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가이버의 낭만도보 - 양평 물소리길 1코스(양수역~국수역) & 2코스(국수역~양평역) 이어걷기 - 코스
양수역 1번 출입구→굴다리→1-1 목왕로앞→용담마을 입구→가정천 잠수교→부용길 삼거리→정지길 사거리→1-2 월계골 입구→[등산로]
→등산로 정상→정창손묘→1-3 목왕로 편의점→1-4 부용1교→낙차보(징검다리)→부용3교→1-5 부용2교→1-6 부용4교→산양산삼밭 입구
→1-7 한음 이덕형 신도비→[임야길]→1-8 가마밭골→1-9 전원일기마을 쉼터(부용산 등산로 입구)→부용산 약수터→신원샘골길 삼거리
→신원1길 삼거리→몽양여운형 생가ㆍ기념관→기념관 비석거리→신원역→1-10 신원리 강변 산책로 입구(신원역 건널목)→[강변산책로]
→1-11 양서초교 앞 보도육교→양서초교 앞→1-12 도곡터널→1-13 제방길 입구→1-14 제방길 삼거리→굴렁쇠 휴게소→국수역→굴다리
→제방길 입구→2-1 밭길→2-2 송구터길 93번길→2-3 대아교출구→인성메디컬 공장앞→증동리 새마을교→2-4 고들빼기마을 삼거리
→식곡길56번길 삼거리→진결고개길 삼거리→2-5 남한강강변길 자전거도로 입구→2-6 기곡터널→옛철도길 쉼터→2-7 아오곡 삼거리
→심충겸 선생묘→상곡재 상곡등산로 입구→단풍마을→2-8 새터말길 삼거리→2-9 골프장 앞→양근향교→옥천1교→2-10 옥천초등학교
→옥천수공원→2-11 들꽃마을 입구→2-12 덕구실 보도육교→들꽃수목원→2-13 양근성지→물안개공원→고산정→양평군립미술관→양평역
▲ 양평 물소리길 1코스 2코스 개념도
▲ 양평 물소리길 1코스 ▼ 양평 물소리길 2코스
‘양평 물소리길'에 대하여...
제주의 명품 ‘올레길’을 빼닮은 도보여행길이 경기도 양평군에 개설되었단다..
‘물소리길’이란 이름이 붙은 이 여행길은
양평군 양수역에서 국수역까지 13.8㎞ 구간을 1코스로, 국수역에서 양평시장까지 16.4㎞ 구간을 2코스라 하여,
2개 구간 총 30.2㎞의 강과 산, 마을이 어우러진 트레킹 코스이다.
지난 4월 27~28일 개설된 양평 물소리길은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농로, 마을길, 옛 철도 터널, 자전거길 등이 어우러져
고향을 찾아 떠나는 아득한 여정으로 손색이 없다고 자랑을 한다.
1코스는
양수역에서 시작하여 정창손묘~부용리 논두렁길~한음 이덕형 신도비~한계산 둘레길~부용산 약수터
~몽양 여운형 기념관~신원역~양서초등학교~도곡터널을 거쳐 국수역까지 이어지는 13.8km이고,
소요시간은 5~6시간이 걸린다고...
2코스는
국수역에서 시작하여 기곡터널~무광사~양근향교~옥천교(사탄천)~옥천수공원~들꽃수목원
~천주교 양근성지~고산정~양평군립미술관~양평시장~양평역으로 연결되는 16.4km이고,
소요시간은 6~7시간 걸린다고..
'양평 물소리길'을 만드는 데는 ‘사단법인 제주올레’가 참여했다고 한다.
제주올레 탐사팀원 10여명이 지난 해 석달 동안 양평군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물소리길 코스 개발 용역을 국내의 여러 도보여행길 가운데 처음으로 직접 수행했다고 한다.
남한강과 북한강을 낀 지리적 이미지와 어감을 고려해 명칭은 '물소리길'로 정했다고...
일부 농로와 산길을 빼곤 대부분 포장길이라는 점이 아쉽지만
길을 만들기 위해 또다른 인공적인 작업을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사람 사는 그대로의 모습을 살려 고향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여행길로 조성했다고 한다.
양평군은
6억원을 들여 리본과 각종 안내표지를 만들고 나무다리 설치 등 코스를 정비했고,
수도권에서 가장 접근하기 쉽고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도보여행길이라 자부하며,
농촌 문화를 체험하고 일상의 피로를 푸는 명소가 될 것이라고 자랑한다.
오늘은 '양평 물소리길'의
'1코스 양수역~국수역 13.8㎞'와 '2코스 국수역~양평역 16.4㎞',2개 구간 30.2㎞를 이어 걷고자 길을 나선다.
수도권 인근에서 새로운 길?이 생겼다고 하는데 기쁜 마음으로 한 번은 다녀와야 하는데 차일피일하다가...
날을 정하고 '양평 물소리길'에 대해 선답자들의 후기를 살펴보았으나...
'양평 물소리길'에 대해 감을 잡을 수가 없을 정도인지라...
'양평 물소리길'에서 제공한 1코스와 2코스 코스도를 들고 무작정 길을 나서기로 한다.
양평 물소리길 중 일부 구간이 언젠가 걸었던 남한강 자전거길과도 만나는 것 같으니 생소한 길에서만 독도에 주의하면 되리라...
그리고 양평 물소리길에서 제공한 코스도에서 보니
양수역~국수역 13.8㎞(1코스)가 5~6시간 소요되고,
국수역~양평시장 16.4㎞(2코스)가 6~7시간이 소요된다고 하니
특별히 난코스가 없다면 점심식사 시간을 포함하여 약 12시간 정도 걸리리라 예상하고 길을 걷기로 한다.
점심식사는 '신원역 국수집'에서 매식 할 수 있도록 조금 이른 출발을 하여 동행들의 배낭 무게를 줄였다.
☞ 양평 물소리길 1코스(양수역~국수역) & 2코스(국수역~양평역) 이어걷기를 다녀오다 - 2부를 시작하며...
▼ 10시 08분 - 한음 이덕형선생 묘 및 신도비
한음 이덕형 선생 묘 및 신도비
소 재 : 양서면 목왕리
분 류 : 경기도문화재
문 의 : 031-770-2471
종목 : 시도기념물 89호
시대 : 신도비-조선 효종 4년
분류 : 묘
수량 : 1기
지정일 : 1985.09.20
소유자 : 광주이씨의정공파종중
관리자 : 광주이씨의정공파종중
사천교 갈림길에서 공원묘원이 있는 곳으로 약 150m 떨어진 곳에 제실이 마련되어 있다.
묘소는 이 제실의 남쪽 청계산 줄기 형제봉 하단에 있다.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 본관은 광주이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민성(李民聖)의 아들이며, 영의정 이산해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통달하여 어린 나이로 양사언(楊士彦)과 가까운 사이였다.
또한 어렸을 때 이항복과 막역한 사이로 많은 일화가 알려져 있다.
선조 13년(1580)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패수까지 올라와 화의를 청하자
이덕형은 단독으로 적진에 들어가 대의로서 그들을 공박하였다.
그 뒤 정주까지 왕을 호종하였고, 청원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명군의 파병을 성취시켰다.
정유재란시 좌찬성에 올랐고,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로 경상, 전라, 충청, 강원 4도체찰사를 겸하여
전란 뒤의 민심수습과 군대의 정비에 노력하였으며 이듬해 영의정이 되었다.
한때 영중추부사로 한직에 있다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광해군 5년(1613)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삭직(削職)되었고
이 때 양근에 내려와 국사의 그릇됨을 상소하며 세월을 보내다 53세로 병사하였다.
인조 때 복관되었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신도비(높이 356㎝, 폭 110㎝, 두께 42㎝)는 효종 4년(1653)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조경(趙絅)이 찬했으며, 글씨는 오시수(吳始壽)가, 전자(篆字)는 정규상(鄭奎祥)이 썼다.
신도비는 장방형 비좌와 이수를 갖춘 형태이다.
귀부는 용과 괴운문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현재 비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전각 내에 세워져 있다.
신도비에서 동쪽으로 약 1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영정각은 1977년에 문중에서 건립한 것으로,
홍살문과 경중문(敬重門), 영정각(影幀閣)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정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내부에는 이덕형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참고문헌
『양평군지』(양평군, 1991), 『양평문화유적총람』(양평군, 1995), 『경기도금석문대관』(경기도, 1994)
[교통정보]
양서면소재지에서 1번 국도를 따라 북동쪽으로 약 4km 정도 가면 사천교에 이른다.
이덕형 신도비는 사천교에서 남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묘는 신도비에서 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형제봉 하단에 위치하고 있다.
출처 : 양평문화원
한음이덕형선생묘 및 신도비[漢陰李德馨先生墓─神道碑]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木旺里)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이덕형(李德馨)의 묘와 신도비.
지정종목 : 시도기념물
지정번호 : 경기기념물 제89호
지정일 : 1985년 09월 20일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 82
시대 : 조선
종류/분류 : 묘, 신도비
1985년 9월 20일 경기도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되었다.
광주이씨 좌의정공파 종중이 소유하고 있으며 청계산(淸溪山) 서쪽 형제봉(兄弟峯) 줄기에 있다.
묘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묘비 1기(基), 상석(床石)이 있으며 그 앞에 가로로 긴댓돌로 단을 쌓았다.
단 아래 좌우에는 동자석(童子石)이 있고 그 앞에 망주석(望柱石)·문인석(文人石)이 좌우로 있다.
대리석으로 된 묘비의 크기는 높이 155㎝, 너비 60㎝, 두께 20㎝이다.
신도비는 1653년(효종 4)에 세웠으며 묘역 아래 약 300m 지점에 있다.
화강암으로 된 직사각형 비좌(碑座)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螭首)를 올렸다.
크기는 높이 360㎝, 너비 110㎝, 두께 42㎝이고 근래에 비각을 건립하였다.
비문은 조경(趙絅)이 찬(撰)하였으며, 정규상(鄭奎祥)이 전액(篆額)을 썼다.
신도비에서 동쪽으로 약 150m 떨어진 곳에 이덕형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영정각이 있다.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한음(漢陰)이며 어렸을 때 이항복과 막역한 사이로 많은 일화가 알려져 있다.
여러 관직을 거쳐 1602년에는 영의정에 올랐으며 잠시 한직에 있다가 1608년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삭직(削職)되어 양근에서 병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음이덕형선생묘 및 신도비 [漢陰李德馨先生墓─神道碑] (두산백과)
▼ 한음 이덕형선생 신도비
▼ 개울을 건너는 아치교가 있는데...
▼ 10시 09분 - 물소리길은 숲속으로 이어지고...
▼ ?
▼ 10시 20분 - 이덕형의 沙阜春帖에서 가져온 글을...
▼ 10시 21분 - 이곳은 큰물이 흐를 땐 어찌 하라고...
▼ 10시 31분 - 징검다리를 건너서 잠시 휴식하고 출발...
▼ 이곳에선 진행표시 색이 제대로인데...
▼ 10시 33분 - 이곳에선 진행표시 색이 뒤바뀌었네...
▼ 진행표시 색과 상관없이 진행방향으로...
▼ 10시 38분 - 전원일기마을...
▼ 개조심!!!
▼ 10시 39분 -
▼ 물소리길 1코스 안내도(클릭하면 확대됨)
▼ 10시 41분 -
▼ 10시 49분 -
▼ 10시 51분 - 물 한모금 마시고...
▼ 10시 52분 -
▼ 10시 53분 - 부용산약수터에 도착...
▼ 10시 57분 - 약수물을 보충하고....
▼ 10시 58분 - 전나무숲을 지나...
▼ 11시 01분 - 샘골고개에 도착...
▼ 11시 01분 - 양평 청계산에서 부용산으로 이어갈 때 지났던 '샘골고개'
▼ 오늘은 신원역 방향으로...
▼ 11시 03분 - 샘골고개 아래에서 만나 이후 여정을 함께 하기로...
▼ 11시 11분 -
▼ 돼지감자
▼ 11시 13분 -
▼ 11시 15분 -
▼ 11시 23분 - 몽양 여운형 생가 기념관으로...
▼ 몽양 여운형 기념관
▼ 11시 24분 - 몽양 여운형 생가ㆍ기념관을 배경으로 인증샷...
▼ 몽양 여운형 기념관
여운형[呂運亨]
한국의 독립운동가·정치가. 초당의숙(草堂義塾)을 세우고,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발기하였다.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하여 한국의 사정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이어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생-사망 : 1886.5.25 ~ 1947.7.19
본관 : 함양
호 : 몽양
활동분야 : 독립운동, 정치
출생지 : 경기 양평
주요수상 : 건국훈장 대통령장(2005), 대한민국장(2008)
본관은 함양(咸陽), 호는 몽양(夢陽)이다.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양서면(楊西面) 신원리(新院里) 묘곡(妙谷)이라는 곳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조부 여규신(呂圭信)과 종조부 여규덕(呂圭德)은 동학에 가담하였는데 몽양에게 끼친 영향이 컸다.
하지만 부친 여정현(呂鼎鉉)은 조부와 달리 조선시대 양반사회의 계급주의를 신봉했으며
몽양은 이러한 부친을 자신의 성장기에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 회고하였다.
몽양은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촌 관계였던 족숙(族叔) 여병현(呂炳鉉)의 도움으로 서울로 갔으며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서 기독교를 접했고, 흥화학교(興化學校)를 거쳐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전신(電信)기술을 공부하여 통신원 기술자가 되고자 하였다.
하지만 통신원이 일본 소유로 넘어가자 취업을 거부하였다.
1906년 부친이 사망하자 집안의 노비를 모두 불러모아 노비문서를 모두 불태워 그들을 해방시켰다.
1907년부터 서울 종로에 있었던 승동교회(勝洞敎會)에서 선교사 보조원 생활을 했었고
같은해 양평 고향집에 기독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워 향리의 청년들을 계몽하는데 앞장섰다.
1910년 선교보다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강릉에 초당의숙(草堂義塾)을 세워 평등사상과 신학문을 가르치는데 전념하였다.
하지만 총독부에 의해 학교는 1년만에 폐쇄되고 말았다.
국권이 피탈되고 학교가 폐쇄되자 승동교회로 돌아와 평양신학교를 다녔다.
또한 그는 스포츠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대한민국 최초의 야구팀인
YMCA 야구부(황성기독교청년회 베이스 볼 팀)의 주장으로 활약한 것으로 추측되며
1912년 11월 2일 와세다대학의 초청을 받아 일본까지 원정경기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직접 목격한 신문물과 조선유학생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깨우치고
선교사 클라크를 따라 서간도(西間島: 퉁화)의 신흥학교(新興學校)를 견학하였고
이때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1914년 겨울 중국으로 건너갔다.
언드우드 선교사로 부터 추천장을 받아 장로교 선교회가 운영하는
난징[南京] 진링대학[金陵大學]에서 3년간(28~30세) 영문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1915.2~1917.1).
몽양이 당시 선진국 일본을 선택하지 않고 퇴락하는 중국으로 유학을 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중국의 유학은 그의 가치관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1916년 상하이[上海]로 가 협화서국 서점(Shanghai Mission Bookstore)에 취업 하였으며
선교사, 인성학교 교사, 여행대행업 등을 했다.
1918년 상하이에서 장덕수(張德秀)를 만나면서 여운형은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몽양은 정치와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조선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김규식(金奎植)을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였고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발기하였다.
이 일은 국내 독립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이 되었는데,
일본정부는 이를 자치운동(自治運動)으로 회유하고자 그 해 11월 그를 도쿄[東京]로 초청하였으나
오히려 장덕수(張德秀)를 통역관으로 삼아 일본의 조야(朝野) 인사들에게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1920년 5월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하였는데,
국제공산당 위원인 보이틴스키(Grigorii Voitinsky)가 조선의 독립을 지원할 수 있다는 제안에 공산당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볼셰비키정부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제공한 자금을
이동휘, 김립이 가로채 독단적인 처리하자 고려공산당은 분파되어 와해되고 말았다.
1921년 이르쿠츠크(Irkutsk)에서 열릴예정이었던 원동(遠東)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고비사막을 횡단하고,
바이칼호수를 건너는 고난한 여행으로 도착하였으나 대회 장소는 모스크바로 변경되었다.
1922년 1월 7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났으며 조선의 사정을 논의하였다.
중국 상하이로 돌아와 쑨원과 중국공산당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1925년부터는 중국혁명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하지만 1927년 장개석(蔣介石)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 축출로
몽양이 믿었던 소련의 지원과 국공합작체계의 정치적 모델이 무너지고 말았다.
낙담한 그는 체육부 코치로 생활하면서 싱가포르에서 인삼사업을 모색하다
1929년 7월 10일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는 혐의로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었다.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국내로 압송되었는데 국내 언론에서는 그의 압송이 대서특필되었으며
중국에서 실패한 공산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허망한 날을 보냈으나 국내에서는 일약 유명인이 되었다.
재판 결과 독립운동을 전개한 죄목으로 4년간 복역하였다.
1933년 출옥하자 그는 민족의 영웅으로 추대되었고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였는데
경영난으로 어려웠던 신문사는 그의 명성에 힘입어 번창하였다.
하지만 베를린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1936년 신문이 일제에 의하여 폐간되자 사임한 후 1944년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8·15광복을 맞아 안재홍(安在鴻), 정백(鄭栢) 등과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하였으나
임시정부의 지사들과 대립되었고 건준위 조직 내부 박헌영이 주도하는 극좌익세력과 정치투쟁 내분에 휩쌓였다.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해 실패하였다.
12월 조선인민당을 창당, 1946년 29개의 좌익단체를 규합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을 결성하였으나
정책 노선이 명확하지 못해 조직을 장악하지 못했고 반대파 좌익세력에게 밀려 탈퇴하였다.
또, 1947년 5월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으나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극우파 한지근(韓智根)에 의하여 1947년 암살되었다.
덴마크체조를 국내에 보급한 체육인이기도 하였으며, 광복 후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 제11대(1946∼1947) 회장을 지냈다.
2005년 3·1절에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된 데 이어 2008년 2월 2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이 추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여운형 [呂運亨]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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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양 어록을 돌에 새겨...
▼ 11시 30분 - 굴다리 통과...
▼ 11시 34분 - 신원역 도착...
▼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 12시 13분 - 점심식사와 휴식을 마치고...
▼ 12시 16분 -
▼ 남한강 강변길을 따라....
▼ 12시 24분 -
▼ 12시 26분 - 한강하구에서 90km지점을 통과...
▼ 홑왕원추리
▼ 12시 31분 - 조망대
▼ 12시 37분 - 양서초등학교 앞 보도육교(내려다보고 있는 이와 국수역까지 동행함)
☞ 여기서 양평 물소리길 1코스(양수역~국수역) & 2코스(국수역~양평역) 이어걷기를 다녀오다 - 2부를 마치고...
-▥☞ 1부[양수역→용담마을 입구→정창손묘→목왕로 편의점→부용교→낙차보→산양산삼밭 입구→한음 이덕형 신도비]는 여기를 클릭.☜▥-
-▥☞ 2부[한음 이덕형 신도비→가마밭골→부용산 약수터→몽양 여운형 생가ㆍ기념관→신원역→양서초교 앞 보도육교]는 여기를 클릭.☜▥-
-▥☞ 3부[양서초교 앞 보도육교→도곡터널→굴렁쇠 휴게소→국수역→대아교→중동1교→기곡터널→옛철도길 쉼터]는 여기를 클릭.☜▥-
-▥☞ 4부[옛철도길 쉼터→심충겸 선생묘→상곡재→단풍마을→골프장 앞→양근향교→옥천교→옥천초교→옥천수공원]는 여기를 클릭.☜▥-
-▥☞ 5부[옥천수공원→덕구실 보도육교→들꽃수목원→양근성지→물안개공원→고산정→양평군립미술관→양평역]는 여기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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