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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보여행 후기☞/☆ 청계천 빛·등축제

[20070527]옥수역에서 '서울숲' 거쳐 청계천 루치페스타(빛의축제) 감상을 위한 야간도보여행을 다녀오다 - 3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07.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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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27일(일) 옥수역에서 '서울숲' 거쳐 청계천 루치페스타(빛의축제) 감상을 위한 야간도보여행을 다녀오다.

 

오늘은 청계천의 '청계광장과 장통교 사이'에서 지난 12일부터 시작된 '루치페스타(빛의축제)'가 폐막을 하다고 하여 함께 하는 님들과 축제의 마지막 날을 즐기기 위한 여정으로...

 

'옥수역에서부터 한강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서울의 숲' 이정표를 보고 마음이 동하여 잠시 '서울의숲'으로 들어가는 '보행가교'를 따라 '바람의 언덕'까지 간 후, 시간상 '서울의 숲'은 다음에 들러보기로 하고 한강과 중랑천의 합류지점으로 다시 되돌아와서 '중랑천을 따라 오르다가...

 

중랑천과 청계천의 함류지점에서 청계천으로 접어들어 '마장2교'를 지나서 저녁식사를 위해 '마장동 먹자골목'으로 가서 좋은 집?에서 저녁을 먹고...

 

게속해서 청계천의 야경을 감상하며 청계광장쪽으로 오르다가 영도교와 다산교 사이에 있는 '청계천 빨래터'에서 '탁족'을 하고...

이어서 장통교에서부터 '루치페스타(빛의축제'를 감상하며 청계광장까지 간 후...

마무리는 '서울시청(서울광장)'에서 하고, '시청역'에서 전철을 타고 귀가하였다.

 

 

 

 ☞ 3부를 시작하며...

 

 ▼ 마장동 먹자골목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 다시 청계천 산책로로...

 

 ▼ 어두워진 청계천 산책로를 따라...

 

 ▼ 청계광장까지 5.9km

 

 ▼ 고산자교 - 조선시대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호를 따서 지은 다리로, 인근에 같은 이름의 도로인 '고산자로'와 연관되어 붙여졌음

 

 

광통교모전교장통교삼일교광교수표교관수교세운교배오개다리새벽다리나래교버들다리마전교맑은내다리다산교영도교황학교비우당교무학교두물다리고산자교오간수교
 
 
 

 

 

 

 

 

 ▼ 두물다리 - 다리 위치가 과거 청계천 지류가 합류되던 지점으로 두개의 물이 만나는 다리라는 의미이며 다리모양도 서로 만나는 형상으로 되어 있음

 

 

 

 ▼ 무학교 - 조선 개국초에 이 도로의 종점지역인 왕십벌 지역에 도읍을 정하려고 태조 이성계를 따라 地相을 보러 다니던 高僧 無學大師에서 유래한 무학로의 이름을 인용

 

 ▼ 존치교각 - 청계고가도로의 교각 중 일부를 2003년 8월 당시 철거하지 않고 남겨둔 것으로 비우당교와 무학교 사이에 있으며, 청계고가도로를 걷어낼 당시 철거하지 않은 3개의 교각이 남아있다.
근대화의 상징인 청계고가도로의 교각을 남김으로써 후대에 청계천 복원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것이다.

 

 

 ▼ 비우당교가 보이고...

 

 ▼ 비우당교 - 조선 세종 때 대표적인 청백리로 알려진 하정 유관선생 댁이 이 다리 근처였는데, 그의 청렴함은 비가 오는 날에도 방안에서 우산을 받쳐들고 비를 피했을 정도였다고 하여 유래한 이름임

 

▼ 비우당교 아래 있는 저 문?은...

 

 ▼ 주문을 잊어버리셨군요...'열려라 참깨!'

  

 

 ▼ 리듬벽천 - 고수벽면에 리듬폭포처럼 유지용수를 흐르도록 하고 색색의 조명이 조화로운 수경시설과 저수변에 목재 데크를 설치하여 친수공간을 조성한 것으로 황학교와 비우당교 사이에 있다.
높이 5m, 넓이 20m의 대리석 벽으로, 검은 타원형의 돌을 박아 물고기가 물위에 있는 형상을 만들었다. 4색의 88개의 LED로 화려함을 더 했다.

 

 

 

 

▼ 소망의 벽에서...

 

▼ 소망의 벽 - 20,000여명의 시민이 참가하여 그들의 소망과 염원을 직접 쓰고 그려 넣었다.

청계천 복원사업에 서울시민은 물론, 지방 광역시ㆍ도ㆍ이북5도민, 해외동포 등 온 국민의 참여를 유도한 기념물이다.

가로, 세로 10cm의 도자기질 타일에 각자의 소망을 표현한 것으로 황학교와 비우당교 사이의 양쪽 벽에 50m씩 설치되어 있다.

 

 

 

 

▼ 황학교 - 옛날 이곳 논밭에 황학(黃鶴)이 날아왔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됨

 

▼ 대피안내문이...

 

▼ 이 문은 비가 많이 와서 우수가 넘칠 때 이곳으로 물을 빼내는 곳이라고...

 

 

 

▼ 영도교 -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귀양갈 때 그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이곳까지 나와 서로 영영 이별하였다 하여 영이별다리 혹은 영영건넌다리라고 전해지는 전설에서 유래된 교량명
- 숭인동 234번지와 상왕십리 748번지 사이 현 동묘(東廟, 숭인동 22번지) 남쪽 청계천 하류에 있던 다리이다. 동대문 옆에 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어서 동대문 방면에서 왕십리 쪽을 가려면 영도교를 건너야만 되었기 때문에 이 다리의 교통량은 몹시 빈번하였다. 그리하여 성종은 절의 중들을 동원해서 살곶이다리(전곶교, 전관교)와 함께 이 곳에 돌다리로 중수(重修)하고 어필(御筆)로 ‘영도교’라 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그 규모가 크고 특징이 있었으리라 보인다.
한편 이 다리에 얽힌 전설로는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로 귀양갈 때(세조 4년, 1458) 그의 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가 이 곳까지 나와서 서로 영영 이별을 하였다 하여 ‘영이별다리’ 혹은 ‘영영건넌다리’라고 전해진다. 그 후 정순왕후 송씨는 지금의 청룡사 새절승방에 있던 정업원(淨業院, 현 숭인동 17번지)에 들어가서 시녀 셋을 데리고 일생을 불도(佛道)에 바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도교의 돌다리는 고종초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헐어다가 석재로 썼기 때문에 이 때 없어졌다 한다. 그 뒤 나무다리가 놓여졌으나 가끔 떠내려 갔는지 그 옆에는 ‘띠엄돌’이라고 해서 개천 바닥에 돌을 띠엄띠엄 놓아서 이것을 밟고 건너게 한 때도 있었다.

 

▼ 님들은 징검다리를 건너가고...

  

 

 

▼ 다음 징검다리에서 건너오고...

 

▼ 여기는 청계천 빨래터 - 탁족을 위해...

 

▼ 청계천 빨래터  - 청계천은 아낙네들의 빨래터이자 아이들의 놀이터로 서민들의 생활터전이었다. 옛 아낙네들의 애환이 담겨 있는 빨래터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또, 충남 천안에서 옮겨온 능수버들 16주가 어우러져 한편의 풍속화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비록 이곳에서 빨래를 할 수는 없지만, 어른들과 추억을 나누고, 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해 주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을 듯 하다.

 

 

 

▼ 탁족을 마치고...

 

 

 

▼ 다산교 - 조선중기 실학자 정약용의 호를 붙인 도로인 다산로에 인접한 다리

  

 

 

 

 

▼ 맑은내다리 - 청계천을 순 우리말로 바꾼 이름으로 청계천을 상징할 수 있는 다리 명칭으로 결정

 

  

 

 

▼ 청계천 오간수교 옆에 있는 오간수문터

 

▼ 오간수문터 - 오간수문이 있던 자리로서 오간수문이란 조선초기 도성을 쌓을 때 청계천의 물줄기가 도성 안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는 지점에 있었던 다섯개의 수문을 말한다.

수문은 동대문(흥인지문)과 광희문을 잇던 성곽의 하부에 설치돼 있었다. 처음에는 3칸이었으나 5칸으로 증축되었다. 1908년, 동대문 주변 성곽을 헐면서 오간수문도 같이 헐었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 다리를 놓았다. 이 마저도 이후에 헐려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2003년 발굴조사 때 오간수문의 아래쪽 끝받침과 홍예(무지개 모양의 구조물) 기초부, 돌거북 등이 발굴됨에 따라 그 터를 사적 제 461호로 지정하였다.

  

 

▼ 오간수교 - 동대문에서 을지로 6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다리이다.
홍예문(紅霓門)으로 다섯 칸으로 되었다 하여 "오간수다리" 또는 "오간수문" 이라 하였다

- 이 다리는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 나가는 지점에 놓여 있던 다리이다. 즉 서울에 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다섯 개의 아치형으로 된 구멍을 만들었고, 그 위로 성곽을 쌓아 올렸으며, 아치 모양의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성벽 안쪽으로 장대석을 연결하여 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가 동대문 옆의 오간수문을 설치한 다리이므로 오간수다리라 불렀다.

이 오간수문은 물길이 잘 빠져가기 위해 가설한 것인데 조선시대에는 도성 안에서 죄를 지은 자가 도성을 빠져 달아나든가 혹은 밤에 몰래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 사람들의 통로로 곧잘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 예로 명종 때 전국적으로 사회를 흉흉하게 만들었던 임꺽정의 무리들이 도성에 들어와 전옥서를 부수고 도망갈 때도 이 오간수문을 통해 달아났었다.

이 다리는 1907년 일제가 청계천 물이 잘 흘러가도록 한다는 미명하에 오간수문을 모두 헐어버릴 때 함께 사라지고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되었다가 후에 성곽이 훼손되는 것과 함께 오늘날에는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마전교와 오간수다리 사이에는 조선시대 때 청계천의 하상을 준설하고 여기에서 나온 흙들을 쌓아 인공적으로 만든 산인 가산(假山)이 있었다.

 

 

 

 

 

 

▼ 패션광장의 패션분수

 

▼ 패션광장 - 인간과 자연의 상생과 조화를 주제로 제작한 '문화의 벽'과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 올리는 하천분수, 자그마한 문화공간인 수변무대가 어우러진 휴식공간이다.

 

 

▼ 문화의 벽 - 자연ㆍ환경을 주제로 한 현대 미술가 5인의 작품으로 오간수문 상류에 설치되어 있고 각각의 작품 크기는 가로 10m, 세로 2.5m이다.

 

 

 

 

▼ 두타빌딩

 

 

▼ 버들다리 - 과거 오간수문 상류에 왕버들이 많았었다는 데서 명칭을 인용하였으나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재검토 권고로 공식명칭 사용 보류

  

  

 

▼ 나래교 - 나비가 날개를 활짝 편 형상의 다리로, 동대문 의류상권의 중심지역에 위치하는 교량.
인근 동대문 의류상권이 세계 패션 1번지로 비상하는 의미를 담음

 

  

 

 

 

 

▼ 마전교 - 인근 옛교량 명칭으로, 다리 부근에 우마(牛馬)를 매매하는 마전(馬廛)이 있었던 것에서 인용

 

▼ 새벽다리 - 시장 천막의 이미지를 막구조로 적용하여 동대문 재래시장의 역사성 및 향수 연출

 

▼ 배오개다리 - 현 종로4가 네거리에 배오개(梨峴)라는 고개가 있었으므로 배오개길이라 명명한 이름에서 유래

  

 

▼ 세운교 - 현 세운상가에 인접하여 세워지는 다리로, 세운상가의 명칭을 인용

 

▼ 관수교 - 관수교(觀水橋)는 1918년 일본에 의해 지금의 청계 3가 사거리에 놓여있던 다리이다. 이곳에 청계천 준설사업을 위한 준천사가 설치되어 있었고 준천사에서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옛 교량 명칭으로 현 관수동에 위치 함.

 

▼ 수표교 - 수표교가 놓여진 것은 1420년(세종2)으로 당시 이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라 불렀으나,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수표석(水標石)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하였다. 수표교의 원형은 1959년 청계천을 복계할때 장충당공원으로 옮겨졌다.

 

▼ 삼일교 -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한 뒤 전국에서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는 시위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명명된 삼일로 인근에 위치하여 명칭을 인용했다.

 

 

▼ 삼각동 벽천 - 지난 여름의 추억이...

 

 

▼ 장통교 - 현 중구 장교동 51번지와 종로구 관철동 11번지 사이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이다.
이 다리 근처에 ‘장찻골’로 불리는 마을이 있었다 하여 이 부근에서는 ‘장찻골다리’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원명은 중부 장통방에 있던 다리이므로 장통교, 혹은 줄여서 장교라 하였다.

중구 장교동 51번지와 종로구 관철동 11번지 사이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이다. 이 근방이 조선시대 장통방(長通坊)이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이 다리 부근에 긴 창고가 늘어서 있었다 하여 장창교(長倉橋)라고 불렀고 달리 장찻골다리라고도 불렀으며, 장통교를 줄여서 장교(長橋)라고도 불렀다. 다리 서쪽 기둥에 '신미개조(辛未改造)'와 '기해개조(己亥改造)'의 8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차례에 걸쳐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내리는 창동천과 회현동을 거쳐 내려오는 물줄기가 소광통교에서 만나고 다시 남산동천의 물줄기와 합하여져 이 다리 앞에서 청계천의 본 물줄기와 합하여 진다. 따라서 장통교를 중심으로 서쪽에는 삼각주를 이루어 넓은 지세를 형성하고 있다.

이 일대는 일찍부터 도성 안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시전상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며, 중앙과 지방 관청의 연락사무를 맡아 보던 경주인(京主人)들의 본거지였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중인으로서 개화 물결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선각자적 역할을 수행한 유대치(劉大致)가 장통방 지금의 보신각 뒤편에 살았었다.

 

▼ 장통교를 지나자 '루치페스타(빛의 축제)'가...

 

☞ 서울문화재단은 5월 12일부터 오늘 27일까지 매일 오후 6시부터 11시까지 16일간 청계광장 ~ 장통교 구간 일대 730미터 구간에 ‘빛의 축제-루치페스타(Luci-Festa,이태리어로 빛의 축제를 의미)'를 열었다.

 

맥빔/ 만다라돔 /일루미네이션/블라쉐르 등 일본 및 이태리 등지에서 최근 개발된 조명 도구를 사용해

환상적인 빛의 예술을 연출하였다.

 

특히 이 행사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도심에서 가족나들이를 즐길 수 있도록 기획되었으며 국내 최초로 시도되는 '3D조명예술의 세계'를 만날 수 있어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 광교 - 광통방에 있던 크고 넓은 다리라는 의미에서 옛부터 광교라 일컬어졌으며, 현재 광교 사거리가 이 위치에 해당된다.

 

▼ 아이스께끼

 

 

▼ 광교 갤러리?에는...

 

 

▼ 아이스께끼를 먹으며 빛의축제를 즐겨요.

 

 

 

 

 

 

 

 

 

 

 

 

 

 

 

 

 

▼ 광통교 - 지금 서린동 124번지 부근에 있었던 다리인데 광통방에 있는 큰 다리였으므로 처음에는 대광통교라 하였다. 특히 옛부터 서울에서는 큰 다리로 알려져 정월 대보름이 되면 도성의 많은 남녀가 이 곳에 모여 답교(踏橋)놀이를 하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서린동 124번지 부근에 있던 다리이다. 지금의 보신각이 있는 종로 네거리에서 을지로 네거리 방향으로 나아가다가 청계로와 만나는 길목에 놓여 있었던 다리이다. 조선시대 광통방(廣通坊)에 있던 큰 다리였으므로 대광통교(大廣通橋)라 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북광통교(北廣通橋),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대광통교, 「도성지도(都城地圖)」에는 광통교, 「수선전도」에서는 대광교(大廣橋) 등으로 각각 기록되어 있어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같은 다리를 나타내는 말이며, 일상적으로 대광교 혹은 광교라고 불러왔다.
이 다리에 놓여진 돌들은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씨의 묘를 황화방 정동에서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기고 당초 묘에 썼던 돌들을 옮겨 다리를 건설하는 데 사용하였다. 왕비의 묘에서 잘 다듬어진 돌들을 다리를 건설하는데 사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조선초기의 정치상황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즉 이성계가 자신의 왕위를 강씨의 소생인 방석(芳碩)에게 넘겨 주려 하자 전처 소생인 이방원이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방석을 죽이는 사건인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다. 이후 정권을 장악한 이방원이 자신의 계모인 강씨의 묘를 옮기는 과정에서 묘에 사용되었던 돌들을 다리로 옮겨 놓은 것이다. 당시 이방원의 강씨에 대한 미움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광교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는 많은 상가들이 있어 서울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즉 닭과 계란을 파는 가게, 갓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대나무를 파는 가게, 갓을 파는 가게, 부인의 머리 장식을 파는 가게, 부인들의 패물과 가락지등을 파는 가게, 신발을 파는 가게, 물감과 중국 과실을 파는 가게, 칠 목기와 장롱을 파는 가게, 잔치 때 그릇을 세 놓는 가게, 채소를 파는 가게, 솜을 파는 가게, 말총, 가죽, 초, 실, 휴지, 책등 잡화를 파는 가게, 말안장, 등자, 굴레등을 파는 가게, 서화와 책을 파는 가게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항상 광통교 주위에 모여들어 생필품을 팔고 사곤 하였다.

1958년 광통교를 복개한 이후 다리의 돌에 새겨진 문양을 볼 수는 없지만 매우 정교한 구름무늬와 당초(唐草)무늬, 그리고 한가운데 두 손을 합장하고 머리에 관을 쓴 신장상(神將像)을 돋을새김한 돌들이 놓여 있었다. 이러한 문양의 돌을 복개된 청계천 내부로 들어가면 아직도 그래도 남아 있어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조흥은행 앞에 옛다리를 축소복원한 모형이 있다.

 

 

▼ 만다라돔 - 만다라돔은 2004년 일본 최대의 LED 생산단지로 유명한 도쿠시마현 아난시에서 ‘빛의 도시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된 빛 구조물이다.

불교의 ‘만다라’ 사상을 표현한 디자인은 무사시노 미술대학 교수가 담당하였으며, 알미늄 프레임은 일본경금속 주식회사가 제작하였다.

반구형 구조물의 경우 1기당 17만개의 LED 전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음악에 연동하여 각 패널이 점멸하며 환상적인 공간을 연출한다.

 

 

 

 

 

 

 

 

 

 

 

 

 

 

▼ 모전교 - 옛 교량명칭으로 길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는 과일을 파는 과전(果廛)을 '모전[隅廛]'’이라고 불렀는데, 이 다리가 바로 그 모전 부근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종로구 서린동과 중구 무교동 사이의 네거리에 있던 청계천의 옛 다리이다. 부근에 토산 과일을 파는 모전(毛廛)이 있어서 ‘모전다리’즉 모전교, 모교라고 불렀다. 그러나 원래는 태종 12년(1412) 종묘입구 서쪽의 개천을 석축(石築)으로 방축하고 동쪽을 목작방축(木作防築)할 때 석교로 조성하였다. 당시는 신화방동구교라 불렀으나 영조 연간(年間)에 작성된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分界之圖)에는 모전교로 기록되어 전한다.

 

 

 

 

청계폭포 양 옆으로 파란색 조명이 설치되어 있다.

청계광장 – 모전교(40m) 구간에는 은하수 전식과 인물 맥빔 조형물 , 그리고 구형 조형물과 모전교 위 일루미네이션이 설치되어 있다.

 

 

 

 

 

 

 

 

 

 

▼ 청계(시점)폭포

 

 

 

 

 

▼ 청계광장

 

 

 

 

 

▼ 청계광장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 청계광장 - 청계천이 시작되는 세종로에 조성된 청계광장. 삼색 조명이 어우러진 캔들 분수와 4m 아래로 떨어지는 2단 폭포가 장관을 연출한다.
폭포 양 옆에는 전국에서 돌을 가져온 8도석으로 제작된 ‘팔석담’을 깔았다. 밤이면 빛과 물이 어우러지는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또, 청계천 전구간을 1/100로 축소한 미니어쳐 역시 멋진 볼거리를 제공한다.

 

 

 

 

▼ 음력 11일 달이 빌딩 위에...

 

▼ 서울광장

 

 

 

 

▼ 숭례문(남대문)방향을 보니...

  

 

 

 

 

▼ 지금 시각은...

 

 

☞ 여기서 '옥수역에서 서울숲 거쳐 청계천 루치페스타 감상을 위한 야간도보여행'을 마친다.

 

 

 '2007년 5월 27일(일)  

옥수역에서 '서울숲' 거쳐 청계천 루치페스타(빛의축제) 감상을 위한 야간도보여행 中

 

-▥☞ 1부(옥수역 → 서울숲 보행가교)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2부(서울숲 보행가교 → 마장동 먹자골목)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3부(마장동 먹자골목 → 서울광장)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