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불구불 42km 쉬엄쉬엄 걷는 길, 나를 돌아보는 길
[중앙일보] 입력 2013.04.12 04:00 / 수정 2013.04.12 09:21그 길 속 그 이야기 (37) 전남 완도군 청산도 슬로길
영화 `서편제` 촬영지로 가는 길목의 유채밭 길 풍경. 뭍의 꽃은 지난해보다 일주일 정도 일찍 개화했는데 청산도 유채꽃은 되레 늦게 꽃망울을 틔웠다. 샛노란 유채밭을 만나려면 이번 주말부터 이달 말까지가 적기다. 사진은 지난 달 29일 촬영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중략)’ 고교 시절 배운 고려가요 ‘청산별곡(靑山別曲)’이다. 청산은 이상향, 유토피아를 뜻한다. 우리나라에도 ‘청산’이 있다. 전남 완도군의 작은 섬 청산도. 이름처럼 이곳 섬 주민들은 유토피아를 꿈꾸며 살아간다. 고유의 옛날 생활방식을 고수한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천천히. ‘빠름빠름’이 생활화된 현대인에겐 어떤 의미에선 또 하나의 이상향이다.
2007년 12월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Slow city)로 인증 받은 청산도는 ‘느림의 섬’이다. 그래서 청산도에선 걸어야 한다. 그게 청산도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길이다. 쉬엄쉬엄. 청산도를 한 바퀴 도는 길 이름도 ‘슬로길’(42㎞)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 길을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했다. 청산도는 이맘때가 가장 아름답다. 야트막한 돌담과 유채꽃, 청보리, 그리고 넘실대는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여기가 유토피아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1 상서마을 돌담길을 알려주는 이정표 가운데에는 상서마을 마스코트 긴꼬리투구 새우가 그려져 있다. 2 영화 `서편제`에 등장한 초가. 3 해풍이 바위와 부딪쳐 나는 소리가 마치 호랑이 울음소리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범바위 뒤로 너른 남해가 펼쳐져 있다. 4 평지가 거의 없는 청산도에는 계단식 논이 발달했는데, 구들장 논은 다랭이 논과는 달리 배수구가 있다.
어깨가 절로 들썩이는 서편제 그길
전남 완도군 연안여객터미널에서 50분 정도 배를 타고 청산도에 도착했다. 청산도로 들어가는 관문인 도청항은 평일인데도 분주했다. 청산면사무소가 있는 도청항 일대는 청산도에서 가장 번잡하다. 작은 규모의 식당들이 항구를 중심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다. 슬로길은 도청항에서 내리자마자 시작된다. ‘슬로길’이라고 적힌 푯말을 따라가면 된다. 바닥에도 방향을 알려주는 파란색 화살표가 눈에 잘 띄게 그려져 있다.
시끌벅적한 부둣가를 빠져나와 언덕을 지나니 첫 마을 도락리와 마주했다. 도락리에 들어서자 전형적인 청산도 풍경이 펼쳐졌다. 오른쪽으로는 너른 바다가 펼쳐졌고 왼쪽으로는 야트막한 동산이다. 듬성듬성 보이는 민가 옆으로 계단 논에 유채꽃과 청보리가 바람에 출렁거렸다. 김미경 문화해설사는 “섬을 떠난 사람들이 남겨놓은 텃밭에 잡초만 무성했다”며 “군에서 10년 전부터 거기에 유채와 청보리를 심었는데 이제는 청산도의 상징이 됐다”고 한다.
구불구불한 유채 밭 사이로 길이 이어졌다. 무릎 높이의 돌담이 유채 밭과 청보리 밭을 끌어안고 있었다. 청산도는 평지가 별로 없고 돌이 많은 섬이다. 섬사람들은 울퉁불퉁한 산 사이사이로 들어가 정착했고 땅을 일궜다. 농작물을 심으려고 땅을 팠는데, 끊임없이 돌이 나왔다. 나오는 족족 옆에 쌓은 것이 지금의 돌담이 됐다. 정겹기만 한 돌담에 섬 주민들의 이런 애환이 숨어 있었다.
유채밭을 지날 때는 저절로 걸음이 느려졌다. 영화 ‘서편제’에서 아버지 유봉(김명곤)이 딸 송화(오정해), 아들 동호(김규철)와 함께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어깨춤을 추던 곳이 바로 이 돌담길이다. 외진 섬, 청산도를 맨 처음 외부에 알린 것이 ‘서편제’다. 쉬엄쉬엄 언덕을 올라 ‘서편제’ 영화 세트장으로 쓰인 초가에 도착했다. 그늘이 드리워진 솔밭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유채밭 길 저 멀리 푸른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더없이 포근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 언덕에서 드라마 ‘봄의 왈츠’ ‘여인의 향기’ 등도 찍었는데 ‘봄의 왈츠’ 촬영장은 온통 새하얗다. 이국적이다.
‘봄의 왈츠’ 세트장부터 화랑포로 가는 길은 유난히 한적하다. 섬 남쪽에 삐쭉 튀어나온 ‘새땅끝’을 한 바퀴 둘러 나오는 길인데, 바닥에 시멘트를 깔았다. 앞선 코스보다는 찾는 사람이 적어 고즈넉하다. 따뜻한 봄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걸었다. 여기가 바로 ‘청산’이구나!
슬로길은 옛 청산도 사람들이 마을과 마을 사이를 오갔던 길을 연결해 만들었다. 해서 길 곳곳에는 소박한 사연들이 묻어 있다. 그중 2 코스의 이름은 ‘사랑길’이다. 청산도 사람들은 이를 ‘연애바탕길’이란다. “작은 섬마을에서 젊은 남녀가 눈이 맞으면 소문이 삽시간에 퍼집니다. 사랑에 빠진 연인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 후미진 곳까지 찾아와 연애를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김미경 해설사의 설명이다.
사랑길 초입에는 초분(草墳) 모형이 있다. 초분은 글자 그대로 풀로 만든 무덤이다. 섬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바로 땅에 묻지 않고 풀이나 짚으로 덮어 놓았다가 3~5년 정도 지난 다음 뼈를 골라 묻었다. 초분에는 청산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태도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김 해설사는 “청산도 사람들은 세속에 찌든 육신을 땅에 바로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초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초분을 지나자 길은 숲 속으로 이어졌다. 소나무와 후박·동백나무가 울창해 따가운 봄볕을 피할 수 있었다. 산새 지저귀는 소리가 온 숲에 울려 퍼져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길은 숲 끝자락에 있는 바위로 안내했다. 사랑이 싹튼다는 ‘연애바위’다. 길을 걸으면서 자연스레 이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워낙 길이 좁고 험해 여기를 안전하게 지나려면 동행인과 꼭 손을 잡아야 한다. 손을 맞잡은 남녀 사이에 오묘한 기류가 흐르고 사랑이 깊어진다는 길이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꼭 한번 걸어보길 바란다. 잠시 난간을 잡고 서서 숨을 돌렸다.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고깃배에서는 신나는 트로트 가락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읍리해변에서 시작한 4코스는 낭떠러지를 따라 걷는다. 산등성이에서 두릅·달래·냉이 등 봄나물을 뜯던 동네 아낙 몇몇이 인사를 건넸다. 권덕리 마을 앞에는 지난해 태풍 ‘볼라벤’이 부서버린 방파제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길은 점점 절정을 향해 갔다. 청산도에서 가장 전망이 좋다는 범바위가 바로 코앞이었다. 범바위 주차장까지 가는 지름길이 있지만 경치를 제대로 보려면 말탄바위에 올라 범바위까지 가는 게 좋다. 범바위에 오르는 길에는 큰 나무가 없다. 바람이 워낙 강해서인지 키작은 수목만이 서로의 몸에 기대어 자라나고 있었다. 자칫 황량하다고 느낄 뻔했으나 붉게 핀 진달래가 곳곳에서 인사를 한다.
가파른 오르막이 계속됐다. 바람도 심하게 불었다. 고생도 잠시, 범바위에 오르자 다도해국립공원의 장관이 펼쳐졌다. 정면으로는 여서도, 왼편에는 거문도가 보였다. 날이 약간 흐려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하늘에 둥실둥실 떠있는 것 같은 섬풍경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내려왔다.
글=홍지연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여행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