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01일(수)
도보여행-'경희궁→홍난파 가옥→단군성전→창의문→백사실→세검정→석파랑→탕춘대성→불광역으로 봄나들이'를 다녀오다.
도보여행코스
서울역사박물관(금천교) → 경희궁(서울시립미술관) → 흥화문 → 돈의문(서대문)터 → 강북삼성병원(경교장) → 서울특별시교육청
→ 월암근린공원 → 홍난파 가옥 → 교남경로당 → 권율장군집터 → 옥경이슈퍼 → 종로문화체육센터 → 단군성전 →인왕스카이웨이
→ 황학정(등과정터) → 삼거리 → 청운공원 → 창의문(자하문) → 산모퉁이 → 백사실(백석동천) → 현통사 → 신영교 → 탕춘대터
→ 세검정(洗劍亭) → 석파랑(石破廊) → 홍지문(한북문/오간대수문) → 옥천소공원 → 옥천암(玉泉庵) → 보도각백불(普渡閣白佛)
→ 다시 옥천소공원 → 탕춘대성곽 → 탕춘대성(蕩春臺城) 암문 → 헬리포트 → 산불감시탑 → 정자 → 거북약수터 → 불광역 4거리
오늘은 도심(광화문-서울역사박물관)에서 출발한 후 경희궁을 거쳐 지금은 강북삼성병원 소유로 되어 있는
백범 김구선생의 사저였던 경교장에서 사진을 찍고 경교장 안을 둘러보려 했으나
안전요원에게 경교장의 사진을 찍지 말라는 제지를 당하고 내부를 들어가 보려던 마음을 접는다.
이어 서울특별시교육청 정문 앞을 지나 송월동 기상청 별관 정문 앞을 지나고
바로 옆에 새로 조성된 송월동 월암근린공원을 거쳐 홍파동 홍난파 가옥 앞에서 고향의 봄을 읊조리다가
사직터널 위에 있는 ‘교남동 경로당’을 거쳐 ‘권율장군집터’라는 표석과 수령 450년이라는 은행나무를 본 후
서울성곽이 도로로 인해 일부 끊어지고 ‘옥경이슈퍼’가 있는 곳에서 잠시 방향을 고민하다가
인왕산 성곽을 따라서는 안팎으로 그간 여러 차례 오르내렸기에 오늘은 종로문화체육센터 앞을 지나간다.
이 길은 초행이다.
그 길의 끝에는 인왕스카이웨이 시점에 있는 단군성전이 나온다.
단군성전을 둘러보고 인왕스카이웨이를 따라 걸어가다가 마을토박이 어르신을 만나 인왕산의 숨은 내력에 대해 전해 듣는다.
이어 인왕스카이웨이를 따라 걸어 인왕산 성곽의 북쪽 들날머리 지나 청운공원 정자를 거쳐
전망소나무에서 석파정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창의문(자하문)으로 들고난다.
이어 ‘북악산산책길’ 가는 길을 따라걷다가 ‘카페 산모퉁이’를 지나 백사실 갈림길에서 지나쳐
북악산산책로 입구에서 부암동 뒷골마을(능금나무마을)에 당도한다.
백사실(계곡)을 따라 내려서다가 ‘백석동천’ 각자바위가 있는 곳으로 잠시 들어갔다가
다시 백사실(계곡)로 돌아와서 백사 이항복의 ‘별서‘로 알려지고 있는 곳에서
메마른 연못과 그 연못에 걸쳐있는 육각정의 주춧돌, 그리고 연못 위쪽의 사랑채의 주춧돌을 둘러본다.
그리고 계곡 아래로 내려서다가 작은 폭포가 있는 암반계곡 위쪽에 위치한 일붕선사의 ‘현통사’를 둘러본다.
북한산 부암동암문으로 오르는 중간에 있는 청하동문 각자바위에서 ‘일붕선사의 기도처’라는 각자가 새겨진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현통사 뒤쪽 산에도 일붕선사의 흔적이 있다.
신영교를 건너 세검정으로 가는 길 좌측에 ‘탕춘대한지마을터’와 ‘탕춘대터’에 대한 안내문과 송모씨의 불망비를 보게 된다.
세검정을 살펴보고 상명대 앞 삼거리에 있는 '세검정의 풍류'와 '부암동 부침바위'의 조형물을 보고,
부암동의 지명과 명물에 대한 소개글도 읽어본다.
그리고 석파랑에 들러본다
많은 이들이 석파정과 석파랑에 대해 혼동하고 있는데
석파정은 조선 철종과 고종 연간에 영의정 등 고위직을 지낸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이 경영한 별서(別墅)였으나,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집권한 후 몰수하여 자신의 별장으로 사용하였었고...
석파랑은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이 말년에 작품활동을 하며 살던 건물로 지금은 전통음식점이다.
인터넷 등에서 석파랑과 석파정을 혼동하여 표기하고 주장하는 글들이 떠돌아다닌다.
소전 손재형이 부암동 산 16-1번지에 있던 석파정의 사랑채 부속건물 중 하나를 1958년 종로구 홍지동 125번지로 옮겨왔는데,
그 후 1974년 '대원군별장'이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면서 혼동이 온 듯하다.
다시 상명대 삼거리로 나와 홍제천을 잠시 따라 내려가면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이 보인다.
홍지문을 지나 옥천소공원을 거쳐 옥천암과 보도각백불을 보고 다시 옥천소공원으로 돌아와서 언덕길을 오르면
군데군데 무너져 내린 곳이 있는 탕춘대성의 성곽이 나오는데 굽이굽이 이어져 탕춘대능선을 따라 향로봉 중턱까지 이어진다.
탕춘대 성곽을 따라가다가 탕춘대 암문에서 암문을 통해 성곽 밖으로 난 산책길을 따라 불광역까지 간다.
도보여행-'경희궁→홍난파 가옥→창의문→백사실→세검정→석파랑→탕춘대성→불광역으로 봄나들이'의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 불로그의 사진으로 대신한다.
☞ 도보여행-'경희궁→홍난파 가옥→창의문→백사실→세검정→석파랑→탕춘대성→불광역으로 봄나들이 - 2부'를 시작하며...
▼ 청운공원 사각정
▼ 청운공원 전망소나무
四月 上旬 / 박목월
누구나
人間은
반쯤 다른 세계에
귀를 모으고 산다.
滅한 것의
아른한 音聲
그 발자국 소리.
그리고
세상은 환한 四月 上旬.
누구나
人間은
반쯤 다른 세계의
물결 소리를 들으며 산다.
돌아오는 파도
집결(集結)하는 소리와
모래를 핥는
돌아가는 소리.
누구나
人間은
두개의 音聲을 들으며 산다.
허무한 동굴의
바람 소리와
그리고
세상은 환한 四月 上旬.
▼ 성곽사이로 석파정을 보니...
석파정 石坡亭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호
지정연월일 : 1974년 1월 15일
시 대 : 19세기 중반
재 료 : 석조 기단, 목조
소 유 자 : 사유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산 16-1
석파정은 조선 제25대 철종과 제26대 고종 연간에 영의정 등 고위직을 지낸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이 경영한 별서(別墅)였으나,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집권한 후 몰수하여 자신의 별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서울 성곽의 북쪽 밖에 위치한 이곳은 수려한 산수와 계곡을 배경으로 거암(巨巖)과 오래된 장송(長松)이 많아
세검정 자하문 밖으로 통칭될 정도로 한양 도성의 경승지로 꼽혔던 곳이다.
원래 석파정 서북쪽 뒤 바위 앞면에 '三溪洞'이라고 새겨진 글자가 있어 김흥근이 소유하며 살고 있을 당시에는
'삼계동정자(三溪洞亭子)'라고도 불렸다가, 훗날 흥선대원군의 소유가 되면서 '석파정'으로 불렸다.
대원군은 앞산이 모두 바위여서 자신의 아호를 '석파(石坡)'라고 한 뒤, 정자 이름을 '석파정'으로 바꾸었다.
조선말의 우국지사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 권1에는 석파정의 내력이 적혀 있다.
고종이 즉위하자 김흥근은 흥선 대원군이 정치를 간섭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곧 대권을 손에 넣은 흥선대원군은 김흥근을 미워하며 그의 재산을 빼앗기 시작했다.
삼계동에 있는 김흥근의 별장은 한성에서 가장 유명한 정원이었는데,
하루는 흥선대원군이 그 별장을 팔 것을 간청하였으나 김흥근이 듣지 않자 하루만 빌려 놀게 해달라고 하였다.
서울의 옛 풍습에 따라 정원을 가진 사람으로서 빌려주지 않을 수 없어 김흥근이 억지 승락을 하자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행차하도록 권하고 자신도 따라갔다.
그 후 국왕이 거처한 곳을 신하가 감히 거처할 수 없는 곳으로 생각하고 김흥근이 다시는 삼계동에 가지 않게 되자
결국 이 별장은 운현궁의 소유물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의 후손인 이희(李熹), 이준(李埈), 이우(李鍝)의 별장으로 세습되며 사용되어오다가
6·25 전쟁 후에는 천주교가 경영하는 코롬바고아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석파정 입구를 들어서면 왼편으로는 인왕산의 자연 암석을 타고 흐르는 계곡이 있으며,
이 계곡의 물이 흘러들어 연못을 이루는 곳 바위 면에
'소수운렴암(巢水雲簾菴, 물 속에 깃들여 있으면서 구름으로 발을 친 암자)'이라고 쓴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계곡을 왼편으로 끼고 경사진 언덕을 조금 올라가면 석파정 건물들이 나타난다.
석파정에는 현재 전면 오른쪽인 동쪽에는 안채, 그 서쪽에는 사랑채, 안채 뒤 언덕 위에는 별채 등 건물들이 있다.
사랑채 서쪽 뜰에는 잘생긴 노송(老松, 서울특별시 지정보호수 제60호, 1968. 7. 3)이
옆으로 가지를 길게 펼치며 차일 치듯 드리워져 있고, 그 뒤 언덕 위 바위에 '三溪洞'이라 새겨져 있으며,
노송이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더 들어가면 계곡 속에 정자가 있다.
안채 맞은 편 언덕 위에는 망원정(望遠亭) 터가 남아 있고,
사랑채와 '三溪洞'이 새겨진 바위 사이에 위치했던 건물은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이 1958년 종로구 홍지동 125번지로 옮겨갔는데,
그 후 1974년 '대원군별장'이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남향〔癸坐丁向〕하며 'ㅁ'자형 평면으로 구성된 안채는
건물 서남쪽 모퉁이에 낸 대문간을 통해 동북쪽으로 한번 꺾여 안마당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안마당에서 봐서 안채는 동서 방향으로 5칸, 남북 방향으로 4칸 규모로 조영되어 있고,
안마당 동남쪽에는 동쪽 밖으로 통하는 편문이 나있다.
사랑채는 안채 서쪽에 역(逆)'ㄱ'자형 평면을 이루며 위치하였는데,
세벌대 화강석 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반 규모로 지은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왼쪽 끝 칸 전면에 누마루 1칸이 돌출되었는데,
뒤로 이어지는 2칸 반 모두 누마루이며 아래 부분은 벽을 막고 문을 내어 광으로 쓰고 있다.
정면에 유리문을 내어 원형에서 변형된 모습을 하고 있다.
안채 언덕 뒤에 있는 별채는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난 문을 통해
왼편으로 담을 끼고 계단을 오르다가 별채 문을 지나면 그 오른쪽 앞에 자리잡고 있다.
화강석 기단 위에 선 정면 6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의 5량가 건물로,
이곳에 서면 앞으로 멀리 인왕산과 북악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랑채에서 서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나오는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風樓)는 작은 계곡과 계곡 사이에 세워졌는데,
사방 3칸 규모의 사모지붕 건물이다.
좌우 툇칸 기둥 간격이 매우 좁고, 사각기둥의 부재가 매우 가늘어서 마치 사방 1칸 정자 같이 보인다.
가운데 칸은 모두 개방되었으나, 툇칸은 모두 창호무늬처럼 꾸며 공간이 투과되게 하였다.
기둥 위에는 자그마한 익공을 결구하여 건물 전체가 하나의 공예품처럼 느껴지게 조영되었다.
지붕은 기와를 씌우지 않고 동판을 얹었으며,
장대석으로 만든 누대(樓臺)의 한 면에는 정자로 들어갈 수 있도록 '之'자 모양을 하며 세 번 꺾인 돌다리를 계곡 위에 설치했다.
건물 바닥은 그 아래에 사면으로 쌓은 전벽돌 아취 벽 위에 길게 걸친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이 정자는 홍지동으로 이건된 '대원군별장'과 함께 조선말 유입된 청(淸)나라식 건축의 한 유형을 보여주며,
이 일대의 계곡과 소나무를 중심으로 조성된 정원은 전통적인 산수정원에 인공미(人工美)를 가미한 예를 보여준다.
-서울문화재홈페이지-
▼ 석파정
▼ 가수 이승환과 팬들이 보내준 소나무로 만든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동산 이라고...
▼ 제비꽃
▼ 창의문(자하문)
▼ 문루에 봉황이...
▼ 저 '오솔길'은 예전에는 '유심 쌀 수퍼'였는데...
백사실로 들기 전에 '서울신문'에 연재된 글로 먼저...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 (9) 서울 북악산 세검정~백사실 계곡
도롱뇽 ·맹꽁이 서식하는 도심 속 비밀정원
북악산 북서쪽 창의문(자하문) 일대의 부암동은 서울의 오지마을이다.
그동안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던 덕에 시골 같은 풍경과 깨끗한 자연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이곳에 ‘도심 속 비밀정원’으로 알려진 골짜기가 숨어 있는데, 그곳이 백사실 계곡이다.
최근에는 청정지역에 서식하는 도롱뇽과 맹꽁이 등이 사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아이들의 자연탐험교실로도 각광받고 있다.
본래 이름은 부암동 뒷골이고, 예로부터 능금나무가 많아 능금나무골이라 불렀다.
백사실 계곡은 사계절 좋지만 특히 겨울철에는 무주공산에 들어온 듯한 깊은 고요와 적막함을 만날 수 있다.
탐방 코스는 세검정에서 출발해 현통사를 거쳐 백사실 계곡을 거슬러 올라 부암동으로 나오는 길이 걷기에 좋다.
세검정(洗劒亭)은 부암동과 홍지동, 평창동 등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사용되지만 본래는 정자 이름이다.
일찍이 연산군이 수각(水閣)·탕춘대(蕩春臺) 등과 함께 이 정자를 지어 흥청망청 놀았고
이후에는 시인, 묵객 등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의 거사 동지인 이귀·김류 등이 광해군 폐위 문제를 의논하고 칼을 씻은 자리라고 해서
‘세검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시골 풍경… 깨끗한 자연 그대로
세검정 앞의 세검교에서 우회전하면 길은 홍제천을 따라 이어진다.
세검정성당을 지나면 앞쪽으로 자하슈퍼가 보이고 그 뒤로 작은 야산이 눈에 들어온다.
그 산 속에 백사실 계곡이 숨어 있다. 자하슈퍼를 지나면 거대한 부처바위(佛岩)가 눈에 들어온다.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 있는 것을 주민들이 꺼내 세워둔 것이다.
부처바위 뒤로 이어진 골목길을 따라 100m 정도 들어가면 작은 폭포가 나온다.
백사실 계곡의 물이 이리로 흘러온 것이다.
여기서 길이 끊긴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계곡을 건너 골목길로 이어진다.
이리저리 꺾어지는 골목을 따라 오르면 불쑥 현통사라는 절이 나타난다.
현통사는 좁은 터에 건물들이 바투 붙어 있는 고요한 절집이다.
대웅전 처마 밑의 풍경소리가 맑게 울린다.
현통사 입구의 오른쪽 계곡을 따르면 본격적으로 부드러운 산길이 이어진다.
솔숲에서 맑고 청량한 공기가 몰려온다.
인적없는 이곳이 정말 서울 땅인지 의심스럽다.
이어 아름드리 고목들이 자리잡은 널찍한 터가 나오고 작은 돌다리를 건너면 정자 주춧돌과 연못터에 이른다.
이곳이 백사 이항복의 별장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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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기미술관과 산모퉁이 갈림길에서...
▼ 산모퉁이 방향으로 가면...
▼ 제비꽃은 환경을 탓하지 않고...
▼ 인왕산 전경
▼ 삼거리에는 이정표가...
▼ 좌측으로 내려서면 백사실 '백석동천' 각자바위를 먼저 만나고, 우측으로 가면 백사실 '뒷골마을'을 먼저 만난다.
▼ 좌측은 '뒷골마을'로, 우측은 '북악산산책길'로 가는 길...
▼ 뒷골마을로...
▼ 부암동 뒷골마을
▼ 백사실 계곡을 따라 내려서고...
▼ 도롱뇽알
▼ 개구리의 사망 원인은 꽃샘추위?
▼ 개구리알
▼ 바삐 움직이던 물고기가 버들치였나?
▼ 좌측 오솔길이 '백석동천' 각자바위로 가는 길...
▼ '백석동천' 각자바위
▼ 다시 백사실 계곡으로 돌아와서...
▼ 백사 이항복의 별서로 추정되는 연못과 건물터...
▼ 마치 바위 위에 올라앉은 듯...
▼ 다시 계곡을 따라 내려서면...
▼ 누가 가재를 죽였나?
▼ 저들이 버들치?
▼ 현통사
▼ 돌틈에 핀 제비꽃
▼ 일붕선사의 '일붕애국시' - 일붕선사의 흔적은 북한산 부암동암문 가는 길에 '청하동문' 각자바위 옆에도 있는데...
▼ 이제 세검정으로...
▼ 홍제천 신영교를 건너...
▼ 세검정 우체국 앞을 지나...
▼ 탕춘대한지마을터
▼ 탕춘대터
▼ 송씨의 불망비
▼ 얼마전에 공사를 하더니 이렇게 만들어 놓았네...
▼ 오솔길 끝에 세검정이 보이네...
▼ 세검정
세검정 洗劍亭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호
지정연월일 : 1976년 11월 11일
시 대 : 조선 연산군 6년∼11년(1500∼1505)경 창건으로 추정, 영조 23년(1747), 1977년 5월 복원
규모·양식 : 건평 5.22평,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
재 료 : 석조 기단, 목조
소 유 자 : 국유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168-6
세검정은 창의문(彰義門) 밖 탕춘대(蕩春臺) 옆에 있는 정자다.
이 지역은 도성의 서북쪽 밖 삼각산과 백악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며,
도성과 북한산성의 중간 지대로서 도성의 북방 인후(咽喉)가 되는 요충지이기도 하다.
이 정자는 연산군 6년∼11년(1500∼1505)경 유흥을 위한 수각(水閣)으로 세웠다고도 하고,
일설에는 숙종 때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수비하기 위하여 병영을 설치하였는데 이 곳에 있는 군인들의 쉼터로 세운 것이라고도 한다.
광해군 15년(1623) 이귀(李貴), 김류 등이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이곳 사천(沙川, 모래내ㆍ홍제천) 맑은 물에서 칼을 씻었으므로 '세검정'이라 이름하였다 하는데,
원래 세검(洗劍)이란 칼을 씻어서 칼집에 넣고 태평성대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세검정'은 인조반정을 의거로 평가하여 이를 찬미하는 상징을 가졌다.
영조 23년(1747)에는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에 옮겨 경기 북부와 서울의 방비를 엄히 하는 한편,
북한산성의 수비까지 담당하게 하던 곳이다.
총융청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군사들이 쉬는 자리로 정자를 지은 것이 바로 세검정인데,
당시 총융청 감관으로 있던 김상채(金尙彩)가 지은 《창암집(蒼巖集)》에는, 육각정자로서 영조 23년(1747)에 지어졌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겸재 정선(鄭敾)의 <洗劍亭圖>에는 누(樓) 아래로 기둥이 높직하게 서있는
누각 형식의 건물로 도로쪽을 향하는 면에는 낮으막한 담을 돌렸고, 입구에는 일각문을 두었으며,
정자의 측면으로는 편문을 두어 개울로 내려갈 수 있도록 그려져 있으나 현재 이 시설물은 없다.
세검정은 1941년 부근에 있던 종이공장의 화재로 소실되어 주초석 하나만 남아 있던 것을 1977년 5월에 복원하였다.
복원은 정선의 <세검정도>를 참고하였다고 한다.
복원 당시 도시계획선에 저촉되어 원위치에서 홍제천 상류로 약 40m 이전 복원키로 하였으나
원위치에서 주초 자리가 드러나게 되어 도시계획선을 변경하고 원위치에 복원하게 되었다.
복원된 정자는 서남향을 하였는데,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삼아 가운데 칸이 넓고 양 협칸이 좁은 정면 3칸, 측면 1칸에,
개천쪽 서남쪽으로 가운데 칸 1칸을 내밀어 '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암반 위에 높이가 다른 10개의 4각 장초석을 세우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둘레에는 '亞'자 난간을 돌렸다.
건물 북쪽 협칸에는 밖으로 계단을 설치하여 도로에서 오르내리도록 하였다.
옛날에는 개천쪽으로 돌출된 1칸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는 경관은 절경을 이루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기둥 사이에는 문을 설치하지 않고 개방되었으며,
기둥머리는 익공계의 간결한 수법으로 결구하였으며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단청을 하지 않았다.
이 부근에는 주택이 들어서고 정자 옆으로 도로가 나 있어 옛날의 운치있던 분위기는 많이 없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왕조실록》이 완성된 뒤에는 이 곳 세검정에서 세초(洗草, 史草를 물에 씻어 흐려 버리는 일)하였으며,
장마철 물이 불어나면 해마다 도성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물구경을 하였다고 한다.
이 정자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계획하여 배치한 점, 안정감을 느끼도록 간잡이를 하여 평면 구성을 한 점,
알맞은 부재의 크기를 사용하여 건물의 비례와 리듬을 살린 점에서 한국 건축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서울문화재홈페이지-
☞ 여기서 도보여행-'경희궁→홍난파 가옥→창의문→백사실→세검정→석파랑→탕춘대성→불광역으로 봄나들이 - 2부'를 마치고...
2009년 4월 01일(수)
도보여행-'경희궁→홍난파가옥→창의문→백사실→세검정→석파정→탕춘대성→불광역으로 봄나들이' 中
-▥☞ 1부[서울역사박물관→경교장→홍난파 가옥→단군성전→인왕스카이웨이→청운공원]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2부[청운공원→창의문(자하문)→백사실(백석동천)→현통사→신영교→탕춘대터→세검정]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3부[세검정→석파랑→홍지문(오간대수문)→옥천소공원→옥천암→보도각백불→옥천소공원]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4부[옥천소공원→탕춘대성곽→탕춘대성 암문→헬리포트→산불감시탑→거북약수터→불광역]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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