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1월 31일(일)
용문산 등정기(백운암-백운봉-함왕봉-장군봉-가섭봉-용문사)
'용문산 등정기(백운암-백운봉-함왕봉-장군봉-가섭봉-용문사)' 코스
용산역→용문역→용문 버스터미널→연수1리 버스종점→청소년수련관→백운암→쉼터(의자 2)→형제우물→백운봉능선 형제우물 갈림길
→백운봉(940m)→백운봉능선 형제우물 갈림길→형제우물 우회로→구름재(813m)→여우봉(865m:암봉 전망대)→헬기장→사나사 갈림길1
→사나사 갈림길2→함왕봉(삼각점:947m)→장군봉(1064m)→정상 우회로 이정목→너덜지대→가협치→용문산 전망대(장군봉 갈림길)
→용문산 정상 가섭봉(1157m)→용문산 전망대→용문산 능선길4(평상/마당바위 갈림길)→용문산 능선길3→용문산 능선길2(안내판)
→상원사 갈림길2→상원사 갈림길1→용문사→일주문→친환경농업박물관→용문산관광지 정류장→용문버스터미널→용문역→용산역
용문산(龍門山:1,157m) 소개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과 옥천면 경계에 있는 산.
높이 1,157m. 양평(楊平) 북동쪽 8km, 서울 동쪽 42km 지점에 위치한다.
광주(廣州)산맥계에 속하나 독립된 한 산괴로서 산체(山體)가 웅대하여 동서 8km, 남북 5km에 걸치고,
용문산을 주봉으로 하여 동북동 5.5km의 도일봉(道一峰:864m), 동쪽 4.5km의 중원산(中元山:800m),
남서 3.5km의 백운봉(白雲峰:940m) 등 지봉(支峰)이 용립(聳立)하여 연봉을 이루고 있다.
정상은 평정(平頂)을 이루고 능선은 대지(臺地)가 발달하였으며,
특히 중원산과의 중간에는 용계(龍溪)·조계(鳥溪)의 대협곡이 있고,
그 사이에 낀 대지는 수 100m의 기암절벽 위에 있어 금강산을 방불케 한다.
북쪽은 완경사, 남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첩첩이 쌓인 암괴들이 나타나며 깊은 계곡과 폭포도 볼 수 있고,
용문산 북서 일대는 고도 700∼1,100m의 약 4㎢의 고위평탄면이 나타난다.
남쪽 산록 계곡에는 용문사(龍門寺)·상원사(上院寺)·윤필사(潤筆寺)·사나사(舍那寺) 등 고찰이 있고,
용문사 경내에 있는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고 나무가 차지하는 면적이 260㎡나 된다.
또 이곳에는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 부도(正智國師浮屠) 및 비(碑) 2기가 있다.
- 네이버 테마백과사전에서 -
맥가이버의 '용문산 등정기(백운암-백운봉-함왕봉-장군봉-가섭봉-용문사)'
작년 말 중앙선 전철이 용문역까지 완전 개통되어 용문산을 찾아가는 교통이 편리해졌기에
지난 1월 8일(금)에는 용문역에서 용문사를 거쳐 용문산 정상 가섭봉에 올라 장군봉을 경유하여 상원사로 하산하고,
상원사에서 용문사로 가서 용문산관광지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용문역에서 전철로 귀가한 적이 있는데...
2010년 01월 08일(금) 용문산(용문사-가섭봉 정상-장군봉-상원사-용문사) 답사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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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용문산 산행은 지난 번과는 역방향으로 진행을 하면서 백운봉을 오르기 위해 연수1리에서 시작한다.
연수1리에서 백운암을 거쳐 형제우물, 백운봉, 여우봉, 함왕봉, 그리고 장군봉까지 코스는 초행길이지만
기존 등산로를 따라가는 것이기에 길찾기에는 애로가 없겠지만 출발 전에 지도와 선답자의 산행기를 봐 두었다.
'모든 만남은 걷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길을 걷다보면 새로운 풍광을 보게 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 장군봉에 도착...
▼ 봉우리 정상이 아닌 곳에 '장군봉'이라는 표시가...좌측 받침돌 위에 있던 정상표지석은 어디로 갔나?
▼ 아마 장군봉의 정상에 ?시설물이 있어 이곳을 정상으로 표기한 듯...(1월 8일에는 이곳에서 상원사 방향으로 하산)
▼ 이제부터는 1월 8일 코스를 역방향으로 가고...
▼ 여기가 장군봉 정상일 텐데 저 시설물 때문에 정상석을 놓을 수 없었던 것으로 판단되네...
▼ 여기서 정면으로 가면 군부대가 나오고...그곳에서 좌측으로 유명산으로 이어지는 배너미고개로 가는 길이 나올 듯...
▼ 우측 용문산으로...
▼ 저기 '등산로 아님'이라는 곳으로 가면 운필암이 나오는 듯...
▼ 여기가...
▼ 용문산 전망대(장군봉 갈림길) - 정상에 올랐다가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야...
▼ 용문산 정상이 개방되기 이전에 정상표시가 있던 곳...
▼ 이제는 용문산 정상이 개방되어...
▼ 용문산 정상석(1157m)
용문산 태고선사의 영원한 수행도량
김윤우(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인산 산악회 회장)
용문산(龍門山:1157m)은 고려 말기에 해동 임제종(臨濟宗)의 초조(初祖)인 태고선사(太古禪師:1301~1382)가 이 산기슭에서 태어난 후 이 산기슭에서 생애를 마칠 때까지 작은 설산(雪山)으로 여기고 그의 영원한 수행도량으로 삼은 수행 명산이다.
경기도 양평군(楊平郡)의 용문면(龍門面) ․ 옥천면(玉泉面) ․ 단월면(丹月面)과 가평군(加平郡)의 설악면(雪岳面) 지역에 걸쳐 위치한, 양평의 진산(鎭山)이다. 이 산은 백두대간상의 오대산 두로봉에서 갈라져 나온 한 지맥이 서남쪽으로 뻗어가면서 계방산(桂芳山:1577.4m)을 이루고, 운두령→보래령을 경유한 후 태기산(泰岐山) 일대의 덕고산→운무산→수리봉→대학산→오음산(五音山:930.4m)→성지봉→갈기산(685.4m)으로 뻗어가다가 신당고개 ․ 비슬고개를 지나 도일봉(863.7m) 일원의 싸리재를 경유한 후 문례봉(992m) 일대에 이르러 북에서 남으로 용(龍)의 등줄기와 같은 큰 산줄기를 이루며 뻗어가고 있는, 경기 일원의 큰 산이다.
용문산은 상봉인 가섭봉(伽葉峯:1157.2m)을 중심으로 하여 북쪽으로 뻗어나가면서 문례봉(992m)과 봉미산(鳳尾山:855.6m)을 형성하고, 문례봉에서 동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에는 도일봉(841m)이 위치한다. 문례봉과 도일봉 사이에서 남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에는 용조봉(635m)과 중원산(中元山:799.8m)이 위치하고, 가섭봉과 문례봉 사이의 문례재에서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에는 용문봉(947m)이 위치한다. 상봉에서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와 용문봉 능선 사이에는 현재 절골 또는 용각골[龍角谷]로도 불리고 있는 용계(龍溪)가 위치한다. 용문산은 또 상봉이 남쪽으로 뻗어나가면서 함왕봉(咸王峯:947m)과 백운봉(940m)을 형성하고 있으며, 함왕봉 능선 서쪽에는 수량이 풍부한 함왕골이, 능선 동쪽에는 상원골이 자리하고 있다. 용문봉과 용조봉 사이에는 조계골, 용조봉과 중원산 사이에는 속칭 용계골이 자리하고 있으며, 중원산과 도일봉 사이에는 중원폭포 등의 폭포와 담소를 갖추고 있는, 수량이 풍부하고 경관이 좋은 중원계곡이 자리하고 있다. 용문산은 남쪽의 백운봉에서, 또는 동쪽의 산기슭 용문사 입구 쪽에서 등 어느곳에서나 대체로 잘 조망되나, 특히 동쪽 중원산에서 바라보면 용(龍)의 등줄기 같은 장대한 산줄기가 남북으로 뻗어가면서 큰 산세를 이루고 있는 것이 잘 조망된다.
용문산의 산 이름
조선시대 허목(許穆:1595~1682)의《기언(記言) 권28》 <미지산기(彌智山記)>와, 이만부(李萬敷:1664~1732)의 《지행록(地行錄)》미지산조에 의하면, 용문산의 상봉은 가섭봉(伽葉峯)이라 불리었고, 가섭봉 북쪽에 위치한 봉미산은 소설산(小雪山)으로 불리었음을 살 필수 있다. 또 위의 <미지산기>에 의하면, 가섭봉 아래쪽에 묘덕봉(妙德峯) ․ 윤필봉(潤筆峯), 윤필봉 아래쪽에 죽장봉(竹杖峯), 죽장봉 남쪽에 상원봉(上元峯), 상원봉 아래쪽에 묘적봉(妙寂峯)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들 산봉우리가 현재의 어느 산봉우리를 지칭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대체로 지금의 상봉에서 남쪽 백운봉까지의 함왕봉능선 일대와 그 동쪽 윤필암터 및 상원사 일대로 뻗어내린 산줄기상에 위치한 산봉들로서, 묘덕봉은 옛 묘덕암(妙德庵), 윤필봉은 옛 윤필암(潤筆菴), 죽장봉은 옛 죽장암(竹杖菴), 상원봉은 현 상원사(上元寺)의 주봉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용문산의 산 이름은 본래는 미지산(彌智山)으로 불리었으며, 조선시대까지도 용문산의 별칭으로서 함께 병칭되어 왔다. 불가의 설에 의하면, 고승대덕들의 ‘덕풍지광(德風智光)이 미만(彌滿)해 있다’ 는 뜻에서 그렇게 명명한 것이라 한다. 이만부의 《지행록》에 의하면, 양평군 일대에서 옛 양근군(楊根郡) 지역에서 보고 용문(龍門)이라 지칭하였고, 옛 지평현(砥平縣) 지역에서 조망할 때에 미지(彌智)라 지칭한 것이라 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도 양근군 산천조에서는 이 산을 용문산이라 언급하고, 지평현 산천조에서는 이 산을 미지산이라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만부의 설은 근거가 있는 이야기라 본다.
용문산의 본래의 산 이름이 미지산이었음은 최언위(崔彦撝:868~944)가 나말여초(羅末麗初)의 고승 여엄(麗嚴: ?~929)의 사적을 기록한《고려국미지산보리사대경대사현기탑비(高麗國彌智山菩提寺大鏡大師玄機塔碑)》의 비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비문에 의하면, 용문산은 적어도 나말여초부터는 미지산으로 불러왔음을 살필 수 있다. 또 고려조 이색(李穡:1328~1396)의 <지평현미지산죽장암중영기(砥平縣彌智山竹杖菴重營記)>와 <지평현미지산용문사대장전기(砥平縣彌智山龍門寺大藏殿記)> 및 여말선초(麗末鮮初) 정도전(鄭道傳:?~1398)의 <미지산사나사원증국사석종명(彌智山舍那寺圓證國師石鐘銘)>과 권근(權近:1352~1409)의 <조선국미지산용문사정지국사비명(朝鮮國彌智山龍門寺正智國師碑銘)> 등의 기록에 의하면, 미지산이란 산 이름은 여말선초까지도 대체로 용문산의 주명(主名)으로 불리어 왔음을 살필 수 있다
용문산이 속칭 미리산 또는 미디산 ․ 미지산으로도 불리어진 것을 보면, 미지산의 ‘미지(彌智)’는 용(龍)의 우리말 ‘미리’의 옛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彌智’는 곧 ‘미디→미지’의 소리옮김 표기로서 용의 우리말 ‘미르 ․ 미리’의 고형(古形) 표기라 생각된다. 그 일례를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에서 살펴보면, 지금의 의성군(義城郡) 단밀면(單密面) ․ 단북면(單北面) 일대에 위치하였던 단밀현(單密縣)은 본래 무동미지(武冬彌知), 일명 갈동미지(曷冬彌知)였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단밀로 고쳤다고 하였다. 이 내용에 의하면, ‘單’은 ‘武冬’ 또는 ‘曷冬’과 대응되고, ‘密’은 ‘彌知’와 대응된다. 그렇다면 ‘彌知’는 ‘密’로 전음(轉音)되기 이전의 고형태 표기라 하겠다. ‘彌知’는 곧 ‘미디→미지 ․ 믿 ․ 밎’의 소리옮김이라 본다. 그렇다면 용의 우리말도 ‘미디→ 미지→ 미르 ․ 미리’로 전음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언어학적 관점에 의하면, 일본어 속에서도 우리 고대어의 잔형(殘形)이 상당수 드러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곧 일본어에서 빽빽하다, 친밀하다는 뜻으로 ‘密’ 이라 쓰고, 이의 독음을 ‘미쯔(みっ)’라 하며, 또 셋[三]을 ‘미쯔(みっ)’라 하기도 한다. 이에 의해서도 ‘미르 ․ 미리’의 고형태는 ‘미디 ․ 미지’였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삼국사기》지리지에 의하면, 밀성군(密城郡:현 밀양군)은 본래 추화군(推火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밀성군으로 개명되었고, 현효현(玄驍縣:현 대구시 현풍면)은 본래 추량화현(推良火縣) 일명 삼량화현(三良火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현효현으로 개명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密’은 고대에 ‘推’ 또는 ‘推良’ 또는 ‘三良’ 으로도 표기하였는데, 이들 표기는 곧 ‘밀 ← 믿← 미디 ․ 미지’ 의 뜻옮김 표기라 하겠다. ‘龍山’을 뜻하는 ‘彌智山’ 이 고려 말엽 까지도 용문산의 주명으로 불리어지고, 조선시대까지도 용문산의 일명으로 계속 남아있게 된 것은 곧 우리말의 변천과정에서 목단(牧丹)→ 모란, 글단(契丹)→ 거란 및 도장(道場)→ 도량, 차제(次第)→ 차례의 예처럼 대체로 ‘ㄷ ․ ㅈ(t)’ 이 ‘ㄹ(r)'로 전음된 어음변화를 일으켰으나, 일찍이 ‘龍山’의 우리말을 소리 옮김한 고형태 한자표기가 불교적 의미의 산 이름으로 부회(附會)하여 볼 수 있는 면도 있어서 그러한 어음변화에 동화되지 않은 채 처음의 표기 그대로 굳어진 경우라 하겠다. 우리말에서 용(龍)의 의미로서 ‘미리’ 와 ‘미지’가 같이 쓰였을 가능성은 다음과 같은, 황윤석(黃胤錫:1729~1791)의 견해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방언(方言)에 용(龍)을 ‘미리(彌里)’라 부르고, 또 증보(證保)의 保를 ‘미지(彌知)’라 하였다 [지(知)의 초성(初聲)을 미(彌)의 종성(終聲)으로 삼아 둘을 합한 소리이다]. 그 때문에 의주(義州)의 옛 이름을 보주(保州)라 일컬었고, 또 용만(龍灣)이라고도 일컬은 것이다. ” [《이재선생유고(頤齋先生遺稿) 12, 화음 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
이상에서 살핀 바에 의하면, 용의 우리말 ‘미르 ․ 미리’는 ‘密 ․ 彌里’ 등으로 소리옮김하여 표기되기도 하고, 또 이의 고형태 표기로서 ‘彌智 ․ 彌知’ 로도 소리옮김하여 표기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용문산의 본래 이름 ‘彌智山’은 ‘龍山’ 의 우리말 ‘미르뫼 ․ 미리뫼’를 소리옮김한 고형태 차음표기라 하겠다. 그 때문에 용문산 일원에는 유달리 용(龍)자가 붙은 지명이 많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용문산 서쪽 사나사가 위치한 옥천면 관내에 미르내를 뜻하는 마을 이름의 용천리(龍川里)가 있고, 용문산 동쪽에 용문봉 ․ 용조봉이 위치하며, 동쪽 산기슭 용문산에서 마당바위 방면으로 오르는 현 절골(또는 용각골)의 본래 이름이 용계(龍溪), 그리고 용문사 좌측의 용계가 등산로로 올라 삼거리에서 마당바위쪽으로 약20분 정도 오른 1,3km 지점에 용각(龍角)바위가 있는 것을 살필 수있다.
용문산과 소설산
용문산의 본래 이름으로서 고려시대까지 이 산의 주명으로 불리어온 미지산이란 산 이름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미지산의 일명으로 불리어지던 용문산(龍門山)이란 산 이름으로 주객(主客)이 바뀌어 조선시대부터는 용문산이 이 산의 주명으로 정착하게 된다. 미지산이 뒤에 용산(龍山)이 되지 않고 용문산으로 불리어지게 된 것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지평현조에 의하면, 이 산 동남쪽에 자리한 용문사(龍門寺) 때문이다. 용문산은 곧 용문사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한 산 이름이다. 현금에 이르기까지 산 이름, 절 이름으로 함께 불리어온 ‘龍門’이란 명칭은, 조선 세조(世祖) 4년(1458)에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저자 미상의 <용문사기(龍門寺記)>에 의하면, 용문사 왼쪽 마당바위 방면으로 오르는 계곡인 용계(龍溪)상에 위치한 용각석(龍角石)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곧 두 석봉(石峯)이 우뚝서서 좌우로 서로 마주 대하며 자연적인 석문(石門)을 이루고 있는데, 절 이름은 바로 이 용각석이란 바위 모습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이 용각석 아래쪽에 있는 5개 바위 남쪽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대가람이 바로 용문사이다.
용문산은 양촌 권근의 <미원현소설산암원증국사사리탑명(彌源縣小雪山菴圓證國師舍利塔銘)>과 근대의 고승 석전(石顚) 정호(鼎鎬:1870~1948)가 지은 <양평소설산사나사중건상량문(楊平小雪山舍那寺重建上樑文)> 등에 의하면, 고려 말엽 이후 일명 소설산(小雪山)으로도 일컬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려 말엽에 태고 보우(太古普愚)가 용문산 북쪽 산기슭 미원장(迷源莊:현 가평군 설악면) 소설촌(小雪村:현 설곡리)에 소설암(小雪菴)이란 암자를 짓고 은거, 수행하면서 그 주산을 소설산(小雪山) 이라 명명하고, 자호(自號)를 소설산인(小雪山人)이라 한 데에서 유래한 산 이름이다. 그러나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용문산을 광의의 소설산으로 볼 수도 있고, 좀더 구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용문산 북쪽에 위치한 산봉인 봉미산(856m)을 소설산으로도 볼 수 있다. 소설암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소설암지의 구체적 소재지는 곧 봉미산 줄기가 서북쪽으로 뻗어가다가 637m봉을 이룬 후 그 산줄기가 서쪽으로 427m 봉을 형성하면서 둘리어진 곳, 설곡리 중촌 마을의 절안골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있었던 소설암의 주산을 협의의 구체적 관점에서 소설산으로 명명한 것이었다면 소설산을 봉미산으로 볼 수 있고, 광의의 관점에서 그 조산(祖山)인 용문산을 주산으로 보고 소설산으로 명명한 것 이었다면 소설산은 곧 용문산을 지칭한 것이라 하겠다.
예컨대《동국여지승람》양근조에 소설암의 소재산을 미원장 미지산으로 언급하고, 앞에서 석전 정호가 사나사의 소재산을 소설산으로 언급한 것 등이 바로 용문산을 광의의 소설산으로 인식하고 있는 예이다. 그러나 태고선사 문인 유창(維昌)이 1383년에 지은 <고려국사원증행장(高麗國師圓證行狀)>과 정도전이 1386년에 지은 <미지산사나사원증국사석종명>과 권근의 <미원현소설산암원증국사사리탑명>에 용문산 또는 미지산과 소설산을 달리 구분하여 언급하고 있고, 그 구체적 위치를 용문산 북쪽 기슭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소설산은 구체적으로 봉미산과 그 산줄기가 뻗어내려와 소설암지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산기슭 일원을 지칭한 산 이름이라 하겠다.
용문산의 문화유적
용문산은 나말여초(羅末麗初)에 해동사무외(海東四無畏) 중의 한 사람인 대경대사 여엄(麗嚴) 과 여말선초(麗末鮮初) 시기의 고승 원증국사 보우(普愚) 및 정지국사(正智國師) 지천(智泉) 과 그 제자 조안대사(祖眼大師) 등 당대 불교계의 고승대덕들이 머물렀던 명산인 만큼 또한 그들이 주석하였던 신라 ․ 고려시대 이래의 명찰들이 산중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상봉 동남쪽 기슭에는 신라 신덕왕(神德王) 2년(913)에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용문사가 있다. 일설에는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 3년(649)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고, 진성여왕(眞聖女王) 6년(892)에 도선국사(道詵國師) 가 중창하였다고도 하고, 또는 신라 말에 경순왕(敬順王)이 친히 거둥하여 절을 창건하고 손수 공손수(公孫樹:현 은행나무)를 심었다고도 하나 모두 신뢰성이 없는 설로 여겨지고 있다. 용문사 앞에는 천연기념물 제 30호로 지정된, 높이 62m, 가슴둘레 14m 나 되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는데, 동양에서 제일 큰 은행나무로 수령이 대략 1100여세 또는 1300여세라 한다.
이 은행나무는 일반적으로 신라 때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놓은 것이 자란 것이라고 전한다. 이 전설에 의하면 용문사를 의상조사가 개산(開山) 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또는 원효대사가 절을 창건한 후 중국을 왕래할 때 심은 것이라고도 하고,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麻衣太子) 가 망국의 한을 풀길이 없어 금강산으로 들어갈 때 지팡이를 꽂아놓고 간 것이라고도 하는데, 이 은행나무의 정확한 나이에 따라 위의 전설의 신빙성여부와 용문사의 창건시기 등을 대략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용문사 대웅전 오른쪽 부도밭 옆으로 약 300m 쯤 산언덕으로 오르면 보물 제531호로 지정된 정지국사 부도와 아래쪽 80m 지점에 서 있는 부도비가 있다. 정지국사는 곧 지공(指空)의 제자로, 우왕(禑王) 4년(1378)에 개성 경천사(敬天寺)에 있었던 대장경 1질을 이 절에 가져와 대장전 3칸을 짖고 옮겨 보관 한 후 이곳에 주석하였던 고승이다. 조선 태조(太祖) 4년(1395)에 그의 제자인 조안대사가 이 절을 중창하였다.
함왕봉 서쪽 산기슭 함왕골 입구에는 고려 태조 6년(923)에 산 능선 넘어에 있었던 보리사(菩提寺) 주지 대경대사가 그의 제자 융천(融闡)과 함께 창건하였다는 사나사(舍那寺)가 있다. 이 절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16년(1367)에 태고 보우가 140여칸 규모로 크게 중창하고 주석한 바 있다. 태고선사는 용문산 남서쪽 기슭, 지금의 옥천리 동부 대월리(大月里)로 추정되는 양근군 대원리(大元里)에서 태어난 당대의 고승으로서, 우리나라 불교를 중흥시킨 중시조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용문산은 바로 그의 고향산 이었으므로 산중 여러 곳에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함왕봉 능선 동쪽 산기슭에 위치한 상원사(上元寺)는 1330년 봄에 그가 이곳에 들어와 관음보살께 예배하고 열두 가지 큰 서원(誓願)을 세우고 수행하였던 곳이고, 산 북쪽의 봉미산 서쪽 산기슭에 있었던 소설암(小雪菴)은 그가 말년에 주석하고 있다가 생애를 마친 곳이다. 사나사 경내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72호로 지정된 태고선사의 석종형부도와 정도전이 그 비문을 지은 부도비(원증국사석종비)가 있다. 또 원증국사석종비각 옆에 함씨각(咸氏閣)이 있는데, 양근함씨(楊根咸氏) 시조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이곳 사나사로 들어오는 절골 입구 계곡가에 함왕혈(咸王穴)이 있는데, 양근 함씨의 시조 함씨대왕이 태어난 곳이라 한다. 또 함왕봉 능선과 능선길에서 함왕골로 내려오는 중간지대에 남아있는 함왕성(咸王城) 일명 함공성(咸公城)은 삼한시대에 함왕혈에서 태어난 함씨대왕 주악(周鄂)이 이 성을 쌓고 웅거하였던 곳이라는 전설이 전하며, 고려시대 몽고군 침입 때에는 부근 주민들이 이곳으로 피난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함왕봉 동쪽 상원골 상류쪽에 위치한 상원사는 최항(崔恒:1409~1474) 의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에 의하면, 조선조 세조(世祖)가 이 절에 거둥하였을 때 백의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바 있다는 고찰이다. 이곳 상원사 남쪽에 있었던 보리사는 고려 태조의 국정 자문이었던 당대의 고승 대경대사 여엄이 말년에 주석하다가 생애를 마친 곳이다. 그의 사적을 기록한, 보물 제 361호로 지정 된 《대경대사현기탑비(大鏡大師玄機塔碑)》가 이곳에 있었으나, 비는 현재 서울 경복궁 뜰로 옮겨져 있다.
▼ 용문산 정상 가섭봉 상징물(은행잎 모양으로 한 것은 아래 용문사의 은행나무를 염두에 둔 듯...)
▼ 이제 하산...
▼ 팔각정에서 간식과 따듯한 커피 한 잔...
▼ 고드름에 상고대가...
▼ 용문산 전망대(장군봉 갈림길)를 지나...
☞ 여기서 용문산 등정기(백운암-백운봉-함왕봉-장군봉-가섭봉-용문사) - 3부를 마치고...
2010년 01월 31일(일)
용문산 등정기(백운암-백운봉-함왕봉-장군봉-가섭봉-용문사)
-▥☞ 1부[용문역→용문터미널→연수1리 버스종점→→백운암→형제우물→백운봉 능선갈림길→백운봉(940m)]는 여기를 클릭.☜▥-
-▥☞ 2부[백운봉→형제우물 갈림길→구름재→여우봉(암봉 전망대)→헬기장→사나사 갈림길→함왕봉→장군봉]는 여기를 클릭.☜▥-
-▥☞ 3부[장군봉→정상 우회로→너덜지대→가협치→용문산 전망대→가섭봉(1157m)→팔각정→용문산 전망대]는 여기를 클릭.☜▥-
-▥☞ 4부[용문산 전망대→용문산 능선길4ㆍ3ㆍ2→상원사 갈림길2ㆍ1→용문사→일주문→용문터미널→용문역]는 여기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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