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즐거움 20선]<18>주말이 기다려지는 숲 속 걷기여행
《“숲은 고요하다. 가끔씩 새 울음소리가 정적을 깨지만 숲 속의 조용함이 그 소리를 더욱 맑게 울려준다. 새소리 외에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 고요함은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굵기가 한 아름도 더 되는 소나무, 전나무, 산벚나무 등 커다란 나무들이 방음벽처럼 소음을 차단해주고 있는 것일까.”》
산림학자 따라 나무 그늘 속으로
숲은 그 존재만으로도 구원(救援)을 낳는 생명체다.
거의 모든 작품에서 자연의 소중함을 주제로 삼아 온 애니메이션 작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1997년작 ‘모노노케 히메’를 통해서 ‘숲에 의해 구원받는 인간’의 이야기를 그렸다. 울창한 숲 속에서 모든 동식물의 생사를 관장하는 ‘사슴 신’은 숲에 대한 작가의 경의를 보여주는 캐릭터였다.
사슴 신을 통해서 숲의 힘을 받아 목숨을 구원받는 이 만화 속 주인공 아시타카처럼, 하늘을 가릴 듯 빽빽하게 붙어 선 나무 사이를 거닐다 보면 누구나 묘한 생명의 기운을 느낀다. 이 책은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기대려 나무 그늘을 찾아 나선 여행자에게 요긴한 길잡이가 될 만한 숲 안내서다.
국립산림과학원에서 임업연구관으로 일하고 있는 저자는 서울 종묘부터 시작해 제주 비자림에 이르기까지 전국 52개 숲을 일일이 발로 딛고 손으로 만지며 소개했다.
산림학자답게 해당 숲의 얼굴이라 할 나무의 종류, 눈여겨볼 만한 꽃의 이름과 특징을 상세히 기록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묻힌 경기 화성시 융릉, 단종의 유배지였던 강원 영월군 청령포 등에서는 그곳에 얽힌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간략히 덧붙였다. 예상되는 산책 소요시간, 교통편, 주변 여행지 정보도 지도와 함께 실었다.
전국 이곳저곳의 숲을 우왕좌왕 나열하지 않고 유명 경승지를 중심으로 인근 숲을 소개한 구성이 돋보인다.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에 갔다면 그 건너편의 부용대를 돌아보고, 경북 경주시를 찾았다면 남산 숲에도 한번 올라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인공 조림과 지연 삼림을 가리지 않고 풍성하게 아울렀다.
무심하게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쉽사리 잡아내기 어려운 숲 구석구석에 대한 관찰과 그에 대한 개인적 감상도 꼼꼼히 적었다.
“전나무 밑에는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나무들이 가느다란 몸통을 유지하며 자기가 숲의 주인이 될 세상을 상상하고 서 있다. 산꼭대기로 오를수록 전나무가 굵어진다. 어쩌면 굵은 전나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산 깊숙이 들어갈수록 나무가 굵어지길 바라는 소망이 불러 온 착각일지도 모른다. … 숲길이 다시 환해진다. 붉은 석양빛을 받은 소나무가 가로등처럼 길을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조금씩 생겨 흘러나온 물이 합쳐지면서 개울물 소리를 만든다.”
하지만 간결하게 정리된 글에 비해 첨부한 사진 상태가 좋지 않아 읽는 이의 감흥을 떨어뜨린다. 노출이 맞지 않고 구도가 어색한 사진이 많다. ‘천연기념물’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소개한 식의 자잘한 첨부 설명도 형식을 갖추기 위해 붙여 넣은 사족으로 보인다.
책상에 앉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기보다는 첫머리의 지도와 색인을 참고해 가볼 만한 지역을 하나씩 골라 읽길 권한다. 차 뒷좌석 앞주머니에 넣어뒀다가 주말에 잠깐씩 들춰보면서 참고하거나 배낭 속에 집어넣고 훌쩍 떠나기에 유용한 책이다. 전국 고속버스와 시외버스 터미널 전화번호를 말미에 따로 정리해 놓았다.
“한참 나무를 보다가 숲가에 있는 돌무더기에 앉아 연둣빛 가로수와 길 건너 짙푸른 대숲을 바라본다. 시원한 솔바람에 식힌 몸과 마음을 거두고 어느덧 다시 도시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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