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찬란한 슬픔의 봄을
위 사진은 2009년 05월 05일(화)에 '아차산ㆍ용마산 연계산행 후 구리 한강시민공원 유채꽃 감상 나들이'를 다녀오면서 |
모란꽃의 진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저자인 김부식과 일연스님은 냄새를 맡지 못하는 무후각증(anosmia)을 앓고 있었던 것일까?
40대 전후 상당수는 모란에 향기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웠던 ‘선덕여왕과 모란꽃’ 이야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을 요약하면 이렇다.
‘신라 진평왕(서기 7세기 전반) 때 당 태종이 모란꽃 그림과 종자를 신라에 보냈다.
꽃 그림을 본 덕만공주(훗날 선덕여왕)는 꽃은 아름다우나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왕은 이유를 물었다.
공주는 그림에 벌이나 나비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씨를 심어 보니 과연 공주의 말이 옳았다’고 적었다.
원산지가 중국인 모란을 본 적이 없었던 1300년 전 덕만공주야 그림만 보고 ‘모란은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모란에 향기가 없다고 기록한 김부식이나 일연스님은 사실 관계 파악에 소홀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고려시대 문장가 이규보(1168~1241)가 지은 글을 보아도 모란이 고려시대에는 무척 ‘대중적인’ 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날, 아가씨가 모란꽃을 들고 서방님에게 물었다.
내가 고와요, 꽃이 고와요. 서방님은 꽃이 곱다고 했다.
아가씨는 그럼 꽃하고 사세요 라며 들고 있던 모란을 짓밟았다.’
김부식은 12세기에, 일연스님은 13세기에 살았다.
두 사람의 저서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따른다면, 모란이 중국으로부터 온 지 최소한 500년은 지난 시점이었다.
이규보의 글에서처럼 모란은 아가씨가 발로 짓밟을 수 있을 정도로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던 때였다.
역사 기록도 곧이 곧대로 믿을 수만은 없음을 알려주는 사례다.
한데 중국인들은 왜 모란그림에 나비를 그리지 않았을까?
조용진 서울교대 교수는 “동양화에 등장하는 소재는 저마다 의미가 있다.
때문에 동양화는 볼 뿐 아니라,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옛 문헌에서부터 ‘꽃 중의 꽃(화중지왕·花中之王)’으로 불리던 모란은 그 화려함 때문에 부귀를 상징했다.
나비는 한자로 蝶(접)이다. 한데 80세 노인을 나타내는 ?(질)과 중국에서는 같은 발음인 ‘뎨’로 읽는다.
때문에 모란과 나비를 그리면 “80세에 부귀를 누린다”는 뜻이 된다.
한데 80세 이전에는 어떻다는 말인가? 이때 등장하는 게 고양이다.
고양이를 나타내는 猫(묘)는 70세 노인을 뜻하는 ?(모)와 발음이 같다. ‘마오’라고 읽는다.
때문에 모란에 고양이와 나비를 함께 그려 넣어 “70~80대에 이르기까지 장수하며 부귀를 누려라”고 뜻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이원복 국립광주박물관장도 “모란에 나비만 그리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했다.
삼국유사는 선덕여왕이 죽기 전,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적었다.
“모란만 그린 것은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남자)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
선덕여왕은 죽을 때까지도 동양화 읽는 법에 서툴렀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물론 당나라에서 선덕여왕의 통치를 낮잡아 본 것은 사실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덕여왕 12년(서기 643년), 당으로 건너간 신라 사신에게 당 태종은
“그대 나라는 임금이 부인이어서 이웃 나라에서 업신여김을 받는다”라고 말한다.
- 한국분화재보존연구소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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