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가이버의 '하루에 걷는 600년 서울, 순성(巡城)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 일주' 코스
서울역→남대문(숭례문)→대한상공회의소→소의문터→순화빌딩→배재공원→정동제일교회→이화여고→창덕여중
→서대문터(돈의문)→강북삼성병원(경교장)→서울시교육청→홍난파기념관→권율장군집터→옥경이슈퍼(세븐일레븐)
→인왕산 정상(삿갓바위:338m)→청운공원→창의문(자하문)→경복고→봉황분수대→청와대 앞길→삼청공원→감사원
→성균관대 후문→와룡공원 쉼터→서울과학고 후문→경신고교 후문→서울시장 공관→혜화문(동소문)→한성대입구역
→삼선주유소→낙산 정상(타락산駝駱山:125m)→동대문성곽공원→동대문(흥인지문)→오간수문→동대문역사문화공원
→한양공업고→광희문→신당동 성당→장충체육관 뒤→신라호텔 담→반야트리호텔(舊타워호텔)→국립극장→N서울타워
→남산 정상(팔각정:262m)→잠두봉포토아일랜드→안중근의사기념관→백범광장→도동삼거리→남대문(숭례문)→서울역
서울성곽 [서울城郭/서울漢陽都城]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 둘레 약 17㎞, 지정면적 1,730,221㎡. 사적 제10호. 현재 남대문·동대문 등의 성문과 암문(暗門)·수문(水門)·여장(女墻)·옹성(甕城) 등의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다. 건국 초 태조는 한양천도를 위하여 일차적으로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다음, 1395년(태조 4) 9월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성터를 측정, 조사하게 하였다. 정도전은 백악(白岳)·인왕(仁旺)·목멱(木覓)·낙산(駱山)에 올라 실측하여 사산(四山)을 연결하는 5만9500척의 성터를 결정하였다. 이듬해 정월부터 전국의 민간인 장정이 무려 11만 8,000명이나 동원되어 600척을 한 단위씩으로, 축성구역을 97구(區)로 나누어 정하였다. 구역마다 천자문의 자호(字號)를 표시하여 백악산 동쪽에서부터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낙산·남산·인왕산을 거쳐 백악산 서쪽에 이르러 조자(弔字)까지 구획하였다. 공사는 매글자 구간 600척을 6등분하여 각 공사구간에 판사(判事)·부판사·사(使)·부사·판관(判官) 등 12명씩을 임명하여 민정을 독려하여 견고하게 축성하도록 책임을 맡겼다. 책임진 부분에 해당하는 성벽에 관직과 군명(郡名)을 새겨 넣어 책임을 분명하게 하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높고 험한 산에는 15척 높이의 돌로 쌓게 하였는데 총 석축길이는 1만 9,200척이었다. 석재는 자연석을 약간씩 다듬어 쌓되 기초석은 길고 큰 돌을 수직으로 쌓아올렸다. 평지는 흙으로 쌓았는데 너비는 아랫부분이 25척, 윗부분이 18척, 높이 25척이다. 그 단면은 사다리꼴을 이루는 성토판축(盛土版築)을 하였는데 토축의 둘레는 4만 3,000척이었다. 동대문 부근 청계천에 있는 수구(水口)에는 홍예[雲梯]를 쌓고 그 좌우에는 석성을 축조하였다. 홍예의 높이는 16척, 석성 등을 포함한 길이는 1,050척이었다. 이 해 가을 징정 8만명을 동원하여 토축 부분을 석축으로 고치고 4대문과 4소문을 완성하였다. 4대문이란 동의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의 돈의문(敦義門), 남의 숭례문(崇禮門), 북의 숙청문(肅淸門)을 말하고, 4소문이란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서남의 소덕문(昭德門)을 말한다. 그런데 동대문에만 옹성을 쌓았고, 숙청문은 암문으로 하여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았다. 대략의 공사는 이렇게 끝났지만, 남대문은 1396년에, 동대문의 옹성은 이듬해 4월에야 완성되었다. 1422년(세종 4) 이 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토축부분을 모두 석축으로 바꾸어 높여 쌓고 석재를 약 2 : 1 길이 비율의 장방형으로 많이 다듬어 쌓았다. 또한, 여장도 쌓았고 수문도 2개 더 만들었다. 전국에서 32만 2,000명의 일꾼이 동원된 이 때의 개축으로 도성은 둘레 8만 9,610척, 높이 40척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군데가 되었으며, 곡성(曲城) 1군데, 성랑(城廊) 15군데를 만들었다. 그 뒤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고 성문과 성벽을 보호하게 하였고, 1447년 남대문을 다시 세웠고 1479년(성종 10) 남대문을 중수하였다. 또한, 1451년(문종 1) 1월부터 경기·충청의 수군(水軍) 3,000명으로 성벽을 수축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함락되어 왜군에 의하여 왜루(倭壘)가 쌓여졌고, 이듬해에 수복하여 왜루를 철거하고 그 돌로 다시 수축하였다. 1616년(광해군 8) 부분적인 수축을 하였고, 1704년(숙종 30) 3월부터 약 5년에 걸쳐 오군영(五軍營)에 분담하여 둘레 9,975보, 성첩(城堞) 7,081개의 대대적인 수축을 하였다. 또한, 1743년(영조 19) 부분보수를 하였고, 성첩도 회분(灰粉)으로 단장하였고, 1869년(고종 6) 동대문의 개축을 마지막으로 도성의 수명이 다하였다. 이처럼 서울성곽은 태조 때 창축되어 세종 때 개축되고 숙종 때의 수축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축조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세 시기의 성벽은 쉽게 구분된다. 즉, 태조 때의 것은 1척 정도의 다듬지 않은 네모꼴의 작은 돌을 불규칙하게 쌓았으나 벽면은 수직이다. 세종 때는 2×3척의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을 아랫부분은 비교적 큰 돌로, 윗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왔다. 이 때는 철과 석회를 사용하여 축성기술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준다. 숙종 때의 것은 가로·세로 2척의 정방형 돌을 정연하게 쌓아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이다. 이는 근대적 축성기술의 완성으로 견고한 축성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1915년 일제는 근대도시로의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경성시구역개수 계획이라는 것을 만들어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 결과 현재 삼청동·장충동 일대에만 성벽이 남아 있고, 문도 남대문·동대문·동북문·홍예문뿐이나 조선시대의 태조·세종·숙종으로 이어지는 축성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광복 후 1963년에 인왕산 방면과 북악산의 석축을 보수하였으며, 1972년과 1976년에 부분보수와 개축을 하였다. 참고문헌 石造文化財補修淨化誌 文化財大觀-史蹟篇 下-(文化財管理局, 1976) 서울城郭(서울特別市, 1976) 한국의 성곽(반영환,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8)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96.1.5, 한국학중앙연구원
순성(巡城)놀이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은 동서남북으로 바깥쪽은 외사산(아차산, 덕양산, 관악산, 북한산)이 둘러싸고 외수(한강)가 흐르며, 안쪽으로 내사산(낙산, 인왕산, 목멱산, 백악산)과 내수(청계천)가 있는 명당이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를 건국한 뒤 내사산을 잇는 서울성곽을 축조하였는데 2/3는 토성이었다. 그 뒤 세종이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숙종 때 보수공사를 고쳐 오늘에 이르렀다. 서울 도성의 둘레는 약 사십여리(약18㎞)인데, 순성(巡城)놀이는 봄과 여름철에 성안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성곽 둘레를 따라서 한 바퀴 돌며 성 안팎의 경치를 구경하고 과거 급제를 비롯한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조선 정조 때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誌)라는 책에는 “도성을 한 바퀴 돌아서 도성 안팎의 화류(花柳) 구경을 하는 것이 멋있는 놀이인데, 새벽에 출발하여 저녁종 칠 때에 다 볼 수 있다. 산길이 깎은 듯 험해서 지쳐서 돌아오는 사람이 많다” 하였다.
2012년 8월 25일(토)에 진행될 '맥가이버와 함께 하는 순성놀이'는
서울역에서 만나 숭례문을 출발하여 내사산(인왕산, 백악산, 낙산, 목멱산),
4대문(돈의문, 숙정문, 흥인문, 숭례문), 4소문(창의문,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을 거치며,
600년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생태도시 서울을 걸으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는 여행이다.
--☞ '서울성곽일주'는 지난 2006년 3월 2일자 모 일간지에 [건축가 황두진의 서울성곽 하루에 돌기]를 보고
2006년 3월 05일(일)에 그 신문기사를 들고 홀로 '서울성곽일주'를 위한 사전답사를 하였었고,
이후 2006년 4월 30일(일)에 좋은 님들과 11시간 20분에 걸쳐 '서울성곽일주'를,
세 번째로 2006년 9월 22일(금)~23일(토) 양일간에 걸쳐 '야간 서울성곽일주'를,
네 번째로 2009년 2월 22일(일)에는 10시간 10분에 걸쳐서 '서울성곽일주'를,
다섯 번째로 2010년 4월 25일(일)에는 09시간 27분에 걸쳐서 '서울성곽일주'를,
여섯 번째로 2010년 7월 10일(일)에는 11시간 10분에 걸쳐서 '서울성곽일주'를 하였으며,
그외 '서울성곽'의 일부 구간별로는 이십 여차례 이런 저런 테마로 다녀왔었으며,
오늘은 일곱 번째로 좋은 님들과 함께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 일주'를 하게 된다.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에 대한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원하시면...
아래 움직이는 운동화를 '클릭'하시면 2010년 4월 25일(일)에 다섯 번째로 다녀온 '서울성곽일주'의 사진후기를 볼 수 있습니다. |
누군가가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臥死步生)'고 했다.
맥가이버는 '산 따라 강 따라 길 따라' 걷는 것을 죽고사는 차원이 아닌 즐기는 차원에서 걷는다.
즉, 좋은 길을 걷다가 새로운 환경이나 상황,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되고, 느끼고, 감동 받고, 깨닫는 것을 즐긴다.
▼ 10시 00분 - 서울역 5번 출입구 밖에서 모여...
▼ 10시 03분 - 남대문(숭례문)을 향해 출발...
▼ 숭례문은 복원공사 중...
▼ 아래는 2006년 3월 5일(일) 첫 번째 서울성곽일주를 하면서 찍은 남대문(숭례문)과 수문장교대식 사진 6장...
▼ 숭례문 복구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고...
▼ 10시 07분 - 숭례문 옆 '수선전도'를 한바퀴 돌아보고...
▼ 10시 08분 - '순성놀이'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 일주를 시작하고...
▼ 대한상공회의소 앞을 지나...
▼ 서울성곽을 만나고...
▼ 10시 18분 - 빗방울이 떨어져서 우산을 준비하고...
▼ 10시 23분 - 호암아트홀을 지나...
▼ 10시 25분 - 평안교회를 지나...
▼ 10시 27분 - 러시아대사관이 막고 있어 이화여고 원형극장쪽으로 진행하지 못하고 배재공원으로...
▼ 10시 30분 - 정동교회
▼ 10시 32분 - 정동극장 앞을 지나...
▼ 이화여고 담장을 따라...
▼ 10시 34분 - 이전까지는 이화여고 동문으로 들어서서 유관순 우물을 보고, 원형극장을 따라 걸어서 이화여고 서문으로 나섰으나...
▼ 정문을 지나쳐서 바로 돈의문터 방향으로...
▼ 10시 38분 - 경향신문사 앞 횡단보도를 건너...
▼ 강북삼성병원
▼ 10시 40분 - 강북삼성병원 內 경교장을 둘러보려 했으나...
경교장 [京橋莊 ] 서울시 종로구 평동에 있는 백범 김구(金九)가 1945년 11월부터 1949년 6월 26일까지 사용했던 개인 사저이다.
2001년 4월 6일 서울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 6월 13일에 사적 제465호로 승격되었다. 서울특별시 종구 평동에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하였던 역사적 장소이다.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건국 활동의 중심을 이룬 3대 요람이다.
1938년 금광으로 돈을 번 최창학(崔昌學)이 건축면적 396.69㎡, 연면적 945.45㎡(지하1층, 지상2층)규모로 지은 일본식 건물로, 원래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다.
8·15광복 이후 최창학이 김구의 거처로 제공하였는데, 김구가 죽첨장이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근처에 있는 경교[京橋;경구교(京口橋)의 약칭]라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개명하였다.
건물은 단아한 2층 양관으로 전면 분할의 비례가 아름다우며, 1층의 좌우창을 원형으로 돌출시켰고, 그 상부를 의장의 중심체로 하였다. 현관 2층부에는 6개의 붙임 원주를 사용하여 5개의 들임 아치창을 냈다.
김구가 반탁·건국·통일 운동을 주도할 때에는 흔히 '서대문 경교장'이라고 일컬었으며, 민족진영 인사들의 집결처로 이용되었다. 또한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집무실에서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의해 서거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최창학에게 반환되었고 다시 타이완 대사관저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때에는 미국 특수부대가 주둔하는 등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1967년 삼성재단에서 매입하여 강북삼성병원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출처]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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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시 44분 - 서울시교육청 앞을 지나...
▼ 10시 46분 - 송월동 월암근린공원으로 들어서서...
▼ 10시 49분 - 홍난파기념관
▼ 10시 51분 - 홍난파기념관을 떠나...
▼ 지난 2006년 4월 30일(일)에는 이런 모습이었는데...
▼ 10시 54분 - 딜쿠사 앞에는...
딜쿠샤(Dilkusha)
딜쿠샤(Dilkusha) 또는 앨버트 테일러 가옥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2길 17(행촌동 1-88번지)에 자리잡고 있는 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의 미국식 주택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소유하고 있으며, 한국자산관리공사가 관리한다. 2012년 1월 현재 대한민국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는 않으며, 저소득층 17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이 곳은 본래 행주대첩에서 큰 공을 세웠던 조선의 무관 권율이 기거했던 집터로, 현재도 건물 앞에는 권율이 직접 심은 것으로 알려진 수령 42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1898년 대한제국 시대 아버지와 함께 광업회사 직원 자격으로 한국에 처음 입국하여 무역상이자 언론인으로 활약하였던 앨버트 테일러는 1923년 독립문 인근의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이 곳에 붉은 벽돌로 2층 양옥을 짓고 딜쿠샤(Dilkusha)라는 이름을 붙였다.
집의 이름인 딜쿠샤는 힌디어로 '희망의 궁전, 이상향, 행복한 마음'을 뜻하며, 인도 북부의 곰티 강 인근에 자리잡은 딜쿠샤 궁전(힌디어: दिलकुशा)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 집은 1926년 7월 26일 낙뢰 화재로 손상되기도 하였으나 그 후 복구되었으며, 앨버트 테일러는 1942년 일제에 의해 한국에서 추방될 때까지 이 곳에서 거주하였다.
※ 발굴 과정 오랫동안 이 곳은 양기탁과 어니스트 베델이 함께 발행한 대한매일신보의 사옥으로 추정되어 왔고 1995년부터 서울특별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 및 언론박물관 조성이 추진되어 왔다. 그러나 건물 기초에 새겨진 'DILKUSHA 1923'이라는 명문의 진위를 밝히지 못해 사업이 중단되었다가, 앨버트 테일러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Bruce Tickell Taylor, 1919년 2월 28일 ~ )가 2006년 2월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이 집에 관한 정확한 사실을 밝히면서 모든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브루스 테일러는 서울특별시로부터 명예 시민증을 받았고, 소장하고 있던 서울 사진 17점을 서울특별시에 기증하였다.
※ 앨버트 테일러 앨버트 와일더 "브루스" 테일러(Albert Wilder "Bruce" Taylor, 1875년 3월 14일 ~ 1948년 6월 29일)는 대한제국 및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활동하던 미국의 기업인이자 언론인이다.
※ 생애 1875년 3월 14일 미국에서 금광 기술자였던 조지 알렉산더 테일러(George Alexander Taylor, 1829년 3월 17일 ~ 1908년 12월 10일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금광 기술자가 되었고, 1896년 아버지와 함께 한국에 들어와 운산금광의 직원으로 일하였다. 1908년 아버지 조지가 사망한 후에도 테일러는 한국을 떠나지 않고, 한국에서 금광 사업과 무역상을 하며 동시에 UPI 통신사의 서울 특파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17년 영국 출신의 연극배우 메리 린리 테일러(Mary Linley Taylor, 1889년 ~ 1982년)와 결혼하였고, 1919년 경성에서 외아들 브루스를 낳았다. 그 해 3월 1일 한국 민족대표 33명이 작성, 낭독한 독립 선언서를 입수, 뉴스로 통신사에 타전하여 한국의 3·1 운동을 세계에 알렸으나, 이로 인하여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조선총독부의 감시 대상 인물이 되었다.
이후에도 한국의 독립 운동에 협력하다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며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테일러 일가족은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고, 이듬해 5월 조선총독부의 외국인 추방령에 따라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광복 직후인 1945년에는 한국에 남겨두고 간 재산을 찾기 위하여 미군정청 고문 자격으로 한국에 입국하기도 하였다. 1948년 6월 29일 미국에서 73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대한민국으로 이송되어 서울외국인묘지공원에 안장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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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걸친 美노신사의 ‘한국사랑’ 경향신문 | 입력 2006.02.05 18:29
3대에 걸쳐 한국을 사랑한 미국인이 서울시민이 된다. 서울시는 66년 만에 서울 고향집 '딜쿠사(Dilkusha)'를 방문한 미국인 브루스 테일러(87)에게 '명예시민증'을 수여한다고 5일 밝혔다. 딜쿠사는 브루스 가족이 1942년까지 살던 종로구 행촌동 1-88의 보금자리를, 힌두어 '행복한 마음·기쁨·이상향'의 의미로 작명한 것이다.
이들 가족의 한국사랑은 구한말인 1897년 입국한 할아버지 조지 알렉산더 테일러(George Alexander Taylor)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아들인 알버트 테일러(Albert Taylor)는 금광엔지니어 겸 UPI 통신사 프리랜서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3·1운동을 세계에 알리고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알버트는 한국 독립을 도왔다는 이유로 6개월간 수용생활을 거쳐 추방됐으며 48년 미국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알버트의 한국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땅, 한국 아버지의 묘소 옆에 나를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할아버지와 나란히 묻혔다.
이번에 서울시민이 되는 그 아들 브루스는 1919년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당시 그의 침대 밑에는 독립선언서가 숨겨져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추방된 브루스는 이후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했다. 브루스 가족은 이번 방한길에 딜쿠사를 시작으로 3대에 걸친 한국 사랑을 다큐멘터리에 담는다.
브루스는 6일 명예시민증 수여식에서 부친 알버트로부터 받은 20년대 서울시청과 원구단, 동대문 등 서울의 생활상을 찍은 희귀사진 17점을 기증한다.
〈김창영기자〉 bodang@kyung.com
함께 온 딸 제니퍼 테일러(영화제작자)도 가족의 서울생활을 기록한 할머니 메리 테일러의 자서전 'Chain of Amber'를 영화로 만들어 할리우드에 소개할 예정이다.
ⓒ 경향신문 & 미디어칸(www.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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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시 56분 - 권율장군 집터 은행나무
▼ 10시 58분 - 옥경이슈퍼는 세븐일레븐으로 바뀌고...
▼ 이전의 '옥경이식품' 모습은...
▼ 10시 59분 - 잠시 쉬려던 것이...
▼ 갑자기 내리는 폭우를 피하려 막걸리 한 잔 하다보니...
▼ 11시 29분 - 인왕산 정상을 향해 출발...
▼ 꽃범의꼬리
▼ 11시 36분 - 전망포인트에 올라...
▼ 11시 43분 - 인왕산 초소 앞에서...
▼ 11시 43분 - 한동안 인왕산 성곽복원공사로 인해 오르지 못했던 계단으로 올라서고...
▼ 11시 56분 - 범바위로 오르는 철계단
▼ 12시 03분 - 범바위를 지나...
▼ 12시 05분 - 인왕천약수터 갈림길을 지나...
▼ 12시 18분 - 인왕산 정상 삿갓바위에 올라 인증샷
☞ 여기서 '하루에 걷는 600년 서울, 순성(巡城)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 일주' - 1부를 마치고...
-▥☞ 1부[숭례문→배재공원→정동교회→돈의문터→경교장→홍난파기념관→옥경이슈퍼→인왕산 정상]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2부[인왕산 정상→청운공원→창의문→봉황분수대→청와대→삼청공원→감사원→와룡공원→혜화문]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3부[혜화문→한성대입구역→낙산 정상→흥인지문→동대문역사문화공원→광희문→국립극장]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4부[국립극장→N서울타워→남산 팔각정→잠두봉포토아일랜드→안중근기념관→백범광장→숭례문]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문화유적탐방후기☞ > ♣ 서울한양도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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