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10일(일) 종로구 운니동 운현궁(고종 잠저, 흥선대원군 사저)에 다녀오다.
오늘은 그동안 늘 지나치던 운현궁을 다녀오기로 하고...
인사동 쌈지길을 둘러보고 인사동 골목길을 따라 운니동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사저 '운현궁'을 들어서니
마침 운현궁 內 문화마당에서 재즈밴드그룹 '그루터기 T'의 재즈공연이 있단다.
운현궁을 둘러보고 재즈공연도 보고...
☞ 운현궁의 유래
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로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은 조선조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潛邸)이며 흥선대원군의 사저이며, 한국근대사의 유적 중에서 대원군의 정치활동의 근거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흥선군 이하응이 왕실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정치로의 개혁의지를 단행한 곳이다.
대원군이 권력에서 하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내외에 행사한 곳으로서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였기 때문에 역사적 상징성이 더욱 크다.
흥선군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 였다.
고종이 12살까지 살았던 운현궁은 철종 때 옛 관상감 터였던 운현궁에 왕기가 있다는 내용의 민요가 항간에 유행하였으며, 고종이 등극한 후 대원군이 운현궁 터를 다시 확장하였다.
운현(雲峴)이란 당시 서운관(書雲觀)이 있는 그 앞의 고개 이름이였으며, 서운관은 세조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었으나 별호로 그대로 통용되었다.
서운관의 명칭인 운관(雲觀)과 운관 앞의 고개를 가리키는 운현(雲峴)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고종의 잠저는 당시 대왕대비 교지를 받들어 영의정 김좌근, 도승지 민치상, 기사관 박해철·김병익 등 일행이 명복(明福-고종의 이름)에게 익종의 대통을 계승토록 하기 위하여 고종을 맞이하러 최상급의 가마행렬을 갖추어 관현(觀峴)의 흥선군 사저에 갔을 때 흥선군의 위엄 있는 자세와 그의 둘째 아들인 명복의 천진스러웠던 모습에 대한 사실적 묘사에서 운현궁이 고종의 잠저였음을 알수 있다.
한일합방후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이왕직 장관을 시켜서 운현궁을 관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운현궁을 유지·관리하는 일은 소유권에 관계없이 이로당의 안주인들이 계속 맡아했다.
운현궁의 소유권이 다시 대원군의 후손에게 넘겨지게 된 것은 1948년 미군정청의 공문에 의해서였다. 이후 그 소유권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정부와 대원군 후손 사이에 법적 공방이 있었으나 그 해 9월 21일 결국 대원군의 5대손 이청(李淸, 1936- )씨에게 운현궁 소유권이 확정되었다.
그러던 것이 1991년 운현궁을 유지, 관리하는데 여러가지 어려움이 생기면서 양도 의사를 이청씨가 밝힘에 따라 서울시에서 매입하게 되었고, 1993년 12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된 것이다.
☞ 운현궁의 규모
고종이 즉위(1863.12.13)한 지 한 달쯤 지나서 대왕대비의 하교로 운현궁의 신ㆍ증축 공사는 시작되었고, 9개월만에(1864. 9) 노락당과 노안당 건물의 준공을 보았다. 당시 대왕대비는 호조에 명하여 운현궁에 매달 쌀 10섬과 100냥씩을 보내고, 운현궁의 신증축 비용으로 17,830냥을 지원하였다.
운현궁이 준공되었을 때 고종은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모시고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하였다. 이 때 고종은 자신이 그 곳에서 살던 때를 생각하여 근처의 선비와 소년들에게 임시과거시험을 보게 하고 선비 50명, 소년 497명을 선발해서 시상하는 등 운현궁의 준공을 기념 축하하였다.
본래 흥선군의 사저였을 때 운현궁의 위치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부근으로 지금의 운현궁과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자리에 해당된다. 그러나 증축하여 규모가 가장 커졌을 때는 주의 담장 길이가 수리(數理)나 되고 4개의 대문이 웅장하여 마치 궁궐처럼 엄숙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 舊TBC방송국, 일본문화원, 교동초등학교, 삼환기업 일대라고 한다.
운현궁의 대표적 건물로는 고종원년(1864) 9월에 준공한 노락당과 노안당 그리고 6년 후에 증축한 이로당이 있고, 지금은 한 개뿐이지만 그 당시 4개였던 대문이 있다.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서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등 큰 행사 때 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그 규모는 궁궐에 비하여 손색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였다.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했던 고종이 대제학 김병학(金炳學)에게 '노락당기(老樂堂記)'를 지어 기념할 것을 지시했던 사실만으로도 노락당이 상징하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병학은 노락당과 하늘 사이가 한자 다섯치 밖에 안된다고 했는데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는 해도 당시 흥선대원군의 권세가 천하제일이었다는 것을 잘 웅변하고 있다.
대원군의 위세와 운현궁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는 고종 3년(1866) 3월 21일에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를 운현궁에서 치른 사실이다. 가례준비 일체를 노락당에서 하였음은 물론이다. 당시 가례행사를 위하여 1,641명의 수행원과 700필의 준마가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이들이 모두 운현궁을 거쳐갔다고 할 때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노안당은 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그가 임오군란 당시 청에 납치되었다가 환국한 이후 민씨 척족의 세도 정치 아래에서 유배되다시피 은둔생활을 한 곳이 이 건물이고, 만년에 임종한 곳도 노안당의 큰방 뒤쪽에 있던 속방이었다.
노안당은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으로 추녀 끝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노안당의 상량문이 1994년 5월 27일 보수공사 당시 발견되었는데 당호의 유래와 대원군의 호칭 및 지위에 관한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상량문에 의하면 대원군의 호칭을 '전하(殿下)' 다음의 존칭어인 '합하(閤下)'라고 하였으며, 지위는 모든 문무백관의 으뜸이라고 하였다. 또 노안당의 당호는 공자가 '老者를 安之하며'라고 한 글에서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노락당과 노안당 증축 당시 대원군의 권세를 이처럼 상량문에서도 잘 대변하고 있다.
노락당 못지 않게 운현궁의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 4대문이었다. 한창 전성기였을 때는 정문, 후문, 경근문(敬覲門), 공근문(恭覲門)의 4대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후문 하나만 남아 있다.
경근문은 고종이 운현궁을 출입할 때 전용하던 문으로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에 있었다.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등극했을 때 조종대신들이 왕의 심중을 헤아려서 왕실 예산으로 경근문과 공근문을 지었다고 한다. 이 때 고종은 호조판서 이돈영에게 품계를 올려주고 치하했다는 기록이 있다.
공근문은 대원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 전용한 문인데 경근문과 함께 없어지고 지금은 일본문화원 옆터에 그 기초만 남아있다.
☞ 대원군과 운현궁
대원군의 정치생애와 운현궁의 성쇠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따라서 운현궁의 역사적 보존가치는 대원군이 한국근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맥을 같이한다.
고종의 잠저였던 운현궁은 대원군이 집권하기 전까지는 왕족으로서의 권위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보잘 것이 없었다. 그러나 고종 즉위 후 10년 동안 대원군의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운현궁은 그 위용이 자못 왕궁과도 같았다.
운현궁의 대표적 건물인 노락당, 노안당이 사대문이 웅장하고 화려하여 그 모습이 엄숙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운현궁의 중심건물인 노락당은 낙성식 때 고종과 대왕대비가 참여했을 뿐 아니라 고종과 명성후 민씨가 가례를 치른 곳으로서 이 건물이 상징하는 역사적 의미는 크다.
그러나 대원군이 하야한 이후 운현궁도 점차 위용을 잃었다.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이 청에 구금당하고 있는 동안에 가장 경제적으로 힘들 때여서 관리유지가 힘들었다. 다시 운현궁이 활기를 찾게 된 것은 그가 재집권하고서부터 이다.
대원군이 다시 집권한 것은 2차례 있었다. 처음은 임오군란 직후 33일간(1882.7. 23 - 8.26)이었고, 두 번째는 동학혁명 당시로서 약 4개월간(1894 7.23 - 11. 22)이었다. 이 경우 대원군의 재집권 배경과 계기는 서로 다른 점이 있으나 공통적인 것은 2차례 모두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가 초기 집권할 때부터 내정개혁에서 역점을 두었던 인사정책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하겠다. 신분에 관계없이 불만세력을 포용하는 인재등용 원칙이 일관되게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동학혁명 당시의 대원군은 이미 지방민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민씨 정부나 청·일측이 동학군의 봉기를 폭동으로 보았을 때 그는 일종의 사회변혁운동으로 규정하는 한편 서울에서도 그와 같은 일이 전개될 것이라는 암시를 할 정도로 동학군에 대한 인식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의 재집권은 민씨 정부를 돌려놓고 조선의 내정개혁을 독자적으로 강행하려던 일본측 전략과 대원군의 집권 의지가 상호 연계되어 가능했다. 대중적 지지기반은 그가 재집권한 후 일본군 축출을 계획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고종 즉위후 10년 동안의 쇄국정책은 재집권할 당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임오군란 수습조건으로 일본이 부당한 요구조건을 제시했을 때, 또 조선정부가 양보하는 선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중재한 청에 대해서 보여준 그의 태도는 강온양면정책이었다.
일본의 무례한 요구에 대하여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강경책을 썼는가 하면 한편으로 시일을 지체하면서 청과의 협조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전략도 구사했다. 그렇다고 해서 청의 중재를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이 때의 대외정책은 겉으로 유연성을 보이기도 했지만 실은 아직 경직된 면이 없지 않았다. 그의 대외정책이 명분보다 실용주의 방향으로 변화가 있었던 것은 동학혁명 당시 재집권할 때였다.
청일전쟁이 발발한 후 대원군이 일본군 축출을 계획할 때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과의 협조를 꾀했다. 교전 중이던 청이나 내정개혁을 강요받던 조선측 입장에서 보면 상부상조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또 일본의 조선침략정책을 국제적으로 여론화하기 위한 노력도 하였다. 그는 이미 청과 일본이 출병했을 때 러시아의 개입을 예견했을 정도로 러시아의 조선지배 야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제일 먼저 러시아측과 접촉하여 러시아를 통한 일본견제를 꾀하였다. 그렇치 않아도 러시아는 은밀히 청·일을 중재하고 있었고 3국협동론을 제시하여 조선에 관여할 의사를 비췄었다. 별로 소득이 없었지만 대원군은 러시아 외에도 영국이나 미국과도 외교접촉을 시도하였다.
영국도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원치 않았으므로 역시 드러나지 않게 중재를 시작했는데 이때의 중재안은 청과 일본이 조선을 분할 점령하라는 것이었다. 대원군이 조선주재 각국 공사들과의 면담을 통한 적극적인 외교를 시도해 보았지만 민씨 정부의 무능과 타락이 한계에 이른 상태에서 조선정부에 대한 국제적 협조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대원군은 이 점을 알았기 때문에 친일개화파 인물 제거와 신정부 수립을 계획하였으나 이른바 이준용역모사건으로 인하여 결국 권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 운현궁의 주인들
1대 이하응(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 순조 20∼고종 35)
조선시대 왕족·정치가.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이름은 하응. 영조의 5대손이며 조선 제 26 대 왕 고종의 아버지이다. 1843년(헌종 9)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46년 수릉천장도감(綏陵遷葬都監)의 대존관(大尊官)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을 지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아래 왕족에 대한 감시가 심하자 호신책으로 시정의 무뢰한과 어울리고 구걸도 서슴치 않아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왕실의 조대비(趙大妃)와 밀약하여 철종이 후사없이 죽자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왕위에 세우고 그는 대원군에 봉해졌다. 그 뒤 섭정을 통해 강력한 혁신정치를 추진,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당쟁의 기반이 된 서원을 정리하였다. 또 토호들의 토지겸병을 막고 종래 상민에게만 징수하던 군포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하였으며 환곡제를 사창제(社倉制)로 개혁하였다.
복식을 간소화하고 사치를 금하였으며, 《대전회통(大典會通)》 《육전조례(六典條例)》 《양전편고(兩銓便攷)》 등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 확립에 힘썼다. 반면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납전(願納錢)을 징수하고 역역(力役)을 부담시켜 백성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또한 서구 세력의 차단을 위한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병인박해를 통해 9명의 프랑스 신부와 8000여 명의 신도를 처형하는 등 가톨릭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으며 이를 구실로 침공한 프랑스와, 제너럴셔먼호사건을 계기로 개국을 강요한 미국을 격퇴하였다.
한편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권력투쟁을 벌여 최익현(崔益鉉) 등 유림의 상소로 실각하였고 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계기로 재집권하였으나 청(淸)나라 개입으로 톈진〔天津〕에 연행되어 3년간 유수생활(幽囚生活)을 하였다. 그 뒤 86년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결탁하여 큰 아들 재황(載晃)을 옹립하려다 실패하였고, 95년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일으킨 을미사변(乙未事變)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러정부가 성립되자 은퇴하였다.
1907년(순종 1)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헌의(獻懿).
2대 이재면(1845~1912)
완흥군 이재면은 흥선대원군의 장자로 동생 명복보다 7살이 위였으나 왕세자로 간택되지 못하였다. 그는 상처하여 57세에 20세인 계실 이씨와 결혼하였다. 그의 아들 이준용보다 13살 아래였다.
3대 이준용(1870~1917)
영선군 이준용은 이재면의 장자로 노락당 뒤쪽에 송정 사랑채를 지어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운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1896년 을미사변 직후 일본으로 건너가 신학문을 연마한 후 12년만인 1908년에 귀국하여 운현궁에서 살았다. 그의 부친 이재면이 세상을 떠난 뒤 5년 후인 1917년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준용의 뒤를 이을 혈육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아들 이우를 양자로 맞이 하였다.
운현궁의 내당 살림살이는 이재면의 부인 이씨(1883~1978)가 맡았어야 하는데 한 세대를 건너 대원군의 손자 며느리인 이준용의 계실 광산 김씨(1878~1955)가 내당살림을 맡게 되었다.
4대 이우(1912~1943)
흥영군 이우는 이준용의 양자로 들어갈 때 나이가 5세이었다. 10세에 일본으로 가서 일본군인으로 복무하게 되었으니 이준용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나 이우가 일본으로 가게 된 것은 모두 일본의 정략적인 음모술책에 기인한 것이다. 일본에서 이우와 결혼한 박찬주(1914~1995)는 박영효의 증손녀딸이다.
5대 이청 (1936~ )
이우의 큰아들 이청은 흥선대원군의 5대손이 되고 고종으로부터는 4대손이 되는데 외모라든가 풍기는 모습이 고종을 닮았고 왕족으로서의 품위를 갖추어 행동하려고 하였다. 일본에서 자란 이청은 어린시절을 운현궁에서 살지 않았으며 가끔 휴가를 받아 한국에 왔을때 운현궁에서 지냈을 뿐이다. 이청씨가 운현궁의 소유(관리)로 된 것은 1948년 부터이다. 운현궁 관리에 어려움이 있어 1993년 서울시에서 매입하여 서울정도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관리 운영하게 되었다.
☞ 고종
초휘(初諱)는 재황(載晃)이고 아명(兒名)은 명복(命福)이다. 초자(初字)는 명부(明夫)이며 자는 성림(聖臨)이고 호는 주연(珠淵)이다.
영조의 현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로서 비(妃)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딸 민씨(閔氏)이다.
1863년(철종 14)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趙大妃)의 전교(傳敎)로 12세에 즉위하였다. 새 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하였으나, 대정(大政)을 협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은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렸다.
척신(戚臣) 세도정치의 배제, 붕당문벌(朋黨門閥)의 폐해 타파, 당파를 초월한 인재의 등용, 의정부의 권한 부활에 따른 비변사(備邊司)의 폐지 및 삼군부(三軍府)의 설치, 한강 양화진(楊花津)의 포대(砲臺) 구축에 따른 경도수비(京都守備) 강화, 양반으로부터의 신포징수(身布徵收), 양반 유생의 발호 엄단 등은 고종 초기 10년 동안 대원군이 이룩한 치적이다.
그러나 경복궁 중수(重修)에 따른 국가재정의 파탄, 악화(惡貨)인 당백전(當百錢)의 주조(鑄造)와 민생의 피폐, 과중한 노역(勞役)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과 소요, 천주교 탄압에 따른 8,000여 명의 교도 학살, 쇄국정책,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등 어두운 정치적 자취를 남기고 1873년(고종 10) 11월, 민비의 공작에 따라 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자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정권은 민비와 그 일족인 민승호(閔升鎬) ·민겸호(閔謙鎬) ·민태호(閔台鎬)로 대표되는 민씨 일문의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1875년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쇄국정책을 버리고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 근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개국과 함께 새로운 문물에 접하게 되자, 개화당이 대두, 조정은 개화 ·사대당(事大黨)의 격심한 알력 속에 빠졌다.
1881년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 朝鮮策略》의 유입, 반포를 계기로 위정척사파는 마침내 신사척사상소운동(辛巳斥邪上訴運動)을 일으켜 민씨정부규탄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때 안기영(安驥永) 등에 의하여 국왕의 이복형인 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 이재선(李載先)을 국왕으로 옹립하고자 하는 국왕폐립음모(國王廢立陰謀)가 꾸며졌으나, 고변(告變)에 의하여 사전에 적발되어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민씨정권은 이 사건을 이용하여 척사상소운동을 강력히 탄압하여 정국을 수습하였다.그리고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게 하고, 군사제도를 개혁, 신식 훈련을 받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으나 신제도에 대한 반동으로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 개화 ·수구(守舊) 양파는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벌이게 되어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겪고 고종은 개화당에 의해 경우궁(景祐宮) ·계동궁(桂洞宮) 등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이런 중에도 한 ·미, 한 ·영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서방국가와 외교의 길을 텄지만, 1885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우월권을 배제하고, 일본도 동등한 세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청 ·일 간의 톈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되어 일본이 한반도에 발판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계략으로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있자 김홍집 ·정병하(鄭秉夏) ·어윤중(魚允中) 등 개화파 인사가 살해되고 다시 친러내각이 성립되었다. 이로부터 한동안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를 받았지만, 고종은 1897년 2월 25일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에 따라 경운궁(慶運宮: 후의 덕수궁)으로 환궁, 8월에는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10월에는 국호를 대한, 왕을 황제라 하여 고종은 황제즉위식을 가졌다.
1904년(광무 8) 러 ·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요구로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위한 제1차 한 ·일 협약을 체결, 이듬해 한성의 경찰치안권을 일본헌병대가 장악하였으며, 이해 11월에는 제2차 한 ·일 협약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김으로써 병자호란 이래 국가존망의 위기를 맞았다. 이에 우국지사 민영환(閔泳煥) ·조병세(趙秉世) ·홍만식(洪萬植) 등은 자결로써 항의하였지만 일본은 1906년 2월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대행정치(代行政治) 체체를 갖추었다.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자 고종은 밀사 이준(李儁) 등을 파견하여 국권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 오히려 이 밀사사건 때문에 일본의 협박으로 황태자(순종)에게 양위(讓位)한 후 퇴위, 순종황제로부터 태황제(太皇帝)의 칭호를 받고 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19년 1월 21일 일본인에게 독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의 재위 44년은 민족의 격동기로서 실질적으로 국운(國運)과 명운을 함께 하여, 양위 3년 후에는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았다. 능은 금곡(金谷)의 홍릉(洪陵)이고, 저서에 《주연집(珠淵集)》이 있다.
☞ 명성황후
여흥(驪興),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錄)의 딸로 태어 났다. (1851~1895) 8살에 부모를 여의고 가정이 빈한하여 고생이 많았으나, 민씨 일가에 재주가 비상한 아이로 알려졌다.
1866년(조선 고종 3년) 외척 세도정치의 세력 기반을 없애기 위하여 고종비의 물색에 골몰하던 차에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16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고종은 궁녀 이씨를 총애하고 명성후를 돌보지 않았으나 예의범절이 밝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궁녀 이씨가 서자 완화궁(完化宮)을 낳고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대단히 기뻐함을 보자 명성후는 불만과 질투로 정치적인 수완을 부리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의 집정으로 명성후에게는 일반의 관심이 미치지 않았던 것이 기회로, 대원군 반대 세력을 규합하여 자신의 세력을 모으는 한편 1874년(조선 고종 11년)에 왕자 척(拓)을 낳았다. 그러나 명성후의 척족 일파가 득세하여 집권하려는 낌새를 눈치챈 흥선대원군은 완화궁을 장자로 하여 태자(太子)로 정하려 하였다.
이에 분개한 명성후는 드디어 흥선대원군과의 경쟁을 시작, 원로(元老)인 이유원(李裕元)을 북경에 보내어 왕자 척(拓)을 정자(正子)로 승인받고, 흥선대원군의 내치가 백성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점을 이용하여, 민승호(閔升鎬)를 시켜 조대비의 조카 조성하(趙成夏)와 결탁하고,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나쁜 김병국(金炳國)일파와 손을 잡고, 흥선대원군의 장자 이재면과 흥선대원군의 형인 이최응(李最應)은 물론 조두순(趙斗淳)·이유원(李裕元)등과 연결을 맺고 명성후 중심의 세력을 만들어 갔다.
드디어 1873년(조선 고종 10년) 흥선대원군의 하야로 고종이 친정(親政)을 하매, 고종은 대외 개방주의를 내세워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안으로는 흥선대원군 내치를 시정해 나갔다. 명성후 중심의 일족들이 궁내의 요직을 차지하여 흥선대원군과의 반목이 날로 심해지더니 1882년 임오년에 군란이 일어나 명성후는 간신히 충주목 민은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여 있으매, 흥선대원군은 재집권을 하고 명성후가 죽은 것으로 오인하여 명성후의 장례식까지 치뤘다. 그러나 청나라의 간섭으로 군란이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이 청으로 납치되어 갔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민씨 일족은 개화당 세력을 밀어내며 사대당으로 다시 집권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1894년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졌던 갑오개혁으로 말미암아 명성후는 세력을 잃게 되자,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형세가 나빠지매 친로책(親露策)을 써서 일본 세력을 압박하였다.
1895년 9월 이노우에의 뒤를 이어 부임한 일본 공사 미우라는 명성의 친로책과 정면충돌을 하였으며, 명성후의 이러한 친로책은 일본을 자극하였으며, 1895년 10월 8일 친일파와 일본공사가 보낸 20~30명의 자객에 의해 살해되고, 시신마저 비단이불에 싸 석유를 끼얹어 불질러버렸다. 이를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 한다.
1897년(대한제국 광무 1년) 명성황후로 추책되어 남청량리에 장사하였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홍릉에 이장하였다. 경복궁 깊속한 곳 구 민속박물관(한동안 전승공예관으로도 사용)오른편에 명성황후 조난비가 외로이 세월을 보내고 있다.
에서 가져옴.
▼ 저 문을 나서니...
▼ 운현궁 문화마다에서는 '그루터기 T'의 재즈공연이...
▼ 꽃담을 따라...
▼ 유물전기관으로...
▼ 운현궁의 주인 '흥선대원군 이하응' 영정
▼ 사랑방 모습
▼ 또다른 공간에서는...
▼ 운현궁을 나서며...
☞ 이것으로 '종로구 운니동 운현궁(고종 잠저, 흥선대원군 사저)에 다녀오다'를 마친다.
'▣문화유적탐방후기☞ > ♣ 궁궐·왕릉·묘ㆍ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81002]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 경복궁에 다녀오다. (0) | 2008.10.03 |
---|---|
[20080811]서궐 경희궁(경덕궁)/서울역사박물관에 다녀오다. (0) | 2008.08.11 |
[20080810]종로구 운니동 운현궁(고종 잠저, 흥선대원군 사저) - 1부 (0) | 2008.08.11 |
[20080101]무자년(戊子年) 첫 해맞이를 행주산성에서 하다. (0) | 2008.01.01 |
조선왕조 오백년 역사 (0) | 2007.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