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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궁궐·왕릉·묘ㆍ원

[20070210]김포 장릉(章陵)을 다녀오다.

by 맥가이버 Macgyver 2007.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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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10일(토) 김포 장릉(章陵)을 다녀오다.

 

조선 16대 인조의 부모인 원종(元宗, 1580~1619)과 인헌왕후(仁獻王后, 1578~1626)구씨를 모신 능이다.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으로 용모가 출중하고 태도가 신중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남달라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정원군은 처음엔 양주군 곡촌리에 묻혔다. 큰아들 능양군(인조)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정원군은 대원군에 봉해졌고, 묘가 원으로 추숭되어 흥경원(興慶園)이라 했다.

1627년 인조는 정원군묘를 김포현의 성산 언덕으로 천장했고, 1632년 다시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원종, 능호를 장릉이라 했다.

인헌왕후는 아들(인조)이 즉위하자 연주부부인이 되었고, 궁호를 啓雲宮이라 했다.

1626년 49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김포 성산 언덕에 예장하고 원호를 毓慶園이라 했다.

흥경원을 이곳으로 다시 천장하면서 원호를 흥경원이라 합쳐 불렀다.

 

인조의 아버지이자 장릉의 주인인 정원군은 조선 제 14대 왕 선조의 아들로 어머니는 선조의 치세 후반기에 특히 총애를 받았던 인빈 김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는 임진왜란 당시 13세의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왕 선조를 끝까지 모신 공으로 호성공신 2등에 책봉되기도 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선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왕자 시절부터 그의 성정은 포악하고 방탕하여 당시 여러차례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니 그 또한 말썽많은 서자였던 것 같다.

물론 장릉의 행장에는 정반대로 기록되어 있는데 인조가 감히 아버지의 성정을 실록에 기록된 것처럼 할 수 없어서 온통 그의 인품을 칭송하는 구태의연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인조도 이전의 선조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왕과 왕비로 추존하기 위해 신하들과 대결을 벌였는데 인조 6년부터 시작하여 인조 13년까지 이 일을 가지고 인조를 위시한 공신 세력들과 사림 세력간에 힘 겨루기가 이어졌고 결국은 인조는 뜻을 이뤄 부모님을 왕과 왕비로 추존하고 산소를 능으로 격상시켰으며 위패는 종묘 영녕전으로 모시게 되었다.

 

이 사건은 훗날 효종, 현종 때 극렬해지는 예송 논쟁의 주춧돌을 놓게 된 일이 되었다.

명분에 죽고 사는 유교, 때로는 수긍이 가지만 사실 자주 생각하기로는 국가의 발전에 큰 도움이 안되는 일로 죽어라고 싸우는 이들을 모두 베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화나는 일이 정말 많습니다. 특히 요즘 저는 중국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인조의 이 추존 노력은 효심이라고 봐 줄 수도 있겠으나 좀 꼬인 시각으로 보면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일종의 정략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여간 정원군과 연주군부인 구씨의 산소는 능이 되었고 그들은 추존왕과 왕비의 반열에 들어 종묘에서 제사를 받게 되는 광영을 누렸다.

 

하지만 정원군도 생전에 아픔을 겪었는데 바로 셋째 아들이었던 능창군이 광해군대에 역모로 몰려 죽음을 당한 사건이다.

다른 아들도 아니고 무예도 능하고 인품도 좋아 평판이 자자했던 아들 능창군의 죽음 이후로 괄괄하던 그도 기력을 잃었고 결국 광해군 11년인 1619년 향년 40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둘째 아들(큰아들 능풍군은 일찍 죽음)이었던 능양군이 훗날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축출하고 용상에 앉게 되면서 대원군으로 추존되었다가 많은 토론(?) 끝에 종국에는 왕으로 추존되었다.

 

조선왕조의 왕릉들 중 장릉이란 이름은 세 개나 있는데 '장릉章陵'은 인조 부모의 추존 쌍릉, '장릉長陵'은 인조와 인렬왕후 한씨의 합장릉, 그리고 멀리 영월의 단종 '장릉莊陵'-단릉-이다.

  

 

 ▼ 김포 장릉(章陵) 입구

 

 ▼ 안내문에는...

  

 

  

 ▼ 관람권을 구입하고...

 

 

 ▼ 들어서니...

  

 ▼ 휠체어와 유모차가 준비되어 있는 곳이...

 

 ▼ 관람로를 따라...

 

 

 

 

 

 

 

 

 

 

 ▼ 관람로 변경 안내문이...

 

 ▼ 능이 바로 앞에 있지만...

 

 ▼ 돌아서...

 

 ▼ 길 한쪽에는...

 

 

 ▼ 봄이 오고 있다.

 

 

 ▼ 연지(蓮池)가 보이고...

 

 ▼ 연지 가운데에는 섬이...

 

 ▼ 연지에도 나무와 해가 있다.

 

 

 

 

 

 

 

 

 ▼ 연지 옆에는 장릉관리소가 있다.

 

 ▼ 일단 능으로...

 

 

 ▼ 능의 홍살문이 보이고...

 

 ▼ 금천교 너머로 홍살문과 참도, 그리고 정자각이...

 

 ▼ 금천교

 

 

 ▼ '사적 202호 장릉'

 

 

 

 ▼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진 참도를 따라...

 

 ▼ 다른 능들과 달리 경사진 참도를 통해 정자각에 이르게 되어 상대적으로 정자각이 높은 곳에 지어졌다.   

 

 ▼ 정자각(丁字閣)과 수복방

 

 

 ▼ 정자각

 

 

 ▼ 수복방

 

 ▼ 비각

 

 

 

 

 

 ▼ 정자각 추녀마루에는...

 

 ▼ 귀신 �는 잡상이..

 

 

 

 ▼ 정자각을 옆에서 보니...

 

 

 

 

 

 

 ▼ 정자각 문이 열려지고...

 

 

 ▼ 능침의 봉분이 정자각 어칸을 통해 바라보이는 장릉 

 

 ▼ 장릉

 

 

 ▼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는 두 봉분 앞에 혼유석이 각각 놓여 있는 쌍릉이다.

봉분은 지면과 맞닿은 부분에 아무런 조각이나 무늬도 새기지 않은 호석을 두르고 있다.

이는 추존 전에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 정자각 뒤에서 홍살문쪽을 보니..

 

 ▼ 너무 먼 봉분을 가까이 보려고...

 

 

 

 

 

 

 

 

 

 

 

 

 

 ▼ 다시 관람로로 와서...

 

 

 

 

 

 

 

 

 

 

 

 

 

 ▼ 저수지 방향으로...

 

 

 

 

 

 

 ▼ 저수지가 보이고...

 

 

 

 

 

 

 

 

 

 

 

 ▼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고...

 

 

 

 

 

 

 ▼ 장릉관리소

 

 

 

 

 

 

 

 

 

 

 

 

 

 

 ▼ 봄이 오고 있다.

 

 

 

 

 

 

 

 ▼ 마른 가지에 매달린 저것은...

 

 ▼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니...

 

 ▼ 콩처럼...

 

 

 

 

 

 ▼ 다시 돌아나온 매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