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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서울한양도성

[20120825]하루에 걷는 600년 서울, 순성(巡城)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 일주 - 3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12.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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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08월 25일(토)  

하루에 걷는 600년 서울, 순성(巡城)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 일주
 

 맥가이버의 '하루에 걷는 600년 서울, 순성(巡城)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 일주' 이야기 

 

 맥가이버의 '하루에 걷는 600년 서울, 순성(巡城)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 일주' 코스

 

 서울역→남대문(숭례문)→대한상공회의소→소의문터→순화빌딩→배재공원→정동제일교회→이화여고→창덕여중

→서대문터(돈의문)→강북삼성병원(경교장)→서울시교육청→홍난파기념관→권율장군집터→옥경이슈퍼(세븐일레븐)

→인왕산 정상(삿갓바위:338m)→청운공원→창의문(자하문)→경복고→봉황분수대→청와대 앞길→삼청공원→감사원

→성균관대 후문→와룡공원 쉼터→서울과학고 후문→경신고교 후문→서울시장 공관→혜화문(동소문)→한성대입구역

→삼선주유소→낙산 정상(타락산駝駱山:125m)→동대문성곽공원→동대문(흥인지문)→오간수문→동대문역사문화공원

→한양공업고→광희문→신당동 성당→장충체육관 뒤→신라호텔 담→반야트리호텔(舊타워호텔)→국립극장→N서울타워

→남산 정상(팔각정:262m)→잠두봉포토아일랜드→안중근의사기념관→백범광장→도동삼거리→남대문(숭례문)→서울역

  

 

 서울성곽 [서울城郭/서울漢陽都城]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


둘레 약 17㎞, 지정면적 1,730,221㎡. 사적 제10호.

현재 남대문·동대문 등의 성문과 암문(暗門)·수문(水門)·여장(女墻)·옹성(甕城) 등의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다.


건국 초 태조는 한양천도를 위하여 일차적으로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다음,

1395년(태조 4) 9월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성터를 측정, 조사하게 하였다.

정도전은 백악(白岳)·인왕(仁旺)·목멱(木覓)·낙산(駱山)에 올라 실측하여 사산(四山)을 연결하는 5만9500척의 성터를 결정하였다.


이듬해 정월부터 전국의 민간인 장정이 무려 11만 8,000명이나 동원되어

600척을 한 단위씩으로, 축성구역을 97구(區)로 나누어 정하였다.

구역마다 천자문의 자호(字號)를 표시하여 백악산 동쪽에서부터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낙산·남산·인왕산을 거쳐 백악산 서쪽에 이르러 조자(弔字)까지 구획하였다.


공사는 매글자 구간 600척을 6등분하여

각 공사구간에 판사(判事)·부판사·사(使)·부사·판관(判官) 등 12명씩을 임명하여

민정을 독려하여 견고하게 축성하도록 책임을 맡겼다.

책임진 부분에 해당하는 성벽에 관직과 군명(郡名)을 새겨 넣어 책임을 분명하게 하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높고 험한 산에는 15척 높이의 돌로 쌓게 하였는데 총 석축길이는 1만 9,200척이었다.

석재는 자연석을 약간씩 다듬어 쌓되 기초석은 길고 큰 돌을 수직으로 쌓아올렸다.

평지는 흙으로 쌓았는데 너비는 아랫부분이 25척, 윗부분이 18척, 높이 25척이다.

그 단면은 사다리꼴을 이루는 성토판축(盛土版築)을 하였는데 토축의 둘레는 4만 3,000척이었다.


동대문 부근 청계천에 있는 수구(水口)에는 홍예[雲梯]를 쌓고 그 좌우에는 석성을 축조하였다.

홍예의 높이는 16척, 석성 등을 포함한 길이는 1,050척이었다.


이 해 가을 징정 8만명을 동원하여 토축 부분을 석축으로 고치고 4대문과 4소문을 완성하였다.

4대문이란 동의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의 돈의문(敦義門), 남의 숭례문(崇禮門), 북의 숙청문(肅淸門)을 말하고,

4소문이란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서남의 소덕문(昭德門)을 말한다.


그런데 동대문에만 옹성을 쌓았고, 숙청문은 암문으로 하여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았다.

대략의 공사는 이렇게 끝났지만, 남대문은 1396년에, 동대문의 옹성은 이듬해 4월에야 완성되었다.


1422년(세종 4) 이 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토축부분을 모두 석축으로 바꾸어 높여 쌓고

석재를 약 2 : 1 길이 비율의 장방형으로 많이 다듬어 쌓았다.

또한, 여장도 쌓았고 수문도 2개 더 만들었다.


전국에서 32만 2,000명의 일꾼이 동원된 이 때의 개축으로

도성은 둘레 8만 9,610척, 높이 40척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군데가 되었으며,

곡성(曲城) 1군데, 성랑(城廊) 15군데를 만들었다.


그 뒤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고 성문과 성벽을 보호하게 하였고,

1447년 남대문을 다시 세웠고 1479년(성종 10) 남대문을 중수하였다.


또한, 1451년(문종 1) 1월부터 경기·충청의 수군(水軍) 3,000명으로 성벽을 수축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함락되어 왜군에 의하여 왜루(倭壘)가 쌓여졌고,

이듬해에 수복하여 왜루를 철거하고 그 돌로 다시 수축하였다.


1616년(광해군 8) 부분적인 수축을 하였고, 1704년(숙종 30) 3월부터 약 5년에 걸쳐

오군영(五軍營)에 분담하여 둘레 9,975보, 성첩(城堞) 7,081개의 대대적인 수축을 하였다.

또한, 1743년(영조 19) 부분보수를 하였고, 성첩도 회분(灰粉)으로 단장하였고,

1869년(고종 6) 동대문의 개축을 마지막으로 도성의 수명이 다하였다.

이처럼 서울성곽은 태조 때 창축되어 세종 때 개축되고 숙종 때의 수축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축조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세 시기의 성벽은 쉽게 구분된다.

즉, 태조 때의 것은 1척 정도의 다듬지 않은 네모꼴의 작은 돌을 불규칙하게 쌓았으나 벽면은 수직이다.

세종 때는 2×3척의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을 아랫부분은 비교적 큰 돌로,

윗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왔다.

이 때는 철과 석회를 사용하여 축성기술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준다.


숙종 때의 것은 가로·세로 2척의 정방형 돌을 정연하게 쌓아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이다.

이는 근대적 축성기술의 완성으로 견고한 축성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1915년 일제는 근대도시로의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경성시구역개수 계획이라는 것을 만들어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 결과 현재 삼청동·장충동 일대에만 성벽이 남아 있고, 문도 남대문·동대문·동북문·홍예문뿐이나

조선시대의 태조·세종·숙종으로 이어지는 축성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광복 후 1963년에 인왕산 방면과 북악산의 석축을 보수하였으며, 1972년과 1976년에 부분보수와 개축을 하였다.


참고문헌

 

石造文化財補修淨化誌

文化財大觀-史蹟篇 下-(文化財管理局, 1976)

서울城郭(서울特別市, 1976)

한국의 성곽(반영환,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8)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96.1.5, 한국학중앙연구원

 

 

순성(巡城)놀이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은 동서남북으로

바깥쪽은 외사산(아차산, 덕양산, 관악산, 북한산)이 둘러싸고 외수(한강)가 흐르며,

안쪽으로 내사산(낙산, 인왕산, 목멱산, 백악산)과 내수(청계천)가 있는 명당이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를 건국한 뒤 내사산을 잇는 서울성곽을 축조하였는데 2/3는 토성이었다.

그 뒤 세종이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숙종 때 보수공사를 고쳐 오늘에 이르렀다.

 

서울 도성의 둘레는 약 사십여리(18)인데,

순성(巡城)놀이는 봄과 여름철에 성안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성곽 둘레를 따라서 한 바퀴 돌며 성 안팎의 경치를 구경하고 과거 급제를 비롯한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조선 정조 때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誌)라는 책에는

도성을 한 바퀴 돌아서 도성 안팎의 화류(花柳) 구경을 하는 것이 멋있는 놀이인데,

새벽에 출발하여 저녁종 칠 때에 다 볼 수 있다.

산길이 깎은 듯 험해서 지쳐서 돌아오는 사람이 많다하였다.

   

2012825()에 진행될 '맥가이버와 함께 하는 순성놀이'는

서울역에서 만나 숭례문을 출발하여 내사산(인왕산, 백악산, 낙산, 목멱산),

4대문(돈의문, 숙정문, 흥인문, 숭례문), 4소문(창의문,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을 거치며,

600년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생태도시 서울을 걸으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는 여행이다.

  --☞ '서울성곽일주'는 지난 2006년 3월 2일자 모 일간지에 [건축가 황두진의 서울성곽 하루에 돌기]를 보고

2006년 3월 05일(일)에 그 신문기사를 들고 홀로 '서울성곽일주'를 위한 사전답사를 하였었고,

이후 2006년 4월 30일(일)에 좋은 님들과 11시간 20분에 걸쳐 '서울성곽일주'를,

세 번째로 2006년 9월 22일(금)~23일(토) 양일간에 걸쳐 '야간 서울성곽일주'를,

네 번째로 2009년 2월 22일(일)에는 10시간 10분에 걸쳐서 '서울성곽일주'를,

다섯 번째로 2010년 4월 25일(일)에는 09시간 27분에 걸쳐서 '서울성곽일주'를,

여섯 번째로 2010년 7월 10일(일)에는 11시간 10분에 걸쳐서 '서울성곽일주'를 하였으며,

그외 '서울성곽'의 일부 구간별로는 이십 여차례 이런 저런 테마로 다녀왔었으며,

 

오늘은 일곱 번째로 좋은 님들과 함께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 일주'를 하게 된다.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에 대한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원하시면...

 

아래 움직이는 운동화를 '클릭'하시면 

2010년 4월 25일(일)에 다섯 번째로 다녀온 '서울성곽일주'의 사진후기를 볼 수 있습니다. 

 ↓ ↓ ↓ ↓ ↓

 늘 언제나 항상 변함없이

 

 

☞ 2012년 8월 25일(토)에 진행된
'하루에 걷는 600년 서울, 순성(巡城)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 일주'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누군가가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臥死步生)'고 했다.

맥가이버는 '산 따라 강 따라 길 따라' 걷는 것을 죽고사는 차원이 아닌 즐기는 차원에서 걷는다.

즉, 좋은 길을 걷다가 새로운 환경이나 상황,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되고, 느끼고, 감동 받고, 깨닫는 것을 즐긴다.

 

    

'모든 만남은 걷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길을 걷다보면
새로운 풍광을 보게 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맥가이버가 '때론 함께, 때론 홀로' 산행이나 여행, 도보를 하면서 후기를 주로 사진으로 작성함은
인간의 만남이 유한함을 알기에 어떤 연유로 비록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추억 속에서 함께 하고자 함이고,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걸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하는 무능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든다면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자 할 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하루에 걷는 600년 서울, 순성(巡城)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 일주' - 3부를 시작하며...

 

 

▼ 15시 14분 - 혜화문

 

▼ 혜화문 안쪽을 보긴 처음이네...

 

 

▼ 15시 15분 - 도로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선...

 

▼ 15시 18분 - 한성대입구역 5번 출입구로 들어서서 4번 출입구로 나와...

 

▼ 15시 19분 - 삼선주유소에서 체중조절을 하고...

 

▼ 혜화문에서 육교를 놓아 낙산성곽과 연결을 한다니... 

 

▼ 15시 23분 - 낙산성곽으로 오르는 계단...

 

 

 

▼ 낙산성곽을 따라...

 

 

 

 

 

 

 

▼ 15시 33분 - 장수마을 쉼터에서 성곽을 따라...

 

 

 

 

 

 

 

 

▼ 15시 38분 - 낙산성곽의 암문으로 들어서서...

 

▼ 15시 38분 - 놀이마당 쉼터에서 잠시 휴식...

 

▼ 15시 44분 - 이제 동대문으로 내려서고...

 

 

 

▼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를 당겨보니...

 

▼ 15시 50분 - 다락집?

 

 

 

 

▼ 동대문성곽공원

 

 

 

▼ 16시 01분 - 동대문교회 아래 성벽에는 '공사실명제'의 증거가...

 

 

 

성벽 안팎을 살펴보면 글자가 새겨진 성돌(각자석)들이 많이 보인다.

조선시대 ‘공사실명제’의 흔적이다.

태조 때 서울 성곽을 처음 쌓을 당시 천자문의 글자 순으로 공사구간을 정했다.

전체 공사구간을 600자(약 180m)씩 97개 구간으로 나눠 각 군·현에 할당했다.

북악산 정상에서 ‘하늘 천(天)’ 자로 시작해 낙산·남산·인왕산을 거쳐 다시 북악산에서 ‘불쌍할 조(弔)’ 자로 공사구간이 끝난다.
각자석엔 할당된 공사구간의 시작점과 끝 표시, 담당한 지역, 날짜, 책임자 등이 새겨져 있다.

  태조 때 각자석엔 구간과 지역명, 날짜를 주로 새겼으나, 조선 중기 이후 각자석엔 감독관·책임기술자 등의 이름까지 명기돼 있다.

숙종 이전 성축의 각자는 주로 성벽 바깥에, 이후의 각자는 주로 여장 부분 안쪽에 새겨져 있다. 
 


 

▼ 동대문(흥인지문)

 

▼ 16시 05분 - 동대문 인증샷

 

 

 

 

 

 

 

 

▼ 16시 13분 - 청계천 위 오간대수교를 건너며...

 

 

 

▼ 舊동대문운동장(야구장) 아래 묻혀있던 성곽과 이간수교를 복원하여...

 

 

 

 

 

 

 

 

 

 

 

▼ 16시 29분 - 한양공고앞 횡단보도를 건너...

 

▼ 건너편 하얀건물은 을지로와 퇴계로가 만나는 삼각형 땅에 지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건축가인 김중업의 (구)서산부인과 건물이다.

 

▼ 16시 32분 - 광희문

 

 

 

▼ 16시 41분 - 신당동천주교회를 지나...

 

 

▼ 16시 42분 -

 

▼ 16시 43분 - 장충체육관은 리모델링 중...

 

 

▼ 16시 46분 - 신라호텔 담장이 된 성곽을 따라...

 

 

 

 

 

 

 

 

▼ 16시 55분 - 토끼굴을 지나...

 

 

 

 

▼ 17시 01분 - 시원한 맥주로...

 

▼ 17시 07분 - 출발...

 

 

▼ 17시 10분 - 갈림길에서 반야트리호텔 방향으로...

 

 

 

 

 

 

 

 

▼ 17시 14분 - 반야트리호텔 분수대

 

 

 

 

▼ 17시 18분 - 국립극장 앞 횡단보도를 건너...

 

 

▼ 17시 20분 -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 여기서 '하루에 걷는 600년 서울, 순성(巡城)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 일주' - 3부를 마치고...

  

 

 2012년 08월 25일(토)  

하루에 걷는 600년 서울, 순성(巡城)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 일주

 

-▥☞ 1부[숭례문→배재공원→정동교회→돈의문터→경교장→홍난파기념관→옥경이슈퍼→인왕산 정상]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2부[인왕산 정상→청운공원→창의문→봉황분수대→청와대→삼청공원→감사원→와룡공원→혜화문]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3부[혜화문→한성대입구역→낙산 정상→흥인지문→동대문역사문화공원→광희문→국립극장]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4부[국립극장→N서울타워→남산 팔각정→잠두봉포토아일랜드→안중근기념관→백범광장→숭례문]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