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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등산사진후기☞/♤ 관악산·삼성산·호암산

[20091101]목골산과 호암산을 거쳐 삼성산 성지에 다녀오다 - 2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09.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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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11월 01일(일)  
목골산과 호암산을 거쳐 삼성산 성지에 다녀오다.

 

 '목골산과 호암산을 거쳐 삼성산 성지' 코스 :

구로전화국앞 정류장→한울중학교→문성중학교→독산고교→영남초교→삼각점봉→정심초교→금천정ㆍ금천체육공원→호압사 갈림길

→목골산 정상(164.3m)→관악산생태공원→선우약수→호압사갈림길→천불사갈림길→산림감시초소→산복터널→호압사→구름발치길

→전망바위→돌고래바위→헬기장→민주동산(393m)→흔들바위→조망대→육각정→삼호약수→삼성산성지→삼성산청소년수련관

 

 맥가이버의 '목골산과 호암산을 거쳐 삼성산 성지까지' 이야기

 

오늘은 구로전화국앞 정류장에서부터 한울중학교 담을 따라 난 길을 가다가 문성길을 건너 문성중학교 정문앞에서

독산고교쪽으로 죄회전하여 영남초교 정문 좌측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일단 목골산으로 향하면서 널널산행이 시작된다.

  

'목골산과 호암산을 거쳐 삼성산 성지에 다녀오다'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목골산과 호암산을 거쳐 삼성산 성지에 다녀오다' - 2부를 시작하며...

 

▼ 10시 07분 - '관악산 생태공원'에서...

 

 

 

 

 

▼ 선우약수터를 지나...

 

 

▼ 화살나무

 

 

 

 

 

▼ 저 위는...

 

▼ 10시 15분 - 조금 전(09시 56분)에 지났던 호압사 2.0km 갈림길...

 

▼ 이제 호압사 방향으로...

 

 

 

 

 

 

▼ 10시 19분 - 배드민턴장을 지나...

 

 

 

 

 

 

 

▼ 10시 25분 - 천불사 갈림길

 

 

 

 

 

▼ 10시 28분 - 산림감시초소를 지나...

 

 

 

 

▼ 10시 33분 -

 

 

▼ 이것도 국화인 듯...

 

  

 

 

 

 

 

 

 

 

 

▼ 10시 50분 - 호압사 600m지점을 지나...

 

 

 

 

 

 

 

▼ 10시 55분 - 갈림길

 

 

▼ 호암산문 방향으로...

 

 

 

 

▼ 11시 00분 - 호압사 아래주차장을 지나...

 

 

▼ 11시 03분 - 호압사

 

 

▼ 호압사 연혁 및 유래

 

 

☞ 호압사에 대하여

 

 

호압사가 창건된 데에는 두 가지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먼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금천조에는 지금의 시흥군의 현감을 지냈다고 하는 윤자(尹滋)의 이야기가 전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금천의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고, 그런 중에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범바위(虎巖)라 부른다. 술사가 이를 보고 바위 북쪽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하였다.....”라 하고 있다.

또 다른 전설로는 1394년(태조 3)을 전후해 조선의 도읍을 서울로 정하고 궁궐을 짓는 과정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즉 태조가 서울에 궁궐을 세울 때 전국의 장인을 모아 진행했는데, 여러 차례에 걸쳐 밤만 되면 무너져버려 노심초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어둠 속에서 괴물이 나타났는데 반은 호랑이고, 반은 형체조차 알 수 없는 이상한 동물이었다. 이 괴물은 눈으로 불길을 내뿜으며 건물을 들이받으려고 하였다. 이때 태조가 괴물에게 화살을 쏘라고 하였고, 화살은 빗발처럼 쏟아졌으나 괴물은 아랑곳없이 궁궐을 무너뜨리고 사라졌다.

태조가 침통한 마음으로 침실에 들었을 때 한 노인이 나타나 "한양은 비할 데 없이 좋은 도읍지로다"라며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의 한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태조는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호랑이 머리를 한 산봉우리가 한양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인에게 호랑이 모습을 한 산봉우리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노인은 "호랑이란 꼬리를 밟히면 꼼짝 못하는 짐승이니 저처럼 호랑이 형상을 한 산봉우리의 꼬리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다."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 다음날부터 이곳에 절을 짓고 호압사(虎壓寺)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위의 두 설화는 공통적으로 풍수지리설과 비보사찰설이 가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산의 모양을 호랑이로 본 것이며, 이를 누르기 위해 절을 창건했다는 이야기이다.

호압사의 창건기록으로는 호압사의 본사였던 봉은사에서 엮은 '봉은사 말사지'에서 볼 수 있는데 1407년인 조선태종7년에 창건하였다고 하며 또한 태종임금이 호압이란 현액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있습니다. 그러나 1394년(태조 3)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라는 관청을 두고 궁궐을 짓는 공사를 시작했고, 이듬해에 궁궐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호압사는『봉은본말지(奉恩本末誌)』의 기록보다는 태조 2년이나 3년 무렵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호압사의 역사는 이후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세기에 전국 사찰의 위치와 연혁 등을 기록한 범우고(梵宇攷)나 가람고(伽藍攷)에도 호암사(虎巖寺) 또는 호갑사(虎岬寺)라 하여 간략하게 나올 뿐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다가 호압사는 1841년(헌종 7)에 이르러 중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의민(義旻) 스님 쓴 「경기좌도시흥삼성산호압사법당현판문(京畿左道始興三聖山虎壓寺法堂懸板文)」에 의하면 이 해에 당우가 퇴락한 것을 당시 상궁 남씨(南氏)와 유씨(兪氏)의 도움을 받아 법당을 고쳐지었다는 것이다.

고려 말 ·조선 전기의 스님으로 속성은 박씨(朴氏), 호는 무학(無學)·계월헌(溪月軒)이다. 삼기(지금의 합천) 출생으로 18세에 소지선사(小止禪師)의 제자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서 불법을 배웠다. 진주(鎭州) 길상사(吉祥寺)·묘향산 금강굴(金剛窟) 등에서 수도하다가, 1353년(공민왕 2) 원(元)나라 연경(燕京)에 유학하여 그때 원에 와 있던 혜근(惠勤)과 지공(指空)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356년 귀국하여 1373년에 왕사(王師)가 된 혜근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1376년 혜근이 회암사(檜巖寺)에서 낙성회(落成會)를 연 때 수좌(首座)로 초청하였으나 사양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어,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전불심인변지무애부종수교홍리보제도대선사(傳佛心印辯智無碍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묘엄존자(妙嚴尊者)의 호를 받고 회암사에서 지냈다.

이듬해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漢陽)을 오가며 지상(地相)을 보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데 찬성하였다. 1397년(태조 6)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우고, 1402년(태종 2)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 머물다가 입적하였다.

저서에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 《인공음(印空吟)》이 있다.

 

고려가 서산의 노을처럼 스러지고 불끈 솟은 새벽녘 태양처럼 조선이 건국될 무렵의 이야기다. 태조 이성계는 오래도록 사직을 이어가기 위해 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었다. 우선 고려의 옛 서울인 개경에 벗어나 새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고, 곧바로 궁궐을 짖기 시작했다.

그런데 궁궐 공사는 태조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웬일인지 터를 닦고 기둥을 세우고 이제 곧 완성하겠구나 하면 밤새 건물이 허물어지는 것이었다. 그러기를 벌써 몇 번째나 그러고 있었다.

태조는 명령을 내려 전국의 유명한 대목(大木)들을 모두 불러 올렸다. 그들은 상경하기 전부터 소문을 듣고 있었던 터라 각별히 심혈을 기울여서 궁궐 건축을 서둘렀다. 하지만 그들의 정성과 솜씨도 할 수 없었다. 역시 거의 다 지어서 완성 단계에 이른 건물이 계속 밤사이에 무너져 버리는 것이었다.

밤 사이 건물이 무너지면 다음 날 아침엔 모든 일을 새로 시작해야만 하는 것이다. 무너진 건축 자재들을 치우고, 터를 다지고 이러한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보니 공사는 자연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벌써 몇 번째인가? 대궐 공사를 진행시키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기진맥진이었다.

참다 못한 이성계는 드디어 친히 공사장을 찾았다. 그리고 대목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사람을 불러서 공사가 완공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다그쳤다.

"예, 황공하옵니다. 마마."
"너희는 어이하여 바쁜 공사를 게을리하여 대궐의 완성을 더디게 하느냐?"


대목은 꿇어 엎드린 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빨리 그 연유를 대지 못할까?"
"예."


대목은 모기만한 소리로 간신히 말을 했다.

"기둥을 세우고 이젠 한시름 놓았다 하면 밤 새에 무너져 버리곤 하옵니다."
"그거야 너희들이 서툴러서 그런 것이 아니냐?”
"그것은 천부당만부당 하옵니다. 마마."
"그럼 아니란 말이냐?"


이성계는 굵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커다란 눈을 치켜 떴다.

"너희들이 바른 정신으로 심혈을 기울여도 언제나 밤새에 무너진다는 것이냐?"
"웬일인지 저희들은 낮 동안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도 항상 악몽에 시달리옵니다. 누구나 다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꿈을 꾼다고들 하옵니다. 상감마마."
"무슨 해괴한 소린고? 이는 필시 짐을 우롱하는 소리렸다!"
"아니옵니다, 마마. 이 몸도 악몽으로 밤마다 시달리고 있사옵니다. 새벽이면 잠자리에 식은 땀이 흥건하옵니다."


태조도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대목과 일꾼들을 더는 나무랄 수가 없었다.
대목이 좀 더 보충설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몇 마디를 덧붙였다.

"저희들은 의심을 풀 길이 없사와 힘센 장시들을 뽑아서 그들과 함께 지난 밤엔 궁궐의 일터를 지키고 있었사옵니다."
"그래서?"
"부엉이가 울고 난 뒤였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 한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괴물이라, 그래서?"
"소인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반은 호랑이요 반은 그 형체조차 알 수 없는 괴물이 나타나서 저희들이 낮 동안 세워 놓은 건물을 마구 부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태조는 친히 용맹한 무리들을 거느리고 궁궐 일터를 지켜보기로 했다.
깊은 밤중이라 사위는 고요하기만 했다. 그 때 무엇인가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기척이 있었다. 모두들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순간 가만가만 다가오던 괴물은 우뚝 네 발로 버티어 섰다. 그것은 아닌 게 아니라 엄청나게 큰 괴물이었다.
반은 호랑이의 모습인 괴물. 괴물은 두 눈으로 불길을 내뿜으며 곧장 세우다만 대궐로 가까이 다가갔다. 건물을 들이받으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저 짐승에게 활을 쏘아라!"

마침내 태조가 소리를 쳤다. 그와 동시에 화살이 빗발처럼 괴물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괴물은 끄떡 않고 궁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괴물은 자기가 할 일을 끝내자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아, 암담하구나! 달을 보기에도 부끄럽구나. 한양은 내가 세울 도읍지가 아니었던가?"

침실로 돌아온 이성계는 침통하게 뇌까렸다.
그 때였다.

"장군, 장군의 안목은 훌륭하시오. 한양은 비할 데 없이 좋은 도읍지가 될 것이오."

어디선지 노인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성계는 지체하지 않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뜰에는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서 있었다.

"이 밤중에 뉘시온지?"

이성계는 의아해서 물었다.

"그런 건 아실 것 없고, 장군에게 심려가 있는 것 같아 그것을 조금이라도 덜어 드릴까 하고 왔소이다."

노인은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찾아온 뜻을 말했다.

"감사합니다. 무슨 묘안이라도 있으신지?"

이성계는 공손히 허리를 굽혀 물었다.

"장군, 달빛이 휘황한데 저기 한강 남쪽 산봉우리를 보시오."

이성계는 노인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길을 돌리다가 깜짝 놀랐다. 평소에는 몰랐던 것이 지금에야 바라보니 산의 형상이 꼭 호랑이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호랑이 형상의 산봉우리가 한양을 짓누르고 있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태조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저 봉우리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가르쳐 주시오."
"장군, 그것은 어렵지 않소이다. 호랑이란 본시 꼬리를 밟히면 꼼짝 못하는 짐승이라오.”


노인은 호랑이의 형상을 한 산봉우리의 꼬리 부분에다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우리라고 일러 주고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태조는 노인이 말한 대로 절을 짓도록 명했다.
절이 완성되기를 기다려서 말썽 많은 대궐 공사를 진행했다.
절이 호랑이 꼬리를 밟고 있어서인지 이번엔 순조롭게 궁궐 건축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이 산이 바로 금천구 시흥에서 동쪽으로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관악산 줄기인 삼성산이다. 이 삼성산에는 그 때 지은 호압사(虎壓寺)라는 절이 지금도 법등을 밝히고 있다.

 

- 이상 호압사 홈에서 -

 

 

 

 

 

 

 

 

 

 

 

 

 

 

 

▼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

 

▼ 호압사를 돌아보고...

 

 

▼ 11시 15분- 현위치 K81 호압사

 

 

▼ 구름발치길 안내

 

 

 

 

 

 

 

 

 

 

  

 

 

 

 

▼ 11시 27분 - 전망바위

 

☞ 여기서 '목골산과 호암산을 거쳐 삼성산 성지에 다녀오다' - 2부를 마치고...

 

 

 

2009년 11월 01일(일)

'목골산과 호암산을 거쳐 삼성산 성지에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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