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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보여행 후기☞/☆ 서울곳곳을 찾아서

[20090404]봄나들이-'불광역→탕춘대성→백사실→홍난파 가옥→광화문'-3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09. 4. 5.

 

29007
  

 2009년 4월 04일(토)

봄나들이-'불광역→탕춘대성→옥천암→홍지문→세검정→백사실→창의문→홍난파 가옥→경교장→광화문'-를 다녀오다.

 

 봄나들이 코스

불광역 → 거북약수터 → 정자 → 철탑 → 산불감시탑 → 헬리포트 → 탕춘대성(蕩春臺城) 암문 → 탕춘대 성곽 → 옥천암 → 보도각 백불

 → 옥천소공원 → 홍지문(한북문/오간대수문) → 석파랑(石破廊) → 세검정(洗劍亭) → 탕춘대터 → 신영교 → 현통사 → 백사실(백석동천)

 → 뒷골마을 → 산모퉁이 → 창의문(자하문) → 청운공원 → 인왕산길 삼거리 → 황학정(등과정터) → 단군성전  종로문화체육센터

 → 옥경이수퍼 → 권율장군집터 → 딜쿠사 → 교남경로당 → 홍난파 가옥 →  월암근린공원 → 경교장 → 경희궁 흥화문 → 광화문역

 

오늘은 산행이라기보다는 산보에 가까운 '북한산ㆍ북악산ㆍ인왕산'을 연계하는 봄나들이를 나선다.

불광역에서 모여 '거북약수터'를 경유하고 '탕춘대성 암문'을 통과하여 '탕춘대성곽'을 따라가다가 '옥천소공원'을 거쳐

'옥천암'과 '보도각 백불'을 구경하고 이어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지나 '석파랑'에 들어가 '대원군 별장' 구경을 한 후,

'세검정'과 '탕춘대터'를 거쳐 '신영교'를 건넌 후 '현통사'를 지나 '백사실(백석동천)'을 따라 '뒷골마을'까지 가고,

'카페 산모퉁이'를 지나 '창의문'을 통과하고 '청운공원'을 지나 '인왕산스카이웨이'를 따라가다가 '황학정(등과정터)'를 지나

'단군성전'에서 '종로문화체육센터' 앞을 지나 '옥경이수퍼'에서 '권율장군집터'의 은행나무와 '딜쿠사 1923'을 본 후

'홍난파 가옥'을 거쳐 '경교장'과 '경희궁 흥화문' 앞을 지나 광화문역 주변에서 저녁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 해산한다.

 

봄나들이-'불광역→탕춘대성→옥천암→홍지문→세검정→백사실→창의문→홍난파 가옥→경교장→광화문'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 불로그의 사진으로 대신한다.

 

  

봄나들이-'불광역→탕춘대성→옥천암→홍지문→세검정→백사실→창의문→홍난파 가옥→경교장→광화문'-3부를 시작하며...

 

▼ 백석동천 각자바위

 

▼ 봄나들이를 함께 하는 님들...

 

 

 

 

▼ 다시 백사실 계곡을 따라...

 

 

 

 

 

 

 

 

 

 

 

 

 

 

 

 

 

 

▼ 카페 산모퉁이 

 

 

 

 

 

 

  

 

 

 

▼ 환기미술관 갈림길을 지나...

 

▼ 창의문으로...

  

▼ 창의문

 

 

 

 

   

▼ 고 최규식경무관 동상

 

 

▼ 청운공원으로...

 

▼ 창의문(자하문)

 

 

▼ 저곳은...

 

▼ 가수 이승환과 팬들이 보내준 소나무로 만든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동산 이라고...

 

 

 

▼ 석파정

 

석파정 石坡亭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호
지정연월일 : 1974년 1월 15일
시 대 : 19세기 중반
재 료 : 석조 기단, 목조
소 유 자 : 사유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산 16-1
 
석파정은 조선 제25대 철종과 제26대 고종 연간에 영의정 등 고위직을 지낸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이 경영한 별서(別墅)였으나,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집권한 후 몰수하여 자신의 별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서울 성곽의 북쪽 밖에 위치한 이곳은 수려한 산수와 계곡을 배경으로 거암(巨巖)과 오래된 장송(長松)이 많아

세검정 자하문 밖으로 통칭될 정도로 한양 도성의 경승지로 꼽혔던 곳이다.
원래 석파정 서북쪽 뒤 바위 앞면에 '三溪洞'이라고 새겨진 글자가 있어 김흥근이 소유하며 살고 있을 당시에는

'삼계동정자(三溪洞亭子)'라고도 불렸다가, 훗날 흥선대원군의 소유가 되면서 '석파정'으로 불렸다.

 

대원군은 앞산이 모두 바위여서 자신의 아호를 '석파(石坡)'라고 한 뒤, 정자 이름을 '석파정'으로 바꾸었다.
조선말의 우국지사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 권1에는 석파정의 내력이 적혀 있다.

 

고종이 즉위하자 김흥근은 흥선 대원군이 정치를 간섭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곧 대권을 손에 넣은 흥선대원군은 김흥근을 미워하며 그의 재산을 빼앗기 시작했다.

삼계동에 있는 김흥근의 별장은 한성에서 가장 유명한 정원이었는데,

하루는 흥선대원군이 그 별장을 팔 것을 간청하였으나 김흥근이 듣지 않자 하루만 빌려 놀게 해달라고 하였다.

 

서울의 옛 풍습에 따라 정원을 가진 사람으로서 빌려주지 않을 수 없어 김흥근이 억지 승락을 하자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행차하도록 권하고 자신도 따라갔다.

그 후 국왕이 거처한 곳을 신하가 감히 거처할 수 없는 곳으로 생각하고 김흥근이 다시는 삼계동에 가지 않게 되자

결국 이 별장은 운현궁의 소유물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의 후손인 이희(李熹), 이준(李埈), 이우(李鍝)의 별장으로 세습되며 사용되어오다가

6·25 전쟁 후에는 천주교가 경영하는 코롬바고아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석파정 입구를 들어서면 왼편으로는 인왕산의 자연 암석을 타고 흐르는 계곡이 있으며,

이 계곡의 물이 흘러들어 연못을 이루는 곳 바위 면에

 '소수운렴암(巢水雲簾菴, 물 속에 깃들여 있으면서 구름으로 발을 친 암자)'이라고 쓴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계곡을 왼편으로 끼고 경사진 언덕을 조금 올라가면 석파정 건물들이 나타난다.
석파정에는 현재 전면 오른쪽인 동쪽에는 안채, 그 서쪽에는 사랑채, 안채 뒤 언덕 위에는 별채 등 건물들이 있다.

사랑채 서쪽 뜰에는 잘생긴 노송(老松, 서울특별시 지정보호수 제60호, 1968. 7. 3)이

옆으로 가지를 길게 펼치며 차일 치듯 드리워져 있고, 그 뒤 언덕 위 바위에 '三溪洞'이라 새겨져 있으며,

노송이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더 들어가면 계곡 속에 정자가 있다.

 

안채 맞은 편 언덕 위에는 망원정(望遠亭) 터가 남아 있고,

사랑채와 '三溪洞'이 새겨진 바위 사이에 위치했던 건물은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이 1958년 종로구 홍지동 125번지로 옮겨갔는데,

그 후 1974년 '대원군별장'이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남향〔癸坐丁向〕하며 'ㅁ'자형 평면으로 구성된 안채는

건물 서남쪽 모퉁이에 낸 대문간을 통해 동북쪽으로 한번 꺾여 안마당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안마당에서 봐서 안채는 동서 방향으로 5칸, 남북 방향으로 4칸 규모로 조영되어 있고,

안마당 동남쪽에는 동쪽 밖으로 통하는 편문이 나있다.


사랑채는 안채 서쪽에 역(逆)'ㄱ'자형 평면을 이루며 위치하였는데,

세벌대 화강석 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반 규모로 지은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왼쪽 끝 칸 전면에 누마루 1칸이 돌출되었는데,

뒤로 이어지는 2칸 반 모두 누마루이며 아래 부분은 벽을 막고 문을 내어 광으로 쓰고 있다.

정면에 유리문을 내어 원형에서 변형된 모습을 하고 있다.


안채 언덕 뒤에 있는 별채는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난 문을 통해

왼편으로 담을 끼고 계단을 오르다가 별채 문을 지나면 그 오른쪽 앞에 자리잡고 있다.

 

화강석 기단 위에 선 정면 6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의 5량가 건물로,

이곳에 서면 앞으로 멀리 인왕산과 북악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랑채에서 서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나오는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風樓)는 작은 계곡과 계곡 사이에 세워졌는데,

사방 3칸 규모의 사모지붕 건물이다.

좌우 툇칸 기둥 간격이 매우 좁고, 사각기둥의 부재가 매우 가늘어서 마치 사방 1칸 정자 같이 보인다.

가운데 칸은 모두 개방되었으나, 툇칸은 모두 창호무늬처럼 꾸며 공간이 투과되게 하였다.

 

기둥 위에는 자그마한 익공을 결구하여 건물 전체가 하나의 공예품처럼 느껴지게 조영되었다.

지붕은 기와를 씌우지 않고 동판을 얹었으며,

 장대석으로 만든 누대(樓臺)의 한 면에는 정자로 들어갈 수 있도록 '之'자 모양을 하며 세 번 꺾인 돌다리를 계곡 위에 설치했다.

 

건물 바닥은 그 아래에 사면으로 쌓은 전벽돌 아취 벽 위에 길게 걸친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이 정자는 홍지동으로 이건된 '대원군별장'과 함께 조선말 유입된 청(淸)나라식 건축의 한 유형을 보여주며,

이 일대의 계곡과 소나무를 중심으로 조성된 정원은 전통적인 산수정원에 인공미(人工美)를 가미한 예를 보여준다.

 

-서울문화재홈페이지-

 

▼ 석파정을 당겨보니...

  

 

 

 

▼ 인왕산 산책길을 따라...

 

▼ 횡단보도 있는 곳이 인왕산 들ㆍ날머리

 

 

 

 

 

 

 

 

▼ 인왕산이 봉황의 모습이라고...

 

 

▼ 봉황의 부리를 당겨보니...

 

▼ 저 바위는...

 

 

▼ 호랑이 형상이라고...

 

 

 

 

 

▼ 황학정(등과정터)

 

황학정 黃鶴亭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5호
지정연월일 : 1974년 1월 15일
시 대 : 조선 광무 2년(1898) 창건, 1922년 이건
규모·양식 : 건평 19.5평, 정면 4칸, 측면 2칸,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
재 료 : 석조 기단, 목조
소 유 자 : 사유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산 1-1
 
황학정은 원래 광무 2년(1898) 고종의 어명으로

경희궁(慶熙宮) 회상전(會祥殿) 북쪽 담장 가까이 세웠던 궁술 연습을 위한 사정(射亭)이었다.

1922년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짓기 위해 경희궁을 헐면서 경희궁내 건물들이 일반에게 불하될 때

이를 받아 사직공원 북쪽인 등과정(登科亭) 옛터인 현 위치에 이건하였다.


황학정이 있는 사직동의 등과정 자리는 한말까지 궁술 연습장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등과정은 경복궁 서편 인왕산 기슭 옥동(玉洞)에 있던 등용정(登龍亭)·삼청동의 운용정(雲龍亭)·

사직동의 대송정(大松亭, 太極亭)·누상동의 풍소정(風嘯亭, 白虎亭)과 함께

인왕산 아래 서촌(西村) 오사정(五射亭)이라고 불렸다.

 

오사정을 비롯한 서울에 있던 이름 있는 활터는 일제 때에 전통 무술을 금지하면서 점점 사라졌다.
황학정의 활터는 전국에서 유명하였으며 광복 후에 계속 사용되었으나

6·25전쟁으로 건물도 파손되고 활쏘기도 중단되었다가 다시 중수되어 활터로 사용되고 있다.

과녁은 전방 약 145m 지점에 있으며, 1977년 일부 보수공사를 하였다.


황학정은 인왕산 동쪽 기슭 언덕 위에 동남향을 하고 자리잡았다.

정면에서 보아 4칸 중에서 동쪽 1칸은 서쪽의 3칸보다 한 단 높게 누마루를 꾸몄고, 동쪽 끝 초석은 장초석으로 처리되었다.

건물 정면 서쪽에서 2번 째 칸 되는 추녀 밑에 '황학정' 현판이 걸려 있다.

북쪽 끝 1칸 양통은 온돌이며 나머지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다.

주간 거리는 건물 정면의 서쪽에서 오른쪽으로 2,763mm, 3,051mm, 2,820mm, 2,793mm 이며,

측면은 정면에서 뒤로 2,787mm, 2,820mm 이다.

초석의 높이는 290mm, 장초석의 높이는 970mm이고, 대들보까지 기둥의 높이는 2,670mm 이다.


건물은 외벌 장대석 기단 위에 사각기둥을 세우고, 정면과 동쪽 측면 기둥에는 칠언 절구의 주련(柱聯)을 걸었다.

정면 외부 기둥 사이에는 사분합문을 달았으며, 내부는 우물마루와 연등천장으로 되었다.

건물은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친 무고주(無高柱) 5량가이며, 굴도리를 사용하였다.

정자로서는 비교적 규모가 큰 건물이나 간결하고 소박하게 구조로 조영되었다.


건물 서남쪽 뒤로는 샘이 있고 그 뒤 바위에 황학정 팔경을 노래한 시를 음각하였으며,

건물 오른쪽인 동북쪽으로는 사모지붕의 한옥 한천각(閒天閣)이 있고,

그 서쪽 뒤로는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사우회관(射友會館)이 있다.
 
-서울문화재홈페이지-

 

 

 

▼ 단군성전

 

 

 

▼ 홍살문 아래에는 사직단과 사직공원이 있다.

 

▼ 종로문화체육센터 앞으로...

 

 

▼ 종로문화체육센터

 

 

▼ 옥경이수퍼 앞에서...

 

▼ 권율장군집터로...

 

 

▼ 권율장군집터에 있는 수령 450년의 은행나무

 

 

▼ 이 건물은...

 

▼ 이 집은 힌두어로 이상향을 뜻하는 ‘딜쿠샤’로 3·1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세계적 통신사인 UPI 특파원 알버트 테일러가 살던 집으로 현재 문화재 지정이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 딜쿠사 초석

 

딜쿠사에 대해 조사하다가 발견한 신문기사에서...

3대 걸친 美노신사의 ‘한국사랑’

경향신문 | 입력 2006.02.05 18:29

3대에 걸쳐 한국을 사랑한 미국인이 서울시민이 된다.

서울시는 66년 만에 서울 고향집 '딜쿠사(Dilkusha)'를 방문한
미국인 브루스 테일러(87)에게 '명예시민증'을 수여한다고 5일 밝혔다.
딜쿠사는 브루스 가족이 1942년까지 살던 종로구 행촌동 1-88의 보금자리를,
힌두어 '행복한 마음·기쁨·이상향'의 의미로 작명한 것이다.

이들 가족의 한국사랑은 구한말인 1897년 입국한 할아버지 조지 알렉산더 테일러(George Alexander Taylor)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아들인 알버트 테일러(Albert Taylor)는 금광엔지니어 겸 UPI 통신사 프리랜서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3·1운동을 세계에 알리고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알버트는 한국 독립을 도왔다는 이유로 6개월간 수용생활을 거쳐 추방됐으며 48년 미국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알버트의 한국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땅, 한국 아버지의 묘소 옆에 나를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할아버지와 나란히 묻혔다.

이번에 서울시민이 되는 그 아들 브루스는 1919년 세브란스병원
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당시 그의 침대 밑에는 독리선언서가 숨겨져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추방된 브루스는 이후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했다.
브루스 가족은 이번 방한길에 딜쿠사를 시작으로 3대에 걸친 한국 사랑을 다큐멘터리에 담는다.

브루스는 6일 명예시민증 수여식에서 부친 알버트로부터 받은
1920년대 서울시청과 원구단, 동대문 등 서울의 생활상을 찍은 희귀사진 17점을 기증한다.

〈김창영기자〉

bodang@kyung.com

함께 온 딸 제니퍼 테일러(영화제작자)도 가족의 서울생활을 기록한
할머니 메리 테일러의 자서전 'Chain of Amber'를 영화로 만들어 할리우드에 소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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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남경로당을 지나...

 

▼ 홍난파 가옥

 

홍파동 홍난파 가옥

 

등록번호 : 제90호(2004년 9월 4일 등록) 
소유자 : 종로구청 
설계자 : 미상 
건립연도 : 1930년 
면적 : 연면적 121.45㎡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파동 2-16 
현 용도 : 주택 
구조 : 벽돌조

 

19세기 말, 개항기로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쳐 서울에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이 몇 군데 생겨났던 적이 있다.

정동, 연건동, 서대문 밖 충정로가 대표적인 곳이었는데, 현재의 홍파동에도 선교사의 주택이 여러 채 건립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근처 송월동에 독일 영사관이 있었던 관계로 독일 계통 선교사의 주택단지가 세워졌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건물은 지상 1층, 지하 1층의 규모로 붉은 벽돌조이다.

가파른 경사지를 이용하여 남쪽에 현관과 거실, 침실을 두고 북서쪽에 지하층을 두었다.

서쪽의 길에서 대문을 통하여 마당 안으로 올라오면 계단을 따라 현관에 다다르게 된다.

현관문은 정교하게 디자인 되어 있으나 다른 서양사람들의 주택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현관주변시설이 따로 없다.

지붕은 다른 지역의 선교사 주택보다는 경사면이 더 가파르다.

아마 북 유럽의 주택문화가 반영된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이 집의 실내는 1930년대 서양인 주택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우선, 거실의 벽난로로서, 벽난로는 붉은 벽돌로 치장 쌓기를 하였다.

거실바닥은 보통 벽돌만한 크기의 나무토막을 사용하여 쐐기문양을 내어서 마감하였다.

 

최근에 생활하였던 소유주가 방들을 터서 사용함으로써 원래의 평면 모습은 사라졌지만

바닥에 그 자국들이 남아 있어 원형을 추측할 수는 있다.

 

서구문물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같이 유입된 서양종교의 선교사 주택들이 최근에 많이 사라지고있다.

일본인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한국에 세워진 순수한 서양인의 주거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는데 아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건물은 경사가 심한 대지를 이용하여 적절하게 건축물을 세워서

공간을 알뜰하게 사용한 실용적인 사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대문을 들어서서 바로 연결할 수 있는 지원시설 - 부엌, 창고, 보일러실 - 부분과

반듯하게 만들어진 계단을 통하여 정원을 거쳐, 현관으로 유도되는 중요 동선의 배려, 넓은 지하실의 활용,

그것을 위한 적극적인 유리창의 확보등, 건축계획학적인 면에서 참고할 사항이 많이 남아 있다.

 

게다가 일제강점기동안의 행적에 여러 가지 문제를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한국 근대음악의 역사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홍난파의 일생동안 중요한 작품이 이곳에서 거주하였을 때 만들어진 것이라 하니

이 장소와 공간이 지니고있는 의미 또한 한국근대사에서 아주 큰 것이라 하겠다.

 

한국근대사와 건축학적 가치에 따라 홍난파 가옥은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90호로 등록·관리되고 있다.


- 문화재청 -

 

 

 

▼ 옛 기상청

 

 

 

▼ 경교장

 

▼ 경교장 안내문

 

서울 경교장(京橋莊)


지정번호 : 사적 제465호
지정연월일 : 2005년 6월 13일
시 대 : 1936년 착공, 1939년 준공
규모·양식  : 지상 2층 지하 1층, 연면적 874.05㎡(264.4평) 고전풍 
재 료  : 철근콘크리트조
설 계 자  : 김세연(金世演)
시 공 자  : 대림조(大林組) 경성지점(京城支店)
소 유 자  : (주)삼성생명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108-1
 
이 건물은 광복을 맞아 1945년 11월 23일 국내에 돌아온

김구(金九) 주석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집무실 겸 숙소로 사용한 곳이다.

 

환국(還國) 이후 임시정부의 첫 국무회의가 이곳에서 열렸고,

신탁통치 반대운동·남북 정치지도자 회담도 이곳을 무대로 추진되었다.


원래 이 건물은 금광업자 최창학(崔昌學)이 1938년 자신의 개인저택으로 세웠으나

광복 후 일제시대 때의 친일행위를 속죄한다는 뜻에서 김구 선생 숙소로 제공했다 한다.

 

경교장을 무대로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남북협상 등을 주도하던 김구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이 건물 2층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다.


설계는 김세연(金世演)이 맡았는데 1930년대의 건축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건물은 정면 중앙 출입구를 중심으로 활 모양의 아치형 창이 좌우로 대칭 배치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단아한 인상을 준다.
당초 2001.4.6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의 동 건물의 중요성 등이 재평가되면서 2005. 6. 13 국가 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되었다.

현재 동 건물 2층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김구 선생의 옛 집무실이 원형대로 복원되어 <김구 기념실>로 운영되고 있다.


-서울문화재홈페이지-

 

▼ 돈의문(서대문)터

 

 

 

▼ 경희궁 흥화문

 

흥화문 興化門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
지정연월일 : 1974년 1월 15일
시 대 : 조선 광해군 10년(1618), 1932년 이건, 1988년 재이건
규모·양식 : 건평 약 88㎡,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 다포계 우진각지붕
재 료 : 석조 기단, 목조
소 유 자 : 국유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 1가
 
흥화문은 조선시대 광해군 10년(1618)에 세운 경덕궁(慶德宮) 정문이었다.

1910년 일제(日帝)가 경성중학교를 세우기 위해 경희궁의 전각들을 헐고,

몇몇 건물들을 매각하고 이건하면서 흥화문도 1915년 남쪽 담장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 장충동 박문사(博文寺)로 옮겨져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박문사는 안중근 의사(安重根義士)에 의해 포살된 이또히로부미(伊藤博文)를 위해

일제가 지은 사당이었으나 1945년 광복과 더불어 폐사되었다.

그 후 영빈관이 들어서고 신라호텔이 서면서 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 경희궁지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경희궁의 정문이었던 흥화문은 원래 궁궐의 동남쪽 모퉁이,

지금의 구세군회관 빌딩 자리에 동향하여 서 있다가 1915년 도로공사로 남쪽으로 이전되었으나,

현재 복원된 흥화문은 원래의 위치와 향(向)이 다르게 남향으로 되었다.

흥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겹처마 우진각지붕이다.

흥화문은 건립 당시에는 다른 궁궐의 정문과 같이 중층으로 세울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으나

인경궁(仁慶宮)의 정문이 층문(層門)이어서 단층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경덕궁이 피우처(避寓處)였기 때문이다.

흥화문의 초석과 기둥은 원형이며, 가운데 기둥 열 3칸에는 문짝을 달았다.

문틀 위에는 홍살을 달았고, 공포는 외2출목, 내3출목으로 구성되었다.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두었고, 그 놓여진 주심포의 살미첨차는 양봉으로 되어 장식적이지만,

기둥 사이 주간포의 살미는 짧게 끊어 자른 교두형이어서 대조를 이룬다.

첨차 외단 1, 2제공은 앙서, 3제공은 수서를 하였다.

가구는 고주 위에 2개의 보가 전후에 꽂혔고,

종량이 고주 상부에 놓였으며, 종량 위로 파련대공이 종도리를 받고 있다.

천장은 가운데 칸은 연등천장, 좌우 협간은 우물천정으로 되어 있다.

지붕마루에는 취두·용두·잡상 등이 장식되어 있다.
원래 경희궁에는 동문인 흥화문 외에 흥화문 왼쪽에 흥원문(興元門),

오른쪽에 개양문(開陽門), 서쪽에 숭의문(崇義門), 북쪽에 무덕문(武德門)이 있었다. 

 

-서울문화재홈페이지-

 

 

▼ 서울역사박물관 앞을 지나...

 

▼ 망치질하는 사람(Hammering Man) 

 

망치질하는 사람(Hammering Man)

                                          ---조너선 브로프스키(Jonathan Borofsky)

 

광화문 흥국생명 사옥 옆, 조용히 망치질하는 거인이 있다.

거인의 망치질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온종일 지나가는 자동차와 행인들의 바쁜 발걸음에도 아랑곳없이 거인은 그저 망치질에만 여념이 없다.

 

조너선 브로프스키(Jonathan Borofsky)의 ‘망치질하는 사람(Hammering Man)’은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바젤, 시애틀 등에 이어 세계 7번째 거인이다.

 

2002년, 해머링 맨 중에서 가장 늦게 설치됐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해머링 맨이기도 하다.

 

조너선 브로프스키의 작품으로는 광화문의 ‘해머링 맨’외에 

삼청동 국제 갤러리 지붕 위의 ‘지붕 위를 걷는 여자’,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노래하는 사람’ 등이 있다.

 

 

▼ 광화문역 부근에서...

 

 

▼ 저녁식사 겸 뒤풀이를 하고...

 

 

☞ 이것으로 봄나들이-'불광역→탕춘대성→옥천암→홍지문→세검정→백사실→창의문→홍난파 가옥→경교장→광화문'마친다.

 

 

 2009년 4월 04일(토)

봄나들이-'불광역→탕춘대성→옥천암→홍지문→세검정→백사실→창의문→홍난파 가옥→경교장→광화문'

 

-▥☞ 1부[불광역→거북약수터→정자→탕춘대 암문→탕춘대 성곽→옥천암(보도각백불)]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2부[옥천암→홍지문(오간대수문)→석파랑→세검정→탕춘대터→현통사→백사실(백석동천)]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3부[백사실→창의문→청운공원→인왕산길→황학정→단군성전→홍난파 가옥→경교장→광화문역]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