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臥死步生)'고 했단다.
맥가이버는 '산 따라 강 따라 길 따라' 걷는 것을 죽고사는 차원이 아닌 즐기는 차원에서 걷는다.
즉, 좋은 길을 걷다가 새로운 환경이나 상황,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되고, 느끼고, 감동 받고, 깨닫는 것을 즐긴다.
--☞ 오래 전부터 '서울성곽일주'를 꿈꾸다가 지난 2006년 3월 2일자 모 일간지에 [건축가 황두진의 서울성곽 하루에 돌기]를 보고
2006년 3월 05일(일)에 그 신문을 들고 '서울성곽일주'를 위한 답사를 나서 홀로 '서울성곽 길찾기 일주'를 하였었고,
두 번째는 2006년 4월 30일(일)에 좋은 님들과 함께 11시간 20분에 걸쳐 '서울성곽일주'를 하였으며,
세 번째는 2006년 9월 22일(금)~23일(토) 양일간에 걸쳐 '야간 서울성곽일주'를 한 적이 있었으며,
네 번째는 2009년 2월 22일(일)에 10시간 10분에 걸쳐서 '서울성곽일주'를 하였으며,
다섯 번째로 2010년 4월 25일(일)에는 09시간 27분에 걸쳐서 '서울성곽일주'를 하였으며,
오늘은 여섯 번째로 '서울성곽일주'를 한다.
처음과 두 번째, 세 번째 '서울성곽일주'는 북악산 구간이 통제되었었고, 야간에 통행이 불가한 관계로 북악산 성곽 구간을 빼고
창의문(자하문)에서 청와대 앞을 지나 삼청동을 거쳐 감사원길을 따라 와룡공원으로 우회하여 북악산의 나머지 성곽을 걸었었다.
그러다가 2006년 4월 1일에 북악산 지역 서울 성곽이 처음 개방된 '홍련사 코스'는 홍련사-숙정문-촛대바위 구간으로 1.1㎞이고,
그리고 2007년 4월 5일 2단계로 '말바위 쉼터 코스'가 와룡공원-숙정문-청운대-백악마루-창의문으로 4.3㎞가 개방되면서
이 두 지역이 개방됨으로써 북악산 구간의 서울성곽을 완전하게 답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는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1시간 간격으로
한 팀당 100명씩만 입장(2시간30분 동안 관람)을 시키는 제한적 개방인지라
'인터넷 예약이나 현장에 선착순' 등을 하면서 '서울성곽일주'를 하기에는 곤란함이 있어
완전?한 서울성곽일주를 할 수 있는 '언젠가'를 기다리며 지내는데
2007년 7월 1일을 기해 사전예약이나 선착순이 아닌 무제한 자유 탐방이 실시되었다.
해서 보다 완전한 '서울성곽일주'를 하고자 날을 잡다가 2008년 3월 1일에 하려고 계획 중이었는데
2008년 2월 10일 20시 50분에 발생한 남대문(숭례문)화재로
-서울성곽일주'의 마지막 여정은 '남대문(숭례문) 야경 감상'이 압권이었기에...- 다시 차일피일하다가
2009년 2월 22일(일)에 하게 된 네 번째 '서울성곽일주'는 이전보다는 충실한? '서울성곽일주'를 하게 되었고...
다섯 번째로 2010년 4월 25일(일)에는 09시간 27분에 걸쳐서 '서울성곽일주'를 하였다.
오늘 하게 되는 여섯 번째 '서울성곽일주'는 다음카페 '고양올레길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
지난 다섯번의 서울성곽걷기와 같이 '서울역 5번 출구' 밖으로 나와 연세ㆍ세브란스재단 앞에 조형물이 있는 곳에서 모여
간단하게 몸풀기와 진행일정을 소개하고 나서 복원중인 남대문(숭례문)을 향해 걸어가서
그곳 '수선전도'에서 오늘의 여정을 그리고, 약 10시간 30분 예정의 '서울성곽일주'를 위한 출발을 한다.
10시 19분에 남대문(숭례문)에서 복원공사로 인한 가림막 안에 있는 남대문(숭례문)의 이전 모습을 상상하며 돌아본 후
'서울성곽'을 시계방향으로 일주를 시작하며 횡단보도를 건너 대한상공회의소 건물 옆으로 들어서고...
서울성곽의 성곽길과 성곽을 잇기 위한 우횟길을 드나들면서 대문과 소문, 대문터와 소문터를 지나며...
인왕산과 북악산, 낙산을 거쳐 남산에 오르고, 다시 남대문(숭례문)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니 21시 30분이다.
서울성곽을 약 11시간 10분에 걸쳐 일주를 하고, 시청역부근 음식점에서 저녁식사겸 뒤풀이를 한 후 해산하였다.
☞ '한여름의 서울성곽일주(인왕산ㆍ북악산ㆍ낙산ㆍ남산 연계산행)'의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인왕산 인왕천약수터 가기 전 쉼터에서 '카메라 에러'가 나서 더이상의 사진을 찍지 못하고...
그후 여정은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고 다만 가슴에 담아야 했다.
▼ 가볍게 몸풀기를하고...
▼ 10시 11분 - 숭례문(남대문)을 향하여 출발...
▼ 10시 16분 - 숭례문(남대문) 부근 '수선전도' 조형물에서 오늘 하게될 '서울성곽일주'를 그리며...
▼ 10시 19분 - '한여름의 서울성곽일주'를 시작하며...
▼ 10시 25분 - 대한상공회의소 앞을 지나...
▼ 10시 30분 - 중앙일보 사옥 앞에는 '이충순 자결터'라는 표지석이...
이충순李忠純(1877.2.8~1907.8.3)
한말의 순국지사.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명령에 저항하여 서소문에서 대일 시가전을 전개하다가 자결하였다.
충청남도 홍성 출신이다.
일찍부터 군문에 들어갔고 1902년 7월에 육군보병 참위(參尉)로 임관되어 시위대에서 복무하였다.
1905년 군인구락부를 조직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8월 내려진 군대해산명령에 불복하였고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가 합세하여
일본군과 경성에서 교전하던 중 부상을 입고 체포당하기 직전에 자결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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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시 34분 - 순화빌딩 앞을 지나...
▼ 평안교회
▼ 10시 36분 - 배재빌딩을 지나...
▼ 10시 37분 - 배재공원 길로...
▼ 배재학당 연혁
배재학당 培材學堂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
개교년도 : 1885년
구분 : 중등 교육기관
설립자 : H.G.아펜젤러
소재지 : 서울
교훈 :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當爲人役)
1885년 8월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인 H.G.아펜젤러가 세웠으며, 오늘날의 배재중학교·배재고등학교·배재대학교의 전신이다.
1885년 7월 서울에 도착한 아펜젤러가, 1개월 먼저 와 있던 W.B.스크랜턴의 집을 구입,
방 두 칸의 벽을 헐어 만든 교실에서 2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에 고종은 1886년 6월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 이름지어 간판을 써 주었고, 그해 10월 학생수는 20명으로 늘었다.
아펜젤러는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꾼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라고 설립목적을 밝혔고,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當爲人役)’이라는 학당훈(訓)을 내걸었다.
그리스도교인과 국가 인재양성을 위하여 일반 학과를 가르치는 외에, 연설회·토론회 등을 열고 사상과 체육 훈련에 힘을 쏟았다.
당시 배재학당에 설치되었던 인쇄부는 한국의 현대식 인쇄 시설의 효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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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재학당동관/배재학당역사박물관
배재학당동관 培材學堂東館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옛 배재학당의 교실 건물.
지정번호 : 서울기념물 제16호
지정년도 : 2001년 3월 15일
소장 : 학교법인 배재학당
소재지 : 서울시 중구 정동 34-5
시대 : 1910년대
분류 : 기타문화재
미국 선교사(宣敎師) H.G.아펜젤러(1858∼1902)가 세운 한국 최초의 서양식 학교건물이며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이다.
2001년 3월 15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옛 배재학당의 교실로 사용된 건물로 한국 근대 교육적 의미가 크며 한국 근대 건축으로서 그 형식이 우수하다.
건물의 구조와 창문, 외장 및 벽돌 구조가 뛰어나며 정면의 현관(玄關)과 양쪽 출입구의 돌구조 현관이 잘 보존되어 있다.
배재학당 동관 건물은 1916년에 세워졌는데 처음 지었을 때의 원형(原形)이 대체로 남아 있고 건물의 형태가 우수하여
1910년대 한국 근대 건축의 중요한 유물로 평가 된다.
1984년 배재고등학교가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교실로 사용되었으며 배재고등학교 동관으로 불렸다.
2008년 7월 24일 동관 건물을 새롭게 단장하여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개장하였다.
박물관에는 상설전시관, 기획전시관, 체험교실, 세마나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설전시관에는 1930년대 배재학당의 교실 모습을 재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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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소화
▼ 10시 43분 - '광화문연가'가 생각나는 정동교회
정동교회貞洞第一敎會禮拜堂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건축물.
지정종목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256호
지정일 : 1977년 11월 22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2-2
시대 : 조선
종류 : 종교건축
크기 : 면적 1,143㎡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었다.
1895년 9월에 착공, 이듬해 헌당식(獻堂式)을 거행하고 1897년 10월 무렵에 준공된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축물이다.
교회 내부는 평천장(平天障)에 별다른 장식 없이 간결하고 소박하며 기단(基壇)은 석조(石造)이고 남쪽 모퉁이에 종탑을 세웠다.
건물은 벽돌쌓기로 큰 벽체를 구성하고 아치 모양의 창문을 낸 고딕 양식의 교회당이다.
1926년 양쪽 모퉁이를 넓혀 삼랑식(三廊式) 평면형으로 교회 건물을 증축하였으며
1953년에는 6·25전쟁으로 반파(半破)된 교회를 수리하여 복원하였다.
정동교회의 역사는 1885년 10월 11일, 미국 북감리교 선교부 목사 아펜젤러가 정동에 마련한 '벧엘예배당'이라는 그의 집에서,
감리교회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인을 위한 공중예배를 가짐으로써 시작되었는데,
이 날 여자 한 사람을 포함한 4명의 신자가 예배를 드리고 세례를 받았다.
아펜젤러는 이보다 앞서 1885년 6월에 입국하였으나,
당시 조선 정부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전도사업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지 않아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워 신학문 교육부터 시작하였다.
정동교회는 1889년 한국 최초의 월간잡지 《교회》를 발간하여 자유주의 사상을 불어넣기 위해 힘썼고,
1897년에는 미국의 엡웟청년회 운동을 도입하여 청년사업을 전개하였는데,
1922년에는 한국 최초로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는 등 선구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한 한국 감리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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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교회 앞에 있는 신아빌딩
▼ 10시 46분 - 정동극장 앞을 지나...
정동극장 貞洞劇場 Chongdong Theater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예술극장.
구분 : 예술극장
설립연도 : 1995년
소재지 : 서울 중구 정동 8-11
규모 : 대지 약 460평, 객석 400석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의 복원 이념 아래 1995년에 건립하였다.
전통예술의 발전과 보급, 생활 속의 문화운동 전개, 청소년 문화의 육성이라는 세 가지 지표 아래
다양한 공연예술 프로그램을 개발, 보급하였으며, 주변의 다른 문화공간과 함께 도심 속의 새로운 문화관광 명소가 되었다.
미국대사관 관저와 정동교회 사이에 있는 극장 건물은 460여 평의 대지 위에
지상 2층, 지하 3층의 철골 트러스 구조로 지어졌으며, 객석은 400석이다.
무대 시스템은 전통예술, 음악, 무용, 연극 등 모든 장르의 공연예술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무대 면적은 70여 평으로 한가운데에 지름 9m의 회전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별도의 오케스트라 피트 승강무대는 필요에 따라 75석의 이동객석으로 활용할 수 있다.
조명시설로는 572개의 채널과 1,024개의 딤머를 갖추고 있으며, 첨단 컴퓨터로 총 500여 개의 조명장치를 조작할 수 있다.
또 시링과 프론트사이드 조명, 서스펜션, 보더라이트, 호리촌트 라이트 등이 설치되어 있다.
음향시설은 파워앰프 12개와 무선 마이크로폰 14개, 스피커 4식의 기본시설이 32개의 채널로 통제된다.
또 이퀄라이저, 피드백 시스템이 유선 인터컴 시스템과 같이 사용되는 가운데 3대의 마이크로폰 등이 소리를 입체적으로 소화해낸다.
1997년 2월 공연장으로서는 최초로 전통예술을 관광상품화한 ‘정동극장 상설국악공연’은
한국의 전통예술공연을 무용·풍물·기악연주·소리의 4종류로 나누어 각각 7개의 프로그램으로 배합,
궁중음악과 민속음악을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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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시 49분 - 이화여고 동문으로 들어서서...
이화학당 梨花學堂
조선시대에 선교사 스크랜턴이 창설한 사립 여자교육기관.
소재지 : 서울 중구 정동
건립연도 : 1886년
건립자 : 스크랜턴 부인(Scranton, M.F)
이화학당은 1886년(고종 23) 해외여성선교회에서 파견된 메리 F. 스크랜튼(Mary F. Scranton)이
서울 황화방(皇華坊), 지금의 중구(中區) 정동(貞洞)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사립여성교육기관이다.
제1대 당장인 스크랜튼의 교육이념은 기독교 교육을 통하여 한국여성들을 ‘더 나은 한국인으로 양성하는 것’,
즉 한국인의 긍지와 존엄성을 회복하고 진정한 한국인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이듬해인 1887년 2월에는 고종황제가 외아문을 통해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과 현판을 하사하였다.
이는 조선의 사액서원에 비견되는 것으로서 이화학당이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최초의 근대식 여학교임을 의미한다.
이화라는 교명은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한 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이화학당은 점차 학제를 정비하여 1904년에는 중등과를, 1908년에는 보통과와 고등과를 신설함으로써
마침내 보통·중등·고등과정의 일관된 학제를 마련하였다.
이화가 중등과를 먼저 설치한 것은 이화의 교육이 여성의 고등교육을 지향해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교사 양성이 시급했던 당시의 사회적 요구를 수렴한 것이었다.
이화학당은 1908년 6월 5명의 제1회 중등과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10년에는 4년제의 대학과를 설치하여 1914년 4월 신마실라·이화숙·김애식 등 한국 최초의 여대생을 배출하였다.
아울러 1914년에 이화유치원을, 1915년에 유치원사범과를 차례로 신설하고, 1917년에는 중등과를 대학예과로 개편하였다.
또한 1918년에 보통과와 고등과를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로 분립개교하였고,
1925년에 대학과와 대학예과를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하였으며, 1928년에 유치원사범과를 이화보육학교로 독립하였다.
이렇듯 이화학당 내에 있던 각급 교육기관들이 독자적인 발전을 추구하면서 독립된 학제로 운영됨에 따라
1928년에 ‘이화학당’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폐기되었으나, 친근하고 익숙한 ‘학당’이란 칭호가 계속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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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정동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貞洞梨花女高─紀念館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이화여자고등학교에 있는 기념관.
2002년 2월 28일 등록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학교법인 이화학원에서 소유와 관리를 맡고 있다.
이화여자고등학교 캠퍼스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1915년에 미국인 사라 J. 심슨(Sarah J. Simpson)이 위탁한 기금으로 세워졌다.
지하 1층, 지상 4층의 건물로 6·25전쟁 때 붕괴되었다가 1960년대 초에 복구하였는데,
남쪽 건물의 외관을 처음 건축할 때의 모습으로 복원하였으며, 뒷부분은 현대적인 외관으로 처리하였다.
외관을 붉은 벽돌로 지은 철근콘크리트구조의 근대 건축물로, 학교건축의 초창기 서양 건축양식을 도입하였다.
이화여자고등학교는 1886년 기독교 정신을 토대로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으로 창설되어
1887년 조선 제26대 왕 고종(高宗:재위 1863∼1907)으로부터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학교명을 하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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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탁호텔터 표지석
손탁孫鐸호텔 Sontag Hotel
1902년 러시아의 여성 손탁이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세운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
개관일자 : 1902년
소재지 : 서울 중구 정동(터만 남아 있음)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1902년(고종 39) 러시아 여성 손탁(Sontag:한자명 孫鐸)이 건립하였다.
손탁은 1885년 초대 한국 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Karl Ivanovich Veber)와 함께 서울에 도착해
베베르 부부의 추천으로 궁궐에 들어가 양식 조리와 외빈 접대를 담당하였다.
그러다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어 정계의 배후에서 활약하다가
1895년 고종으로부터 정동(貞洞)에 있는 가옥을 하사받아 외국인들의 집회 장소로 사용하였다.
1902년 10월에는 이 가옥을 헐고 2층의 서양식 호텔을 지었는데, 이 호텔이 바로 손탁호텔이다.
1층은 보통실과 식당, 2층은 귀빈실로 이루어졌고,
1층과 2층의 창 사이의 벽을 작게 하고 벽 전면을 아케이드 모양로 구성하는 등 러시아의 전형적인 건물 형태를 취하였다.
미국을 주축으로 결성된 정동구락부의 모임 장소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구한말 서구 열강의 외교관들이 외교 각축을 펼친 곳으로 유명하다.
1918년 문을 닫은 뒤 이화학당에서 사들여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1923년 호텔을 헐고 새 건물을 지었다.
그러나 6·25전쟁 때 폭격을 당해 폐허로 남아 있다가 1969년 3층짜리 호텔로 지어져 이후 여관과 식당으로 운영되었다.
지금의 정동교회와 정동극장 뒤에서 경향신문사 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호텔의 터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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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시 51분 - '능소화 아치'로 들어서면...
▼ 유관순열사가 빨래하던 우물
▼ 10시 51분 - 이화여고 원형극장
▼ 아화여고와 창덕여중의 담장을 따라...
▼ 11시 00분 - 농협건물에서 우측으로...
▼ 11시 02분 - 창덕여중 담장아래 성곽돌이...
▼ 11시 07분 - 정동사거리 횡단보도에서..
▼ 돈의문터
돈의문 敦義門
서울 종로구 새문안길에 있던 조선시대 성문.
서울 성곽의 4대문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서대문(西大門) ·새문 ·신문(新門)이라고도 한다.
1396년(태조 5) 한양 도성(都城)의 제2차 공사가 끝나고 8문이 완성되던 때 처음 세워졌다.
1413년(태종 13) 폐쇄되고 그 대신 그 북쪽에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출입케 하였다가,
1422년(세종 4) 다시 서전문을 헐고 돈의문을 수리하였다.
그 뒤 헐어진 것을 보수하여 1711년(숙종 37)에 다시 지었으나,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확장 공사로 인해 철거되고 말았다.
대략적인 모습은 돌축대 한 가운데에 무지개문을 큼지막하게 내고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지붕집의 초루(譙樓)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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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시 09분 - 강북삼성병원 內 경교장
서울경교장 京橋莊
서울시 종로구 평동에 있는 백범 김구(金九)가 1945년 11월부터 1949년 6월 26일까지 사용했던 개인 사저이다.
지정종목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465호
지정일 : 2005년 6월 13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108-1
시대 : 일제강점기
종류 : 개화기 건축
크기 : 건축면적 396.59㎡, 연면적 945.45㎡
2001년 4월 6일 서울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 6월 13일에 사적 제465호로 승격되었다.
서울특별시 종구 평동에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하였던 역사적 장소이다.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건국 활동의 중심을 이룬 3대 요람이다.
1938년 금광으로 돈을 번 최창학(崔昌學)이 건축면적 396.69㎡, 연면적 945.45㎡(지하1층, 지상2층)규모로 지은
일본식 건물로, 원래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다.
8·15광복 이후 최창학이 김구의 거처로 제공하였는데, 김구가 죽첨장이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근처에 있는 경교[京橋;경구교(京口橋)의 약칭]라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개명하였다.
건물은 단아한 2층 양관으로 전면 분할의 비례가 아름다우며, 1층의 좌우창을 원형으로 돌출시켰고, 그 상부를 의장의 중심체로 하였다.
현관 2층부에는 6개의 붙임 원주를 사용하여 5개의 들임 아치창을 냈다.
김구가 반탁·건국·통일 운동을 주도할 때에는 흔히 '서대문 경교장'이라고 일컬었으며, 민족진영 인사들의 집결처로 이용되었다.
또한 1949년 6월 29일 김구가 집무실에서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의해 서거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최창학에게 반환되었고 다시 타이완 대사관저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때에는 미국 특수부대가 주둔하는 등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1967년 삼성재단에서 매입하여 강북삼성병원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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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시 14분 - 서울시교육청 담장을 따라...
▼ 11시 16분 - 월암근린공원으로...
▼ 11시 23분 - 홍난파가옥
홍파동 홍난파 가옥 紅把洞洪蘭坡家屋
서울특별시 종로구(鍾路區) 홍파동에 있는 근대 건축물이다.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되었다.
종로구청에서 소유, 관리한다.
1930년에 독일 선교사가 지은 붉은색 벽돌 벽체에 기와를 얹은 서양식 건물로,
《봉선화》《고향의 봄》 등으로 유명한 작곡가 홍난파(1898~1941)가 6년간 말년을 보낸 집이다.
토지 304㎡에 연면적은 지상, 지하 각 1층 121㎡ 규모이다.
이곳은 개·보수 공사를 끝내고 2007년 9월 소공연장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거실과 안방으로 사용하던 지상 1층에 음향시설 등을 설치하여 50명 정도 수용 규모의 공연장으로 만들었으며
지하에는 자료실과 시청각실을 만들어 홍난파 관련 서적과 비디오테이프 등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서양식 주택의 특성이 잘 보존되어 있는 근대문화유산으로 가치 있는 건축물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파동 2-16번지에 있다.
-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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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걸친 美노신사의 ‘한국사랑’
경향신문 | 입력 2006.02.05 18:29
3대에 걸쳐 한국을 사랑한 미국인이 서울시민이 된다.
서울시는 66년 만에 서울 고향집 '딜쿠사(Dilkusha)'를 방문한 미국인 브루스 테일러(87)에게 '명예시민증'을 수여한다고 5일 밝혔다.
딜쿠사는 브루스 가족이 1942년까지 살던 종로구 행촌동 1-88의 보금자리를,
힌두어 '행복한 마음·기쁨·이상향'의 의미로 작명한 것이다.
이들 가족의 한국사랑은 구한말인 1897년 입국한 할아버지 조지 알렉산더 테일러(George Alexander Taylor)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아들인 알버트 테일러(Albert Taylor)는 금광엔지니어 겸 UPI 통신사 프리랜서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3·1운동을 세계에 알리고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알버트는 한국 독립을 도왔다는 이유로 6개월간 수용생활을 거쳐 추방됐으며 48년 미국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알버트의 한국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땅, 한국 아버지의 묘소 옆에 나를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할아버지와 나란히 묻혔다.
이번에 서울시민이 되는 그 아들 브루스는 1919년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당시 그의 침대 밑에는 독립선언서가 숨겨져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추방된 브루스는 이후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했다.
브루스 가족은 이번 방한길에 딜쿠사를 시작으로 3대에 걸친 한국 사랑을 다큐멘터리에 담는다.
브루스는 6일 명예시민증 수여식에서 부친 알버트로부터 받은
20년대 서울시청과 원구단, 동대문 등 서울의 생활상을 찍은 희귀사진 17점을 기증한다.
〈김창영기자〉 bodang@kyung.com
함께 온 딸 제니퍼 테일러(영화제작자)도 가족의 서울생활을 기록한
할머니 메리 테일러의 자서전 'Chain of Amber'를 영화로 만들어 할리우드에 소개할 예정이다.
ⓒ 경향신문 & 미디어칸(www.khan.co.kr)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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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쉽지만 여기서 '카메라 에러'로 '한여름의 서울성곽일주(인왕산ㆍ북악산ㆍ낙산ㆍ남산 연계산행)의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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