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지도> 18c후반 76.5*119cm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강화산성을 비롯하여 동쪽 해안의 강화외성, 정족산성, 문수산성 등이 검정색 굵은 선으로 강조되어 있다.
면 단위의 행정구역과 호구수, 강화부까지의 거리가 표시되어 있고, 상단의 지리지에는 강화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다.
강화산성[江華山城] 사적 제132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과 내가면, 하점면 일대에 걸쳐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
고려가 몽고의 침입으로 인해 강화도로 천도할 당시 궁궐과 함께 축조되었다.
원래 내성(內城)·중성(中城)·외성(外城)의 3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성이 규모있게 궁궐의 내성으로 축조된 것은 1234년(고종 28) 1월부터였고, 당시의 성은 토석혼축(土石混築)이었다.
그리고 이 내성을 방어하기 위한 중성이 축조된 것은 1250년(고종 37)으로, 둘레가 약 7㎞에 달하는 토성이었다.
또 중성을 둘러싸는 외성은 1233년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여 1235년에 전국 주(州)·현(縣)에서 일품군(一品軍)을 징발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벌인 결과 동쪽 육지를 바라보는 선을 따라 3만 7,070척에 달하는 성이 1237년에 일차 완성되었다.
고려시대의 강화 내성에는 고려 궁궐과 관청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 규모나 배치를 모두 송도(松都 : 지금의 개성)의 것을 옮겨놓은 듯이 비슷하게 하여
왕족과 귀족들은 송도에서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생활을 영위했다.
궁궐의 정문은 정남향의 승평문(昇平門)이었다.
한편 중성에는 모두 8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송도의 것을 그대로 본떠 동에 선인문(宣仁門), 서에 선기문(宣祺門), 남에 태안문(泰安門), 북에 북창문(北昌門)을 두었고,
동남에 장패문(長覇門), 서남에 광덕문(光德門), 서북에 선의문(宣義門), 동북에 창희문(彰熙門)이 있었다.
그러나 고려와 몽고의 강화가 성립되어가던 1259년(고종 46) 몽고의 요구로 내성이 헐리게 되었고, 외성도 허물었다.
그리고 고려정부가 완전히 송도로 환도하는 1270년(원종 11)에는 궁궐도 헐리어 현재는 궁궐터마저 불완전하게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있자 인조가 잠시 피난했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봉림대군을 비롯한 빈궁(嬪宮)들과 신하들이 피난했으나
청군에 의해 강화성이 함락되면서 포로가 되었다.
이렇게 외침이 잦자 조선정부는 이후 수차에 걸쳐 강화성을 개축하여
화강암의 석성으로 바꾸고 여장(女墻 : 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도 설치했다.
이렇게 하여 강화성은 4개의 성문과 4개의 암문(暗門), 남·북·서쪽의 장대(將臺)와 2개의 수문(水門)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현재 북악과 남산을 연결하는 지역에 남아 있는 성벽의 일부와 성문은 거의가 조선시대에 축조되어 1970년대에 보수된 것이다.
동문은 망한루(望漢樓)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그리고 서문은 첨화루(瞻華樓)로 1711년(숙종 37)에 건립되어 그동안 퇴락되었다가 1977년에 개축되었다.
남문은 안파루(晏波樓)로 1711년에 건립되었으나 1955년 홍수 때 무너진 것을 1975년에 복원한 것이다.
북문은 1783년에 건립하여 진송루(鎭松樓)라 했으나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했다.
조선시대에는 성내에 많은 관아(官衙)가 들어서 있었으나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당시 많은 건물이 소실되어
현재는 고려 궁터에 동헌(東軒)과 이방청(吏房廳) 등이 복원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서문 근방에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조인되었던 연무당(鍊武堂)터가 있다.
출처 :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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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산성 (사적 제132호)
소재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번지 일원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남문인 안파루·북문인 진송루·서문인 첨화루와 동문인 망한루가 남아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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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무신집권자 최이(崔怡)는 강화천도에 앞서서 1232년 군대를 동원하여 강화(江華)에 궁궐을 짓고 도성(都城)을 축조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는 몽골의 제2차 침입이 있는 1232년 6월 16일 대몽항전의 기치를 들고 강화도로 서울을 옮겼다.
그러나 왕궁과 도성 및 관아의 시설이 준비된 것은 아니었다.
여러 지방의 장정을 징발하여 강화성(江華城)과 궁궐 및 관공서들을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한 것은 1234년 1월부터이다.
이때 송도(松都)의 궁궐과 비슷하게 하여 산의 이름까지 송악(松岳)이라 하였다.
고려의 성(城)은 내성(內城), 중성(中城), 외성(外城)이 있었는데 내성은 주위 3874척(尺)으로 지금의 강화성이며
중성은 1250년에 축성하였는데 주위가 2960여 간(間)으로 지금 선원면의 토성지(土城址)가 그곳인듯 하다.
외성은 1233년에 축조하기 시작하였는데 강화동쪽 해협을 따라 길이가 37070척이었다 한다.
이들 성은 모두 토성(土城)으로 축조되었다.
1270년(원종 11) 5월 23일 개경(開京)으로 환도하면서 몽골의 요청으로 강화성을 헐었던 것이다.
조선초기에 다시 축성(築城)하면서 고려의 내성(內城)이던 강화성(江華城)을 축소시켰다.
1637년 병자호란때 청군에 의하여 다시 파괴되고 1677년 숙종조에 강화유수(留守) 허질(許秩)이 대대적인 개축공사를 하면서
성의 규모를 고려시대의 내성 규모로 넓혀서 전면석성(石城)으로 축성하였다.
그후 1709년 강화유수 박권(朴權)이 다시 개축하였고 조선말기에 보수가 계속되었다.
성문(城門)은 동서남북에 4개소가 있고 암문(暗門)이 4개소 수문(水門)이 2개소가 있었다.
성문의 문루는 남문에 안파루(晏波樓), 서에 첨화루(瞻華樓), 북에 진송루(鎭松樓), 동에 망한루(望漢樓)가 있었다.
첨화루는 1711년 강화유수 민진원(閔鎭遠)이 건립하였고 안파루는 퇴락되어 쓰러지자 1973년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북문의 진송루(鎭松樓)는 원래 문루가 없었던 것을 1783년 성을 개축하면서 건립되었다.
수문(水門)은 서문과 동문옆에 있었는데 서문옆의 것은 1900년경에 갑곶진 옆으로 옮겨져 있다.
동문쪽은 강화 시가지가 되어 성과 문루도 없어지고 말았다.
현재 성은 강화읍의 남북 산자락으로 완전히 남아있고 동쪽이 없어졌다.
체성(體城)은 석축(石築)으로 견고하게 쌓고 그위에 여장을 설치하였던 것인데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조선말(朝鮮末)에는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와 일본침략(日本侵略)에 의한
강화조약(江華條約)을 체결한 수많은 외침(外侵)의 역사 현장이다.
- 문화재청 홈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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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외성 (사적 제452호)
소재 : 인천 강화군 강화읍,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 일원
강화외성은 고려 23대 고종이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뒤
고종 20년(1233) 해안 방어를 위해 적북돈대로부터 초지진까지 23km에 걸쳐 쌓은 성이다.
강화성은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읍성이다.
외성은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는데 몽고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고종 24년(1237)에 강화외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비상시에 국왕의 피난처인 도성(都城)의 외성(外城)으로 광해군 10년(1618)에 보수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숙종때 병자호란기(1636)에 허물어진 외성을 돌을 이용하여 다시 쌓았고 돈대(墩臺)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영조때 강화유수 김시혁(金始爀)이 비가 오면 성의 흙이 흘러내려 나라에 건의하여
영조 19년(1743)에서 이듬해에 걸쳐 벽돌을 이용하여 다시 쌓았다고 한다.
2001년 동양고고학연구소에서 실시한 오두돈 주변의 전축성 구간에 대한 지표조사 결과에 의하면,
뻘층을 기초로 머리돌을 올리고 그 위에 대형석재로 석벽의 중심을 삼고
그 위에 머리돌을 올리고 다시 전돌을 여러 단 쌓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성은 높이 20척, 폭 5척이며, 6개의 문루(조해루·복파루·진해루·참경루·공조루·안해루)와
암문 6개소, 수문 17개소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강화외성은 고려 후기∼17세기 후반 도성의 구조와 축성기법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 성은 벽돌로 개축한 전축성(塼築城)이 오두돈 주변(남측)에 남아 있어
수원 화성(사적 제3호)과 더불어 전축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 문화재청 홈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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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성 (사적 제130호)
소재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 일원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며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랑성이라 부른다.
이 성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가 1259년 삼랑성 안에 임시궁궐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이 쌓여져 있는 모습을 보면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처럼 삼국시대 성의 구조를 찾을 수 있으므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된다.
고려 때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조 15년(1739)에 성을 다시 쌓으면서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 ‘종해루’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 1년(1660) 마니산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성 안에 있는 정족산사고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이곳은 고종 3년(1866)의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을 해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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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의 지리지에 의하면 전등산(傳燈山)을 삼랑성(三郞城)이라고 부르며,
단군(檀君)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았다고 전해 온다고 하였다.
산의 이름은 길상산(吉祥山)이라고 하며 성의 이름은 정족산성(鼎足山城)으로 기록되기도 하였으나,
항상 이 지역에서는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는 구전(口傳)이 이어져 왔다.
성곽의 축조는 거친 할석(割石)으로 되어 있으며,
성의 안쪽 벽면도 할석으로 채워 안팎을 겹축(夾築)한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할석 사이마다 할석 부스러기로 쐐기 돌을 많이 사용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석축 이전에는 토축된 것이었다고 여겨지며,
해발 222.3m인 산의 정상에서 동향한 계곡을 포용하고,
동남향한 계곡에 수구과 남문이 있다.
북문은 북벽의 서쪽에 치우쳐 산봉우리 사이의 안부(鞍部)에 있고,
서문도 서남쪽 안부에 있으며, 동문은 남문의 북쪽으로 해발 107.2m의 봉우리 북쪽 안부에 있다.
성벽이 회절(回折)하는 곳마다 10여개의 곡성을 이루며, 치성(雉城)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성벽은 서측의 산정에서 북벽을 이루는 두 개의 봉우리와 동쪽 봉우리 및 서문 남동쪽의 봉우리 등이 있어서
마치 솥과 같은 고로봉형(고로峰形)을 이루었다.
조선왕조의 말기까지 존속하여 여장(女墻)과 총안(銃眼)·사혈(射穴)이 남은 곳도 있다.
1259년(고려 고종46) 5월에 중랑장(中郞將) 백승현(白勝賢)의 풍수설에 따라 이 성내에다 가궐(假闕)을 지었다.
1606년(선조39) 마니산(摩尼山)에 사고(史庫)를 설치하여 실록(實錄)을 보존해 오다가
1660년(현종1) 삼랑성내의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로 옮겼다.
이때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寶閣)이 같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모두 없어지고 전등사(傳燈寺)만 남아 있다.
이 산성은 고려 때에 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739년(영조15) 중수를 하면서,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고 종해루(宗海樓)라 하였고, 1764년 다시 성을 중수하였다.
성안에는 훈련도감과 금위영·어영청 소속의 창고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 산성은 1866(고종3)의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하려던 160명의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첩지로 유명하다.
현재 성내에는 당시 프랑스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순무천총(巡撫千摠) 양헌수(梁憲洙)의 승전비가 있고,
1976년 남문을 다시 복원하고 문루를 세워서 예전대로 종해루라는 현판을 달았다.
- 강화역사문화연구소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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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성은 일명 삼랑성이라고도 하며 길상면 온수리 산4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 제130호이며 정족산성 사고와 전등사 등이 그 안에 위치하고 있다.
정족산성의 둘레는 2300m이며, 주위가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천험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삼랑성의 시설물로는 동문·남문·남문루·서문·북문이 남아 있으며, 13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유적으로는 전등사·정족산 사고·군창·군기고 등이 있었다.
정족산성은 정족산을 포함하여 5개의 산봉우리가 있다.
이 산성에서 가장 높은 성벽이 위치한 곳은 정족산 정상부로 해발 222m이고,
가장 낮은 곳은 남문 지점으로 해발 75m이다.
따라서 그 차이는 147m에 달한다.
이 산성에는 동서남북 4개의 대문과 4개의 치가 있다.
4개의 치는 가파르고 시계가 양호한 곳에 설치되어 있다.
정족산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산성을 쌓게 하였기 때문에 삼랑성이라고 했다고 한다.
삼랑성은 막돌을 맞추어 성벽을 쌓았고, 성벽 안을 막돌로 채워 견고하게 하였던 점으로 보아
삼국시대 산성을 쌓은 기법과 비슷하여 삼국시대에 쌓은 석성으로 추정된다.
역사적으로 강화도가 고구려의 강역으로 편입되기 전에는 400여 년간 백제의 강역으로 한강의 관문일 뿐만 아니라,
백제초기 중요한 요새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백제시대의 산성으로 볼 수도 있다.
조선중기에는 마니산에 사고를 지어 실록을 보관해 오다가
1660년(현종 1)에 삼랑성에 장사각(藏史閣)을 지어 실록을 옮겨 보관하게 되었다.
그리고 병인양요 때에는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이 산성에서 격퇴하였다.
이 때의 승리를 기념하는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각이 있다.
병인양요로 프랑스의 로즈제독은 군함 7척, 함재대포 10문, 병력 1000명 등을 인솔하여 강화를 공격, 점령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프랑스의 침공을 물리치고자 대장 이경하, 중군 이용희, 천총 양헌수를 임명하고 출정시켰다.
양헌수는 조선군이 병력과 화력면에서 월등하게 우세한 프랑스군을
정면으로 공격해서는 승리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기병작전으로써 그들을 격퇴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강화해협을 심야에 도하, 정족산성으로 들어갔다.
프랑스의 로즈제독은 나중에 이 사실을 보고 받고,
올리비에 대령을 파견해서 정족산성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탈환하게 하였다.
조선군은 정족산성의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해 오는 프랑스군에게
일제히 사격을 가하고 강력하게 대응하여 일대 격전을 치룬 결과 마침내 승리하였다.
그 결과 조선군의 사상자는 5명뿐이었으나 프랑스군은 6∼7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정족산성에서의 승첩은 몇 가지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그것은 조선군이 병력과 화력면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상황을
역전시켜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프랑스군을 격퇴시켰고,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의 패전을 계기로 철수했으며,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패퇴시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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