 참배(상도역에서 중대후문-달마사-서달산 동작대-호국지장사-서울현충원 內 장군묘역ㆍ창빈안씨신도비부묘소ㆍ충혼당ㆍ현충탑ㆍ현충문ㆍ충성분수대ㆍ현충원 정문-동작역까지)'를 다녀와서...

'국립서울현충원 참배(상도역에서 중대후문-달마사-서달산 동작대-호국지장사-서울현충원 內 장군묘역ㆍ창빈안씨신도비부묘소ㆍ충혼당ㆍ현충탑ㆍ현충문ㆍ충성분수대ㆍ현충원 정문-동작역까지)'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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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국립서울현충원 참배(상도역에서 중대후문-달마사-서달산 동작대-호국지장사-서울현충원 內 장군묘역ㆍ창빈안씨신도비부묘소ㆍ충혼당ㆍ현충탑ㆍ현충문ㆍ충성분수대ㆍ현충원 정문-동작역까지)를 위해 길을 나선다.

 

호국지장사( 화장사)에서...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

 

현재 국립서울 현충원 내 위치하여 있는 호국지장사는

신라 말 풍수지리설에 뛰어났던 도선(道詵)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즉 도선스님이 북쪽으로 만행을 하다가 한강 언덕에 이르러 둘러보니 서기가 퍼져 나오는 곳이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가보니 칡덩굴이 엉켜지고 약물이 샘솟는 명당이므로 토굴을 짓고 갈궁사(葛弓寺)라 했다는 것이다.

그 후에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갈궁사를 고려 공민왕 때 보인(寶印) 스님이 중창하고 절 이름을 고쳐 화장암(華藏庵)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안진호(安震湖) 스님이 편찬한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사기(寺記)를 인용하여 “1577(선조 10) 왕이 창빈묘(昌嬪墓) 부근 산기슭에 절을 창건하고 창빈의 원찰을 삼으니 갈궁사가 바로 이것이다(朝鮮宣祖十年 ?寺於昌嬪墓附近山麓 爲昌嬪願刹 是葛弓寺)”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창빈의 묘는 1578년 즉 선조 즉위 11년에야 양주(楊州) 장흥리(長興里)에서 이곳 동작리로 옮겨졌다.

그래서인지 안진호 스님은 창건에 대한 여러 설을 언급하며 이 시기에 지장사가 창건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현재로서는 화장사가 언제 처음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일반적으로 전해지는 내용은 보인(寶印) 스님의 중창이후 1577(선조 10)에 선조의 생조모인 창빈 안씨(昌嬪 安氏)의 묘를 절 부근에 모시게 되자 그 원찰로 삼고 화장사(華藏寺)로 고쳐 불렀으며, 창빈묘의 조포사찰(造泡寺刹)로 지정하였다는 것이다.

 

이후의 연혁은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 자세히 전한다.

화장사는 1663(현종 4)에 중수를 하는 등 꾸준히 사세를 유지해왔는데, 영조 때 신경준이 지은 가람고(伽藍攷)에도 동작리에 화장암이 있다(在銅雀里縣北十五里)”고 기록하고 있다.

그 뒤 1862(철종 13)에는 운담(雲潭)과 경해(鏡海) 두 스님이 중건하였다.

1870(고종 7)에는 운담(雲潭)과 경해(鏡海) 두 스님이 경파루(鏡波樓)를 새로 지었으며, 1878(고종 15)에는 주지 서월(瑞月) 스님과 경해 스님이 큰방 등을 수리하였다.

1893(고종 30)에는 화주 경운(慶雲계향(戒香) 스님이 불상을 개금·개분하고 구품탱·지장탱·현왕탱·독성탱·산신탱을 봉안하였고, 1896년에는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그리고 1906년에는 화주 풍곡(豊谷) 스님이 약사전의 불상을 개금·단청하고

후불탱·신중탱·감로탱·신중탱·칠성탱 등을 봉안하였다.

1911년에는 일제의 사찰령에 따라 봉은사의 말사로 편입이 되었다.

1920년에는 주지 원옹(圓翁)스님과 명진(明眞)스님이 큰방을 수리하였고,

1936년에는 주지 유영송(劉永松) 스님이 능인전(能仁殿)을 중수하였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국립묘지가 들어서자 수많은 유가족들이 호국영령을 위해 기도하는 사찰이 되었다.

그 뒤 1983년에는 혜성(慧惺)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국립묘지에 안치된 호국영령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절 이름을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로 다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호국지장사

 

창빈 안씨 묘역(昌嬪 安氏 墓域)은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1488∼1544)의 후궁으로 

선조(1552∼1608)의 할머니가 되는 창빈안씨(昌嬪安氏, 1499∼1549)의 신도비와 묘소이다.

 

창빈안씨의 세계는 안산(安山)에서 나왔는데,

아버지 안탄대(安坦大)는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어

적순부위(迪順副尉)가 되고 나중에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어머니 황씨(黃氏)는 정경부인에 증직되었다. 

 

1499년(연산군 5년) 7월9일 출생으로 아홉 살 때인 

1507년(중종 2) 궁녀로 들어가 성종의 계비(繼妃)인 정현대비(貞顯大妃)의 각별한 후의로 

1518년(중종 13년) 왕의 총애를 받았고,

22세에 상궁(尙宮), 31세에 숙원(淑媛)이 되었으며,

마침내 42세에 숙용(淑容)에까지 올랐다.

 

중종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영양군(永陽君)이고,

둘째는 나중에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며, 외동딸은 정신옹주(靜愼翁主)이다.

 

1544년 중종이 사망하자 전례에 따라 인수궁(仁壽宮)으로 물러나 거처하기를 청하였으나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의 특명으로 궁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1549년(명종 4년) 우연히 친정에 나갔다가

10월 13일 51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다. 

 

1568년덕흥부원군의 셋째아들 하성군(河城君)이 조선 제14대 임금으로 즉위하자 

1577년(선조 10년)에 창빈(昌嬪)으로 추봉되었고 특명으로 

덕흥대원군사당(덕흥궁)에 향사되었다.

 

숙종은 창빈 안씨가 서거한 지 130여 년이 지나도록 묘도(墓道)에 비석이 없음을 걱정하여 

1683년(숙종 9) 12월 비를 건립하였다.

신도비는 묘소의 서쪽 비탈10여 m쯤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다.

 

비의 형식은 후궁의 묘에서 찾아보기 드문 예로서 정사각형을 기본으로 했다.

대좌(臺座)·비신(碑身)·개석(蓋石)으로 구성되는데,

정사각형의 2단 대좌는 장중한 느낌을 준다.

 

비신도 사각기둥 모양이며, 개석 또한 4각 지붕 모양으로 꼭대기에

연꽃봉우리를 크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비문은 예조판서 신정(申晸, 1628∼1687)이 지었고,

글씨는 판돈녕부사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으며 머리전서[頭篆]는

오위도총부 도총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썼다.

 

묘소는 원래 1550년 3월8일 경기도 양주(楊州) 서쪽의 장흥리(長興里)에 장례 지냈으나,

다음해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지금의 자리인 과천(果川) 북면(北面) 동작리(銅雀里) 언덕으로 이장했다.

그때부터 '동작릉(銅雀陵)'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창빈 안씨 묘역 터에는 1956년 국립 서울현충원이 건립되었다.

이에 따라 창빈 안씨의 묘역은 국립서울현충원 내부에 존재하게 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창빈 안씨 묘역

 

한자 : 昌嬪 安氏 墓域

이칭/별칭 : 동작릉창빈안씨신도비부묘소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 유적/능묘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시대 : 조선/조선

집필자 : 엄기석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 안에 있는 조선 11대 국왕 중종의 후궁이자 14대 국왕 선조의 조모인 창빈 안씨의 무덤.

 

[개설]

창빈 안씨 묘역은 중종의 후궁이면서, 선조의 친조모인 창빈 안씨(昌嬪 安氏)[1499~1549]의 무덤이다.

 

창빈 안씨는 중종반정에 참여해 반정공신에 오른 안탄대(安坦大)의 딸로 1518(중종 13) 중종의 후궁이 되었다.

성품이 자비롭고 근검절약하는 생활로 궁중 안에서 덕망이 높았다고 한다.

중종과 사이에서 31녀를 두었으며, 둘째 아들 덕흥군(德興君)[1530~1559]이 선조(宣祖)의 아버지가 되어 훗날 선조의 조모가 되었다.

1544(중종 39) 중종이 승하하고 전례에 따라 선왕의 후궁들이 머무는 인수궁(仁壽宮)으로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명종(明宗)의 모후인 문정왕후와 평소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궁궐에 더 머무를 수 있었다.

 

이후 1549(명종 4) 사저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51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에 있는 장흥리에 무덤이 있었으나 이듬해인 1551(명종 6)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군이 현재의 위치인 동작동으로 이장하였고, 이후 동작릉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친손자인 선조가 왕위에 오른 후 1577(선조 10) ‘창빈(昌嬪)’으로 추봉하였다.

 

[위치]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에 있는 국립현충원 묘역 안에 자리하고 있다.

 

[변천]

창빈 안씨 사망 이후 처음에는 경기도의 양주 장흥리에 장사를 지냈으나 이듬해인 1550(명종 5) 덕흥군이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당시 과천 동작리]으로 이장하였다.

1561년 첫째 아들인 영양군(永陽君)[1521~1561]1561(명종 16)에 사망하자 창빈 안씨 묘역 옆에 안장했다가 1581(선조 14)에 경기도 장단군으로 이장했다.

1683(숙종 9) 창빈 안씨 묘역에 신도비를 건립하였으며, 비문은 신정(申晸)[1628~1687]이 짓고, 글씨는 이정영(李正英)[1616~1686]이 썼다.

 

[형태]

봉분 주변에는 담장이 둘러 있고, 봉분 앞에는 묘갈(墓碣혼유석(魂遊石석등(石燈)과 석인(石人) 2기가 조성되어 있다.

봉분 왼편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금석문]

왼편에 세워진 신도비는 창빈 안씨 신도비라고도 한다.

1683(숙종 9)에 세워졌고 비신은 화강암 재질에 높이 312, 신고(身高) 204, 63.5이며, 정사각형 형태이다.

상대적으로 큰 옥개석이 비신을 덮고 있다.

 

[현황]

창빈 안씨 묘역은 신도비와 함께 창빈안씨신도비부묘소(昌嬪安氏神道碑附墓所)’라는 명칭으로 19831111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후궁의 원묘 가운데 신도비를 갖춘 보기 드문 사례이며, 조선왕실의 묘 제도를 보여주고 있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이것으로 '국립서울현충원 참배(상도역에서 중대후문-달마사-서달산 동작대-호국지장사-서울현충원 內 장군묘역ㆍ창빈안씨신도비부묘소ㆍ충혼당ㆍ현충탑ㆍ현충문ㆍ충성분수대ㆍ현충원 정문-동작역까지)' 이야기를 마친다.

 

국립서울현충원 참배(상도역에서 중대후문-달마사-서달산 동작대-호국지장사-서울현충원 內 장군묘역ㆍ창빈안씨신도비부묘소ㆍ충혼당ㆍ현충탑ㆍ현충문ㆍ충성분수대ㆍ현충원 정문-동작역까지)를 다녀오다.

 

▣ 1부[상도역숲속도서관달마사거북바위서달산 동작대현충원 상도통문호국지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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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호국지장사장군묘역창빈안씨묘역충혼당현충탑현충문충성분수대동작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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