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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서울한양도성

[20130504]숭례문(남대문)복원 준공식날에 하는 순성놀이-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1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13. 5. 5.

30905 

 
 
 
 2013년 05월 04일(토)  
숭례문(남대문) 복원 준공식날에 하는 순성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를 다녀오다.
- 인왕산ㆍ북악산ㆍ낙산ㆍ남산 연계산행 -
 
  맥가이버의 '숭례문(남대문) 복원 준공식날에 하는 순성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 코스
 

서울역→남대문(숭례문)→대한상공회의소→소의문터→순화빌딩→배재공원→정동교회→이화여고→서대문터(돈의문)→강북삼성병원(경교장)

→월암근린공원→홍난파기념관→딜쿠샤ㆍ권율장군집터→옥경이슈퍼→범바위→인왕산 정상(삿갓바위:338m)→청운공원(윤동주시인의언덕)

→자하문고개→창의문(자하문)→창의문쉼터→북악산 정상(백악마루:342m)→숙정문→말바위 쉼터→와룡공원→서울과학고 후문→경신고교

→서울시장공관→혜화문(동소문)→한성대입구역→삼선주유소→낙산 정상(駝駱山:125m)→동대문성곽공원→동대문(흥인지문)→오간수문

→이간수문→동대문역사문화공원→한양공고→광희문→신당동 성당→장충체육관 뒤→신라호텔 담→반야트리호텔(舊타워호텔)→국립극장

→N서울타워(루프테라스)→남산 정상(팔각정:262m)→잠두봉포토아일랜드→남산분수대→백범광장→힐튼호텔→남대문(숭례문)→서울역

 

 맥가이버의 '숭례문(남대문) 복원 준공식날에 하는 순성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 이야기

 

 

서울성곽의 탄생


국가를 상징하는 궁궐과 종묘 · 사직이 세워지면서 이를 방어할 도성(都城)이 필요했다.

이른바 성곽(城郭)의 구축이다.

성곽이 서고서야 도성의 규모가 갖춰지는 것이며, 명실공히 수도의 면모를 말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원래는 도성도 한양 신도(新都) 건설 당시 동시에 쌓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궁궐과 종묘 · 사직의 건설이 먼저였기 때문에 곧 착수하지 못하다가,

태조 4년(1395) 9월 궁궐과 종묘의 공사가 끝날 무렵 도성 축조령이 떨어졌다.

즉 9월 26일에 좌 · 우 정승에게 다음 해 정월부터 각 도의 장정들을 징집해 도성을 쌓을 것을 명했던 것이다.


태조는 "성(城)은 국가의 울타리요, 강폭한 적을 방어하고 민생을 보호하기 위해 없을 수 없는 것"이라며

직접 산에 올라 성 쌓을 곳을 살폈다고 한다.

정도전은 윤 9월에 백악 인왕산 남산 낙산에 올라

이 네 개의 산을 연결한 총 길이 59,500척의 성터를 실측, 성곽의 기본을 잡았다.

남산을 제외한 백악 인왕산 낙산이 모두 종로구 지역임을 감안하면 서울 성곽 · 도성의 55% 이상이 종로인 셈이다.


도성축조와 관련,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기도 한다.

도성을 어느 규모로 쌓아야 할 지 고심하던 중 어느 날 아침 깨어보니 밤 사이 눈이 내렸는데,

지금의 도성 울 안쪽은 눈이 녹고, 바깥 쪽에만 하얀 눈이 줄을 그은 듯 남아 있었다.

이에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그 선을 따라 도성을 쌓았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태조의 왕사인 무학대사는 새 왕조에서 불교의 쇠퇴를 막기 위해 인왕산 서쪽 장삼에 고깔 쓴 스님 형상의 선바위를

도성 안에 넣고자 인왕산에서 무악으로 연결시키는 도성을 쌓을 것을 주장했다.

러나 이것이 정도전의 반대로 무산되자

"이후 불자는 유생의 책 보따리나 져 나르는 심부름꾼을 면치 못하겠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성곽 축조공사

 

오늘 날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 후보로도 올라있는

서울 성곽(둘레 약 17킬로미터)은 태조 5년(1396) 1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49일간 계속되었다.

공사 진행 방법은 59,500척의 성터 중 600척을 1區로 정하고, 각 구마다 천자문으로 표시했다.

예컨대 백악산 동쪽에서 天字로 시작, 낙산 남산 인왕산을 거쳐 백악산 서쪽에서 字로 마쳤다.

59,500척의 성터를 600척씩 97字 區로 나누면 1,300척이 남는데,

이것은 인왕산 정상에 성을 쌓지 않아도 좋을 자연 석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전체의 성터를 600척씩 97字 구로 나누고,

1자 구를 다시 100척씩 6號로 나누어 동북면(백악산 동쪽 정상-숙정문),

강원도(숙정문-동소문), 경상도(동소문-남대문), 전라도(남대문-옛 서대문),

서북면(옛 서대문-백악산 서쪽 정상) 등의 구획으로 각 도(道) 인구비례에 따라 일을 분배했다.

 

이때 경기 충청 황해도의 장정이 보이지 않는 것은 전년도 궁궐 공사에 동원했기 때문이고,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의 국방을 감안해 서북면 안주 이북과 동북면 함주 이북의 장정들도 제외했다고 한다.


축성공사는 완벽을 기하기 위해 이중 삼중의 책임자와 감독자를 두어

그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 성벽 바깥 쪽 돌에 감독자의 출신지와 성명 등을 새기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은 기간에 17킬로미터의 성을 쌓느라 부실하고 조잡한 데가 있었다.

때문에 1396년 8월부터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의 백성 7만 9,400명을 징발해 2차 공사를 또 했다.

2차 공사는 1차 공사에서 완성하지 못했던 부분의 완성과 여름철 장마에 무너진 곳의 개축,

낮은 성문의 보수, 누각을 짓는 일 등에 주력했다.

4대문 4소문 등 8개 성문도 이때 만들어졌다.

이후에도 승려 · 군인들을 동원한 성곽 보수공사는 계속되다가

세종 4년(1422)에 와서야 도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한다.


한편 성곽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다시 부서지고, 그후 또 보수하기를 거듭했다.

일제 강점기의 도시계획과 6. 25 한국전쟁 때도 성문과 벽이 많이 부서졌다.

현재 남아 있는 서울성곽은 대체로 태조 · 세조 · 숙종 때의 것이라 한다.

삼청동 성북동 장충동 일대에 성벽이 남아 있고, 흥인지문(동대문)과 숙정문 · 홍화문이 남아 있다.

국보1호로 지정되었던 숭례문(남대문)은 온 국민이 지켜보는 앞에 얼마 전 불타고 지금은 복원공사 중이다.

2008년 2월 10일 완전소실된 숭례문(남대문)은 5년 3개월의 복원공사 끝에 오늘(2013년 5월 4일) 준공식을 하였다.

 

4대문과 4소문

 

성곽의 축성과 더불어 자연히 성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로서의 문들도 생겼다.

서울 성곽은 전체 둘레 약 17킬로미터 구간 요소마다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小門)을 만들어 냈다.

이른바 '4대문 4소문'이다.


4개의 대문은 유교의 5상(5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에 의해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을 두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해당되는 곳에 보신각(普信閣)을 두어 도읍지의 이상과 정치이념을 나타냈다.

또한 대문과 대문 사이의 요충지에 작은 문을 두어 관문으로 활용토록 했으니

혜화문(동소문), 광희문, 소의문(서소문), 창의문(자하문)이 그들이다.


 

 

순성(巡城)놀이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은 동서남북으로

바깥쪽은 외사산(아차산, 덕양산, 관악산, 북한산)이 둘러싸고 외수(한강)가 흐르며,

안쪽으로 내사산(낙산, 인왕산, 목멱산, 백악산)과 내수(청계천)가 있는 명당이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를 건국한 뒤 내사산을 잇는 서울성곽을 축조하였는데 2/3는 토성이었다.

그 뒤 세종이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숙종 때 보수공사를 고쳐 오늘에 이르렀다.

 

서울 도성의 둘레는 약 사십여리(약18km)인데,

순성(巡城)놀이는 봄과 여름철에 성안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성곽 둘레를 따라서 한 바퀴 돌며 성 안팎의 경치를 구경하고 과거 급제를 비롯한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조선 정조 때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誌)라는 책에는

도성을 한 바퀴 돌아서 도성 안팎의 화류(花柳) 구경을 하는 것이 멋있는 놀이인데,

새벽에 출발하여 저녁종 칠 때에 다 볼 수 있다.

산길이 깎은 듯 험해서 지쳐서 돌아오는 사람이 많다하였다.

 

2013년 05월 04()에 맥가이버와 함께 하는 '순성놀이'는

서울역에서 만나 숭례문을 출발하여 내사산(인왕산, 백악산, 낙산, 목멱산)과

4대문(돈의문, 숙정문, 흥인문, 숭례문), 그리고 4소문(창의문,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을 거치며,

600년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생태도시 서울을 두 발로 걸으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는 여행이다.

 

지난 2008년 2월 10일 남대문(숭례문)이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5년 3개월의 복원공사로 마무리 되어

당일(5월 4일)에 남대문(숭례문) 준공 기념식을 한다니 더욱 뜻깊은 순성놀이가 되리라 여기면서...

 


 

 

  그간의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 일주'에 관하여...

 

 --☞ 오래 전부터 막연하게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를 꿈꾸다가

지난 2006년 3월 2일자 모 일간지에 [건축가 황두진의 서울성곽 하루에 돌기]를 보고...


2006년 3월 05일(일)에 그 신문을 들고 '서울성곽일주'를 위한 답사를 나서 홀로 '서울성곽 길찾기 일주'를 하였었고,

두 번째는 2006년 4월 30일(일)에 좋은 님들과 함께 11시간 20분에 걸쳐 '서울성곽일주'를 하였으며,

세 번째는 2006년 9월 22일(금)~23일(토) 양일간에 걸쳐 '야간 서울성곽일주'를 한 적이 있었으며,

네 번째는 2009년 2월 22일(일)에 10시간 10분이 걸쳐서 보다 완전한 '서울성곽일주'를 하였으며,

그러니까 '서울성곽일주'는 네 번째가 제대로 된 ‘서울성곽일주’인 것이었다.


처음과 두 번째, 세 번째 '서울성곽일주'는 북악산 구간이 통제되었었고,

야간에 통행이 불가한 관계로 북악산 성곽 구간을 빼고

창의문(자하문)에서 청와대 앞을 지나 삼청동을 거쳐 감사원길을 따라

와룡공원으로 우회하여 북악산의 나머지 성곽을 걸었었다.

 
그러다가
2006년 4월 1일에 북악산 지역 서울성곽이 처음 개방된 '홍련사 코스'는 홍련사-숙정문-촛대바위 구간으로 1.1㎞이고,
그리고
2007년 4월 5일 2단계로 '말바위 쉼터 코스'가 와룡공원-숙정문-청운대-백악마루-창의문으로 4.3㎞가 개방되면서
이 두 지역이 개방됨으로써 북악산 구간의  서울성곽을 완전하게 답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는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1시간 간격으로
 한 팀당 100명씩만 입장(2시간30분 동안 관람)을 시키는 제한적 개방인지라
'인터넷 예약이나 현장에 선착순' 등을 하면서
'서울성곽일주'를 하기에는 곤란함이 있어 완전?한 서울성곽일주를 할 수 있는 '언젠가'를 기다리며 지내는데...
 2007년 7월 1일을 기해 사전예약이나 선착순이 아닌 무제한 자유 탐방이 실시되었다.
 
해서 보다 완전한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를 하고자 날을 잡다가 2008년 3월 1일에 하려고 계획 중이었는데
2008년 2월 10일 20시 50분에 발생한 남대문(숭례문)화재로 허탈함에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를 연기하게 된다.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의 마지막 여정으로 하는 '남대문(숭례문) 야경 감상'이 압권이었기에...-

다시 차일피일하다가
2009년 2월 22일(일)에 하게 된 네 번째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는
이전보다는 충실한? '서울성곽일주'이었지만 남대문(숭례문) 야경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움은 컸다.
 
그리고 남대문(숭례문)이 화재로 소실되고 복원공사를 하며 가림막 속에 숨어 있어 아쉽지만
다섯 번째로 2010년 4월 25일(일)에는 09시간 27분에 걸쳐서 '서울성곽일주'를 하였고,
여섯 번째로 2010년 7월 10일(일)에는 11시간 10분에 걸쳐서 '서울성곽일주'를 하였고,
일곱 번째로 2012년 8월 25일(토)에는 약 9시간 10분에 걸쳐서 '서울성곽일주'를 하였으며,
 
남대문(숭례문)이 지난 5년 3개월간의 복원공사를 마치고
남대문(숭례문) 복구 준공식을 하는 2013년 5월 4일에
여덟 번째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를 9시간 20분에 걸쳐서 의미 있게 하였습니다. 
 


 

 

'숭례문(남대문) 복원 준공식날에 하는 순성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의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누군가가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臥死步生)'고 했다.
맥가이버는 '산 따라 강 따라 길 따라' 걷는 것을 죽고사는 차원이 아닌 즐기는 차원에서 걷는다.
즉, 좋은 길을 걷다가 새로운 환경이나 상황,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되고, 느끼고, 감동 받고, 깨닫는 것을 즐긴다.
 

 

 
 '모든 만남은 걷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길을 걷다보면 새로운 풍광을 보게 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맥가이버가 '때론 함께, 때론 홀로' 산행이나 여행, 도보를 하면서 후기를 주로 사진으로 작성함은
인간의 만남이 또한 유한함을 알기에 어떤 연유로 비록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추억 속에서 함께 하고자 함이고,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걸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하는 무능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든다면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자 할 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숭례문(남대문) 복원 준공식날에 하는 순성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를 다녀오다 - 1부를 시작하며...

 

 

▼ 09시 51분 - 서울역 5번 출입구...

 

 

▼ 10시 10분 - 오늘 순성놀이에 함께 하실 8분의 인증샷

 

 

▼ 10시 11분 - 남대문(숭례문)을 향하여 출발...

 

 

▼ 숭례문(남대문) 개방 안내

 

▼ 10시 16분 - 숭례문에 도착하였으나 준공기념식 행사용 가림막이 쳐있네...

 

 

 

 

 

  4대문 中 남대문 - 숭례문(崇禮門)


한양 도성의 남대문이다.

'禮'는 남쪽에 해당되므로 문 이름에 '禮'자를 넣었다.

얼마 전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불에 타 무너지는 처참한 모습을 보인 국보 1호였다.

태종임금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이 썼다고 전하는 세로쓰기 현판도 크게 훼손됐다.

이 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웠던 것은 서울의 외사산 중 하나인 관악산이 화기(火氣)가 충천한 산이라

이로부터 입을 불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현판과 글씨를 세로로 세워 성문 밑을 누름으로써 화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런 믿음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숭례문은 결국 불타고 말았다.

숭례문은 임진왜란 때 일본의 고니시 유끼나카 군과 카토오 키요마사 군이

서로 이 문을 먼저 통과해 서울 입성을 결정지으려 경쟁했던 문으로도 유명하다.

이때 현판도 잃어버렸는데, 몇 년 뒤 광해군 때 어느 날 밤,

지금의 청파동 도랑에서 서광이 비치기에 파 보았더니 숭례문 현판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문은 원래 양측에도 성벽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1908년 일본 황태자가 조선을 방문했을 때 성문 밑으로 들어오기 싫다고 해 바깥 쪽 벽을 헐어냈다고 한다.

지금은 불에 탄 뒤 다시 복원공사 중인데, 양측 성벽도 함께 복원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2월 10일 완전소실된 숭례문(남대문)은 5년 3개월의 복원공사 끝에 오늘(2013년 5월 4일) 준공식을 하였다.

 


 

 

 

 

 

▼ 10시 28분 - 대한상공회의소 옆 서울성곽을 따라...

 

 

 

 

▼ 10시 33분 - 서소문이 있었던 곳을 우회하여...

 

  4소문 中 서소문 - 소의문(昭義門)


한양 도성의 서쪽에 있던 작은 문이다.

원래 이름은 소덕문(昭德門)이었으나,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고 했다.

처음엔 문루 없이 적을 막기 위한 옹성만 둘렀던 것을, 영조 20년(1744)에 새로 문루를 세웠다.

이 문은 옛 인주군과 강화군을 잇는 관문으로, 광희문과 함께 시체를 도성 밖으로 내갈 수 있던 문이었다.

1914년 일제 강점기때 철거되었다.

서울 중구 순화동에 터가 있다.


 

▼ 10시 35분 - 순화빌딩 앞을 지나...

 

▼ 평안교회

 

  평안교회


1951년 05월 13일 - 6·25 전쟁 피난민들이 부산 보수산 중턱에서 첫예배를 드리고, 교회이름을 "평양교회"라 부름. 
    1953년 07월 - 수복된 후 서울에 평양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시내 중구 충무로3가에 교회를 설립한 후 교회 확장에 힘쓰다. 
   1956년 08월 17일 - 평양교회가 시내 서대문구 서소문동 서문교회와 통합하고, 교회 이름을 평안교회로 부르기로 하다.

 

- 평안교회 홈에서 -


 

▼ 이곳이 수렛골(차동)이었다고...

 

 

  수렛골


서울특별시 중구 순화동 일대의 옛 이름이다.

서소문동 서북쪽 전 배재고등학교 자리와 이화여자고등학교 부지 일부 지역을 가르킨다.
 
차동이라고도 불렸다.

이곳에 숙박시설이 많아 관청의 수레들이 많이 모여든 것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숙종 비 인현왕후 민씨가 탄생한 곳이기도 한데,

민씨는 1667년 4월 23일 지금의 중앙일보사 사옥 맞은편 순화빌딩 주차장 터에서 태어나 1681년 15세 때 왕비로 책봉되었다.

20세까지 왕자를 낳지 못하여 숙종에게 장희빈을 후궁으로 천거하였으나

희빈의 모함으로 6년 동안 안국동 감고당에서 칩거하다가 1701년 8월 14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1761년 8월 영조가 직접 이곳에 찾아와 쓴 ‘인현왕후탄강구기’라는 글자를 새겨 인현왕후 추모비를 세웠는데,

이 비는 1936년 민씨 집안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일제강점기에는 상해임시정부의 국내 비밀 연락기관인 서울연통부가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수렛골 (두산백과)

 


 

▼ 배재학당/배재중고교가 잇었던 곳...

 

 

▼ 10시 37분 - 러시아대사관 후문을 지나 이화여고 노천광장으로 이어졌던 서울성곽을 따라 지나가지 못하고...

 

 

 

▼ 배재중고교가 있었다고...

 

 

배재학당[培材學堂]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

 

교훈 :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當爲人役)


1885년 8월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인 H.G.아펜젤러가 세웠으며,

오늘날의 배재중학교·배재고등학교·배재대학교의 전신이다.

1885년 7월 서울에 도착한 아펜젤러가, 1개월 먼저 와 있던 W.B.스크랜턴의 집을 구입,

방 두 칸의 벽을 헐어 만든 교실에서 2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에 고종은 1886년 6월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 이름지어 간판을 써 주었고, 그해 10월 학생수는 20명으로 늘었다.


아펜젤러는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꾼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라고 설립목적을 밝혔고,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當爲人役)’이라는 학당훈(訓)을 내걸었다.

 

그리스도교인과 국가 인재양성을 위하여 일반 학과를 가르치는 외에,

연설회·토론회 등을 열고 사상과 체육 훈련에 힘을 쏟았다.

당시 배재학당에 설치되었던 인쇄부는 한국의 현대식 인쇄 시설의 효시이다.


[출처] 두산백과

 


 

 

▼ 배재학당터, 남궁억집터

 

  배재학당 터·남궁억집 터

 

표석문구
배재학당은 1885년 8월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설립한 근대교육기관이다.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은 고종황제가 직접 내린 것이다. 남궁억은 교육자, 언론인, 독립 운동가이다.

1898년 9월 황성신문을 창간하였고 독립협회의 활동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표석설명
신교육의 문을 연 배재학당

1885년 8월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인 H.G.아펜젤러가 세웠으며, 오늘날의 배재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885년 7월 서울에 도착한 아펜젤러가, 1개월 먼저 와 있던 W.B.스크랜턴의 집을 구입,

방 두 칸의 벽을 헐어 만든 교실에서 2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에 고종은 1886년 6월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 이름지어 간판을 써 주었고, 그해 10월 학생수는 20명으로 늘었다.
아펜젤러는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꾼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라고 설립목적을 밝혔고,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當爲人役)’이라는 학당훈(訓)을 내걸었다.

그리스도교인과 국가 인재양성을 위하여 일반 학과를 가르치는 외에, 연설회·토론회 등을 열고 사상과 체육 훈련에 힘을 쏟았다.

당시 배재학당에 설치되었던 인쇄부는 한국의 현대식 인쇄 시설의 효시이다.

 

남궁억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언론인으로서 서울에서 태어나 재동의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했다.

고종의 어전 통역, 경북 칠곡 부사, 궁내부 토목국장 등을 지냈다.

1896년 <독립신문>에 참여하였고, 독립 협회의 수석총무로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였다.

<황성신문>사 초대사장으로 언론활동에 종사하면서 러시아와 일본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 문화재 기념표석들의 스토리텔링 개발),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 10시 44분 - '정동길 언덕 밑에 눈덮힌 조그만 교회당(광화문연가)' 정동제일교회

 

 

 

  정동교회貞洞第一敎會禮拜堂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건축물.


지정종목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256호
지정일 : 1977년 11월 22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2-2
시대 : 조선
종류 : 종교건축
크기 : 면적 1,143㎡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었다.
1895년 9월에 착공, 이듬해 헌당식(獻堂式)을 거행하고

1897년 10월 무렵에 준공된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축물이다.
교회 내부는 평천장(平天障)에 별다른 장식 없이 간결하고 소박하며

기단(基壇)은 석조(石造)이고 남쪽 모퉁이에 종탑을 세웠다.


건물은 벽돌쌓기로 큰 벽체를 구성하고 아치 모양의 창문을 낸 고딕 양식의 교회당이다.
1926년 양쪽 모퉁이를 넓혀 삼랑식(三廊式) 평면형으로 교회 건물을 증축하였으며

1953년에는 6·25전쟁으로 반파(半破)된 교회를 수리하여 복원하였다.

 

정동교회의 역사는 1885년 10월 11일, 미국 북감리교 선교부 목사 아펜젤러가
정동에 마련한 '벧엘예배당'이라는 그의 집에서,
감리교회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인을 위한 공중예배를 가짐으로써 시작되었는데,
이 날 여자 한 사람을 포함한 4명의 신자가 예배를 드리고 세례를 받았다.


아펜젤러는 이보다 앞서 1885년 6월에 입국하였으나,
당시 조선 정부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전도사업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지 않아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워 신학문 교육부터 시작하였다.

 

정동교회는 1889년 한국 최초의 월간잡지 《교회》를 발간하여 자유주의 사상을 불어넣기 위해 힘썼고,
1897년에는 미국의 엡웟청년회 운동을 도입하여 청년사업을 전개하였는데,
1922년에는 한국 최초로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는 등
선구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한 한국 감리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이다.


-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

 


 

 

▼ 10시 45분 - 정동극장  앞을 지나...

 

 

  정동극장[Chongdong Theater, 貞洞劇場]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예술극장.
 

구분 예술극장
설립일 1995년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43 (정동 8-11) 
규모 대지 약 460평, 객석 400석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의 복원 이념 아래 1995년에 건립하였다.
전통예술의 발전과 보급, 생활 속의 문화운동 전개, 청소년 문화의 육성이라는 세 가지 지표 아래

다양한 공연예술 프로그램을 개발, 보급하였으며,

주변의 다른 문화공간과 함께 도심 속의 새로운 문화관광 명소가 되었다.

미국대사관 관저와 정동교회 사이에 있는 극장 건물은 460여 평의 대지 위에

지상 2층, 지하 3층의 철골 트러스 구조로 지어졌으며, 객석은 400석이다.

무대 시스템은 전통예술, 음악, 무용, 연극 등 모든 장르의 공연예술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무대 면적은 70여 평으로 한가운데에 지름 9m의 회전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별도의 오케스트라 피트 승강무대는 필요에 따라 75석의 이동객석으로 활용할 수 있다.

 

조명시설로는 572개의 채널과 1,024개의 딤머를 갖추고 있으며,

첨단 컴퓨터로 총 500여 개의 조명장치를 조작할 수 있다.

또 시링과 프론트사이드 조명, 서스펜션, 보더라이트, 호리촌트 라이트 등이 설치되어 있다.

 

음향시설은 파워앰프 12개와 무선 마이크로폰 14개, 스피커 4식의 기본시설이 32개의 채널로 통제된다.
또 이퀄라이저, 피드백 시스템이 유선 인터컴 시스템과 같이 사용되는 가운데

3대의 마이크로폰 등이 소리를 입체적으로 소화해낸다.

 

1997년 2월 공연장으로서는 최초로 전통예술을 관광상품화한 ‘정동극장 상설국악공연’은

한국의 전통예술공연을 무용·풍물·기악연주·소리의 4종류로 나누어 각각 7개의 프로그램으로 배합,

궁중음악과 민속음악을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동극장 [Chongdong Theater, 貞洞劇場] (두산백과)

 


 

▼ 10시 46분 - 신아일보별관을 지나...

 

 

구 신아일보사 별관 | 舊新亞日報社別館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는 옛 신아일보사 건물.
 

지정번호 : 등록문화재 제402호
지정년도 : 2008년 8월 27일
소재지 : 서울시 중구 정동 1-28번지
 

2008년 8월 27일 등록문화재 제402호로 지정되었다. 1
930년대에 지하1층, 지상2층으로 건축된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외벽은 중국 상하이에서 가져온 붉은 벽돌로 쌓았다.
1975년에 지상4층으로 증축되었다.

 

구한말에는 세무총사(현재의 관세청에 해당) 사옥으로 쓰였고, 독일인 외교고문 묄렌도르프의 사무실도 이곳에 있었다.
그 뒤 미국기업 싱어미싱회사(Singer Sewing Machine Company)의 한국지부 사무실과

그 상사원들의 숙소 등으로 사용되다가 1963년 신아일보사에 매각되었다.

이후부터 1980년 10월 언론기관통폐합으로 《신아일보》가 《경향신문》에

흡수·통합되기 전까지 신아일보사 별관으로 사용되었다.

구한말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함께 1980년 신군부 언론기관통폐합 조치로

언론수난사 현장을 대변하는 등 근현대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또한 당시 민간건물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철근 콘크리트조 건물로,
슬라브(Slab) 구조 및 원형철근 사용 등 일강점기의 건축수법이 잘 남아 있어

근대건축의 기술사적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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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일보 新亞日報     
  
서울특별시에서 발행되던 일간신문.
 

창간연도 : 1965년
발행구분 : 일간
발행지 : 서울
 
1965년 5월 6일 장기봉(張基鳳)이 창간하였다.
독자를 위한 ‘상업신문’을 자처하면서 한국 종합지로는 처음으로 다색도(多色度) 인쇄를 시도하였다.

독자투고를 취급하는 ‘세론란(世論欄)’, 종교계의 움직임을 취급하는 ‘종교란(宗敎欄)’을 두었고,
서울특별시 일원의 생활정보지로서의 특색을 살리기 위해 ‘생활경제’와

‘수도권백과(首都圈百科)’를 설치하였던 것이 특색이었다.

발행인 장기봉 개인소유로 사세를 확장하지 못하다가

1980년 10월 전국 언론기관통폐합 때에 《경향신문(京鄕新聞)》에 흡수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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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시 47분 - 이화학당/이화여고 담장을 따라...

 

▼ 10시 47분 - 이화여고 교정안으로 들어가 '유관순 우물'도 보고자 하였으나...

 

 

이화학당[梨花學堂]
조선시대에 선교사 스크랜턴이 창설한 사립 여자교육기관.
 
국가 한국
소재지 서울 중구 정동
건립기간 1886년
건립자 스크랜턴 부인(Scranton, M.F)


이화학당은 1886년(고종 23) 해외여성선교회에서 파견된 메리 F. 스크랜튼(Mary F. Scranton)이

서울 황화방(皇華坊), 지금의 중구(中區) 정동(貞洞)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사립여성교육기관이다.


제1대 당장인 스크랜튼의 교육이념은 기독교 교육을 통하여 한국여성들을 '더 나은 한국인으로 양성하는 것',

즉 한국인의 긍지와 존엄성을 회복하고 진정한 한국인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이듬해인 1887년 2월에는 고종황제가 외아문을 통해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과 현판을 하사하였다.
이는 조선의 사액서원에 비견되는 것으로서 이화학당이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최초의 근대식 여학교임을 의미한다.
이화라는 교명은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한 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이화학당은 점차 학제를 정비하여 1904년에는 중등과를,

1908년에는 보통과와 고등과를 신설함으로써 마침내 보통·중등·고등과정의 일관된 학제를 마련하였다.


이화가 중등과를 먼저 설치한 것은 이화의 교육이 여성의 고등교육을 지향해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교사 양성이 시급했던 당시의 사회적 요구를 수렴한 것이었다.


이화학당은 1908년 6월 5명의 제1회 중등과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10년에는 4년제의 대학과를 설치하여

1914년 4월 신마실라·이화숙·김애식 등 한국 최초의 여대생을 배출하였다.  

 

아울러 1914년에 이화유치원을, 1915년에 유치원사범과를 차례로 신설하고, 1917년에는 중등과를 대학예과로 개편하였다.
또한 1918년에 보통과와 고등과를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로 분립개교하였고,

1925년에 대학과와 대학예과를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하였으며, 1928년에 유치원사범과를 이화보육학교로 독립하였다.

이렇듯 이화학당 내에 있던 각급 교육기관들이 독자적인 발전을 추구하면서 독립된 학제로 운영됨에 따라

1928년에 '이화학당'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폐기되었으나, 친근하고 익숙한 '학당'이란 칭호가 계속 사용되었다.

 


이화여자고등학교[梨花女子高等學校]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
 
분류 고등학교
개교일 1886년 5월 31일
구분 사립
설립자 선교사 스크랜턴 여사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26 (정동 32) 
교훈 자유 사랑 평화
교화 배꽃
홈페이지 www.ewha.hs.kr

1886년 5월 31일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으로 창설되었다.
1887년 10월 22일 고종황제가 '이화학당'이란 교명을 하사하였다.
1910년 고등과로부터 대학과를 신설하여 분리했고, 분리된 이화전문학교는 신촌으로 이전하여 이화여자대학교가 되었다.


1935년 이화여대로 교사를 이전하였으며 1951년 6·25전쟁으로 부산 영도에 가교사를 설치하고 개교하였다.
1953년 서울로 환도하여 완전 복교하였고 자매학교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74년 독립 투사인 유관순 동문을 추모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유관순 기념관을  건립했다.

1986년 이화 창립 100주년 기념 비문을 세웠다.
1988년 학교법인 이화학원에서 예원학교 및 서울예술고등학교가 이화예술학원으로 분리되었다.
2003년 일본 야마나시 에이와여고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26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화여자고등학교 [梨花女子高等學校] (두산백과)

 


 

▼ 10시 49분 - 이화여고 교정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제지당하고...

 

 

▼ 10시 53분 - 서대문터

 

 

 

 

  4대문 中 서대문 - 돈의문(敦義門)

 

한양 도성의 서쪽 대문이다.

'義'는 서쪽에 해당되어 '義'자를 넣었다.

처음엔 돈의문이라 했다가 태종 13년(1413)에 풍수설을 수용하여 문을 패쇄하고,

경희궁 서쪽에 새로 문을 내어 서전문(西箭門)이라 불렀다.

이후 세종 4년(1422) 도성을 다시 고칠 때 서전문을 헐고 서대문 마루턱에 새문을 세웠는데, 이름을 다시 돈의문으로 불렀다.

또한 이때부터 돈의문을 새로 지은 문이라 하여 사람들이 '새문'이라고 부르다가 이를 한자어로 신문(新門)이라 불렀다.

오늘날 '신문로'라는 지명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하지만 돈의문은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으로 헐리고, 지금은 서울시가 복원을 준비하고 있다.

 


 

 

▼ 10시 55분 - 경교장을 찾아서...

 

 

서울 경교장[京橋莊]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백범 김구(金九)가 1945년 11월부터 1949년 6월 26일까지 사용했던 개인 사저이다.

 

2001년 4월 6일 서울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 6월 13일에 사적 제465호로 승격되었다.

서울특별시 종구 평동에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하였던 역사적 장소이다.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건국 활동의 중심을 이룬 3대 요람이다.

1938년 금광으로 돈을 번 최창학(崔昌學)이 건축면적 396.69㎡, 연면적 945.45㎡(지하1층, 지상2층)규모로 지었으며,

1930년대 건축술을 잘 보여주고 있다. 원래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다.

 

8·15광복 이후 최창학이 김구의 거처로 제공하였는데, 김구가 죽첨장이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근처에 있는 경교[京橋;경구교(京口橋)의 약칭]라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개명하였다.


건물은 단아한 2층 양관으로 전면 분할의 비례가 아름다우며,

1층의 좌우창을 원형으로 돌출시켰고, 그 상부를 의장의 중심체로 하였다.

현관 2층부에는 6개의 붙임 원주를 사용하여 5개의 들임 아치창을 냈다.


김구가 반탁·건국·통일 운동을 주도할 때에는

흔히 '서대문 경교장'이라고 일컬었으며, 민족진영 인사들의 집결처로 이용되었다.

또한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집무실에서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의해 서거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최창학에게 반환되었고 다시 타이완 대사관저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때에는 미국 특수부대가 주둔하는 등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1967년 삼성재단에서 매입하여 강북삼성병원 본관으로 사용되어왔다.

이후 서울시에서 소유는 그대로 두되 전체 공간을 복원하기로 합의해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던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하였다.

이는 2013년 3월 2일부터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 11시 12분 - 서울시교육청 담장을 따라...

 

 

▼ 옛 기상대 입구를 지나...

 

▼ 11시 15분 - 서울시복지재단 담을 따라...

 

▼ 지난 2006년 4월 30일(일)에 '서울성곽일주'를 하며 지나갔을 때에는 이런 집들이 성곽을 가리고 있었는데...

 

▼ 월암근린공원

 

 

 

 

 

 

 

 

 

▼ 11시 21분 - 홍남파기념관에서...

 

 

  홍파동 홍난파 가옥 紅把洞洪蘭坡家屋     
  
서울특별시 종로구(鍾路區) 홍파동에 있는 근대 건축물이다.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되었다.

종로구청에서 소유, 관리한다.
  
1930년에 독일 선교사가 지은 붉은색 벽돌 벽체에 기와를 얹은 서양식 건물로,

《봉선화》《고향의 봄》 등으로 유명한 작곡가 홍난파(1898~1941)가 6년간 말년을 보낸 집이다.

토지 304㎡에 연면적은 지상, 지하 각 1층 121㎡ 규모이다.

이곳은 개·보수 공사를 끝내고 2007년 9월 소공연장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거실과 안방으로 사용하던 지상 1층에 음향시설 등을 설치하여

50명 정도 수용 규모의 공연장으로 만들었으며

지하에는 자료실과 시청각실을 만들어 홍난파 관련 서적과 비디오테이프 등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서양식 주택의 특성이 잘 보존되어 있는 근대문화유산으로 가치 있는 건축물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파동 2-16번지에 있다.


-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


 

 

 

 

 

 

 

 

 

▼ 지난 2006년 4월 30일(일)에는 이런 모습이었는데...

 

▼ 11시 26분 - 어린이집을 지나면...

 

 

 

▼ 11시 27분 - 권율장군 집터에 '딜쿠샤'

 

 

딜쿠샤

 

딜쿠샤(Dilkusha) 또는 앨버트 테일러 가옥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2길 17(행촌동 1-88번지)에 자리잡고 있는 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의 미국식 주택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소유하고 있으며, 한국자산관리공사가 관리한다.

2012년 1월 현재 대한민국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는 않으며, 저소득층 17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유래

이곳은 본래 행주대첩에서 큰 공을 세웠던 조선의 무관 권율이 기거했던 집터로,

현재도 건물 앞에는 권율이 직접 심은 것으로 알려진 수령 42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1898년 대한제국 시대 아버지와 함께 광업회사 직원 자격으로 한국에 처음 입국하여

무역상이자 언론인으로 활약하였던 앨버트 테일러는 1923년 독립문 인근의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이곳에

붉은 벽돌로 2층 양옥을 짓고 딜쿠샤(Dilkusha)라는 이름을 붙였다.

 

집의 이름인 딜쿠샤는 힌디어로 '희망의 궁전, 이상향, 행복한 마음'을 뜻하며,

인도 북부의 곰티 강 인근에 자리잡은 딜쿠샤 궁전(힌디어: दिलकुशा)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 집은 1926년 7월 26일 낙뢰 화재로 손상되기도 하였으나 그 후 복구되었으며,

앨버트 테일러는 1942년 일제에 의해 한국에서 추방될 때까지 이곳에서 거주하였다.


발굴

과정오랫동안 이곳은 양기탁과 어니스트 베델이 함께 발행한 대한매일신보의 사옥으로 추정되어 왔고

1995년부터 서울특별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 및 언론박물관 조성이 추진되어 왔다.

그러나 건물 기초에 새겨진 'DILKUSHA 1923'이라는 명문의 진위를 밝히지 못해 사업이 중단되었다가,

앨버트 테일러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Bruce Tickell Taylor, 1919년 2월 28일 ~ )가

2006년 2월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이 집에 관한 정확한 사실을 밝히면서 모든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브루스 테일러는 서울특별시로부터 명예 시민증을 받았고,

소장하고 있던 서울 사진 17점을 서울특별시에 기증하였다.


앨버트 테일러

앨버트 와일더 "브루스" 테일러(Albert Wilder "Bruce" Taylor, 1875년 3월 14일 ~ 1948년 6월 29일[5])는

대한제국 및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활동하던 미국의 기업인이자 언론인이다.


생애

1875년 3월 14일 미국에서 금광 기술자였던

조지 알렉산더 테일러(George Alexander Taylor, 1829년 3월 17일 ~ 1908년 12월 10일)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금광 기술자가 되었고,

1896년 아버지와 함께 한국에 들어와 운산금광의 직원으로 일하였다.

1908년 아버지 조지가 사망한 후에도 테일러는 한국을 떠나지 않고,

한국에서 금광 사업과 무역상을 하며[7] 동시에 UPI 통신사의 서울 특파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17년 영국 출신의 연극배우 메리 린리 테일러(Mary Linley Taylor, 1889년 ~ 1982년)와 결혼하였고,

1919년 경성에서 외아들 브루스를 낳았다.

그 해 3월 1일 한국 민족대표 33명이 작성, 낭독한 독립 선언서를 입수,

뉴스로 통신사에 타전하여 한국의 3·1 운동을 세계에 알렸으나,

이로 인하여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조선총독부의 감시 대상 인물이 되었다.


이후에도 한국의 독립 운동에 협력하다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며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테일러 일가족은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고,

이듬해 5월 조선총독부의 외국인 추방령에 따라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광복 직후인 1945년에는 한국에 남겨두고 간 재산을 찾기 위하여

미군정청 고문 자격으로 한국에 입국하기도 하였다.

1948년 6월 29일 미국에서 73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대한민국으로 이송되어 서울외국인묘지공원에 안장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 권율장군 집터에 있는 은행나무

 

▼ 11시 31분 - 열려진 철문을 지나면...

 

 

 

 

▼ 11시 34분 - 옥경이슈퍼 앞 서울성곽을 만나고...

 

 

▼ 지난 2010년 4월 25일(일)에는 이런 모습이었는데...

 

 

▼ 11시 35분 - 이곳에서 잠시 휴식...

 

 

▼ 11시 45분 - 다시 출발...

 

 

▼ 이런 암문은 서울성곽 축성 당시에는 없었는데 근대에 복원하면서 주민통행에 도움을 주고자...

 

 

 

 

 

 

 

 

 

▼ 11시 55분 - 초소 앞을 지나...

 

 

▼ 12시 02분 - 선바위, 얼굴바위(부처바위), 모자바위 등이 보이네...모자바위는 모자(帽子)가 아니라 모자(母子)

 

 

선바위[禪岩(선암)]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인왕산 서쪽 기슭에 있는 바위.
 

1973년 1월 26일 서울특별시민속자료 제4호로 지정되었다.

2개의 거대한 바위가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여 ‘禪’자를 따서 선바위라 불렀다고 전한다.

암석 숭배의 일종으로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모두 이루어진다고 여겨 일찍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남산에 있던 국사당(國師堂)을 이곳으로 옮기게 한 뒤로

선바위에 대한 신앙은 무속(샤머니즘)신앙과 더욱 밀착되었다.

 

조선 태조가 성을 쌓을 때 문신 정도전(鄭道傳)과 무학이

이 바위를 성 안으로 할 것인지 성 밖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 대립을 보였으나

결국 정도전의 의견에 따라 성 밖으로 밀려났다는 일화가 있다.

 

[출처] 두산백과

 


 

 

선바위[禪─]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인왕산 서쪽 기슭에 있는 두 개의 거석(巨石).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

형상이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 같아서 ‘禪(선)’자를 따서 선바위[禪巖]라 불렀다고도 한다.

또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이라는 전설, 또는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는 전설도 있다.

이것은 인간이 죽어서 석불(石佛)이 되었다는 인간의 화신으로 설화되고 있으며,

여기에 빌면 소원성취할 수 있다고 하여 일찍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특히, 자식 없는 사람이 이 바위에 빌면 효험이 크다고 하여 정성을 드리는데,

작은 돌을 붙이면 효험이 더욱 크다고 하여 작은 돌을 문질러서 붙인 자국이 많이 남아 있다.

이를 ‘붙임’이라 하며, 이러한 바위를 ‘붙임바위’라고도 한다.

 

일제가 남산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國師堂)을 선바위 곁으로 옮기게 한 뒤로

더욱 선바위에 대한 신앙은 무속신앙과 밀착되게 되었다.

국사당은 무신당으로서 굿을 행하는 곳이니 바로 옆에 있는 선바위와 복합적으로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이다.

 

선바위는 전국적으로 보이는 암석숭배의 일종이었겠으나

이것이 전설화되고 무속신앙과 밀착되면서 무속신앙의 주요지가 된 듯하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선바위

 

 

선바위[禪岩(선암)]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인왕산 서쪽 기슭에 있는 바위.
 

1973년 1월 26일 서울특별시민속자료 제4호로 지정되었다.

2개의 거대한 바위가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여 ‘禪’자를 따서 선바위라 불렀다고 전한다.

암석 숭배의 일종으로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모두 이루어진다고 여겨 일찍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남산에 있던 국사당(國師堂)을 이곳으로 옮기게 한 뒤로

선바위에 대한 신앙은 무속(샤머니즘)신앙과 더욱 밀착되었다.

 

조선 태조가 성을 쌓을 때 문신 정도전(鄭道傳)과 무학이

이 바위를 성 안으로 할 것인지 성 밖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 대립을 보였으나

결국 정도전의 의견에 따라 성 밖으로 밀려났다는 일화가 있다.

 

[출처] 두산백과

 


 

 

▼ 얼굴바위(부처바위)와 모자(母子)바위...일부에서는 아래 사진에 각진바위를  帽子바위라고 하는데...

 

 

▼ 이 바위가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해서 '모자(母子)바위'...일부는 달팽이바위라고도 하지만...

 

 

 

 

 

▼ 12시 16분 - 범바위를 지나...

 

 

 

인왕산[仁王山:338.2m] 

서울 종로구와 서대문구 홍제동(弘濟洞) 경계에 있는 산.


높이 338.2m이며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구성된 서울의 진산(鎭山) 중 하나이다.

이 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이어지며 동쪽 산허리로 북악(北岳)과 연결되는 인왕산길이 지난다.

조선 초에 도성(都城)을 세울 때, 북악산을 주산(主山),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낙산(駱山)을 좌청룡(左靑龍),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았던, 조선조의 명산이다.

봄에는 진달래가 만발하고 곳곳에 약수와 누대(樓臺)가 있었다.


경치가 아름다워 이를 배경으로 한 산수화가 많은데, 특히 정선(鄭歚)의 《인왕제색도》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인왕산의 표기를 ‘仁旺’이라 하였으나, 1995년 ‘仁王’으로 옛지명이 환원되었다.

군사적인 이유로 1968년 1월 21일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3년 3월 25일 정오부터 개방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인왕산[仁王山] 


유래

인왕사가 있던 데서 유래됨.


종로구 옥인동・누상동・사직동・부암동과 서대문구 현저동・홍제동 경계에 있는 표고 338.2m의 산이다.

인왕사(仁王寺)가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조선을 개국하고 태조가 궁궐터를 정할 때, 북악주산론에 대한 인왕산주산론이 있어 필운대 일대가 궁터로 주목받았다.

 

조선 중기 인물인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에 보면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과 남산을 좌청룡・우백호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이 ‘옛부터 제왕은 남면(南面)하여 천하를 다스렸고,

동향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라고 하면서 극력 반대하여 무학대사의 주장이 좌절되었다.

무학대사는 탄식하며,

‘나의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에 다시 도읍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또 신라 말의 도선대사가 지었다고 하는 ≪산수비기(山水秘記)≫에는

“국도를 정할 때 스님의 말을 들으면 국기가 연장될 것이나,

만일 정(鄭)씨 성을 가진 사람의 말을 들으면 5대가 지나지 않아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만에 큰 난리가 일어나 백성이 어육이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5대 만에 세조의 계유정난이 발생하고,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19세기 기록인 ≪한경지략≫에서 볼 수 있다.

또 명종 때 학자 남사고(南師古)가 인왕산 아래 사직골에 왕의 기운이 있다고 하였는데, 과연 선조가 사직골에서 났다.

광해군 때 인왕산 아래 색문동에 왕의 기운이 있다는 소문이 나서,

그 왕의 기운을 누르기 위하여 인왕산 아래에 경덕궁(경희궁), 인경궁, 자수궁을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인조 2년(1624) 2월에는 안주병사 이괄이 반기를 들고 서울을 점령하여 도원수 장만과 대전할 때,

이괄이 서울사람들에게 “안산에 진을 친 장만을 단숨에 무찌를 터이니, 나와서 싸움을 구경하라.”고 선언하였다.

서울 사람들이 인왕산에 모여 그 싸움을 구경하는데,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어찌 많이 모였던지 인왕산은 흰 사람들로 덮여 백로처럼 되었다고 하는 일화도 있다.

 

또 인왕산에는 호랑이가 많아서 태종 5년(1405) 7월에는 경복궁 안까지 들어와 횡행하였다고 하며,

세조 10년(1464) 9월에는 창덕궁 후원에 들어왔고, 연산군 11년(1505) 5월에는 종묘에 침입하였다.

 그밖에도 호랑이의 민가에 대한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아서 세조는 친히 세 번이나 백악에 올라가서 호랑이를 잡았고,

양주 수락산과 고양 버리고개에 가서도 호랑이를 사냥하였다.

그러나 명종 때에도 양근에서 30여 명이 해를 입고 선조 때에는 고양 등지에서 흰 이마의 호랑이가 횡행하여

400여 명이 그 해를 입었으므로, 조정에서는 군대를 출동시켜 호랑이를 잡았다고 한다.

 

속설에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 머리는 인왕산 호랑이 같다.”는 말이 전하였다고 한다.

서봉(西峰)・서산・필운산이라고도 한다.


출처 : 서울지명사전, 2009.2.13,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인왕산[仁王山:338m]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누상동·사직동과 서대문구 현저동·홍제동에 걸쳐 있는 산.


명칭 유래

조선 개국 초기에 서산(西山)이라고 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렀다.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인데,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하였다고 한다.

서울의 진산(鎭山) 중 하나이다.

일제강점기에 인왕산의 표기를 인왕산(仁旺山)이라 하였으나, 1995년 본래 지명인 인왕산(仁王山)으로 환원되었다.


자연환경

인왕산의 높이는 338m이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암반이 노출된 것이 특징이다.

서울의 성곽은 이 산의 능선을 따라 지나며 동쪽 산허리에 북악산길과 연결되는 인왕산길이 지난다.


인왕산에는 타포니(Tafoni)가 발달한 토르(Tor)가 많다. 주로 서울시 무악동 남쪽기슭 135m 고도에 위치한다.

인왕산의 토르는 주빙하 기후에 의해 화학적 풍화가 진행되어 생성된 것과

후빙기에 절리 발달에 따른 차별침식으로 생성된 것이 있다고 한다.

흔히 타포니는 토르와 관련되어 발달한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화강암 토르에서 관찰되는데 인왕산 또한 그에 해당한다.

 토르에서 타포니가 발달한 부분은 다른 부위보다 풍화가 더욱 진전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2007년과 2008년 인왕산에서 관찰된 식물은 전체 75과 232종 38변종 5품종으로 총 275종이며, 귀화종은 37종이다.

주요 출현 식물은 생태계 교란 야생동ㆍ식물인 국화과의 돼지풀, 서양등골나물 등이다.


형성 및 변천

곳곳에 약수터가 있고 경치가 아름다워 서울시민들의 유원지였으나

군사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었지만 1993년부터 개방되었다.

인왕산은 조선시대의 명산으로 숭앙되었으며, 조선 초기에 도성을 세울 때

북악(北岳)을 주산(主山),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낙산(駱山)과 인왕산을 좌우 용호(龍虎)로 삼아 궁궐을 조성하였다.


현황

봄에는 진달래가 만발하고 곳곳에 약수와 누대가 있었다.

경지가 아름다워 이를 배경으로 그린 산수가 많은데, 특히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인왕산을 등산할 수 있는 코스는 총 5개이며 각각 두시간 정도면 오를 수 있고, 인왕산을 종주하는데 3시간 정도가 걸린다.

제1코스 사직공원 입구·약수터·정상·부암동(자하문),

제2코스는 사직터널·성터·정상·부암동(자하문),

제3코스는 독립문역·인왕산 일주문·국사당·선바위·철조망문·능선길·범바위·인왕천 갈림길·정상·

305능선길·기차바위·인왕아파트 갈림길·홍심약수 갈림길·부암동사무소쪽 갈림길·하림각,

제4코스는 사직터널 전 사직공원·북악스카이웨이·국사당·달팽이바위·인왕산약수·해골바위·정상,

제5코스는 경복궁역·자하문길·영추문·청와대 앞길·청운중학교·최규식 경무관 동상·자하문·성곽길·정상 등이 있다.


지하철 3호선을 이용하여 경복궁역, 독립문역, 홍제역에서 하차한 후 사직공원에 가는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09, 한국학중앙연구원 

 


 

▼ 12시 28분 - 인왕산정상 삿갓바위

 

 

☞ 여기서 '숭례문(남대문) 복원 준공식날에 하는 순성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를 다녀오다 - 1부를 마치고...

 

 
 2013년 05월 04일(토)  
숭례문(남대문) 복원 준공식날에 하는 순성놀이 - 서울성곽(서울한양도성)일주를 다녀오다.
- 인왕산ㆍ북악산ㆍ낙산ㆍ남산 연계산행 -
 

-▥☞ 1부[서울역→남대문→서대문터→경교장→홍난파기념관→딜쿠샤→옥경이슈퍼→범바위→인왕산 정상]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2부[인왕산 정상→청운공원(윤동주시인의언덕)→창의문(자하문)→북악산 정상→청운대→숙정문]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3부[숙정문→와룡공원→혜화문→한성대입구역→낙산 정상→동대문성곽공원→동대문(흥인지문)]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4부[동대문→동대문역사문화공원→광희문→반야트리호텔→국립극장→N서울타워→남산 각정]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5부[남산 팔각정→잠두봉포토아일랜드→남산분수대→백범광장→힐튼호텔→남대문→서울역]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