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유적탐방후기☞/♣ 궁궐·왕릉·묘ㆍ원

김포 장릉(章陵)이야기

by 맥가이버 Macgyver 2007. 2. 12.

장릉이야기

 

 

추존왕 원종(元宗) 장릉(章陵)
   


능이야기 

추존왕 원종(元宗)
능호 : 장릉(章陵)
위치 : 경기 김포시 김포읍 풍무리(豊舞里)
지정번호 : 사적 제202호

조성시기 : 1627년(인조 5)

 

능의구성

장릉(章陵)은 인조의 아버지로 추존된 원종과 그의 비인 인헌왕후의 능이다. 쌍릉으로 조영되었다.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 없이 호석(護石 : 봉분 주위를 둘러 막는 돌)만을 두르고 있는데, 이는 왕이 아니었던 왕의 아버지, 즉 대원군의 묘제를 따른 것이다.
문석인은 머리에 복두를 착용하고 공복을 입은 채 석마와 나란히 서 있으며, 무석인은 장군의 형상으로 투구와 갑옷을 입고 있다. 문무석인 모두 무표정한 얼굴에 위엄이 서려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길인 참도가 다른 능과는 달리 약간의 경사진 계단식 형태이다. 정자각이 상대적으로 조금 높은 곳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정자각 동측에 자리한 비각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각으로, 비문을 통해 능의 주인공과 그의 생전 행적을 알 수 있다. 홍살문 안의 비면에는 ‘조선국 원종대왕 장릉 인헌왕후 부좌(朝鮮國元宗大王章陵 仁獻王后左)’라고 쓰여 있으며, 1753년(영조 29)에 세워졌다.
근처에는 장릉의 원찰인 금정사(金井寺)가 자리하고 있다.


 

능의역사
원종은 1619년(광해군 11) 12월 29일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이듬해 2월에 양주군 곡촌리에 장사지냈는데, 그로부터 3년 뒤 큰 아들 능양군(인조)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아들이 왕위에 오름에 따라 대원군에 봉해졌으며, 묘가 원으로 추숭되어 흥경원(興慶園)이라 하였다.
1626년(인조 4) 1월 14일에는 경희궁 회상전에서 원종의 부인이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같은 해 5월 18일 김포 성산의 언덕에 안장하고, 원호를 육경원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1년 후 흥경원을 이곳 성산으로 천장하여 쌍릉을 조영하면서 원호를 흥경원이라 합칭하게 되었다. 1632년 이귀(李貴) 등의 주청에 따라 다시 원종으로 추존하여 능호를 장릉이라 하고 석물을 왕릉제로 개수하였다.

 

 인물이야기

 

추존왕 원종(元宗)
생몰연도 : 1580년 ~ 1619년
생애이야기

원종은 1580년(선조 13) 6월 22일 경복궁 별전에서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1590년(선조 23) 11세에 가례를 올렸다. 어릴 때부터 용모가 남다르고 태도가 신중하였으며,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피난길에 올라 험난한 시기를 겪고 1595년(선조 28) 겨울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1608년에는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로부터 7년 후 원종의 셋째 아들 능창군을 황해도 수안군수 신경희가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무고로 인하여 커다란 옥사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능창군은 강화도로 유배당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원종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 후 원종은 몸져누워 1619년(광해군 11) 12월 29일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화
원종은 임진왜란 때 부왕 선조를 모시면서 험난한 일을 겪었으나, 나이가 아직 어렸음에도 의연한 태도로 이에 대처하여 모두가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 중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전란의 한가운데에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이 때 신하들에게 명하여 정원군(원종)을 영변으로 데려가 왜적을 피하도록 하였다. 그 때 정원군이 영변에 이르러 울면서 말하기를, “이곳에 온 것은 내가 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임금님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왜적의 형세가 날로 성하고 임금의 행차는 날로 멀어지니,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임금과 신하가 죽음과 삶을 같이 하지 못할 것인데, 이 몸이 간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선조는 이를 전해듣고 가상히 여겨 정원군을 다시 불러왔으며, 그 뒤로 정원군은 선조 곁을 떠나지 않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를 옆에서 모셨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종결되고 서울에 돌아오자, 1604년(선조 37)에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에 봉해졌다.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
생몰연도 : 1578년 ~ 1626년
생애이야기
인헌왕후는 능안부원군 구사맹의 딸로 1578년(선조 11) 4월 17일 태어났다. 1590년(선조 23) 정원군(훗날 원종)과 가례를 올리고 연주군부인에 봉해졌다. 첫째 아들인 능양군이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1623년(인조 1)에 연주부부인으로 진봉되었다.
그러나 셋째 아들 능창군이 역모에 휘말려 유배 후 스스로 목숨을 끊고, 이에 충격을 받은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뜨는 등 불행한 일이 잇달아 일어나자, 1626년(인조 4) 1월 14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훗날 이조판서 이귀의 주청으로 부군인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인헌왕후로 추봉되었다.

 

장릉과 사람들

왕실의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조영, 관리하는 일은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며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과정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따라서 능의 입지 선정, 조영된 능의 관리감독, 천장 등 왕릉과 관련된 사항에는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같이 했다.

 

추존왕 원종의 태묘 합제에 반대하는 이들을 유배 보낸 것에 대한 정언의 상소
『인조실록』 1634년(인조 12) 8월 21일의 기사는 다음과 같은 정온의 상소를 싣고 있다.

“『예기』에 ‘ 아버지를 여의고 갑자기 존귀해졌을 때 아버지를 위하여 시호를 짓지 않는다.’ 하였고, 선유(先儒) 여중(呂中)은 ‘ 아버지의 벼슬이 낮을 경우 자신의 벼슬을 기준으로 시호를 지으면 안되고 그 당사자에게 합당한 시호를 만들어야 하니, 이는 자신의 벼슬로써 그 아버지에게 가할 경우 높이려 했으나 도리어 낮추는 꼴이 되어 부모를 공경하는 도리가 못되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전하께서 시호를 추증하는 일도 이미 지당한 도리가 못되는데, 곧장 열성(列聖)의 지위에 올리려 하신다면 그것은 예경(禮經)의 본의가 아니리라 생각됩니다.

 

(중략) 아, 전하께서는 오늘날의 일이 과연 어떻다고 여기십니까. 삼사는 이목을 맡은 관직인데 거의 다 쫓아내었고, 정원은 후설(喉舌)을 맡은 자리인데 오래 전에 가두어 버렸으며, 대신은 고굉(股肱)을 맡은 직책인데 내팽개치듯이 버렸습니다. 바르게 논하는 자들을 근거 없는 논의를 한다 하고, 아첨하여 영합하는 자들을 정직하다 하여, 시비가 전도되고 사정(邪正)이 구분되지 않고 있으니, 이른바 ‘ 충성스럽고 아름다운 행실이 자취를 감추고 아첨과 간사함이 풍미하고 있다.’는 상황과 불행히도 가깝다 하겠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선뜻 깨닫고 서슴없이 길을 바꾸어 예경(禮經)의 지극한 가르침을 따르고 역대의 득실을 귀감으로 삼아 속히 예에 맞지 않는 예를 중지시키고 유배하라고 한 명을 거두어 들이소서.”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갔으나 안에 두고 답하지 않았다.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하고 태묘(太廟)에 합제(合祭)하려고 하자, 여러 언관들이 이를 강력히 반대하여 이들을 유배보냈다. 정언은 이러한 인조의 결정을 번복시키기 위해 위와 같은 상소를 올린 것이다.

 

정온(鄭蘊, 1569 ~ 1641)
조선 중기 문신이다. 『덕변록』과 『망북두시』, 『망백운가』를 지어 애군우국의 뜻을 토로하였고, 인조반정으로 석방, 헌납에 등용되었다. 이어 사간 · 이조참의 · 대사간 · 경상도 관찰사 · 부제학 등을 역임했다.

 

장릉 숲 이야기

 

산림으로 둘러싸인 곳의 왕릉

조선 16대 인조의 아버지 원종이 잠들어있는 장릉은 경기도 김포시에 위치한다. 김포는 평야로 이루어져 산이 매우 드문데, 특히 도심권 내에서는 장릉이 위치한 장릉산이 유일하다. 장릉을 비롯한 조선 왕릉의 주변은 산세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으며 강한 폐쇄성과 안정성, 중층성을 확보하고 있다.
왕릉의 공간을 조영하는 법칙
능역 내의 공간도 조선 왕릉만의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왕릉은 보통 봉분이 있는 성역 공간과 정자각 등 제사를 지내기 위한 시설들이 위치해 있는 제향 공간으로 나뉘는데 이 두 공간은 높낮이에 차이를 두었다. 따라서 봉분이 있는 성역 공간에 서면 아래의 제향 공간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반대로 아래쪽의 정자각 부근에서는 정자각, 비각, 수복방 등의 부속건물과 우거진 수풀 등 때문에 위쪽 능침이 있는 성역 공간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는 능역에서 가장 상위개념의 공간인 성역 공간의 폐쇄성을 높이기 위한 설계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자각 쪽에서 잘 보이지 않는 위쪽을 바라보면서 조선 왕릉의 성역으로서의 신비감, 권위성, 엄숙성을 느끼게 된다.

 

조선 왕릉과 그 부근의 나무 이야기

장릉을 빠져나오면 그 부근으로는 울창한 장릉 숲이 펼쳐져 있다. 이 숲은 자생한 수풀과 사람이 심은 인공림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장릉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조선 왕릉에서는 인공으로 숲을 조성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조성된 산림은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능을 조영할 당시 심었던 나무의 종류는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숲에 남아있는 나무들과 1920년 ~ 30년대에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의하면 능의 좌우 및 후면에는 소나무를 심었다. 한반도에는 약 5000년 전부터 현재와 같은 소나무림의 경관이 성립되어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삼림에서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였으며,『양화소록(養花小錄)』에 의하면, 소나무가 풍수사상에 의해 선정된 명당자리에 심는 가장 중요한 수목으로 취급되었다고 한다. 한편 능의 전면인 남쪽의 낮은 지대에는 오리나무를 주로 심어 무성한 숲을 이루게 하였다.

 

역사의 숲 조선 왕릉

조선 왕릉의 주위로는 장릉 숲 이외에도, 광릉 숲, 헌릉 오리나무 숲 등 푸르게 조성된 숲들이 산재해있다. 우리는 이 숲을 거님으로서 맑은 공기와 푸른 시야의 자연을 만끽할 뿐 아니라 수백 년 전 조선의 역사를 산책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된다.

 

추존왕 이야기

 

추존왕의 능

장릉은 추존왕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능이다. 추존왕(追尊王)이란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죽은 뒤에 묘호가 내려진 왕을 말한다. 어떠한 인물들을 왕으로 추존하는 것일까? 조선의 추존왕은 모두 9명이다. 이들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세자의 신분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거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왕의 아버지, 그리고 태조 이성계의 4대 선조이다. 왕으로 추존된 이들은 종묘에 신위를 모셔서 왕위에 오른 왕과 똑같은 대우를 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세자나 대군묘의 예로 조영된 능을 왕릉의 상설에 맞게 규모를 키우거나 석물을 추가하여 능도 더욱 위엄을 갖추게 되었다. 태조 이성계의 4대 선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를 제외한 조선의 추존왕은 다음과 같다.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

장릉에 잠들어 있는 추존왕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1587년 정원군에 봉해졌으며,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 아들인 능양군이 반정 세력의 추대를 받아 조선 16대 왕 인조로 즉위하자 정원대원군으로 추존되었으며, 9년 후 원종으로 추존되었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고 선왕인 광해군이 폐위된 터라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왕으로 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삼촌의 왕위를 계승한 성종의 아버지 덕종(德宗)

덕종은 세조의 맏아들로 의경세자에 봉해졌다. 그러나 세자로 책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20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동생인 예종이 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예종 역시 1년 남짓한 재위 기간을 채운 뒤 병사하였다. 의경세자에게는 월산대군과 잘산군 두 아들이 있었는데, 대비는 둘째 아들인 잘산군으로 하여금 예종의 뒤를 잇게 하였고, 그가 9대 왕인 성종이다. 성종이 왕위에 오른 뒤 의경세자는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동생의 아들로 인해 추존된 진종(眞宗)

진종은 영조의 맏아들로 1719년 태어나 1724년 경의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0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효장세자로 봉해졌다. 후에 그의 이복동생인 사도세자가 왕세자가 되었으나 그마저 즉위하지 못하고 죽자, 사도세자의 아들이 22대 임금 정조로 즉위하였다. 정조는 영조의 유언에 따라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되고,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였다. 1899년에는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진종소황제로 추존되었다.

 

비극적 죽음을 맞았던 정조의 친아버지 장조(莊祖)

장조는 형인 효장세자가 죽자 1736년 세자로 책봉된 후 대리청정을 하는 등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였으나, 당쟁의 희생양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1762년 28세의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1776년 아들인 정조가 즉위한 후 그를 장헌세자로 추존하였으며, 1899년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장조의황제로 추존되었다.

 

헌조의 아버지 익종(翼宗)
익종은 순조의 아들로, 태어난 지 3년만인 1812년(순조 12)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827년(순조 27)에는 순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으나 아버지인 순조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 1830년 효명세자로 추존되였다. 1834년에는 아들인 헌종이 즉위하면서 익종으로 추존되었고, 1899년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관람요금 및 시간
관람시간
3월 ~ 10월 11월 ~ 2월
매표 관람 매표 관람
06:00~17:30 06:00~18:30 06:30~16:30 06:30~17:30
※ 휴관일 : 매주 월요일

- 관람소요시간 : 40분

 

관람요금
구분 개인 단체
대 인 (19세 ~ 64세) 1,000원 800원(20인 이상)
소인 (7세 ~ 18세) 500원 400원(10인 이상)

※ 단체 적용시 소인과 대인을 합하여 20인 이상인 경우에도 각각의 단체 요금을 적용함.
※ 시행일자 : 2005. 1. 1

 

무료관람 대상자
6세 이하 및 65세 이상, 장애인, 국가유공자

 

찾아오시는 길

주소

주소 :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산141-1
- 전화 : (031) 984-2897
- 팩스 : (031) 982-7261

 

교통편
지하철
5호선 송정역 하차 1번출구 1, 2, 6, 7, 8, 9, 60, 66, 69, 1002번 버스이용 김포시청 또는 장릉입구 하차(도보20분)
버스
- 연대앞, 광화문 : 9602(김포시청입구 하차, 도보 20분)
- 신촌 : 6712(김포시청입구 하차)
- 여의도, 시청 : 631(김포시청입구 하차, 도보 20분), 1002번
- 영등포역 : 좌석 2, 6, 60(김포시청입구 하차) , 1, 7, 66, 67, 69, 88번
자가용

공항로(외곽순환도로 김포IC)→48번국도를 이용 김포, 강화방면→ 김포시청입구(사우동) 에서 좌회전→김포시청 정문에서 좌회전 200M 오면 오른쪽으로 장릉

 

 

☞ 윗글은 ▼ 아래에서 가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