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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찻길로 골목길로… 유년시절의 나를 찾아서

by 맥가이버 Macgyver 2011. 3. 17.

기찻길로 골목길로… 유년시절의 나를 찾아서


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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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 철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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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동피랑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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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온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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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군산 경암동의 철길마을. 기찻길 옆 오막살이의 향수를 느끼러 간 그 공간은 주민들에겐 엄중한 삶의 공간이다.

유년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 풍경을 찾아 나서긴 쉽지 않다.

 

 개발의 소용돌이 속 우리의 근현대 과거들이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심히 찾아보면 아직도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현장을 만날 수 있다. 허름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달동네도 그런 곳이다. 부서진 담벼락과 지붕, 좁고 지저분한 골목 등 불편한 풍경일텐데 왠지 그 속에 서면
가슴이 아련해지며 뭉클한 위로를 얻는다. 빛 바랜 흑백사진 앨범을 펼쳐놓고 한 장 한 장 시간을 되새김질 하는 여행이다.

 

태백 철암마을

한국 근대화의 비가(悲歌)가 처연히 흐르고 있는 곳이다.

태백 시내를 지나 통리로 달리다 만나는 동네다.

 차창 밖 주위의 풍경이 갑자기 색을 잃는다.

산 중턱 산더미만큼 쌓인 석탄더미, 상점들의 빛 바랜 간판, 무너져가는 허름한 집들.

이곳에만 시간이 멈춘 듯, 전형적인 탄광촌이 그대로 남아있다.

철암마을은 일제강점기 1936년 처음 탄광이 개발되면서 만들어졌다.

1940년 무렵 석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묵호와 철암을 잇는 철암선이 개통됐고,

1955년 영주와 철암을 연결하는 영암선까지 열리면서 철암은 황금기를 맞게 됐다.

시커먼 탄가루는 돈을 불렀고 그 돈냄새를 좇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길거리의 개도 수표가 아니면 물고 다니지 않는다 했고, 전세값도 서울보다 비싼 곳이 철암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주변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3만 명 이상이 누볐던 거리는 현재 4,000명도 안 되는 인구로 쓸쓸하다.

다른 지역이 빠르게 폐광의 기억을 지우고 있는데 철암역 위의 선탄장에선

아직도 산너머 장성탄광에서 채취된 뒤 터널을 통해 옮겨진 탄들을 선별, 열차에 실어 보내고 있다.

이미 문닫은 여타 탄광촌이 폐광지역개발지원특별법에 따라 변신하고 있지만

철암은 아직도 석탄산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법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껏 퇴락한 옛모습이 남아있는 이유다.

통영 동피랑 마을

통영항의 강구안을 내려다보고 있는 마을이다. 50여 가구 모여 사는 허름한 달동네.

 하구를 굽어보는 전망대처럼 원뿔형으로 솟은 동피랑 언덕은 충무공이 설치한 통제영의 동포루가 있던 곳이다.

통영시는 동포루를 복원하고 주변에 공원을 만들 계획으로 이 마을을 철거하려고 했다.

하지만 시민단체 '푸른통영 21'이 공공미술의 기치를 걸고 달동네를 아름답게 바꾸었다.

전국에서 몰려든 미술학도들이 달동네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댔다.

동피랑은 바닷가 벽화마을로 새로 태어났고 통영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시는 마을 철거 계획을 바꾸었다. 예술이 마을과 실핏줄 같은 골목을 살려냈다.

초라한 집들의 벽이 캔버스가 됐고, 알록달록한 벽화로 집들은 누추함을 감쌌다.

벽화길 이정표를 따라 색색의 화려한 벽화를 감상한다.

골목 이곳저곳에는 동네 사진을 찍으러 온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마을 여러 곳에 '벽화를 관람할 때 주민들의 생활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지붕에 올라가거나 집안을 기웃거리는 일은 삼가 달라'는 푯말이 붙어있다.

목포 온금동

항구의 비린내와 복잡다단한 삶의 향기가 뒤엉킨 도시가 목포다.

목포는 개항과 함께 만들어진 도시다.

그 시가지가 형성되기 전 유달산 자락을 지키며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 살던 원조 목포마을이 있다.

지금의 온금동이다.

'따뜻한 만'이란 뜻의 토박이말로 '다순구미'란 옛이름을 가지고 있다.

유달산 자락에 붙어 바다를 굽어보는 온금동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가난한 달동네다.

바다에서 들어서는 골목길 초입에는 1938년에 세워진 조선
내화 건물이 높다란 굴뚝을 올린 채 덩그러니 남았다.

 뱃사람들의 마을인 만큼 동네 전해지는 사연에도 그들만의 희로애락이 담겨있다.

마을 사람들에겐 유쾌하지 않은
단어지만 이곳엔 '조금새끼'란 말이 전해진다.

바닷물이 빠지는 조금 때면 어부들은 출어를 포기하고 모처럼 집에서 쉬어야 했다.

특별히 할 게 없는 그때가 마을의 집집에선 아기를 갖는 시간이다.

그래서 마을엔 유독 생일이 같은 아이들이 많았다.

이들을 조금새끼라고 불렀다.

이 아이들이 자라 함께 배를 타고 나갔다가 풍랑과 싸우다

한꺼번에 생을 마감하는 일도 잦아, 마을엔 제삿날이 같은 집도 많았다.

대를 잇는 가난의 사슬을 끊으려 죄다 떠나서인지 마을에선 인기척을 느끼기 쉽지 않다.

노인들만 몇 남아 골목을 지키고 있다.


군산 경암동 철길마을

어릴 적 들었던 '기찻길옆 오막살이' 동요와 딱 어울리는 마을이다.

군산 이마트 앞 대로변 바로 뒤에 붙어있다.

철로에 바싹 붙어 다닥다닥 이어진 허름한 집들의 풍경이 가슴에 싸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이 철길마을은 일제때 조성됐다. 원래 갯벌이던 땅에 일제가 간척사업을 벌여 방직공장을 만들려 했다.

그리곤 군산역에서 방직공장 부지까지 2.5km 구간에 철길을 놓았다.

그 방직공장 터에 북선제지가 들어섰고 해방 이후 고려제지 세풍제지 등 종이회사가 차례로 들어왔다.

종이회사의 원자재를 나르던 철도라 '제지선' 또는 '종이철도'로 불렸다.

2008년 6월까지도 하루 2번은 다니던 열차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중단됐다.

여행객은 기찻길 옆 오막살이의 향수를 찾아오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에겐 엄연한 삶의 공간이다.

철길 위엔 여름이면 채송화가 작은 화단에 곱게 피어나고, 가을이면 붉은 고추가 말려진다.

 주민들은 철길을 뒷마당 삼아 각종 화분을 늘어놓고 예쁜 정원으로 꾸미고 산다.

철길 골목을 지날 때는 발끝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함부로 카메라를 들이대며 그들 일상을 조준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