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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경기 도보후기☞/☆ 강화도의 산&길

[20100109]강화나들길 1코스-심도로 드는 길(용흥궁에서 갑곶성지까지)-2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10.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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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01월 09일(토) 

강화나들길 1코스-심도로 드는 길(용흥궁에서 갑곶성지까지)을 다녀오다.

 

 '강화나들길 1코스-심도로 드는 길(용흥궁에서 갑곶성지까지)' 코스


강화터미널→강화우체국→김상용 순절비용흥궁 공원용흥궁성공회 강화성당→강화초교→천주교 강화성당고려궁지은행나무

→관제묘(북관운묘)한옥마을강화향교은수물 약수터북문(진송루)북장대오읍약수→송학골빨래터→대월초교(황형장군묘?)

→선학골 갈림길→월곶리 마을회관→민통선 제9검문소 앞연미정→강화검문소 정류장→용정리(옥계방죽) 해안길→고인돌테니스클럽

→해운사 입구→강화대교 아래 통과→갑곶 순교성지→갑곶 쉼터→갑곶진→강화문화회관→진해공원강화청소년수련관 앞 정류장 

 

맥가이버의 '강화나들길 1코스-심도로 드는 길(용흥궁에서 갑곶성지까지)' 이야기

 

오늘은 강화나들길 1코스인 '심도로 드는 길(용흥궁에서 갑곶성지까지)'을 네이버카페 김포시걷기동호회원들과 함께 한다.

'김포시 걷기동호회'와는 '김포둘레길 걷기'와 '서울성곽길 걷기'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인연이다.

 

 '모든 만남은 걷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길을 걷다보면 새로운 풍광을 보게 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 강화나들길 1코스- 심도로 드는 길(용흥궁에서 갑곶성지까지)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맥가이버가 '때론 함께, 때론 홀로' 산행이나 여행, 도보여행를 하면서 후기를 주로 사진으로 작성함은
인간의 기억력이 유한함을 알기에 훗날 그 당시의 풍광과 그리고 함께 했던 님들과의 추억을 되살리고자 함이고,
인간의 만남이 또한 유한함을 알기에 어떤 연유로 비록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추억 속에서 함께 하고자 함이고,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걸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하는 무능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든다면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자 할 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강화나들길 1코스- 심도로 드는 길(용흥궁에서 갑곶성지까지) - 2부를 시작하며...

 

▼ 행복이 가득한 집 앞에서 골목길을 막아선 기름차로 잠시 정체되어...

 

 

 ▼ 관제묘(북관운묘) - 관우를 모신 사당

 

 

 

 ▼ 한옥마을을 지나...

 

 

 

 ▼ 한옥마을에서 강화향교 방향으로...

 

 

 ▼ 강화향교 유림회관

 

 

 ▼ 강화향교

 

강화향교(江華鄕校) 


이 향교는 고려 인종5년(1127) 내가면 고천리(고읍)에서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고종 19년(1232) 강화읍 갑곶리(먹절)로 옮겼다가 고종 46년(1259) 서도면 볼음도로 옮겼고

조선 인조2년(1642)에는 유수 심열이 송악산 기슭이로 옮겼으며,

인조 7년(1629)에 유수 이안놀이 위패를 모시고 명륜당을 세우는 등 비로서 완전한 체제를 갖추어 학궁이라 하였다 한다.


현종 14년(1673) 유수 민시중이 남산골로 옮겼으나 영조 7년(1731) 유수 유척기가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경내에는 중국의 5성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강학하던 명륜당 및 내·외삼문 등이 있고,

동·서무는 터만 남아 있는데 현재의 건물들은 근래에 중수 또는 신축된 것이다.

  

 

 

 

 

 

 

 

 

 

 ▼ 은수물 약수터/빨래터

 

 

 

 

 

 

 ▼ 강화산성 서문 방향...

 

강화산성(江華山城)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서 지었다.


남문인 안파루·북문인 진송루·서문인 첨화루와 동문인 망한루가 남아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 강화산성 북문 방향으로...

 

 ▼ 강화산성길을 계속 오를 수 없어 이곳에서 리기다소나무숲길로...

 

 

 

 

 ▼ 강화산성 북문 주차장에 도착...

 

 

 ▼ 강화산성 북문 진송루

 

 

 

강화산성(江華山城)

 

권신(權臣) 최이(崔怡)는 강화천도(江華遷道)에 앞서서 1232년(年) 영군(領軍)을 동원(動員) 하여

화(江華)에 궁궐(宮闕)을 짓고 도성(都城)을 축조(築造)하였다.

그리하여 고려(高麗)는 몽고(蒙古)의 제2차 침입(侵入)이 있는

1232년 6월 16일 대몽항전(對蒙抗戰)의 기치를 들고 강화도(江華島)로 천도(遷都)하였다.

그러나 왕궁(王宮)과 도성(都城) 및 관아의 시설이 완비(完備)된 것은 아니었다.

 

제도(諸道)의 장정(壯丁)을 징발하여 강화성(江華城)과 궁궐 및 백사공해(百司公해)를

본격적으로 영조(營造)하기 시작한 것은 1234년 1월부터이다.

이때 송도(松都)의 궁궐과 비슷하게 하여 산(山)의 이름까지 송악(松岳)이라 하였다.

 

고려(高麗)의 성(城)은 내성(內城), 중성(中城), 외성(外城)이 있었는데 내성은 주위(周圍) 3874척(尺)으로 지금의 강화성이며

중성은 1250년에 축성(築城)하였는데 주위(周圍)가 2960여간(餘間)으로 지금 선원면(仙源面)의 토성지(土城址)가 그곳인 듯하다.

외성은 1233년에 축조(築造)하기 시작하였는데 강화동쪽 해협(海峽)을 따라 길이가 37070척(尺)이였다 한다.

이들 성(城)은 모두 토성(土城)으로 축조되었다.

 

1270년(고려원종(高麗元宗) 11년) 5월 23일 개경(開京)으로 환도(還都)하면서

몽고(蒙古)의 요청(要請)으로 강화(江華)의 성(城)을 헐었던 것이다.

조선초기(朝鮮初期)에 다시 축성(築城)하면서 고려(高麗)의 내성(內城)이던 강화성(江華城)울 축소시켰다.

 

1637년 병자호란(病子胡亂)때 청군(靑軍)에 의하여 다시 파괴당하고

1677년 숙종조(肅宗朝)에 강화유수(江華留守) 허질(許秩)이 대대적인 개축공사(改築工事)를 하면서

성(城)의 규모(規模)를 고려시대(高麗時代)의 내성규모(內城規模)로 넓혀서 전면석성(全面石城)으로 축성(築城)하였다.

그 후 1709년 강화유수 박권(朴權)이 다시 개축(改築)하였고 조선말기(朝鮮末期)에 보수(補修)가 계속되었다.

 

성문(城門)은 동서남북(東西南北)에 4개소가 있고 암문(暗門)이 4개소 수문(水門)이 2개소가 있었다.

성문(城門)의 문루(門樓)는 남문에 안파루(晏波樓), 서에 첨화루(瞻華樓), 북에 진송루(鎭松樓), 동에 망한루(望漢樓)가 있었다.

첨화루는 1711년 강화유수 민진원(閔鎭遠)이 건립(建立)하였고 안파루는 퇴락되어 쓰러지자 1973년에 다시 복원(復元)한 것이다.

북문의 진송루(鎭松樓)는 원래 문루(門樓)가 없었던 것을 1783년 성(城)을 개축(改築)하면서 건립(建立)되었다.

수문(水門)은 서문과 동문 옆에 있었는데 서문 옆의 것은 1900년경에 갑곶진(甲串鎭) 옆으로 옮겨져 있다.

동문쪽은 강화 시가지(市街地가 되어 성과 문루도 없어지고 말았다.

현재(現在) 성은 강화읍(江華邑)의 남북 산자락으로 완전히 남아있고 동쪽이 없어졌다.

체성(體城)은 석축(石築)으로 견고하게 쌓고 그 위에 여장을 설치(設置)하였던 것인데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조선말(朝鮮末)에는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와

일본침략(日本侵略)에 의한 강화조약(江華條約)을 체결한 수많은 외침(外侵)의 역사 현장이다.

 

 

 

 ▼ 북문 안쪽 길은...

 

 

 ▼ 미끄럼방지를 하고...

 

 ▼ 북문에서 북장대방향으로 산성을 따라...

 

 

 

 

 

 

 

 ▼ 고려산이 보이네...

 

 

 

 

 

 

 

 

 

 

 

 

 

 

 

 

 

 

 

 

 

 

 

 ▼ 오읍약수터 방향으로...

 

 

 

 

 

 

 ▼ 새집 위에 쌓인 눈...

 

 

 

 

 

 

 

 ▼ 오읍약수

 

오읍약수(五泣藥水)

 

강화산성 북문인 진송루 동쪽 북산 골짜기에 있으며 고려 고종이 강화천도 후 내성을 수축할 때

장정들이 목이 말라 애타고 있을 때 갑자기 청천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지금의 약수터 위 바위가 깨지면서 샘물이 솟아 역군에게 크게 도움을 주었다고 하며

 

오읍은 몽골침입 때에 피해온 실향민들의 향수를 그려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신이 울었는가 하면 황제가 울고, 온 백성이 울었다는데서 유래되었다.

 

 

 ▼ 송학골빨래터로 이동...

 

 

☞ 여기서 강화나들길 1코스- 심도로 드는 길(용흥궁에서 갑곶성지까지) - 2부를 마치고...

 

 

 

 2010년 01월 09일(토) 

강화나들길 1코스-심도로 드는 길(용흥궁에서 갑곶성지까지)을 다녀오다.

 

-▥☞ 1부[강화터미널→용흥궁공원→용흥궁→성공회 강화성당→강화초교→고려궁지→은행나무→행복한 집]는 여기를 클릭.☜▥-

 

-▥☞ 2부[행복한 집→북관운묘→한옥마을→강화향교→은수물 약수터→북문(진송루)→북장대→오읍약수]는 여기를 클릭.☜▥-

 

-▥☞ 3부[오읍약수→송학골빨래터→대월초교→잣나무숲길→황형장군묘?→월곶리마을회관→연미정 식당]는 여기를 클릭.☜▥-

 

-▥☞ 4부[연미정→옥계방죽→고인돌클럽→해운사 입구→강화대교→갑곶순교성지→갑곶진→강화문화회관]는 여기를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