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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남산 이야기] “이 남산엔 타워가, 저 남산엔 부처님이”

by 맥가이버 Macgyver 2012. 9. 27.

[한국의 남산 이야기] “이 남산엔 타워가, 저 남산엔 부처님이”
  • 글·손수원 기자 
  • 사진·조선일보DB, 윤제학 

 

남산은 고유명사 아닌 남쪽에 있는 산, 앞에 있는 산이란 뜻
서울, 경주, 강릉 등 전국 각지에 남산 즐비
  ▲ 조선의 도읍지였던 서울의 중심에는 남산이 있다.
예부터 중앙봉수대와 국사당 등 주요 시설이 있었던 서울 남산은 요즘에도 시민의 휴식터로 사랑받고 있다.

애국가 중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에 나오는 남산은 어디일까? 흔히 서울의 남산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답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이다. 이 말은 곧 우리나라에 남산이란 이름을 가진 산이 서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서울 사람들이야 제 집 드나들 듯 다니는 명동의 남산(262m)이 가장 친근할 터이지만 경주 사람들은 금오산(495m)과 고위산(467.9m) 사이의 능선과 계곡 전체를 아울러 부르는 남산이 더 친근할 것이다. 이밖에도 전국에 걸쳐 ‘남산’이란 이름을 가진 산은 한두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남산은 정말 남쪽에 있어서 남산일까?


남산의 ‘남(南)’이란 한자로 남쪽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서울 남산의 본래 이름은 인경산 또는 목멱산이었고, 옛말은 남쪽에 있는 산이란 의미로 ‘마뫼’였다. ‘마’는 남쪽(南)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흔히 남쪽에서 부는 바람을 마파람이라 하고, 남쪽을 마녁이라 부른다. 이 ‘마’와 산(山)을 뜻하는 순 우리말 ‘뫼’를 합쳐 ‘마뫼’라고 불렀던 것이다.


남쪽에 있는 산, 앞쪽에 있는 산 등 다양한 의미
반면 남쪽이란 뜻 말고도 ‘앞쪽’이란 뜻도 있다. 1527년(중종 22) 최세진(崔世珍)이 어린이의 한자 학습을 위해 지은 책인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앞은 南, 뒤는 北’이라 서술했다. 이는 북방에서 내려온 민족이 뒤를 북쪽이라 칭하고, 앞을 남쪽이라 칭한 것에서 기원한다. 또한 풍수지리상 주산을 마주 보는 산을 일컫기도 한다.


 
▲ 서울 남산은 궁궐 앞의 산이었기에 각 지역의 봉수가
남산 중앙봉수대에 이르면 비로소 임금도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따져보면 남산은 ‘남쪽에 있는 산’을 말하기도 하고, ‘동네 앞에 있는 산’을 지칭하기도 한다. 또한 남산은 ‘도읍이 있는 곳의 앞산’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이기도 하다. 조선의 도읍지였던 서울(한양)은 물론이고, 신라의 도읍지였던 경주(서라벌), 백제의 도읍지 후보였던 충주, 고려의 도읍지였던 개성(개경)에는 어김없이 남산이 있다.


이러한 다중적인 의미 때문에 남산이라 불리는 산은 전국적으로 셀 수 없을 정도다. 말하자면 우리나라 산 중 ‘남산’은 사람으로 치면 ‘김아무개’ 정도랄까. 그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곳은 서울 남산과 경주 남산이다. 서울 남산은 도심 한가운데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으면서 시민들이 여가를 즐기는 랜드마크 중 하나이며, 경주 남산 또한 신라시대 불교의 중심지로서 ‘노천 박물관’ 경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산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서울 남산의 옛 이름은 인경산(仁慶山)이었으나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서울로 수도를 옮긴 후 지금의 남산 팔각정 자리에 목멱신사를 지어 목멱산(木覓山)으로 불렸다. 목멱신사는 나라에서 행하는 굿을 베풀던, 말하자면 산천제의 기능을 맡아 하던 사당(국사당)이었다. 1925년까지 지금의 팔각정이 있는 자리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황국사관 전파를 위해 남산에 조선신궁(神宮)을 지으면서 지금의 인왕산 국사당 자리로 강제로 옮겨졌다. 목멱산은 ‘경복궁 앞에 있는 산’이라 하여 남산이라 불렸다.


남산 정상에서는 봉수대를 볼 수 있다. 봉수는 나라에 외세가 쳐들어왔을 때 이를 신속히 알리려는 일종의 통신수단이다. 낮에는 봉수대에 연기를 피우고, 밤에는 불을 피워 신호를 전달했다. 


 
▲ 1 남산 정상의 팔각정은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시민의 쉼터이다.
2 남산의 명물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전경.

봉수대는 지방 5개 처에서부터 서울의 남산 사이를 약 수십 리 간격으로 잇고 있었다. 서울 남산의 봉수대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봉수 신호가 집결하는 중앙봉수대였다. 전국 어느 지역 봉수대부터 신호가 시작되었건 약 12시간이면 궁궐이 있는 남산 봉수대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하니 수도 한양에서 남산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통한의 역사 품은 서울 남산
남산은 1910년대부터 ‘한양공원’이란 이름의 시민공원으로 가꾸어졌다. 푸른 소나무도 명물이지만 봄에 피는 벚꽃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남산 벚꽃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남산을 ‘왜장 터’라 부르면서 주둔지로 삼았고, 자신들의 성역처럼 여겨 1897년 무렵에는 남산 일부를 ‘왜성대공원’이라 이름 짓고 산길을 닦아 일본 벚꽃 수백 그루를 심었다. 이 때문에 원래 남산을 지키고 있던 소나무가 반 이상 사라지기도 했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조선총독부가 서울성곽을 비롯한 기존 건축물들을 파괴하고 남산 자락에 조선신궁을 세웠다.


이렇듯 한반도의 중심에서 역사의 희로애락을 모두 몸으로 받아들인 남산이건만, 지금은 명실상부 ‘대한민국 대표 남산’으로 불리며 시민들의 나들이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 남산의 랜드마크이자, 서울의 랜드마크인 남산N타워의 야경.

남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N서울타워’다. 명실상부 서울의 랜드마크로 자리한 탑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있어 서울의 야경을 만끽할 수 있으며, 회현동 순환로에서 N서울타워 밑까지 운행하는 케이블카는 서울 야경을 내려다보며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연인들의 필수 코스다. 또한 남산은 높지 않으며 길이 잘 나 있어 7.5km의 남산순환로를 따라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이외에도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남산자동차극장, 남산골 한옥마을, 장충단공원 등 들러볼 만한 곳이 즐비하다. 


경주 남산은 신라 불교의 성지로 손꼽혀
서울 남산과 유명도를 견주는 또 하나의 남산은 경주 남산이다. 경주 남산은 이름 그대로 ‘경주(서라벌)의 남쪽’에 위치하기에 부르는 이름이며, 일반적으로 금오봉과 고위봉(수리봉)을 합쳐서 남산이라 부른다. 남북 8km, 동서 4km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내린 타원형이면서 남쪽으로 약간 치우쳐 정상을 이룬 직삼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다.


경주 남산은 서울 남산처럼 시민들이 여가를 즐기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는 많지 않다. 하지만 경주 남산은 신라시대 불국토를 이룬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있는 곳으로 신라 개국 이래 줄곧 신라인과 호흡을 같이하며 신성시 되었으며, 불교가 신라에 전파되면서부터는 사찰이나 암자 등이 집중적으로 지어졌다.현재 알려진 것만 147군데의 절터와 118기의 불상, 96기의 탑, 그리고 고분 37기에 이르러 ‘노천 불교박물관’으로 불린다. 200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역사유적지구로 지정되었다.


경주 남산은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뉜다. 동남산은 완만한 편이고, 서남산은 골이 깊고 가파르다. 동남산엔 권력이나 부가 없으면 세우기 어려웠을 법한 세련된 작품이 많아 귀족들이 많이 드나들던 곳으로 보고 있다. 반면에 서남산엔 소박하고 투박한 작품들이 많아 귀족과 백성들이 불공을 드리던 장소가 나뉘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 용장사 삼층석탑에서 본 경주 남산.

경주 남산이 역사적 의의를 갖는 이유는 또 있다. 신라의 시작과 끝이 모두 남산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서남산의 나정(蘿井)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가 깃든 곳이지만, 불과 남쪽으로 1km 남짓 거리에 있는 포석정은 신라 말기의 경애왕이 후백제의 견훤에게 죽임을 당한 곳이다.


경애왕이 죽고 견훤은 경순왕을 56번째 왕으로 앉혔으나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신라를 넘김으로써 박혁거세 이후 992년간 이어진 찬란한 신라의 역사는 끝을 맺게 되었다. 1,000년에 육박하는 신라 역사의 시작과 끝이 모두 남산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렇게 곳곳에서 신라와 불교의 유적들을 볼 수 있는 경주 남산은 봄이면 서울 남산 못지않은 벚꽃 천지로 변한다. 진달래와 함께 피는 벚꽃 덕분에 상춘객들이 몰리는데, 특히 불상과 마애석불을 볼 수 있는 삼릉골 주변의 벚꽃 터널은 전국에서 소문난 벚꽃명소이다. 


경주 남산엔 수많은 등산로가 있다. 답사코스만 70가닥에 이른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는 등산로지만 산길의 정점은 언제나 고위봉과 금오봉이다.


▲ 경주 남산 서쪽 삼릉계곡의 마애석가여래좌상. 신라에 불교가 전파되면서 숭산신앙, 암석신앙과 연관된 문화가 남산에 집중되었다.

그중에서도 추천할 만한 코스는 유물이 가장 많은 삼릉골에서 시작하여 금오봉을 거쳐 절터가 가장 많은 용장골로 내려오는 코스다. 이 코스를 지나며 나정과 포석정, 배리삼존불, 삼릉, 마애관음보살상, 상선암의 마애석가여래대불좌상 등의 주요 유적지들을 모두 볼 수 있다. 대략 6.3km 거리로, 3시간 30분 정도면 완주할 수 있다.


삼릉~삼릉계곡~상선암~금오봉~사자봉~금오정~늠비봉 5층 석탑~부엉골~포석정~배리삼존불~삼릉 회귀코스도 추천할 만하다. 넉넉하게 4시간 정도 걸린다. 특히 능선에서 경주 야경을 바라본다면 이것이야말로 ‘신라의 달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환상적인 경치를 뽐낸다.


각 지역마다 ‘터줏대감’ 남산 있어
이밖에도 전국 각지에 남산 명함을 가진 곳은 많다. 강원도 강릉의 남산은 노암동 남대천 냇가에 솟은 봉으로 조선시대 강릉부사가 집무를 보던 동헌(칠사당)에서 보면 남쪽에 있다고 하여 남산이라고 불렀다. 시민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서울, 경주의 남산과 마찬가지로 봄마다 벚꽃축제가 열린다.


정선의 남산은 아리랑의 발상지인 아우라지와 가깝다. 남산이라는 이름보다는 흔히 조양산(620m)으로 많이 불리는데, 정선읍에서 지척이어서 주민들이 운동 삼아 오르내리는 산이다. 정상에 오르면 정선읍내의 모습을 비롯해 비봉산과 가리왕산도 눈에 들어온다. 조양산은 특히 가을단풍이 아름답기로 소문나 단풍산행지로서도 각광받는다.


▲ 경주 남산 서쪽 삼릉계곡의 마애석가여래좌상.

충주에도 남산이 있다. 일명 금봉산(636m)이라 부르는 이 산에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창룡사가 있다. 또한 정상 부근에는 남북을 잇는 능선 상에 충주산성이 있다. 대몽항전지로 유명한 이 산성은 삼한시대 마고선녀가 축성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어 마고성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창룡사 우측 계곡길을 통해 능선에 오르면 정상까지 군데군데 휴게소가 있는 깨끗한 산책로다. 정상에 서면 충주호 뱃길이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월악산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울산 남산은 도심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장소다. 정상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태화강과 십리대밭, 보리밭 등이 계절마다 색다른 풍경을 자아낸다. 산책로 곳곳에 쉴 수 있는 정자나 쉼터가 많아 아이들과 함께 오르기에 좋다. 능선을 따라 만든 산책길인 솔마루 길을 이용하면 쉽게 남산을 둘러볼 수 있다. 


합천 가야산 자락의 명봉인 남산제일봉(1,010m)의 ‘남산’이란 말 또한 ‘가야산 남쪽에 있는 산’이란 뜻이다. 석화성(불꽃 모양의 바위)이 이어져 등산객에게 사랑받고 있다.


충남 서천읍 남산리와 마서면 봉남리에 걸쳐 있는 산도 남산이라고 불린다. 고도는 140m로 아주 낮은 산이지만 정상부에는 길이 468m에 이르는 서천남산성이 있다. 이 성곽에선 삼국시대의 토기와 기와 조각 등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서천 남산에는 백제시대부터 유래된 남산놀이가 전하는데, 출가한 딸들이 1년에 한 번씩 이 산에서 어머니와 만나 노래를 부르며 즉흥적으로 놀았다고 한다.


이밖에도 상주, 청도, 강화도, 순창, 장수 등에도 남산이라 불리는 산이 자리하고 있으니 서울 사람들은 남산이 서울만의 산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