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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싶다☞/♤ 포구기행

[포구기행](11) 인천 만석포구 / 내 가슴에 사는 사람 - 이수

by 맥가이버 Macgyver 2009.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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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기행](11) 만석포구
 글 박석진·사진 김순철기자 psj06@kyu
ㆍ석양 아래 작은 어선, 옛 영화를 낚는가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인천 도심 북쪽 끝, 미로처럼 얽힌 길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만석포구는 초행자가 찾아내기 쉽지 않다. 보물찾기 보다 힘든 ‘만석포구 찾기’는 몇 사람에게 묻고 물어 더듬거린 뒤에나 겨우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나마 포구 초입에 위치한 ‘만석슈퍼’가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 만석슈퍼를 끼고 난 외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길 양쪽으로 늘어선 10여 개의 낚시 가게가 포구와 가까워졌음을 암시해 준다. 포구의 감초, 횟집은 거의 없다. 만석포구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인천 연근해 어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사람이 몰리고, 생선이 거래되며 꽤나 영화를 누렸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됐다.

예전의 영화는 온데간데 없는 만석부두. 그곳에 가득한 저녁노을은 찬란할수록 슬프기만 하다. 조업을 마치고 귀환하는 작은 어선 한 척을 정박해 있던 낚싯배들이 반갑게 맞는다.


횟집 대신 만석포구를 포위한 건 다름아닌 공장들이다. 만석포구 입구로 이어진 공장 길은 꼭 만화 같다. 하늘 높이 올라선 공장 굴뚝은 꺾일 줄 모르고, 온통 은회색 철재로 둘러싼 공장 벽면은 빈틈이 없다. 단 2분여를 걸었을 뿐인데 숨이 차 오른다. 쿵쾅거리는 쇳소리가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인적은 드물고, 공장 외벽에 튕겨져 나온 햇빛이 시야를 가려 저도 모르게 공격적인 태세를 갖추게 된다. 만석포구를 채 만나기도 전에 한바탕 일이 벌어질 것 같다. 움츠러드는 어깨를 간신히 펴고 포구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어렵사리 만난 허름한 철조망이 만석포구 정문이었다. 삐쭉이 열린 문 쪽으로 들어서자 만석포구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철조망 뒤에 단출하게 써 붙인 이름판이 아니라면 여기가 어딘지 모를 판이다. 그 어떤 허망함이 온몸에 밀려왔다. 만석포구와의 첫 인사는 그렇게 찰나에, 쉽게 지나갔다.

횟집 대신 공장과 철조망

2006년부터 재단장 공사를 진행한 만석포구는 그와 이웃한 북성포구, 화수부두와 함께 올 2월 공사를 마무리했다. 시멘트로 발라 자로 댄 듯 반듯한 네모꼴로 만들어 놓은 포구의 현재 모습이 만들어진 지 얼마되지 않았단 뜻이다. 포구라 부르기엔 어딘가 낯설다. 역사와 연륜이 묻어나기보다 인위적인 느낌이 강하다. 어쩐지 씁쓸하고 쓸쓸하다.

“가끔 낚싯대 들고 놀러와요. 회사도 가깝고 해서요. 뭘 낚으러 오는 건 아니고 그냥 바람이나 쐴 겸 나오는 거죠.” 바다로 향한 포구 끝자락에 앉아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김상학씨(45) 일행 곁에 무작정 끼어들었다. 그는 직장을 동구 쪽으로 옮기며 만석부두를 드나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개발을 앞둔 만석부두는 찾는 이가 없어 더욱 쓸쓸하다.


김씨의 만석포구 개척에 길잡이 역할을 한 이범규씨(43)는 그나마 더 만석부두와 연이 있다고 했다. “어릴 때 집이 근처였어요. 북성, 만석, 화수부두 를 헤집고 뛰어다녔는데 물론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죠. 낚싯배 대던 곳도 지금보다 100m는 더 아래쪽이었는 걸요.” 포구는 분명 변했다. 하지만 바다는 변하지 않았단다. 이씨는 “약간 비릿하지만 생기 있는 내음으로 포구를 찾는 그 누구도 반겨준다”고 말했다. 어색했던 만석포구와의 첫 대면을 잊고,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도 곱씹어 넘겼다. 거친 풍파 속에 수십 년 동안 변하지 않고, 힘들게 지켜낸 만석포구의 진면목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오후 4시를 넘기자 한산했던 부두가 잠시 부산해졌다. 새벽녘에 출발했던 낚싯배들이 귀향하는 시간이었다. 만석부두에는 한 척에 30~45명을 태우는 낚싯배들이 20대 정도 영업을 하고 있다. 가깝게는 영종도, 멀게는 자월도, 신도까지 나가 바지락을 캐고 우럭, 놀래미, 광어를 끌어올린다. 낚시는 대부분 취미로 나선 경우이고, 바지락은 품팔이를 위해 나선 사람들 몫이다. 이들은 물때에 따라 새벽 3~4시에 출발하는 배를 타고 나가 캐온 바지락은 손질해서 판다. 광주리에 탐스럽게 담긴 바지락은 내 목숨을 이어 줄 밥이고, 내 새끼를 가르칠 등록금이다. 하루를 투자한 끝에 얻은 바지락 광주리를 유난히 어여삐 여기는 심정이 헤아려진다. 만석포구 초입에서 낚싯배를 타고 나간 아내를 기다리는 신숭조씨(77)가 눈에 들어왔다. 아내의 모습이 언제 보일까 목을 빼고 바다를 바라보는 두 눈이 단단히 고정돼 있었다. 넉살좋게 먼저 말을 건네봤다. 그는 평생을 이곳, 만석부두에서 보냈다. 운좋게 애써 발품을 팔지 않고 달인을 만났다.

“여긴 본래가 낚싯배 들고나는 곳이여. 아주 옛날에도 그랬어. 배만 신식으로 바뀐 거지. 난 나무로 엮은 돛단배 띄워 낚시할 때부터 배 다뤘는 걸. 지난해 까지만 해도 내 배 가지고 일했는데, 이제는 삭신이 쑤셔셔 못하고 정리하고 말았지.” 23세에 시작한 일이 평생 업이 됐다. 그 일로 가정을 꾸리고, 삼형제를 낳아 길렀다. 앞도 뒤도 재지 않고 달린 삶이었다. 그리고 이젠 그마저도 만석포구의 넘실거리는 파도에 묻었다. 그 대신 아내가 바다로 나선다. 아내도 그처럼 만석포구를 통해 들고 난다. 단출한 두 식구의 하루가 만석포구에서 시작되고 진다.

“마지막 배 나온 거야. 오늘 장사도 끝이네.”만석포구 입구에 자리한 간이 슈퍼 주인 김정숙씨(74)가 문 닫을 채비를 했다. 낚시 배 한 척이 들어올 때 마다 30명 정도씩 우르르 쏟아내면 잠시 바빠진다. 그나마도 오가는 배가 없으면 손님도 끊긴다. 라면, 술, 초고추장 등 몇몇 먹을거리와 토스트, 어묵을 만들어 파는 조리대가 제법 야무지게 올라앉은 1톤 트럭의 간이슈퍼가 인상적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어릴 적 느꼈던 스릴과 긴장감은 아직도 우리들 마음에 생생한데… 만석동 어린이들은 그렇게 놀고 있었다.


고향이 신의주라는 김씨는 50여 년 전 남쪽으로 내려왔다. 송현동에 살다가 결혼을 하면서 이곳 만석부두 쪽으로 집을 옮겼다. 만석부두와 뗄 수 없는 ‘괭이부리말’ 이야기도 그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진짜 괭이부리말은 부두 뒤편, 저기 만석주공아파트 있는 쪽이야. 그때는 여기 만석부두 입구까지 물이 들던 때야. 지금은 매립해서 이렇게 장사도 하지만 그땐 이런 거 없었어. 진짜 어렵게 살던 때지. 괭이부리말, 만석부두, 요 옆 북성부두는 못사는 동네에 석탄차까지 다녀서 온통 새까맸지. 그땐 북성부두 보고 ‘똥바다, 똥바다’ 했는데 지금은 ‘돈 바다’라잖어. 하하.”

을씨년스런 ‘시멘트 포구’

지역 개발 붐이 일어나면서 조용했던 만석부두 일대에 그야말로 돈 바람이 불었다. 개발 계획 수정 혹은 시기에 따라 바람은 강약을 달리하며 사람을 바꾸고 동네를 바꿔놨다. 하지만 유독 해양공원을 만든다는 약속만은 지켜지지 않았다. 해안을 따라 북성포구에서 월미도까지 친수공간으로 개발하겠다는 계획으로 만석부두 근처에 대규모 땅을 차지했던 한국유리 대지를 지자체가 구입했지만, 4년도 채 지나지 않아 슬그머니 다른 공장들이 들어섰다. “여기는 애초 계획대로 공원 만들어야 해. 내가 모르긴 몰라도 인천에 볼 게 뭐 있어? 공원이라도 좋게 만들어서 작약도도 살리고, 배도 띄우고 해야지. 늙은이도 아는 걸 다들 왜 그러는 건지.” 공연스레 가슴 한켠이 뜨끔했다. 알면서 모른 척했던 일을 콕 짚어 들어낸 듯했다. 역시나 연륜이 무섭다. 매서운 지적을 하고도 태연히 파라솔을 걷고, 포장을 내린다.

포구 밖으로 옮겼던 발길을 다시 안으로 옮겼다. 돌아서기 전에 다시 한 번 봐둬야만 할 것 같았다. 의자 하나 없어 텅빈 길쭉한 포구 끝자락에 위태롭게 서서 맞는 바닷바람이 제법 차다. 그 흔한 갈매기도 없었다. 바다에는 서너 척의 배만 한가로이 떠 있었다.

해가 지고 만석포구 주위가 어스름해지자 어깨를 나란히 한 왼쪽 북성포구와 오른쪽 화수부두 모습이 사라졌다. 만석포구 한켠에서는 해양처소 신축공사 작업이 한창이었다. 자욱한 흙먼지 속에 쌓여 올려진 새로운 해양처소는 다음 주면 문을 연다고 했다. 차근히 쌓아올린 붉은색 벽돌 사방이 꽤 단단히 맞물려 올려져 있었다. 만석부두를 통해 나가는 배와 사람 일체를 관리하는 통에 새벽과 저녁, 해양처소에 사람들이 몰린다. 만석포구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때이기도 하다.

오후 4시30분. 바다로 조업 나갔던 배들이 다시 부두로 돌아와 엔진을 끄고 고단했던 하루를 정리하고 있었다. 일 나갔던 아내를 기다리던 신씨도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쌀쌀한 새벽에 낚시꾼들의 속을 든든히 채워주는 간이슈퍼도 단단히 문을 내렸다. 오후 5시. 만석포구는 언제 사람이 오갔냐는 듯이 시치미를 떼고 고요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바로 그 순간 세상이 멈춰버린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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