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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궁궐·왕릉·묘ㆍ원

[20071020]덕수궁 나들이를 다녀오다.

by 맥가이버 Macgyver 2007.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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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0일(토) 덕수궁 나들이를 다녀오다.

 

 

☞ 덕수궁의 역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 갔다가 서울로 돌아와 보니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버려서 왕이 거처할 왕궁이 없어서 왕족의 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했던 월산대군가를 행궁으로 삼아 왕이 거처하게 되었다.
1608년 2월에 선조는 행궁의 침전에서 돌아가시고 광해군이 행궁의 서청에서 왕위에 즉위하였다.

 

광해군 3년(1611)에 행궁을 경운궁 이라 하였다. 경운궁의 정문은 원래 정남쪽의 인화문이었으나,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1906년에는 화재로 불탔던 중화전이 복구되었다. 석조전은 1900년에 착공하여 1909년에 완공되었다.

1907년 7월 20일에 일본침략자들의 강압에 의하여 고종이 순종에게 제위를 전위 하자 선제가 거처하는 궁이 되어 덕수궁이라 하였다.

 

☞ 덕수궁 

 

사적 제124호. 조선의 5대 궁궐 중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것으로 조선말 고종이 살던 곳이다.

궁궐의 자리는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직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행궁(行宮)이 되었다.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뒤 1611년 10월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615년(광해군 7)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빈 궁궐이 되었으며 1618년 인목대비가 이곳에 유폐되면서 서궁(西宮)으로 불렸다.

 

인조는 이곳 별당에서 즉위했으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는 바람에 다시 빈 궁궐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왕태후와 왕태자비가 이곳으로 옮겨와 생활했으며 1897년 고종이 러시아 영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궁궐건물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그해에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시는 선원전(璿源殿), 침전인 함령전(咸寧殿), 보문각(寶文閣) 등이 지어졌으며 9월 17일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하고 소공동의 원구단(圜丘壇)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정궁(正宮)이 되었다.

 

1900년(광무 4) 담장공사가 완공되었고 정문인 인화문(仁化門) 및 돈례문(敦禮門)·회극문(會極門)·영성문(永成門) 등의 전문(殿門)이 완성되었다. 그해에 선원전이 불탔다.

1902년 정전인 중화전(中和殿)과 관명전(觀明殿) 등이 새로이 건립되었으며 1904년 대규모 화재로 많은 건물이 불타버렸으나 즉조당(卽祚堂)·석어당(昔御堂)·함령전 등이 중건되었다. 이때 정문의 이름을 대안문(大安門)이라 했다. 1905년 중화전을 다시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되었으며, 이때 대안문도 수리하여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이곳에 살면서 현재의 이름인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순종이 이곳의 즉조당에서 즉위한 뒤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고종의 거처가 되었다. 1910년 근대건물인 서양식의 대규모 석조전(石造殿)이 건립되었으며, 1919년 고종이 함령전에서 죽었다.

921년 중화전에 봉안했던 고종의 영정을 창덕궁 선원전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배치는 중앙에 정전인 중화전이 남향하여 있고 정전의 뒷편에는 석어당과 즉조당이 있으며, 정전의 동편에 침전인 함령전이 있다. 함령전의 서쪽에 덕홍전(德弘殿)이 있으며, 북쪽에 서양식 건물인 정관헌(靜觀軒)이 있다.

 

정문인 대한문은 궁궐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전인 중화전의 주위에 회랑이 없어 다른 궁궐에 비해 격이 떨어진다.

현재 정문인 대한문과 정전인 중화전을 비롯하여 중화문·함령전·즉조당·준명당(浚明堂)·석어당·덕홍전과 근대식 건물인 석조전과 정관헌 등이 남아 있다.

 

서양식으로 세워진 석조전과 정관헌은 주변의 한식건물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건축양식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특히 석조전의 남쪽에 일본인들이 미술관을 세우고 그 앞에 서양식 연못을 만들면서 궁궐의 본래 모습이 상당히 손상되었다.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 건축이 함께 남아 있는 조선왕조의 궁궐로 본래 일반사가의 집을 궁궐로 꾸몄기 때문에 규모도 가장 작고 전체배치가 정연하지 못하다.

 

  

 

 

1.대한문  2.금천교  3.중화문  4.중화전  5.광명문  6.포덕문 

7.궁중유물전시관 (석조전 동관)  8.덕수궁미술관 (석조전 서관) 

9.분수대  10.준명당  11.즉조당  12.세종대왕동상 

13.덕홍전  14.정관헌  15.함녕전  16.석어당 

 

 

 

대한문 

덕수궁의 정문이다. 원래 이 문은 대안문(大安門)이었으나 1906년 대한문(大漢門)이라 개명하였다. 현재의 위치는 도시계획에 의해 서쪽으로 물러난 자리이며, 궁궐의 정문이 동향하고 있는 것은 창경궁의 경우와 같으나, 원래는 중화문 앞쪽에 정문이 있었다고 한다. 궁문의 건축양식은 단층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우진각지붕이다. 궁의 정문으로 단층인 것은 이 문이 유일하다. 오늘날에는 기단과 계단이 묻혀 버렸으나 전에는 다른 궁의 정문과 같이 기단과 석계가 있었다. 대한문이란 현판은 조정 중신 남정철의 글씨이다

 

 

  

 

 

 

 

금천교 

모든 궁에는 명당수가 흐르는 어구(御溝)가 있고, 거기에는 석교가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덕수궁인 경우 지세 자체가 왕궁이 들어앉을 만한 곳이 아니어서인지 인공적으로 명당수의 금천교를 만들었다. 현재는 어구가 연못처럼 변형되어 있다. 이 금천교는 두 개의 홍예로 구성되어 있다.

 

 

 

 

 

 

 

 

 ☞ 세종대왕 동상

이 동상은 1968년 5월 건립된 세종대왕의 좌상이다. 조각가 김경승이 제작하였고, 애국선열 조상건립위원회와 서울신문사가 공동으로 건립하여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좌대(座臺)는 석재(石材)로 하고 3면에는 세종대왕 때에 발명된 각종 과학기재들을 양각하여 장식하였다.

 

 

 

 

 

 

  

 

☞ 함녕전 

고종황제의 침전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1904년 화재로 인해 소실된 것을 같은 해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함녕전은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한 건물이기도 하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9칸, 측면 4칸인데 서쪽 뒤편에 4칸이 더불어 ㄱ자형으로 되었다. 앞에서 보면 중앙 3칸은 근간으로 하여 개방하였고, 나머지 부분은 전부 거실로 이용하도록 되어 있다. 기둥 위에 올린 공포는 익공식이며, 건물이 거대한 데 비해 장식은 간결하다.

 

- 함녕전 행각의 외관
함녕전과 덕홍전 남쪽의 행각이다. 행각의 위치는 크게 변하지 않았으나 건물은 일정기에 개수되어 많이 변모하였다. 함녕전 앞에는 행각 3칸에 문을 두었고, 덕홍전 앞면에도 3칸의 대문을 두고 그 좌우에 각각 3칸의 행각을 붙여 함녕전 행각과 내부에서 서로 통하게 하였다.

 

- 함녕전 창호(내부)
함녕전 내부에서 앞쪽 주간의 분합문을 바라본 모습이다. 사분합의 띠살문을 전면 3칸에 달고 그 위쪽으로 광창(光窓)을 달아 실내조명을 밝게 하려 하였다. 띠살분합문은 비교적 간결 단순한 무늬를 택하였고, 광창은 빗살무늬의 살을 넣어 분합문과 조화되도록 하였다. 문과 창의 시원스러움이 청간(廳間)의 공간을 한층 더 넓고 높게 돋보여 주고 있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에는 장지문을 달았는데, 각 문마다 중앙에 정자살을 넣어 내부공간의 아늑함을 표출하고 있다. 대청의 한 공간 내에서 서로 다른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 한국적 공간의 실례라 할 수 있다.

 

 

 

 

 

 

 

☞ 덕홍전 

덕홍전은 고종황제가 내외빈객들을 접견하던 건물이다. 1911년에 건립되어 현존 전각(殿閣) 중에 가장 나중에 건조된 전각(殿閣)의 하나이다. 기단은 장대석을 돌려쌓고 알맞은 기둥 높이에 간결한 익공(翼工)을 얹어 처마를 받게 하였다. 팔작지붕의 마루에는 양성(兩城)하고 귀마루에는 용두와 잡상(雜像)을 얹어 잡귀와 화재에 대비하고 있다. 현재는 건물 내부를 고종황제의 침전으로 복원하여 당시의 궁중 생활상을 볼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석어당 

덕수궁 내의 유일한 이층 건물로, 1904년의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같은 해에 다시 다른 전각들과 함께 중건했다. 원래의 석어당은 임란 때 선조가 피난으로부터 환도하여 승하할 때까지 16년간 거처하였던 곳이며,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이 건물 앞뜰에 꿇어앉혀 죄를 책한 곳이기도 하다. 아래층이 정면 8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이 정면 6칸, 측면 단간인 굴도리집으로, 올라 다니는 계단은 서쪽 끝에 설치되었다. 중층이면서도 가식이 없는 민간풍의 건축양식을 나타내고 있어 친근감을 준다.

 

  

 

 

 

☞ 즉조당 

즉조당은 중화전의 북쪽에 위치한 건물로, 순종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1904년 화재를 입어 소실된 것을 같은 해에 중건한 것이다. 궁의 침전으로서는 규모가 크지 않으나,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간결하고 짜임새가 돋보인다. 전면 동쪽으로 편향하여 3칸의 퇴(退)를 두어 개방하였고, 내부는 거실로 이용하였다. 건물에 비해 높은 기단을 두었고, 서쪽의 준명당과 연결되도록 2칸 복도를 두고 있다.

 

즉조당 앞의 괴석
덕수궁에는 원래 괴석을 배치한 공간이 없었는데,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침전 주위에 괴석이 배치되어 있으므로, 침전이었던 즉조당 전정(前庭)에 괴석을 배치한 것이다. 1984년 창경궁에서 옮겨왔다

 

 

 

 ☞ 준명당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집으로 중화전 북쪽, 즉조당 서쪽에 위치한다. 고종황제가 이곳에 거처하기도 하였고, 한때 고종의 초상화와 순종의 초상화가 봉안되기도 하였다. 또한 고종은 이곳에서 외국 사절들을 영접하기도 했다. 내전으로 동쪽에 자리 잡은 즉조당과 같은 기능의 건물로 양식도 유사하다. 즉조당의 퇴간(退間)이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 데 비해 준명당의 근간은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중화전(보물 제 819호)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형식을 취하고 있는 중화전은 중화문과 함께 1902년 건립되었으나 1904년 화재로 전전각(全殿閣)과 함께 소실되었던 것을 1906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이 건물은 조선조 최후의 궁궐 정전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형식을 취하고 있는 중화전은 중화문과 함께 1902년 건립되었으나 1904년 화재로 전전각(全殿閣)과 함께 소실되었던 것을 1906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이 건물은 조선조 최후의 궁궐 정전이다

 

- 중화전의 어좌 중화전 내부 중앙간 뒤편에 마련된 어좌이다. 어간 고주 사이에 단(壇)을 마련하고 그 위 중앙에 용대를 놓았으며, 용대 뒤편에는 투각곡병(透刻曲屛)과 일월오악병풍(日月五嶽屛風)을 놓았다. 어단(御壇)에는 앞면과 좌우 측면에 보계(寶階)가 있고 난간(欄干)을 설치했다. 어좌 위에는 보개(寶蓋)를 마련하였는데, 적주(吊柱)에 낙양각하고 그 위로 닫집을 얹어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다.

 

- 중화전 상·하월대 계단 중화문에서 중화전에 이르려면 상·하월대의 석계를 통해야만 된다. 하월대는 3단 장대석의 기단으로 최하단에 지대석을 놓고 2단의 장대석을 엇갈려 쌓은 후, 최상단에 갑석(甲石)으로 박음하였다. 석계는 5단으로 구성하였는데 중앙부 제2단 디딤돌 위 양편에 서수(瑞獸)를 놓아 석계 전체를 3등분하였다. 중앙 양 석수(石獸) 사이의 중심에는 넓은 판석의 답도(踏道)를 마련하고 석계 양쪽 소맷돌 위치에는 삼각우석(三角隅石)을 놓고 끝쪽에 머리부분만 있는 서수(瑞獸)를 조각하였다. 하월대의 석계도 하월대의 석계와 같은 수법인데, 소맷돌이 곡선으로 된 점과 디딤돌이 3단만 있어 하월대보다 2단이 낮게 된 점이 다르다.

 

 

 

 

☞ 중화문 

중화문은 궁궐의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집인데, 건축 양식은 중화전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원래의 중화전은 중층정전이었으며, 그때의 중화문은 현재의 문보다 규모가 더 웅대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1904년 전전각이 소실될 때 이 문도 소실되었고, 중화전이 중건될 당시 재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화전과 같이 평면 규모에 비해 기둥 높이가 훤칠하여 다른 궁궐 전문(殿門)에서 볼 수 없는 비례감을 보여주는 문이라 할 수 있다.

 

 

 

 

 

 

광명문 

광명문은 원래 함녕전의 정문으로 함녕전 남쪽에 있었는데, 흥천사 종과 자격루 등을 전시 할 목적으로 일제 때 지금의 위치로 이건되어 문의 기능을 잃고 말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전문형식으로, 중앙 도리간에 판비가 있었으나 이건되면서 없어졌다. 가구는 원주 위에 주심포를 올리고 창방위에는 장화반(長花盤)을 얹어 주심도리를 받고 있으며, 맞보형식의 대량을 중심고주에서 받게하여 중도리를 얹고 있다. 문의 가구 기법은 견실하며 전문(殿門)으로서는 규모도 크고 내용도 충실하다.

 

 

 

 

 

 

 ☞ 궁중 유물전시관(석조전 서관)

이 건물은 1900년 착공하여 1910년 완공된 지상 3층 연건평 1,247평의 석조 건물이다. 외관은 19세기 초 서구에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적 양식으로 영국인 기사 하딩에 의에 설계되었고 공사초기에는 한국인 심의석, 러시아인 사바틴, 일본인 오가와 등이 감독하였으며, 후반에는 영국인 데이비슨이 감독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1층은 시종들의 대기장소, 2층은 접견장소로 이용됐으며 황제부부는 3층에 거쳐하셨다. 현재는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궁중유물전시관은 5대궁 12개 능 · 원에 분산 · 소장되어 오던 중요 궁중유물을 한데 모아, 보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관리와 왕실문화 생활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1992년 12월 개관되었다. 전시실은 크게 역사실과 유물전시실로 나누어지고 1실부터 10실까지 유물의 재질별, 주제별로 분류 전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유물들은 왕실에서 사용하던 당 시대 최고의 장인들이 만들어낸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또한 우리관에서는 매년 주제를 달리하는 특별전을 마련하고 있으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교육으로 조선시대 왕실문화 관련분야의 전문강좌를 실시하여 시민과 함께 하는 문화 박물관의 역활을 하고 있다

 

덕수궁미술관(석조전 동관)

1937년 이왕직박물관으로 지은 별관은 연면적이 1,104평이며, 해방 뒤 석조전의 부속 건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덕수궁 현대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덕수궁미술관은 근대미술 전문기관으로서 근대미술의 조사 · 연구, 작품의 수집과 보존, 기획 및 상설전시, 각종 교육프로그램의 개발과 실시, 학술과 출판, 근대미술 작품과 정보의 국제적 교류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도심 외곽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 본관의 관람 불편 요소를 해소하여 강북권에 새로운 문화공간을 활성화 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석조전 전정:
석조전 앞의 전정으로, 1900년 영국인 브라운이 발의하여 영국인 기사 하딩의 설계로 착공되어 1910년 준공을 보게 되었다. 이때 이 전정도 완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전정은 분수와 연못을 중심으로 서양식 정형(整形) 정원을 꾸몄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유럽식 정원이라 할 수 있다. 석조전의 남북축선 위에 동서가 대칭되도록 중심에 분수대를 놓고 원형과 방형이 조합된 연못을 파고 그 안에 네 마리의 물개를 동서남북으로 배치하였다. 연못 주변은 방형으로 2단의 낙차를 두어 구획하고 조경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