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곳에 가고싶다☞/♤ 그 길 속 그 이야기

[그 길 속 그 이야기 (40)] 한라산둘레길 - 자연 에어컨 바람 솔솔~ 해발 800m 제주 밀림 속은 신세계

by 맥가이버 Macgyver 2013. 12. 31.

[그 길 속 그 이야기 (40)] 한라산둘레길

[중앙일보] 입력 2013.08.16 00:40 / 수정 2013.08.16 00:40

자연 에어컨 바람 솔솔~ 해발 800m 제주 밀림 속은 신세계

한라산 둘레길 1구간 곳곳에는 이런 이끼가 낀 계곡이 많다. 숲이 하늘을 가린 덕분인데 이끼 정원을 걷다 보면 신령스러운 느낌마저 든다.


제주도에는 제주올레만 있는 게 아니다. 한라산둘레길도 있다. 한라산국립공원에 포함되지 않는 중산간 지역의 한라산 허리를 한 바퀴 도는 트레일로, 산림청이 조성하고 있다. 현재 3개 코스가 열려 있는데, 오는 2016년 한라산 둘레를 한 바퀴 도는 트레일이 완성될 예정이다. 한라산둘레길을 걸어본 사람은 가장 더운 계절인 요즘 진가를 알 수 있는 길이라고 입을 모은다. 동백길로 불리는 1구간(무오법정사~돈내코 계곡) 9㎞ 길을 걸어보니 거짓말이 아니었다. 폭염 내리쬐는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빽빽한 원시림은 뜨거운 여름 햇볕을 가려주었고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다. 걷는 사람도 많지 않아 호젓하게 길을 만끽할 수 있었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숲 속으로 빨려갈 듯한 원시림 속 오솔길

“제주도에는 유명한 길이 세 개 있습니다. 제주올레와 사려니숲길, 그리고 한라산둘레길인데 제각각 특색을 갖고 있죠.”

한라산둘레길 1구간 들머리에 접어들자 안내를 맡은 한라산둘레길 관리팀의 김서영(46)씨의 맛깔나는 안내가 시작됐다.

“올레길은 마을과 마을을 잇는 정다운 길이고, 사려니숲길은 널찍한 도로에 울창한 숲이 우거진 길이죠. 한라산둘레길은 이 두 길의 장점을 모은 길이면서도 완전히 다른 느낌의 길입니다.”

“뭐가 다르냐”는 질문에 김서영씨는 “걸어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라며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었다. 미소의 의미를 눈치채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출발지인 무오법정사에서 10분쯤 올라가니 ‘한라산둘레길’이라는 큼지막한 안내판이 붙은 문 모양의 입구가 나왔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둘레길이다.

길에 들어서자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울창한 원시림이 하늘을 가렸다. 한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오솔길이어서 하늘이 더 좁게 보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숲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대나무 밭이 이어졌다. 조릿대인데 다 자라면 키가 1m쯤 되지만 아직은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손님을 맞고 있었다. “예부터 제주에선 조릿대가 고혈압과 당뇨에 좋다는 걸 알고 차를 끓여 마셨습니다. 요즈음에는 화장품 재료로도 사용된다네요.” 김서영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1㎞쯤 더 걸었을까. 바위는 물론이고 나무 줄기도 이끼로 뒤덮인 ‘이끼정원’이 나타났다. 나무 사이로 햇살이 퍼지니까 비밀의 정원에 들어온 것처럼 신비스러웠다. 여느 수목원의 이끼 정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올해 제주도는 마른 장마가 들어 비가 거의 오지 않았는데도 두꺼운 이끼가 덮여 있었다. 이끼정원은 한라산둘레길 곳곳에 널려 있었다.

오솔길 옆에 늘어선 나무는 즐거운 동행이었다. 잎이 탈 때 ‘꽝꽝’ 소리를 낸다는 꽝꽝나무를 비롯해 나도히초미·굴거리나무·작살나무·자금우 등 이름도 생소한 나무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시오름 갈림길에서 돈내코 계곡 사이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 편백나무 숲이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놀란 표정의 노루 가족도 종종 볼 수 있었다. “노루도 지금이 포획기인지 아나 봐요. 잽싸게 숨네요.” 김서영씨가 웃으며 말했다. 제주시는 한라산 노루가 너무 많아 지난 7월부터 3년간 노루 포획을 허용한 상태다.

한라산둘레길은 어지간한 제주올레 코스나 사려니숲길보다 힘든 편이었다. 해발 800m에 이르는 곳까지 오르기도 했고, 계곡을 건너기도 했다. 걷기여행이라기보단 산행에 가까웠다. 그러나 쉬지 않고 바뀌는 풍경에 힘든 줄을 몰랐다.

숲은 길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30도를 웃도는 폭염이 제주도를 달궜지만 더운 줄도 몰랐다. 숲 안쪽이 바깥보다 5~6도는 낮다고 했다. 게다가 숲에서는 연방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산길에도 아픈 역사의 흔적 아직 생생

한라산둘레길 1구간 대부분은 두 사람이 겨우 걸을 수 있는 좁은 길이다. 길바닥에는 야자수 껍질로 만든 매트가 깔려 있어 푹신푹신하다. 자연친화적인 소재를 활용해 길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편히 걸을 수 있게끔 공을 들인 배려가 느껴졌다. 그런데 이 깊은 숲 속에서 가끔 널따란 길을 마주치기도 했다. 길바닥에는 반반한 돌도 깔려 있었다.

‘이런 밀림 같은 산속에 왜 길을 냈을까’. 아니나 다를까 사연이 있었다. 원래 이 길은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병참로의 일부여서 ‘하치마키 도로’라고 불렸다. 하치마키(鉢券)는 ‘머리띠’라는 뜻이다. 일제는 한라산 곳곳에 병참로를 만들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한라산에 머리띠를 두른 것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 이 병참로를 만들었습니다. 제주 도민의 땅을 강제로 뺏은 뒤 주민들을 동원해 길을 낸 거죠. 수많은 제주 사람이 이 중산간 지역까지 끌려와 거의 맨손으로 이 길을 만들었습니다.” 제주 토박이 김서영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라산둘레길은 한라산 자락의 자원을 수탈해간 길이기도 했다. 김서영씨는 “예부터 한라산은 표고버섯이 유명했다”며 “다른 지역에 비해 크기도 크고 향도 더 진해 진상품이었는데 일제가 다 캐서 가져갔다”고 설명했다.

한라산둘레길 곳곳에는 아직도 표고버섯 단지가 많이 있었다. ‘출입금지’라는 표지판이 걸린 안쪽이 표고버섯 밭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민간인이 국유림을 불하 받아서 표고버섯을 재배하는 곳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관련된 유적지는 한 곳 더 있다. 1구간 출발지인 무오법정사다. 일제 강점기에 승려들이 일제에 대항했다는 이유로 일본 순사들이 불을 질러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3·1 만세 운동보다 5개월 전인 1918년 10월 7일 무오법정사 승려와 신도 등 400여 명이 이틀간 항일 운동을 벌였습니다. 제주도는 물론이고 전국에서 가장 먼저 만세 운동이 일어난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한라산둘레길 초입에 당시 의거를 기리는 추모탑과 순국한 이들을 기리는 의열사 등이 세워져 있다.

무오법정사를 출발해 두어 시간 걷다 보면 길 왼쪽으로 이끼가 낀 채 허물어진 돌담이 나온다. 깊은 산속에 웬 돌담인가 싶지만, 4·3 사건 때 만들어진 군경 초소다. 정확한 이름은 ‘시오름 주둔소’. 한라산 깊숙이 숨어든 무장대와 대치하던 군인과 경찰이 주둔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길가에 ‘4·3 유적지’라는 안내 표지판이 없다면 그냥 지나쳤을 만큼 돌담은 긴 세월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었다.

고난했던 제주 삶의 흔적도 곳곳에 숨어 있다. 먹고살기 힘든 백성들은 한라산에 화전을 일궈 끼니를 때우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한라산 나무를 베어 숯을 구워 장에 내다팔아 연명했다고 한다. 숯을 구웠던 장소는 둘레길 곳곳에 남아 있다.

● 길 정보=해발 600~800m 한라산 중턱 중산간 지역을 잇는 한라산둘레길은 현재 1구간(동백길·9㎞)과 2구간(돌오름길·5.6㎞), 그리고 4구간에 포함될 사려니숲길(10㎞)만 조성돼 있다. 오는 2016년까지 차례로 한라산둘레길을 낼 예정인데 완성되면 모두 80㎞에 이르는 대형 트레일이 된다. 한라산둘레길을 걸으려면 몇 가지 지켜야 할 사항이 있다. 우선 신발. 발목을 잡아주는 등산화를 꼭 신어야 한다. 햇볕이 잘 들지 않아 길 곳곳에 이끼가 낀 곳이 많다. 슬리퍼나 운동화를 신었다가 미끄러져 안전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한라산둘레길 안내센터의 통제도 잘 따라야 한다. 한라산둘레길 1코스에는 계곡이 7개 있다. 평소에는 말라 있어도 비가 조금만 내리면 금세 물이 분다. 한라산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비가 가장 많이 내리는 지역이다. 마지막으로 한라산둘레길은 여럿이 함께 걷기를 권한다. 숲이 워낙 우거져 휴대전화가 잘 터지지 않다. 인적도 드물어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구조를 요청하기가 쉽지 않다. 한라산둘레길 안내센터 064-738-4280.

[사진 1 시오름 갈림길에서 한라산둘레길 지도 돈내코 계곡 중간에 있는 편백나무 숲.
사진 2 일제에 항거했던 법정사 스님과 신도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사당인 의열사.
사진 3 한라산 둘레길 1구간에는 바닥에 야자수 껍질로 만든 매트가 깔려있어 걷기 편하다.
사진 4 한라산 둘레길 입구를 알리는 입간판.]
 
글=이석희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