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10일(일) 종로구 운니동 운현궁(고종 잠저, 흥선대원군 사저)에 다녀오다.
오늘은 그동안 늘 지나치던 운현궁을 다녀오기로 하고...
인사동 쌈지길을 둘러보고 인사동 골목길을 따라 운니동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사저 '운현궁'을 들어서니
마침 운현궁 內 문화마당에서 재즈밴드그룹 '그루터기 T'의 재즈공연이 있단다.
운현궁을 둘러보고 재즈공연도 보고...
☞ 운현궁의 유래
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로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은 조선조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潛邸)이며 흥선대원군의 사저이며, 한국근대사의 유적 중에서 대원군의 정치활동의 근거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흥선군 이하응이 왕실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정치로의 개혁의지를 단행한 곳이다.
대원군이 권력에서 하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내외에 행사한 곳으로서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였기 때문에 역사적 상징성이 더욱 크다.
흥선군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 였다.
고종이 12살까지 살았던 운현궁은 철종 때 옛 관상감 터였던 운현궁에 왕기가 있다는 내용의 민요가 항간에 유행하였으며, 고종이 등극한 후 대원군이 운현궁 터를 다시 확장하였다.
운현(雲峴)이란 당시 서운관(書雲觀)이 있는 그 앞의 고개 이름이였으며, 서운관은 세조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었으나 별호로 그대로 통용되었다.
서운관의 명칭인 운관(雲觀)과 운관 앞의 고개를 가리키는 운현(雲峴)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고종의 잠저는 당시 대왕대비 교지를 받들어 영의정 김좌근, 도승지 민치상, 기사관 박해철·김병익 등 일행이 명복(明福-고종의 이름)에게 익종의 대통을 계승토록 하기 위하여 고종을 맞이하러 최상급의 가마행렬을 갖추어 관현(觀峴)의 흥선군 사저에 갔을 때 흥선군의 위엄 있는 자세와 그의 둘째 아들인 명복의 천진스러웠던 모습에 대한 사실적 묘사에서 운현궁이 고종의 잠저였음을 알수 있다.
한일합방후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이왕직 장관을 시켜서 운현궁을 관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운현궁을 유지·관리하는 일은 소유권에 관계없이 이로당의 안주인들이 계속 맡아했다.
운현궁의 소유권이 다시 대원군의 후손에게 넘겨지게 된 것은 1948년 미군정청의 공문에 의해서였다. 이후 그 소유권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정부와 대원군 후손 사이에 법적 공방이 있었으나 그 해 9월 21일 결국 대원군의 5대손 이청(李淸, 1936- )씨에게 운현궁 소유권이 확정되었다.
그러던 것이 1991년 운현궁을 유지, 관리하는데 여러가지 어려움이 생기면서 양도 의사를 이청씨가 밝힘에 따라 서울시에서 매입하게 되었고, 1993년 12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된 것이다.
☞ 운현궁의 규모
고종이 즉위(1863.12.13)한 지 한 달쯤 지나서 대왕대비의 하교로 운현궁의 신ㆍ증축 공사는 시작되었고, 9개월만에(1864. 9) 노락당과 노안당 건물의 준공을 보았다. 당시 대왕대비는 호조에 명하여 운현궁에 매달 쌀 10섬과 100냥씩을 보내고, 운현궁의 신증축 비용으로 17,830냥을 지원하였다.
운현궁이 준공되었을 때 고종은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모시고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하였다. 이 때 고종은 자신이 그 곳에서 살던 때를 생각하여 근처의 선비와 소년들에게 임시과거시험을 보게 하고 선비 50명, 소년 497명을 선발해서 시상하는 등 운현궁의 준공을 기념 축하하였다.
본래 흥선군의 사저였을 때 운현궁의 위치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부근으로 지금의 운현궁과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자리에 해당된다. 그러나 증축하여 규모가 가장 커졌을 때는 주의 담장 길이가 수리(數理)나 되고 4개의 대문이 웅장하여 마치 궁궐처럼 엄숙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 舊TBC방송국, 일본문화원, 교동초등학교, 삼환기업 일대라고 한다.
운현궁의 대표적 건물로는 고종원년(1864) 9월에 준공한 노락당과 노안당 그리고 6년 후에 증축한 이로당이 있고, 지금은 한 개뿐이지만 그 당시 4개였던 대문이 있다.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서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등 큰 행사 때 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그 규모는 궁궐에 비하여 손색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였다.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했던 고종이 대제학 김병학(金炳學)에게 '노락당기(老樂堂記)'를 지어 기념할 것을 지시했던 사실만으로도 노락당이 상징하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병학은 노락당과 하늘 사이가 한자 다섯치 밖에 안된다고 했는데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는 해도 당시 흥선대원군의 권세가 천하제일이었다는 것을 잘 웅변하고 있다.
대원군의 위세와 운현궁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는 고종 3년(1866) 3월 21일에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를 운현궁에서 치른 사실이다. 가례준비 일체를 노락당에서 하였음은 물론이다. 당시 가례행사를 위하여 1,641명의 수행원과 700필의 준마가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이들이 모두 운현궁을 거쳐갔다고 할 때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노안당은 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그가 임오군란 당시 청에 납치되었다가 환국한 이후 민씨 척족의 세도 정치 아래에서 유배되다시피 은둔생활을 한 곳이 이 건물이고, 만년에 임종한 곳도 노안당의 큰방 뒤쪽에 있던 속방이었다.
노안당은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으로 추녀 끝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노안당의 상량문이 1994년 5월 27일 보수공사 당시 발견되었는데 당호의 유래와 대원군의 호칭 및 지위에 관한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상량문에 의하면 대원군의 호칭을 '전하(殿下)' 다음의 존칭어인 '합하(閤下)'라고 하였으며, 지위는 모든 문무백관의 으뜸이라고 하였다. 또 노안당의 당호는 공자가 '老者를 安之하며'라고 한 글에서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노락당과 노안당 증축 당시 대원군의 권세를 이처럼 상량문에서도 잘 대변하고 있다.
노락당 못지 않게 운현궁의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 4대문이었다. 한창 전성기였을 때는 정문, 후문, 경근문(敬覲門), 공근문(恭覲門)의 4대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후문 하나만 남아 있다.
경근문은 고종이 운현궁을 출입할 때 전용하던 문으로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에 있었다.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등극했을 때 조종대신들이 왕의 심중을 헤아려서 왕실 예산으로 경근문과 공근문을 지었다고 한다. 이 때 고종은 호조판서 이돈영에게 품계를 올려주고 치하했다는 기록이 있다.
공근문은 대원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 전용한 문인데 경근문과 함께 없어지고 지금은 일본문화원 옆터에 그 기초만 남아있다.
☞ 대원군과 운현궁
대원군의 정치생애와 운현궁의 성쇠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따라서 운현궁의 역사적 보존가치는 대원군이 한국근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맥을 같이한다.
고종의 잠저였던 운현궁은 대원군이 집권하기 전까지는 왕족으로서의 권위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보잘 것이 없었다. 그러나 고종 즉위 후 10년 동안 대원군의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운현궁은 그 위용이 자못 왕궁과도 같았다.
운현궁의 대표적 건물인 노락당, 노안당이 사대문이 웅장하고 화려하여 그 모습이 엄숙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운현궁의 중심건물인 노락당은 낙성식 때 고종과 대왕대비가 참여했을 뿐 아니라 고종과 명성후 민씨가 가례를 치른 곳으로서 이 건물이 상징하는 역사적 의미는 크다.
그러나 대원군이 하야한 이후 운현궁도 점차 위용을 잃었다.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이 청에 구금당하고 있는 동안에 가장 경제적으로 힘들 때여서 관리유지가 힘들었다. 다시 운현궁이 활기를 찾게 된 것은 그가 재집권하고서부터 이다.
대원군이 다시 집권한 것은 2차례 있었다. 처음은 임오군란 직후 33일간(1882.7. 23 - 8.26)이었고, 두 번째는 동학혁명 당시로서 약 4개월간(1894 7.23 - 11. 22)이었다. 이 경우 대원군의 재집권 배경과 계기는 서로 다른 점이 있으나 공통적인 것은 2차례 모두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가 초기 집권할 때부터 내정개혁에서 역점을 두었던 인사정책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하겠다. 신분에 관계없이 불만세력을 포용하는 인재등용 원칙이 일관되게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동학혁명 당시의 대원군은 이미 지방민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민씨 정부나 청·일측이 동학군의 봉기를 폭동으로 보았을 때 그는 일종의 사회변혁운동으로 규정하는 한편 서울에서도 그와 같은 일이 전개될 것이라는 암시를 할 정도로 동학군에 대한 인식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의 재집권은 민씨 정부를 돌려놓고 조선의 내정개혁을 독자적으로 강행하려던 일본측 전략과 대원군의 집권 의지가 상호 연계되어 가능했다. 대중적 지지기반은 그가 재집권한 후 일본군 축출을 계획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고종 즉위후 10년 동안의 쇄국정책은 재집권할 당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임오군란 수습조건으로 일본이 부당한 요구조건을 제시했을 때, 또 조선정부가 양보하는 선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중재한 청에 대해서 보여준 그의 태도는 강온양면정책이었다.
일본의 무례한 요구에 대하여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강경책을 썼는가 하면 한편으로 시일을 지체하면서 청과의 협조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전략도 구사했다. 그렇다고 해서 청의 중재를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이 때의 대외정책은 겉으로 유연성을 보이기도 했지만 실은 아직 경직된 면이 없지 않았다. 그의 대외정책이 명분보다 실용주의 방향으로 변화가 있었던 것은 동학혁명 당시 재집권할 때였다.
청일전쟁이 발발한 후 대원군이 일본군 축출을 계획할 때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과의 협조를 꾀했다. 교전 중이던 청이나 내정개혁을 강요받던 조선측 입장에서 보면 상부상조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또 일본의 조선침략정책을 국제적으로 여론화하기 위한 노력도 하였다. 그는 이미 청과 일본이 출병했을 때 러시아의 개입을 예견했을 정도로 러시아의 조선지배 야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제일 먼저 러시아측과 접촉하여 러시아를 통한 일본견제를 꾀하였다. 그렇치 않아도 러시아는 은밀히 청·일을 중재하고 있었고 3국협동론을 제시하여 조선에 관여할 의사를 비췄었다. 별로 소득이 없었지만 대원군은 러시아 외에도 영국이나 미국과도 외교접촉을 시도하였다.
영국도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원치 않았으므로 역시 드러나지 않게 중재를 시작했는데 이때의 중재안은 청과 일본이 조선을 분할 점령하라는 것이었다. 대원군이 조선주재 각국 공사들과의 면담을 통한 적극적인 외교를 시도해 보았지만 민씨 정부의 무능과 타락이 한계에 이른 상태에서 조선정부에 대한 국제적 협조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대원군은 이 점을 알았기 때문에 친일개화파 인물 제거와 신정부 수립을 계획하였으나 이른바 이준용역모사건으로 인하여 결국 권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 운현궁의 주인들
1대 이하응(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 순조 20∼고종 35)
조선시대 왕족·정치가.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이름은 하응. 영조의 5대손이며 조선 제 26 대 왕 고종의 아버지이다. 1843년(헌종 9)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46년 수릉천장도감(綏陵遷葬都監)의 대존관(大尊官)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을 지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아래 왕족에 대한 감시가 심하자 호신책으로 시정의 무뢰한과 어울리고 구걸도 서슴치 않아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왕실의 조대비(趙大妃)와 밀약하여 철종이 후사없이 죽자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왕위에 세우고 그는 대원군에 봉해졌다. 그 뒤 섭정을 통해 강력한 혁신정치를 추진,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당쟁의 기반이 된 서원을 정리하였다. 또 토호들의 토지겸병을 막고 종래 상민에게만 징수하던 군포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하였으며 환곡제를 사창제(社倉制)로 개혁하였다.
복식을 간소화하고 사치를 금하였으며, 《대전회통(大典會通)》 《육전조례(六典條例)》 《양전편고(兩銓便攷)》 등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 확립에 힘썼다. 반면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납전(願納錢)을 징수하고 역역(力役)을 부담시켜 백성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또한 서구 세력의 차단을 위한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병인박해를 통해 9명의 프랑스 신부와 8000여 명의 신도를 처형하는 등 가톨릭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으며 이를 구실로 침공한 프랑스와, 제너럴셔먼호사건을 계기로 개국을 강요한 미국을 격퇴하였다.
한편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권력투쟁을 벌여 최익현(崔益鉉) 등 유림의 상소로 실각하였고 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계기로 재집권하였으나 청(淸)나라 개입으로 톈진〔天津〕에 연행되어 3년간 유수생활(幽囚生活)을 하였다. 그 뒤 86년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결탁하여 큰 아들 재황(載晃)을 옹립하려다 실패하였고, 95년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일으킨 을미사변(乙未事變)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러정부가 성립되자 은퇴하였다.
1907년(순종 1)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헌의(獻懿).
2대 이재면(1845~1912)
완흥군 이재면은 흥선대원군의 장자로 동생 명복보다 7살이 위였으나 왕세자로 간택되지 못하였다. 그는 상처하여 57세에 20세인 계실 이씨와 결혼하였다. 그의 아들 이준용보다 13살 아래였다.
3대 이준용(1870~1917)
영선군 이준용은 이재면의 장자로 노락당 뒤쪽에 송정 사랑채를 지어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운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1896년 을미사변 직후 일본으로 건너가 신학문을 연마한 후 12년만인 1908년에 귀국하여 운현궁에서 살았다. 그의 부친 이재면이 세상을 떠난 뒤 5년 후인 1917년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준용의 뒤를 이을 혈육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아들 이우를 양자로 맞이 하였다.
운현궁의 내당 살림살이는 이재면의 부인 이씨(1883~1978)가 맡았어야 하는데 한 세대를 건너 대원군의 손자 며느리인 이준용의 계실 광산 김씨(1878~1955)가 내당살림을 맡게 되었다.
4대 이우(1912~1943)
흥영군 이우는 이준용의 양자로 들어갈 때 나이가 5세이었다. 10세에 일본으로 가서 일본군인으로 복무하게 되었으니 이준용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나 이우가 일본으로 가게 된 것은 모두 일본의 정략적인 음모술책에 기인한 것이다. 일본에서 이우와 결혼한 박찬주(1914~1995)는 박영효의 증손녀딸이다.
5대 이청 (1936~ )
이우의 큰아들 이청은 흥선대원군의 5대손이 되고 고종으로부터는 4대손이 되는데 외모라든가 풍기는 모습이 고종을 닮았고 왕족으로서의 품위를 갖추어 행동하려고 하였다. 일본에서 자란 이청은 어린시절을 운현궁에서 살지 않았으며 가끔 휴가를 받아 한국에 왔을때 운현궁에서 지냈을 뿐이다. 이청씨가 운현궁의 소유(관리)로 된 것은 1948년 부터이다. 운현궁 관리에 어려움이 있어 1993년 서울시에서 매입하여 서울정도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관리 운영하게 되었다.
☞ 고종
초휘(初諱)는 재황(載晃)이고 아명(兒名)은 명복(命福)이다. 초자(初字)는 명부(明夫)이며 자는 성림(聖臨)이고 호는 주연(珠淵)이다.
영조의 현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로서 비(妃)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딸 민씨(閔氏)이다.
1863년(철종 14)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趙大妃)의 전교(傳敎)로 12세에 즉위하였다. 새 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하였으나, 대정(大政)을 협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은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렸다.
척신(戚臣) 세도정치의 배제, 붕당문벌(朋黨門閥)의 폐해 타파, 당파를 초월한 인재의 등용, 의정부의 권한 부활에 따른 비변사(備邊司)의 폐지 및 삼군부(三軍府)의 설치, 한강 양화진(楊花津)의 포대(砲臺) 구축에 따른 경도수비(京都守備) 강화, 양반으로부터의 신포징수(身布徵收), 양반 유생의 발호 엄단 등은 고종 초기 10년 동안 대원군이 이룩한 치적이다.
그러나 경복궁 중수(重修)에 따른 국가재정의 파탄, 악화(惡貨)인 당백전(當百錢)의 주조(鑄造)와 민생의 피폐, 과중한 노역(勞役)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과 소요, 천주교 탄압에 따른 8,000여 명의 교도 학살, 쇄국정책,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등 어두운 정치적 자취를 남기고 1873년(고종 10) 11월, 민비의 공작에 따라 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자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정권은 민비와 그 일족인 민승호(閔升鎬) ·민겸호(閔謙鎬) ·민태호(閔台鎬)로 대표되는 민씨 일문의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1875년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쇄국정책을 버리고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 근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개국과 함께 새로운 문물에 접하게 되자, 개화당이 대두, 조정은 개화 ·사대당(事大黨)의 격심한 알력 속에 빠졌다.
1881년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 朝鮮策略》의 유입, 반포를 계기로 위정척사파는 마침내 신사척사상소운동(辛巳斥邪上訴運動)을 일으켜 민씨정부규탄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때 안기영(安驥永) 등에 의하여 국왕의 이복형인 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 이재선(李載先)을 국왕으로 옹립하고자 하는 국왕폐립음모(國王廢立陰謀)가 꾸며졌으나, 고변(告變)에 의하여 사전에 적발되어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민씨정권은 이 사건을 이용하여 척사상소운동을 강력히 탄압하여 정국을 수습하였다.그리고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게 하고, 군사제도를 개혁, 신식 훈련을 받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으나 신제도에 대한 반동으로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 개화 ·수구(守舊) 양파는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벌이게 되어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겪고 고종은 개화당에 의해 경우궁(景祐宮) ·계동궁(桂洞宮) 등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이런 중에도 한 ·미, 한 ·영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서방국가와 외교의 길을 텄지만, 1885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우월권을 배제하고, 일본도 동등한 세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청 ·일 간의 톈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되어 일본이 한반도에 발판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계략으로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있자 김홍집 ·정병하(鄭秉夏) ·어윤중(魚允中) 등 개화파 인사가 살해되고 다시 친러내각이 성립되었다. 이로부터 한동안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를 받았지만, 고종은 1897년 2월 25일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에 따라 경운궁(慶運宮: 후의 덕수궁)으로 환궁, 8월에는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10월에는 국호를 대한, 왕을 황제라 하여 고종은 황제즉위식을 가졌다.
1904년(광무 8) 러 ·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요구로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위한 제1차 한 ·일 협약을 체결, 이듬해 한성의 경찰치안권을 일본헌병대가 장악하였으며, 이해 11월에는 제2차 한 ·일 협약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김으로써 병자호란 이래 국가존망의 위기를 맞았다. 이에 우국지사 민영환(閔泳煥) ·조병세(趙秉世) ·홍만식(洪萬植) 등은 자결로써 항의하였지만 일본은 1906년 2월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대행정치(代行政治) 체체를 갖추었다.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자 고종은 밀사 이준(李儁) 등을 파견하여 국권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 오히려 이 밀사사건 때문에 일본의 협박으로 황태자(순종)에게 양위(讓位)한 후 퇴위, 순종황제로부터 태황제(太皇帝)의 칭호를 받고 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19년 1월 21일 일본인에게 독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의 재위 44년은 민족의 격동기로서 실질적으로 국운(國運)과 명운을 함께 하여, 양위 3년 후에는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았다. 능은 금곡(金谷)의 홍릉(洪陵)이고, 저서에 《주연집(珠淵集)》이 있다.
☞ 명성황후
여흥(驪興),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錄)의 딸로 태어 났다. (1851~1895) 8살에 부모를 여의고 가정이 빈한하여 고생이 많았으나, 민씨 일가에 재주가 비상한 아이로 알려졌다.
1866년(조선 고종 3년) 외척 세도정치의 세력 기반을 없애기 위하여 고종비의 물색에 골몰하던 차에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16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고종은 궁녀 이씨를 총애하고 명성후를 돌보지 않았으나 예의범절이 밝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궁녀 이씨가 서자 완화궁(完化宮)을 낳고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대단히 기뻐함을 보자 명성후는 불만과 질투로 정치적인 수완을 부리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의 집정으로 명성후에게는 일반의 관심이 미치지 않았던 것이 기회로, 대원군 반대 세력을 규합하여 자신의 세력을 모으는 한편 1874년(조선 고종 11년)에 왕자 척(拓)을 낳았다. 그러나 명성후의 척족 일파가 득세하여 집권하려는 낌새를 눈치챈 흥선대원군은 완화궁을 장자로 하여 태자(太子)로 정하려 하였다.
이에 분개한 명성후는 드디어 흥선대원군과의 경쟁을 시작, 원로(元老)인 이유원(李裕元)을 북경에 보내어 왕자 척(拓)을 정자(正子)로 승인받고, 흥선대원군의 내치가 백성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점을 이용하여, 민승호(閔升鎬)를 시켜 조대비의 조카 조성하(趙成夏)와 결탁하고,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나쁜 김병국(金炳國)일파와 손을 잡고, 흥선대원군의 장자 이재면과 흥선대원군의 형인 이최응(李最應)은 물론 조두순(趙斗淳)·이유원(李裕元)등과 연결을 맺고 명성후 중심의 세력을 만들어 갔다.
드디어 1873년(조선 고종 10년) 흥선대원군의 하야로 고종이 친정(親政)을 하매, 고종은 대외 개방주의를 내세워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안으로는 흥선대원군 내치를 시정해 나갔다. 명성후 중심의 일족들이 궁내의 요직을 차지하여 흥선대원군과의 반목이 날로 심해지더니 1882년 임오년에 군란이 일어나 명성후는 간신히 충주목 민은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여 있으매, 흥선대원군은 재집권을 하고 명성후가 죽은 것으로 오인하여 명성후의 장례식까지 치뤘다. 그러나 청나라의 간섭으로 군란이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이 청으로 납치되어 갔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민씨 일족은 개화당 세력을 밀어내며 사대당으로 다시 집권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1894년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졌던 갑오개혁으로 말미암아 명성후는 세력을 잃게 되자,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형세가 나빠지매 친로책(親露策)을 써서 일본 세력을 압박하였다.
1895년 9월 이노우에의 뒤를 이어 부임한 일본 공사 미우라는 명성의 친로책과 정면충돌을 하였으며, 명성후의 이러한 친로책은 일본을 자극하였으며, 1895년 10월 8일 친일파와 일본공사가 보낸 20~30명의 자객에 의해 살해되고, 시신마저 비단이불에 싸 석유를 끼얹어 불질러버렸다. 이를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 한다.
1897년(대한제국 광무 1년) 명성황후로 추책되어 남청량리에 장사하였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홍릉에 이장하였다. 경복궁 깊속한 곳 구 민속박물관(한동안 전승공예관으로도 사용)오른편에 명성황후 조난비가 외로이 세월을 보내고 있다.
에서 가져옴.
▼ 운현궁에 들기 전에...
▼ 운현궁으로 들면서...
▼ 우측 안내판에는...
▼ 운현궁에 들어서니...
▼ 우측에는...
▼ 수직사
▼ 수직사를 지키는 군졸?이 방안에...
▼ 좌측 문화마당에서는 재즈공연이 준비中에...
▼ 저곳은...
▼ 노안당으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 솟을대문을 들어서니...
▼ '노안당 서행각'에는
▼ 노안당
노안당(老安堂)
노안당사진(오른쪽) 및 도면(왼쪽) |
노안당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몸채 동측에, 전면쪽으로는 양칸(樑間) 1칸 도리칸(道理間) 4칸의 누마루인 영화루(迎和樓)가, 배면쪽으로는 양칸(樑間) 3칸 도리칸(道理間) 3칸으로 된 온돌방과 툇마루가 이어져 있어 전체적으로 T자형 평면의 건물이다.
몸채는 서측에서부터 네칸의 대청, 두칸의 온돌방으로 되어 있었는데 제일 서측칸은 퇴칸이며 전후로도 퇴칸을 두었다. 기단은 몸채부분인 대청과 안방의 전후는 장대석 세벌대로 되어 있고, 누마루인 영화루 부분은 장대석 두벌대로 되어 있으며, 초석(주춧돌)은 가로와 세로의 너비가 같은 정방형초석인데 상부를 하부보다 약간 줄여서 다듬었으며, 누마루 부분의 초석은 누마루 아래층에 석주형초석을 세웠다.
기둥은 평주와 고주 모두 네모기둥이고 약간의 민흘림이 있으며, 모서리는 턱이 있는 빗모접기가 되어있다. 기둥머리부분은 보와 장여가 십자로 짜여 사괘맞춤이 되어 있고 그 위에 도리가 얹혀지고, 부분적으로 평주열에 소로를 끼운 소로 수장집이다.
대청과 퇴칸에는 우물마루가 깔려 있다. 우물마루는 보방향으로 기둥과 기둥사이에 장귀틀을 걸고 이 장귀틀과 장귀틀 사이에 동귀틀을 도리방향으로 걸어 우물을 구성하였다. 막장의 설치방식은 동귀틀의 홈턱 위를 따서 내리 끼우고 위에서 못질하는 막덮장방식과, 막장을 밑에서 올려 끼우고 하부의 턱판자리에 솔대를 대고 못질하는 은혈(隱穴)덮장방식의 두가지 모두 사용되었다. 하인방의 하부 초석 사이부분에는 장대석 고막이가 설치되어 있고, 디딤돌과 초석 사이에는 철물로 만든 통기구가 설치되어 있다.
가구(架構)는 몸채는 전·후퇴칸이 구성되는 건물에서 통상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전후의 내진고주사이에 대들보를 건너지르고 퇴칸에는 외진평주와 내진고주 사이에 퇴량을 걸었다.
고주상부에는 중도리를 배치하였고, 종부 위에는 중앙부에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어 전체적인 구성은 이고주오량(二高柱五樑)으로 되어 있다.
종도리 받침장여 하부에는 뜬창방을 건너지르고 뜬창방과 장여 사이에는 소로를 끼웠다. 배면의 동북측의 내민부분은 동측퇴칸을 걸고 서측평주와 내진고주 사이에는 대량을 걸어 일고주오량(一高柱五樑)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측으로 내민 누마루부분은 3량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마는 모두 서까래만의 홑처마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전면과 동서양측면의 남쪽 일부에는 모두 차양(遮陽)을 달아놓았다. 귀서까래는 모두 선자로 꾸몄고, 회첨부분의 처마는 평행서까래로 처리되어 있다.
차양은 장방형 각재틀 위에 판재를 깐 다음 그 위에 함석을 덮어 만들었는데, 서까래 5 - 6개간격으로 지지목을 설치하고 평고대에 설치한 철물에 걸어 설치하였다.
지붕은 몸채의 양쪽인 동측면과 서측면, 그리고 동북쪽이 북측면과 영화루 남측면의 네곳에 합각(合閣)이 설치되는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회첨골에는 모두 중앙에 수키와를 한줄 보내어 두줄로 배수가 되도록 하였다.
합각벽은 전벽돌로 되어 있는데, 서측면에는 중앙부에 팔각형의 테를 두르고 문양을 넣어 장식하였으며, 나머지 3개의 합각벽에는 박쥐문양을 넣었다.
박쥐는 오복을 가져다주고 행복을 상징하는 동물이라고 믿어온 것은 한자의 박쥐'복'자의 발음이 복 '복(福)'과 같기 때문이었다. 박쥐를 하늘의 쥐라고 하여 천서(天鼠)라고도 하고, 신선의 쥐라고 하여 선서(仙鼠)라고도 한다. 그래서 박쥐는 일상 생활용품이나 회화, 공예품, 가구의 장식, 건축 장식 등의 문양으로 많이 사용되어 오고 있다.
▼ 노안당 안에는...
▼ 노안당 뒷편은...
▼ 노안당 마루
▼ 노안당에서 노락당으로 들어가는 문
▼ 노락당의 처마
▼ 노락당에 들어서니...
노락당(老樂堂)
노락당사진(오른쪽) 및 도면(왼쪽) |
노락당은 정면 10칸, 측면 3칸으로 된 몸채에 전면 양끝인 동1칸과 서2칸은 남쪽으로 2칸씩을 내밀어 남행각과 연결되고, 배면 동쪽끝 3칸은 북쪽으로 2칸을 내밀어 전체적인 건물은 一자형 평면의 건물로 되어 있다.
방배치는, 중앙 3칸 대청(大廳)을 중심으로 동측과 서측에 도리통 2칸씩의 온돌방과 1칸씩의 부엌(상부다락)이 거의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온돌방과 대청은 앞에는 퇴칸을 두고 마루를 깔았는데 대청 3칸과 서측온돌방 1칸과 동측온돌방 2칸에는 창호를 달아 마루방으로 꾸몄다.
대청 후면과 동쪽온돌방 1칸에도 퇴칸을 두고 마루를 들였다. 이러한 전후퇴의 구성과 중앙의 3칸의 대청에 동서 양측으로 온돌방을 2칸씩 배치하는 구성은 궁궐내전의 평면구성방식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또한 배면쪽에는 동쪽 돌출부를 제외하고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는데 서측 3칸과 대청부분은 노출된 통로로 되어 있고 동쪽의 나머지 칸은 창호를 달아놓았으며, 통로부분에는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동쪽 끝칸은 반칸너비의 퇴칸으로 되어 있는데, 이 칸은 통로로서 남쪽으로는 노락당 남행각을 거쳐 노안당으로, 북쪽으로는 노락당의 북행각으로 연결된다.
동측면 북쪽 3칸에는 퇴가 달려 있어 바깥으로의 출입에 편의를 도모하고 있으며, 이 부분에도 배면과 같은 형태의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동쪽 부엌의 남쪽으로 내밀어진 칸에는 동쪽의 현재 덕성여대 대지내에 있는 양관으로 연결되었던 복도각 중 남은 1칸이 동측으로 돌출되어져 있었으나, 보수공사시 1864년의 원형을 참착하여 제외시켰다.
주칸(柱間)은 정면 도리통(道理通)을 살펴보면, 서측 첫째칸이 3,080mm(10尺)로 가장 넓고 동쪽 마지막 칸이 1,530mm(5尺)으로 가장 좁다. 그 사이의 여덟칸은 2,460mm-2.476mm(8尺)로서 같이 잡은 것으로 보인다. 서측면 양통(樑通)을 살펴보면 남쪽으로 돌출된 두칸은 2,470mm(8尺)와 2,465mm(8尺)이고 몸채 부분은 남쪽으로부터 2,780mm(9尺), 2,468mm(8尺), 2,782mm(9尺)로서 중앙칸이 한자(尺)정도 좁다.
중앙 대청부분은 전후퇴칸이 1,535mm(5尺)와 1,547mm(5尺)이고 어칸은 4,948mm(16尺)이다. 배면 동쪽의 북쪽으로 내민 두칸은 2,477mm(8尺)와 1,548mm(5尺)이다.
기단은 몸채부분의 전후면은 세벌대로 되어 있으나 상부의 두단만이 노출되어 있다. 기둥은 모두 네모기둥이고 약간의 민흘림이 있으며, 턱을 둔 빗보접기가 되어 있었다. 초석은 정방형주초(正方形柱礎)인데 상부를 하부보다 약간 줄여서 다듬었다.
대청과 퇴칸에는 우물마루가 깔려 있고, 덧달린 툇마루바닥은 장마루로 되어 있다. 우물마루는 보방향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 장구틀을 걸고 이 장귀틀과 장귀틀 사이에 동귀틀을 도리방향으로 걸어 우물을 구성하였다. 막장의 설치방식은 동귀틀의 홈턱 위를 따서 내리끼우고 위에서 못질하는 막덮장방식으로 되어 있다.
벽체(壁體)는 회벽(灰壁)과 지벽장자(紙璧障子)로 되어 있었는데, 지벽장자는 온돌방의 내부쪽에 회벽이나 머름에 덧붙여서 설치되어 있다. 하인방의 하부 초석 사이부분은 장대석 아니면 전돌로 고막이를 설치하였으며, 정면 평주열의 디딤돌이 놓여져 있는 칸에는 마루의 귀틀하부를 디딤돌로 막고 디딤돌과 초석 사이에는 철물로 만든 통기구를 설치하였다. 서측면에는 중방 아래로 화방벽(火防壁)이 쌓여져 있다.
기둥머리부분은 익공과 창방이 십자로 짜여 사괘맞춤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주두가 놓여지고 퇴량이 얹혀지는 초익공양식의 공포가 짜여져 있다. 공포는 평주와 고주에 모두 같은 양식으로 짜여져 있으며, 익공의 형태는 물익공(勿翼工)이다. 공포는 현재 운현궁 건물에는 노락당에만 구성되어 있다.
가구(架構)는, 몸채는 전·후퇴칸이 구성되는 건물에서 통상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퇴칸에는 외진평주와 내진고주 사이에 퇴량을 걸고, 전후의 내진고주 사이에는 대들보를 건너지르고 대들보 위에 중대공을 설치하여 종보를 설치한 후 종보의 중앙부에 판대공을 설치하여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이고주칠량(二高柱七樑)의 짜임이다.
종도리 받침장여 하부에는 뜬창방을 건너지르고 뜬창방과 받침장여 사이에는 소로를 끼웠다. 전면쪽으로 내민부분 중 서측 부엌은 삼량가(三樑架)로 되어 있고, 동측 부엌부분은 평사량(平四樑)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배면 동측에서 북쪽으로 내민부분은 일고주오량(一高柱五樑)으로 되어 있다.
노락당에는 우물반자와 지벽자(紙璧子), 그리고 연등천장으로 천장이 꾸며져 있다. 우물반자는 대청에서 대들보와 하중도리사이에 반자틀을 설치하여 구성하였고, 각재로 틀을 짜고 종이를 발라 구성한 지반자는 온돌방과 일부 마루부문에 사용되었으며, 연등천장은 마루부분에만 사용되었다.
처마는 모두 서까래와 부연으로 구성된 겹처마로 되어있다. 그리고 전면쪽 전체와 배면쪽 일부에는 차양(遮陽)을 설치해 놓았다. 배면쪽 귀서까래는 모두 선자로 꾸몄고, 가지부연이 사용되었다. 회첨부분의 처마는 평행서까래로 되어 있다. 전면의 동서 양측에 돌출된 부분은 박고처마로 처리되었다.
지붕은 몸채 양측에는 합각을 구성하고, 남측으로 돌출시킨 동서 양측은 맞배지붕으로 처리하였으며, 배면 동북쪽으로 돌출시킨 부분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의 회첨골에는 모두 중앙에 수키와를 한줄 보내어 두줄로 배수가 되도록 하였다.
수키와의 끝은 와구토로 마감하였으나 추녀마루 끝주변과 합각부의 너새 중 중앙부와 끝부분의 일부, 박공부의 너새중 중앙부와 끝부분의 일부, 그리고 회첨골 중 고삽이 설치되는 부분에는 막새와 내림새를 사용하였다.
합각벽은 모두 전벽돌치장쌓기로 되어있는데, 몸채 서측의 합각벽에는 중앙에 팔각형의 테를 두르고 문양을 넣어 장식하였다. 배면쪽에는 서측 온돌방쪽에 하나, 동측 온돌방쪽에 하나가 설치되어 있다. 동쪽의 것은 하부를 화강석으로 구축하고 그 위에 전벽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상부에는 도리, 공포 등 목조부재의 형태를 단순화한 전벽돌이 설치되고 그 위에 기와지붕을 덮고 연가(煙家) 두 개를 붙여 설치해 놓았다. 서쪽 온돌방의 굴뚝은 동쪽의 것과 같은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전벽돌 대신 붉은 벽돌을 쌓아 만든 점과 상부의 연가가 하나인 점이 다르다.
난간(欄干)은 평난(平欄)으로서 아자(亞字)난간인데 엄지기둥, 난간살대, 하엽, 돌란대 등 부재의 치목수법이 몹시 정교하며 뛰어나다. 살대는 오목하게 등밀이로 가공되어 있고, 하엽(荷葉)은 양각으로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돌란대는 원형단면이지만 정원이 아닌 한쪽이 약간 일그러진 형태인데, 손에 잡히는 감촉은 정원보다도 오히려 손안에 꽉 들어와 잡혀 이것은 난간을 만든 목수의 솜씨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짜임은 난간지방(欄干地枋) 위에 엄지기둥과 난간동자를 세우고, 엄지기둥 사이에는 난간동자 위로 중방을 걸쳤으며, 중방위 난간동자 위치에는 하협을 놓아 엄지기둥 사이에 걸린 돌란대를 받치고 있다. 엄지기둥은 60mm각의 네모기둥이며 상부에는 꽃봉오리 형태의 법수(法首)로 장식하였다.
난간동자는 42mm×40mm이고, 돌란대 직경은 좁은 쪽이 37mm이고 넓은 쪽은 41mm이며, 중방은 60mm×47mm, 살대는 14mm×33mm이다. 살대에는 난간지방이나 엄지기둥, 난간동자에 끼이는 쪽에는 두 개의 촉을 내고 살대끼리 맞추어지는 쪽에는 하나의 촉을 내었다.
촉 너머는 8mm×9mm정도이며, 길이는 하나의 촉은 6m정도이고 두 개의 촉은 13 - 14mm정도이다. 촉의 끝은 네 면을 비스듬히 깎아 맞춤에 유리하도록 다듬었다.
▼ 노락당 내부에는...
▼ 노락당을 나서니...
▼ 저 문으로 들어서니...
▼ 이로당
이로당(二老堂)
이로당사진(오른쪽) 및 도면(왼쪽) |
이로당은 입구자형 평면의 건물로서 당초에는 정면 7칸, 측면 7칸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서측면 전체에 덧달아낸 부분으로 인해 정면이 8칸으로 되어 있었다. 방배치는, 남측채는 서측 온돌방, 중앙 3칸 대청, 동측 온돌방, 그리고 동쪽 끝으로 통로로 사용되는 퇴칸이 있는데 여기에서 남측으로 이어지는 복도각을 통해 노락당 북행각을 거쳐 노락당으로 연결된다. 대청전면과 동측 온돌방에는 평주열에 사분합문이 달린 퇴칸이 있다.
동측채는 남측채의 동측 온돌방과 퇴칸에서 이어지는 온돌방과 반침(하부 아궁이), 그리고 북측 온돌방과 퇴칸으로 되어 있으며, 북쪽 두칸을 제외하고는 모두 바깥쪽으로 장마루가 깔린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북에서 3번째 칸의 북단(北端)에는 동측으로 돌출시켜 화장실 1칸이 설치되어 있었다.
주칸(柱間)은 정면 도리통을 살펴보면, 서측 첫째칸이 3,073mm(10尺)로 가장 넓고 일곱째칸인 동쪽 마지막칸이 1,545mm(5尺)로 가장 좁다. 그 사이의 다섯칸은 2,457mm - 2,468mm(8척)로서 같이 잡은 것으로 보인다.
서측면의 주칸을 살펴보면 정면쪽 첫째칸만 2,785mm(9尺)로 다소 넓고 나머지 여섯칸은 2,430mm - 2,465mm(8尺)로 같은 간격으로 잡은 것으로 보인다. 남측채와 동측채의 량통(樑通)은 두칸씩으로 되어 있고 서측채와 북측채는 양통이 한칸씩으로 되어 있다. 남측채 양통에서 앞쪽의 퇴칸은1,545mm(5尺)이고 그 뒤쪽칸은 3,673mm(12尺)이다.
초석은 정방형주초(正方形柱礎)인데 상부를 하부보다 약간 줄여서 다듬었다. 기둥은 평주와 고주 모두 네모기둥이고 약간의 민흘림이 있으며, 모서리는 빗모접기가 되어 있다. 기둥머리부분은 보와 장여가 십자로 짜여 사괘맞춤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도리가 얹혀진다. 부분적으로 평주열에 소로를 끼운 소로수장집이다.
마루는 대청과 퇴칸에는 우물마루가 깔려 있고, 덧달린 툇마루 바닥은 장마루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남측의 통로로 사용되는 툇마루는 장마루로 되어 있다. 우물마루 막장의 설치방식은 막장을 밑에서 올려 끼우고 하부의 텃딴자리에는 솔대를 대고 못질하는 음혈(陰穴)덮장방식으로 되어 있었다.
온돌방 벽체는 회벽으로 되어 있는데, 대부분 지벽장지(紙璧障子)가 설치되어 있었다. 지벽장지는 온돌방의 내부쪽에 회벽이나 머름에 덧붙여서 설치되어 있다.
하인방의 하부 초석 사이부분은 대부분 장대석 아니면 전벽돌로 고막이가 설치되어 있다. 남측채 대청 전후면의 디딤돌이 놓여져 있는 칸에는 마루의 귀틀과 디딤돌 사이를 판재로 막았다. 특히 정면인 남측에서는 초석 옆에 붙여 철물로 만든 통기구를 설치하였는데 통기구에는 주역의 괘를 투각해 놓았다.
가구는 입구자형 평면에서 남측채는 1고주 5량, 동측채는 평4량, 서측채와 북측채는 3량으로 되어 있다. 남측채는 전면 평주와 내진고주 사이에 퇴량을 걸고 내진고주와 후면평주 사이에 대들보를 걸고 있으며, 고주머리와 대들보 위에 세운 동자주 사이에 종보를 걸었다.
종도리 받침장여 하부에는 뜬 창방을 건너지르고 뜬창방과 장여 사이에는 소로를 끼웠다. 동측채는 외부쪽 평주와 내진고주 사이에 퇴량을 걸고 내진고주와 중정쪽 평주 사이에 대들보를 걸었으며, 고주머리와 대들보 위에 세운 동자주 사이에 종보를 걸었다. 고주상부와 동자주상부에는 중도리를 배치하였고, 이 중도리 사이에 수평으로 서까래를 걸었다.
서측채와 북측채는 보칸의 주칸은 다르지만 같은 방식으로 짜여져 있는데, 전후평주 사이에 대들보를 건너지르고 대들보 중앙상부에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외부 네면과 중정에 면한 네 면 모두 홑처마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동남쪽의 복도각이 연결되는 부분을 제외한 외부와 내부 모든 면에 차양을 달아 놓았다. 외부의 귀서까래는 모두 선자로 꾸몄고, 중정에 면한 회첨부분의 처마는 모두 평행 서까래로 처리되어 있다.
차양은 각재를 위에 판재를 깐 다음 그 위에 함석을 깔아 만들었는데 서까래 5 - 8개 정도의 간격으로 배치한 지지목으로 받치고 평고대에 박힌 철물에 걸어서 설치되어 있었다.
지붕은 남측채의 양쪽인 동남쪽과 서남쪽 모서리, 그리고 동측채의 북쪽인 동북쪽 모서리의 세곳에는 합각이 설치되는 팔작지붕의 형태이고, 서북쪽 모서리에는 추녀마루가 용마루와 바로 연결되는 우진각지붕의 형태이다. 중정쪽의 회첨골에는 모두 중앙에 수키와를 한줄 보내어 두줄로 배수가 되도록 하였다.
수키와와 끝은 와구토로 마감하였으나 추녀마루 끝 주변과 합각부의 너새중 중앙부와 끝부분의 일부에는 막새와 내림새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중정, 서측면, 동측면, 배면에 각기 하나씩 모두 네 개의 굴뚝이 설치되어 있고, 중정에 면한 네면의 툇마루와 동측면의 툇마루에는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모두 평난으로서 교난이지만 살짜임의 형태와 높이가 차이가 있다. 내정의 �마루 중 서측 부엌의 출입문에서 내정으로 통하는 부분에는 마루를 들여서 젖힐 수 있도록 설치하여 남측과 북측의 툇마루 사이가 끊어지지 않도록 설치해 놓았다.
▼ 이로당을 나서기 전에 다시...
▼ 저 문을 나서며...
☞ 여기서 1부를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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