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곳에 가고싶다☞/♤ 그 길 속 그 이야기

[그 길 속 그 이야기 (38)] 올레길과 DNA 나눈 양평 물소리길 - 졸졸졸 물소리 '내비' 삼아 ··· 청정 양평 두 발로 드라이브

by 맥가이버 Macgyver 2013. 12. 13.

졸졸졸 물소리 '내비' 삼아 ··· 청정 양평 두 발로 드라이브

[중앙일보] 입력 2013.05.10 03:30 / 수정 2013.05.10 03:30

그 길 속 그 이야기 38 올레길과 DNA 나눈 양평 물소리길

경기도 양평군. 서울 가까이에 있어 주말 나들이 장소로 익숙한 이름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주 오가도 양평을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를테면 양평의 자연이 강원도 심심산골 못지않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양평은 수도권 상수도 수원인 팔당댐 상류에 있어 개발을 하고 싶어도 30년째 개발을 못 하는 곳이다. 양평의 물과 공기는 맑고 깨끗할 수밖에 없다. 양평은 또 역사가 깊다.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의 옛 땅으로 기록돼 있다. 그래서 여느 도시보다 크고 작은 역사유적이 많다. 그러니까 양평의 진가를 알려면 찬찬히 지르밟으며 들여다봐야 한다. 지난달 27일 양평군이 트레일 ‘물소리길’을 연 이유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멀리 내다보이는 수도권 전철 중앙선 양수역에서 물소리길은 시작된다. 국수역까지가 1코스(13.8㎞), 국수역에서부터 양평시장까지가 2코스(16.4㎞)로 모두 30.2㎞에 달한다. 앞으로도 길을 늘려 양평 전체를 연결할 계획이라고 한다. 야트막한 산을 오르내리고 제방을 따라 걷고 작은 마을을 지나는 질박한 정취가 낯익다 했더니, 사단법인 제주올레가 주도해서 만든 길이란다.

제주올레가 제주도를 나와 직접 길을 낸 건 국내에서 양평 물소리길이 처음이다. 지난달 27일 개장식 날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과 함께 물소리길을 걸었다. week&이 반한 건 굽이치는 산길마다 오랜 역사를 머금은 1코스였다.

서명숙 이사장의 말마따나 “양평이 가진 것을 아기자기하게 돌아볼 수 있어” 더욱 좋은 길이었다.

제주올레가 파도소리를 품은 길이라면, 양평 물소리길은 옆구리에 물 흐르는 소리를 끼고 걷는 길이다. 남한강을 따라 굽이치는 1코스 마지막 구간.


제주올레가 낳은 두 번째 길

제주올레와 양평군의 인연은 지난해 초 시작됐다. 당시 서명숙 이사장은 양평군 공무원을 대상으로 길에 관한 짧은 강의를 했다. “길은 ‘찾는’ 것이지 ‘조성하는’ 게 아닙니다. 토목공사뿐인 길 만들기는 지양해야 합니다.” 서명숙 이사장의 말은 김선교 군수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물소리길 개장식에서 길 탐방에 나선 김선교 양평군수와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

 

이후 김 군수는 제주올레를 다섯 번이나 걸으면서 서 이사장에게 간청했다. “양평군에 길을 만들어 주십시오. 더도 덜도 말고 제주올레 같은 길이면 됩니다.” 서 이사장은 심사숙고 끝에 다시 양평으로 향했다. 공장 굴뚝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천혜의 자연은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제주올레 6년 경험을 결합하면 좋은 길이 나오겠다’고 서 이사장은 생각했다.

일본 규슈올레에 이어 제주올레의 두 번째 ‘자식’을 낳는 셈이었다. 제주올레 사무국은 지난해 6월부터 10월까지 양평을 샅샅이 헤집으며 길을 찾았다. 양평은 제주도의 절반이 안 되지만 서울보다는 1.4배 크다. 반면 인구는 서울의 100분의 1 남짓이다. 인적이 드문 길이 적지 않았다.

제주올레 사무국은 우선 관광객이 찾아오기 쉬운 중앙선 전철 구간을 중심으로, 자연 훼손이 적은 길, 험하지 않고 걷기에 만만한 길, 역사문화가 잘 보존된 길을 하나하나 더듬어 갔다. 예부터 터를 잡고 살아온 주민의 삶에도 귀를 기울였다. 양평군은 물소리길을 내면서 예산 6억원을 썼다. 이 중에서 길 탐사와 디자인, 지역 경제 활성화 방안 마련 등의 연구용역 명목으로 제주올레에 돌아간 건 2억3000만원이다. 나머지는 길을 닦는 데 들어갔다.

부용산 약수터 물은 그냥 마셔도 좋다.

 

양평은 전체 면적의 75%가 산지여서 길은 자주 산속에서 굽이쳤다. 미끄러운 산길에 데크로드 대신 짚을 삼아 만든 ‘오름매트’를 깔고,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통나무다리를 놓았다. 원래부터 있던 제방길은 살리고 찻길과 자전거도로는 되도록 피했다. 강에 맞닿은 구간은 짧아도, 약수터·실개천이 길 곳곳에 숨어있어 어디를 걷든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물소리길’이란 이름이 붙은 까닭이다.

 
시골 외할머니 집 닮은 정경들

27일 오전 9시 서명숙 이사장과 나란히 물소리길 탐방에 나섰다. 양수역에서 굴다리를 지나 용담마을로 들어섰다. 바다색과 풀색이 어우러진 제주올레 리본이 200m마다 바람에 나부끼며 길잡이 노릇을 했다.

본격적으로 산길이 시작되는 월계골 입구에 다다르자, 작은 안내판이 나왔다. 정창손 묘역이 있는 사자골로 넘어 드는 길이라는 설명과 함께 바닥이 미끄러우니 주의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지형이 급격히 바뀌는 길의 초입마다 이런 안내판을 세웠다고 한다. 여행자가 외딴 길을 안심하고 걸을 수 있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다소 가파르게 시작된 오르막길은 정상부에 이르자 완만하게 굽어지기 시작했다. 오름매트가 깔린 내리막길을 한달음에 뛰어내리다가 와당탕 엉덩방아를 찧었다. 안내판이 경고한대로 군데군데 미끄러운 구간이 있어 바닥에 요철이 있는 등산화가 나을 듯했다. 6개월만 지나면 오름매트 위로 야생화며 풀이 비집고 자라 덜 미끄러울 거라고 서명숙 이사장이 말했다.

정창손 묘역에 다다르자 산자락 아래로 시야가 탁 트였다. 양평군 학예연구사 이강웅(42)씨가 “양수리에서 부용리로 이어지는 이 지역은 조선 초기 문신 정창손(1402~87)을 비롯해 조선시대 정승을 지낸 인물의 묘소가 많아 ‘구정승골’로도 불린다”고 설명했다.

간판도 없는 작은 구멍가게를 지나 부용마을에 들어서자 논밭을 가로지르는 개천을 따라 단정한 농가가 점점이 늘어서 있었다. 삐거덕삐거덕 펌프질로 물 긷는 소리, 닭 울고 개 짓는 소리, 아궁이에 장작불 지피는 냄새가 구수하게 어우러졌다. 띄엄띄엄 놓인 징검다리를 폴짝 뛰어 개천을 건넜다. ‘시골 외할머니 집 정경’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한 번도 가진 적 없는 시골의 외할머니 집이 문득 그리워졌다.


정창손 묘역. 조선시대 정승들의 묘소가 많다는 `구정승골` 에 자리해 있다.


놀멍 쉬멍 걸으멍 … 6시간의 행복

정오가 다가오자 앞서 걷던 이들이 자목련·백목련 꽃 그늘에 삼삼오오 모여 귤이나 인절미 등을 나눠먹었다. 누군가 길을 재촉하니까 서명숙 이사장이 대거리를 했다. “놀멍 쉬멍 가는 게 정상속도예요~.”

한음 이덕형 신도비를 지나 야트막한 비탈길에 들어섰다. 좁은 흙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어른 가슴 높이의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철조망 너머가 전부 장뇌삼 밭이라고 했다. 철조망에 찔릴까봐 걷는 내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부용산(해발 366m) 오솔길은 봄꽃으로 물들어 온통 화사했다. 키가 높은 자생 진달래가 유독 많았다. 알고 보니 양평의 군화(郡花)가 진달래였다.

한때는 기차가 다녔다는 도곡터널. 지금은 사람과 자전거를 위한 길만 고요히 놓여있다.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1886~1947) 선생의 생가와 기념관 주변은 이따금 마을 주민이 오갈 뿐 지나가는 이가 드물었다. 한때는 몽양 선생의 집안인 함양 여씨가 모여 살아 산기슭을 따라 번듯한 한옥이 열 채 이상 있었다고 한다. 걸출한 문인을 여럿 배출한 함양 여씨 집안에는 조선 정조 무렵 시인으로 이름난 노비도 있었다. ‘정초부(鄭樵夫)’, 그러니까 ‘정(鄭)씨 성을 쓰는 나무꾼(樵夫)’으로 불리던 노비다. 어릴 적부터 주인의 독서 소리를 어깨너머로 외며 자란 그는 저 혼자 글을 깨쳐 시인이 됐다. 바로 그 정초부가 시를 읊으며 나무를 하러 다니던 길이 몽양 생가에 이르는 부용산 산길이었다.

손수 만든 호박식혜(1통 2000원)를 내놓은 방통아줌마네 구멍가게를 넘어가자 산 아래로 봄볕에 반짝이는 남한강이 한눈에 내다보였다.

부용산 산길을 다 걸을 즈음이면 방통아줌마네 가게가 나온다. 이 집 호박식혜는 피로까지 씻어주는 기특한 별미다.

신원역 근처에서 길을 건너 6번 국도와 나란히 남한강변을 걸었다. 찻길과 거리가 제법 멀어 한갓진 맛이 있었다. 양서초등학교를 거쳐 도곡터널과 연결된 좁다란 제방길을 걸음마다 음미했다. 제방 아래 고요한 늪에서 백로 한 마리가 미꾸라지를 잡고 있었다.

1코스 종점인 국수역에 이르자 시계가 오후 3시를 가리켰다. 4시간이면 족하다는 길을 놀며 쉬며 6시간 걸은 셈이었다. 제주올레의 ‘자식 길’은 이렇듯 느리게 걷는 것이었다.

●길 정보=물소리길(www.mulsorigil.co.kr)은 서울에서 수도권 전철을 타고 가는 게 제일 편하다. 물소리길 자체가 수도권 전철 중앙선 양수역·신원역·국수역·양평역을 거치며 나 있다. 서울역에서 물소리길 1코스가 시작하는 양수역까지는 전철로 1시간15분 거리다. 요금 1650원. 식사를 하기엔 1코스보다 2코스가 낫다.

 

●물소리길 2코스가 지나가는 국수역 주변이나 옥천냉면 골목, 양평역 옆에 자리한 양평시장에 음
식점이 많다. 200년 역사의 양평시장에는 식당·공산품 등 400여 개 점포가 있다. 3·8일에는 오일장이 선다. 오는 12일까지 용문산관광지와 용문산에서 열리는 ‘5회 양평 용문산 산나물축제’에서는 조선시대 임금께 진상했다는 용문산 산나물도 맛볼 수 있다.
양평군 문화관광과 tour.yp21.net, 031-773-5101.

글=나원정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