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1.17 04:00
정류소 '권춘섭집앞'에서 내려 한강 발원지 검용소 지나보니 잿빛 이상향이었던 태백은 총천연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주말매거진이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의 새로운 기획 ‘사람과 길’을 시작합니다. 사람이 사는 곳으로 사람이 여행을 떠납니다. 사람을 빼놓으면 여행은 무의미합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풋풋하고 따뜻한 인생 이야기를 함께 들려드립니다.
권상철은 농부였다. 주변에 인가가 드문 탓에 버스 승객들은 그의 집 근처에 갈 때면 "권상철 집 앞에 내려달라"고 했다. 버스 승강장 이름은 '권상철집앞'이 됐다. 평생 농사짓던 그가 지난해 하늘로 갔다. 아들이 대를 이었고 버스 승강장 이름은 '권춘섭집앞'으로 바뀌었다. 우리의 여행은 권춘섭 집 앞에서 시작한다. 강원도 태백 상사미 마을 초입이다.
1926년 장해룡이라는 사람이 먹골배기 골짜기 오솔길에서 검은 돌덩이를 발견했다. 이후 태백은 탄광촌이 됐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전쟁 후에도 태백은 대한민국 경제에 불가결한 공간이 됐다. 토박이만 살던 촌락은 팔도 사나이들의 도시가 됐다. 권상철 부자(父子)처럼 수많던 농부들도 광산으로 몰려들었다.
그래서 태백의 산천은 의구(依舊)할 수가 없었다. 크고 작은 탄광으로 비탈이란 비탈은 구멍이 뚫렸다. 거듭된 채광에 산봉우리는 낮아졌다. 골지천과 도시는 탄 먼지에 덮여갔다. 태백은 여행에 미쳐버린 사람 아니면 찾을 일 없는 도시로 변해갔다. 그럼에도 사람들을 부르는 공간이 있었으니,검용소(儉龍沼)다.
#강의 시원, 검용소
권춘섭집앞에서 태백시내로 가다 보면 오른편 산길 끝에 나오는 샘물이다. 2009년 겨울 가뭄에 신화가 깨지긴 했지만, 유사 이래 마른 적이 없다던 한강의 발원지다.
막연한 상상과 달리 규모랬자 조금 큰 샘물 정도다. 샘에서 넘친 물길이 만든 누운 폭포가 특이한 정도? 하지만 만물의 시작은 볼품이 없는 법. 초라한 새싹도 떡잎을 떼면 거목이 되고 초라한 샘물도 궁극에는 바다로 흐른다. 그런데 그 장엄한 초라함을 깔보고 복이나 얻겠다고 던져진 버르장머리 없는 동전들이 물속에서 반짝인다.
길섶에서 검용소까지 서늘한 드라이브와 산책은 이 겨울날 꼭 겪어봐야 할 경험이다. 억겁 세월,무심무변(無心無變)의 공간으로 틈입하는 통로다.
검용소에서 태백으로 가는 길목에 고개가 있다. 고개에 빗물이 떨어져 북으로 흐르면 한강이, 동으로는 오십천이, 남으로 흐르면 낙동강이 된다. 자작나무가 하얗게 숲을 이룬 그 고개 이름은 삼수령(三水嶺)이다. 난리를 피해 이상향을 찾아 넘은 고개라 해서 피재라고도 한다.
난민들이 그리던 이상향은 태백이다. 그런데 고갯길이 태백 가는 38번국도와 만나면 풍경은 잿빛으로 변한다. 점이지대 없이 순식간에 변한다.
#잿빛 이상향, 태백
이상향 태백은 오랫동안 잿빛이었다. 잿빛은 부(富)의 색깔이었다. 몸만 조금 고단하면 부가 보장됐다. 고단한 시절, 전국에서 몰려든 사나이들은 태백에서 거금을 손에 쥐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경상도 사내들이 주로 몰려왔다.
신입 광부는 '햇돼지'라고 불렸다. 미래의 부를 거머쥘 새끼 돼지라는 뜻이다. 쫄딱구댕이라 속칭하던 갱도(坑道)로 작업반이 들어갈 때면, 햇돼지들은 쥐 한 마리와 동행했다. 위험이 감지되면 쥐들이 먼저 알아차렸다. 쥐는 돼지들에게 생명이었다.
탄광에서는 허파 속 탄 먼지 씻어내라고 돼지고기 전표를 나눠줬다. 쌀 전표도 나눠줬다. 돈을 찾아 날아온 여인들은 사내들 품에 안겨 술을 권했다.
- 삼수령 고개를 스치는 바람에 자작나무숲이 몸을 떨었다. 삼수령과 구문소 사이에 있다는 이상향, 태백은 탄광으로 흥했다가 오래도록 잿빛에 묻혀 있었다. 지금은 탄광의 흔적과 태고의 자연을 찾아 여행객들 발길이 잦아졌다. 위 사진은 철암역, 가운데 사진은 상장동 마을 벽화와 마을에 사는 재원이.
제일 컸던 요정 대구관은 낙동강 발원지인 황지(黃池) 청정수를 펑펑 써가며 술과 웃음을 팔았다. "태백에서 기생 안 해보고 서울 기생 절대 못 한다"고 할 정도였다. 탄 먼지 자욱한 비포장이었으되 개도 천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 할 만큼 풍요로웠다. 이상향이었다.
찌든 작업복과 속옷을 빨래하는 날, 골지천은 거무튀튀하게 흘렀다. 쉬는 날이면 천변과 계곡과 골목은 돌판에 삼겹살 구워먹는 가족들이 가득했다. 태백사람들은 삼겹살 또한 태백이 기원이라고 믿고 있다. 그 자신이 잠깐 광부였다가 지금은 공무원이 된 정병운(50)이 말했다. "하루 3교대로 일하다가 퇴근하면 사내들은 삼겹살과 술로 속을 훑어내렸다. 그걸 보고 종교단체에서 대낮부터 취해 있는 주정뱅이 도시를 계몽해야 한다고 난리였다. 무식해도 그런 무식한 소리가." 불륜과 폭력을 빗대 막장 드라마, 막장 국회 운운하며, 가족을 위해 목숨 걸고 뛰어든 신성한 삶터를 비하하는 사람들도 기가 막혔다. 어느 시인 말대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전문).
문득, 호시절이 끝났다.
1989년 경제성 없는 탄광을 정리하는 석탄산업합리화정책이 전격 시행됐다. 이상향은 종언했다. 도시에는 한동안 잿빛만 암울했다. 15만이 넘던 인구는 지금도 5만이 채 되지 않는다.
그 잿빛 잔영이 38번 국도변에 가득했다. 그러다 누군가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탄광 대신 관광이다."
#철암, 아련한 그리움
35번 도로를 타고 남하해 경북 쪽으로 가면 경계선에 철암역이 나온다. 아직 운영 중인 탄광의 무연탄을 집하, 운송하는 역이다. 여기 선탄 시설은 등록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역전에는 지금도 십 단위 국번 전화번호 간판이 붙은 상가가 서 있다. 차가운 바람에 인적은 드물고 늙은 간판만 뙤약볕에 반짝인다. 검은 역에는 검은 탄 가득한 검은 화물차가 오간다.
- 함태탄광의 사택촌이었던 상장동마을은 옛 기억을 벽화로 부활시켰다. 갱도에서 탄을 캐는 광부,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전설의 강아지 만복이도 있다. 고단하였으되 행복했던 그 시절을 가슴에 간직한 마을 사람들이 햇살 속을 걸어간다. 태백 상장동 마을 벽화들. 젊은 광부와 처녀의 사랑부터 막장에서 사투를 벌이는 작업 모습 등 잿빛시대의 일상이 따뜻하게 그려져 있다. 태백 사람에게는 일상이지만 바깥 사람들에겐 가슴 먹먹한 향수다.
먹고살 만해지면서 고단한 시절에 대한 향수와 시원(始原)에 대한 동경이 바깥 사람들 마음에 살아났다. 사람들은 검용소 산길을 걸어 시원을 보고, 굳이 철암역까지 달려가 고단함을 간접 경험한다. 서서히 잿빛이 물러나고 태백 풍경 속에 총천연색이 돌아왔다.
#총천연색 상장동
150여 주민 대부분이 광부 출신인 태백선 문곡역 뒤쪽 상장동은 함태광업소 사택촌이었다. 얇은 벽 사이에 두고 살던 이웃사촌들은 하나 둘 떠났다. 골목은 연탄재 버리는 노인이나 보이는, 시간 멎은 공간으로 변했다. 그런데 2년 전, 잿빛 이상향 시대가 하나 둘씩 마을에 벽화로 그려진 것이다. 앞에 등장한 주민 정병운이 말을 잇는다. "목숨을 걸고 돈을 벌던 시절이다. 지워버리느니 기억하고, 감추느니 보여주는 게 태백이 살 길이라고 다들 생각했다."
샛노란 원색 페인트로 그려놓은, 고단했으되 행복한 시절 일상들이다. 골목 모퉁이에서 광부 아버지를 기다리는 소녀, 진폐증을 앓다 하늘로 간 할아버지 무르팍에 앉은 손자, 광부 청년과 처녀의 사랑, 만원짜리를 입에 문 강아지 만복이에 고참들한테 골탕을 먹는 신입 햇돼지까지. 할아버지 품에 안긴 6학년 꼬마 재원이도 그려졌다. 할아버지 김병태는 2년 전 진폐증 후유증으로 하늘로 떠났다. 그림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광부 아버지의 아버지. 광부는 지금 없다. 할아버지의 모습은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흐뭇한 미소로 남아 있다." 먹먹하다.
동일한 폐광촌이되 철암과 상장동은 외형이 다르다. 철암이 잿빛의 꼬리를 밟고 있다면 상장동은 닫혔던 이상향 문을 열고 있는 분위기다. 외지인들에게는 동일 시간대에 상이한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귀한 공간들이다.
철암과 상장동 사이에 구문소<사진>가 있다.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물이 산을 뚫은' 천연기념물이다. 황지에서 솟은 물이 남쪽으로 흐르다 석회암 절벽에 뚫어버린 구멍이다. 거대한 구멍 아래 반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五福洞天子開門(오복동천자개문)"
정감록을 축약한 그 뜻은 이러하다. "낙동강 위에 오르면 더는 갈 수 없는 석문이 나온다. 자시에 열리고 축시에 닫히는데, 들어가면 사시사철 꽃이 피고 흉년이 없으며 병화도 없고 삼재가 들지 않는 이상향이 나타난다." 북쪽 삼척 사람들이 이상향을 찾아 피재를 넘었다. 남쪽 경상도 사람들은 구문소 너머에 이상향이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태백은 예나 제나 이상향이었다.
부귀의 도시 태백은 긴 세월 잿빛으로 살았다. 지금 태백은 여전히 이상향을 꿈꾸며 화려한 빛깔로 외지인을 부른다. 농부 권춘섭집앞에서 시작한 여행, 두 강의 시원과 뭇 사람들 이상향의 민얼굴을 대면하며 끝낸다.
블로그 seno.chosun.com에서 더 많은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여행 수첩
(서울 기준) 중앙고속도로 제천IC 영월 방향 자동차전용도로→영월 이후 38국도 직진 석항→사북→고한→두문동재터널을 넘으면 태백. 시내 진입해 ‘검용소’ 이정표 따라 좌회전하면 삼수령을 거쳐 검용소 입구. 입구에서 1km 정도 더 가면 ‘권춘섭집앞’ 버스 승강장. 상장동 마을은 검용소 삼거리에서 계속 직진해 문곡역 지나 굴다리 교차로에서 우회전. 좁은 상가가 나오고 그 왼편이 상장동 마을. 태백종합경기장 방면 계속 직진하면 구문소. 정면 인공 석문을 지나자마자 좌회전. 철암은 구문소에서 진행방향으로 1km. 철암에서 다시 태백시내로 오려면 진행방향으로 가다가 철도 건널목을 건널 것.
(지역번호 033) ①강산막국수 오투리조트 진입로. 물막국수와 칼국수. 5000원 선. 춘천막국수와 또 맛이 다르다. 둘째, 넷째 월요일 휴무. 552-6680 ②초막고갈두 삼수령 아래. 고등어, 갈치, 두부찜. 두부찜 말고는 2인분 이상. 553-7388. 주차장에서 자작나무 숲을 감상할 수 있다. * 삼수령에서 바람의 마을 가는 길로 오르면 거대한 풍력발전소들을 볼 수 있다. ③구와우순두부 삼수령 구와우마을. 콩을 갈아 만든 순두부. 저녁은 쉰다. 552-7220 ④인삼닭갈비 시내 황지1동8-63. 걸쭉한 태백식 닭갈비. 2인분 이상. 553-3096 ⑤‘실비’라고 이름 붙은 식당들은 상품 한우에 상차림을 낸다.
상장동 황금곳간 광부의 삶 체험 프로그램. 광부 도시락(계란프라이+김치볶음+국) 4000원. 광부 비누도 판매. 굴다리 진입해 오른편 언덕 노란색 집. 상장동 안내도 받을 수 있다. 상장동주민센터 (033)552-1373
(지역번호 033): ①호텔 메르디앙 5만원부터. 553-1266, www.merdian.co.kr ②카스텔로 호텔 14만원. 최근 오픈한 호텔. 553-2211, www.castellohotel.co.kr ③기타 숙박은 태백관광 안내 사이트 tour.taebaek.go.kr 참고 ④오투리조트 www.o2resort.com
태백눈축제: 25일~2월3일.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 상장동 주민들이 광부 가족이 즐겼던 돌판 삼겹살 구이를 판매할 예정.
태백관광안내소 (033)550-2828, 태백시청 관광문화과 (033)550-2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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