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 은행나무 숲에는 순애보 남편이… 자은리 골짝엔 求道하는 부부가…
홍천 은행나무 숲에는 순애보 남편이… 자은리 골짝엔 求道하는 부부가…
[박종인의 땅의 歷史] 은둔한 사내 정무진과 홍천 은행나무 숲
달둔(達屯)에는…
아픈 아내 위해 심은 은행나무 2000그루
치유 원하는 사람들 위해 5년째 개방, 숲으로 가는 길은 온통 가을빛
자은리(自隱里)에는…
印度 5년 유랑한 남자, 그리고 사랑한 여자
바람처럼 세상 떠돌다 산중으로 숨어 다향(茶香) 맡으며 인생 공부中
강원도 홍천 서쪽 두촌면에 사는 사내 이름은 정무진(63)이고 동쪽 내면에 사는 사내 이름은 유기춘(71)이다. 이들이 홍천에 온 이유는 동일하다. "아픈 아내를 위해 홍천에 정주(定住)했노라"고. 정무진은 서쪽 용소계곡 자은리에서 다향(茶香)을 맡으며 아내 마야(58)와 함께 산다. 젊은 날 그는 진리를 찾아 인도 대륙을 5년 동안 유랑했다. 그가 쓴 인도 여행 안내서는 10만 부가 팔려나갔다. 홀연히, 지금은 오로지 아내만을 위해 산다. 동쪽 내면에 사는 유기춘은 아픈 아내를 위해 은행나무를 심었다. 그 은행나무가 30년 만에 숲을 이뤘다. 유기춘은 사업도 접고 오로지 은행나무 숲과 아내만을 위해서 산다.
▶▶ 바람 같은 사내 정무진
정무진 부부가 사는 곳은 홍천 두촌면 자은리(自隱里)다. 용소계곡이 길 건너에 있다. 자은리는 '스스로 숨는다'는 뜻이다. 원래는 홍천에서 인제로 넘어가는 고개였는데, 말발굽 박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 '징골'이라고 불렀다. 어느 틈에 말발굽 소리 사라지고 계곡은 스스로 숨는 자은리로 바뀌었다. 부부의 인생이 꼭, 자은리 땅 운명과 비슷하다.
전북 장수가 고향인 정무진은 윗입술이 코와 붙어서 태어났다. 인생 자체가 고민이었다. 두 번 수술로 정상에 가깝게 되었지만 세상 눈은 변함없었다. 친구들은 놀렸고 놀림받은 무진은 자기 속으로 숨었다. 중학교 때 헤르만 헤세가 쓴 '싯다르타'를 읽으며 성자가 제자에게 세상을 가르쳐 주는 인도를 꿈꿨다.
전북대에 들어갔다가 2년 만에 등록금 들고 변산 내소사로 도망갔다. 요가를 배우고 요가를 가르쳤다. 1986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3년 만에 인도 여행을 실천에 옮겼다. 뉴욕에 있는 인도 영사관에서 비자를 신청했다. 영사가 물었다. "체류 기간은?" "내가 원하는 만큼." "그게 얼만데?" "스승을 만날 때까지." 3개월 체류 비자가 나왔다. "스승을 어떻게 석 달 만에 만나냐"고 대들었지만 영사는 "행운을 빈다"고만 대답했다.
뉴델리에 도착했다. 스승은커녕 싸구려 여관방에 누우면 망상만 밀려왔다. '산이 오지 않으면 내가 산으로 간다.' 정무진은 구도자 수행터인 아슈람(Ashram·명상센터)을 유랑했다. 두 달 동안 참선과 공부만 하는 정무진을 보더니 란치에 있는 요가난다 아슈람 원장이 체류 기간 연장 추천서를 써줬다. 비자가 연장됐다. 이후 정무진은 "인도를 뺑뺑이 돌며 공부했다"고 했다. 4년 뒤 힌두교 성지 강고트리로 가다가 대지진을 만났다. 그가 말했다. "마날리라는 곳이었는데, 거기에서 난생처음 지진을 겪었다. 모든 게 덧없다는 거 순식간에 깨달았다."
그리고 1992년 다람살라에서 만난 한국 스님과 유학생들이 "가이드북 써서 우리들 성지순례 도와달라"고 졸랐다."찾을 거 다 찾고 이제 구름처럼 사는 일만 남았는데 책은 무슨!" 하고 거절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를 자유롭게 해준 인도와 나를 낳아준 한국에 빚 갚는 일이겠다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취재를 위해 1년을 보냈고, 책을 쓰느라 또 1년을 살았다. 1995년 한국으로 돌아와 이듬해 '우리는 지금 인도로 간다'를 출판했다. 웬만한 학자들이 쓴 인도 서적보다 넓고 깊은 인문 교양서였다. 책은 2003년 절판될 때까지 10만 권이 넘게 팔렸다. 대학생은 물론 종교인, 문인, 예술가, 학자 할 것 없이 인도 여행 광풍에 휩쓸렸다. 시인 류시화와 함께 정무진은 광풍의 뿌리가 됐다.
▶▶"수행자를 망쳐놨구나!"
아내 마야는 본명이 정윤숙이다. 다섯 살 아래다. 마야는 힌두말로 '착각'이라는 뜻이다. 마야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스스로 가방끈을 놓았다." 혼자 철학책을 읽고 그림을 배우고 염색을 배워 서울 인사동에 염색 공방을 하면서 절을 찾아다녔다. 남자처럼 거센 그녀를 사람들은 인사동 왕이빨이라고 불렀다. 그녀가 말했다. "말을 떼자마자 한 말이 '죽어도 결혼 안 해'와 '학교 필요 없어'였단다. 우주의 이치를 알고 싶어서 절들을 돌아다녔는데, 무진이 쓴 가이드북을 알게 됐다. 인도에 가면 숙제가 풀리겠다 싶어서 무작정 찾아갔지."
그해 마흔넷, 서른아홉 먹은 총각·처녀가 인도로 갔다. 불꽃처럼 사랑을 했고, 함께 살다가 2000년 4월 6일 뉴델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식장은 비자를 연장하러 온 젊은 구도자 무진을 재워준 프라사드 가문 저택이었다. 정원에는 생화 수만 송이가 꽂혔다. 사람들은 개울에 촛불을 띄우며 결혼을 축복했다. 훗날 마야가 전남 곡성 태안사에 들렀더니 주지 스님이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무진 수행자를 망쳐놓은 년이 제 발로 나타났구나!"
부부는 이후 서로의 동반자로 인정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남자 무진은 여행사 '인도로 가는 길', 사단법인 '한-인도 교류협회'를 설립하고 인도 대사관 산하 인도 문화원을 맡아 일했다. 지금은 한국차인연합회 정인오 교수와 함께 한국 녹차와 인도 홍차의 접점을 찾는 작업을 하고 있다. 여자 마야는 염색 공예를 계속하며 세상을 떠돌았다. 그런데 마야가 당뇨병에 걸린 것이다.
▶▶ 부부가 숨어든 자은리
영혼은 명징했으나 몸은 피폐해갔다. 2013년 9월 마야가 아는 친구가 '자은리에 5년째 빈 집이 있다'고 했다. 부부는 집 보러 가서 사흘 만에 서울 집을 정리하고 자은리로 들어왔다. 바람처럼 떠돌던 남자와 여자가 산중으로 숨어든 것이다.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2년이 되면서 마야는 몸이 무척 좋아졌다.
널찍하고 천장 높은 실내에는 친구들과 부부가 만든 작품들을 걸었다. 인도와 네팔에서 모아온 수집품들도 많다. 한마디로, 아름답다. '스타트업 수트라(Start-up Sutra)'라는 영문 책자도 눈에 띈다. 2013년 인도 명문 MID 경영대학원 교수가 된 프라사드 가문 맏아들 로히트 프라사드가 쓴 책이다. 주인공은 정무진. 무진은 창업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던지는 현자로 나온다.
삶에 불어오던 바람은 멎었다. 대신 부부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나눠준다. 괴롭고 힘들고 귀찮고 찌질하게 버티다 찾아온 영혼들에게, 경험에서 배운 시행착오와 지혜를 공유할 채비를 하고 있다.
▶▶ 달둔계곡 은행나무 숲과 유기춘
홍천 내면에는 삼둔으로 통칭되는 계곡이 있다. 살둔과 달둔, 월둔이다. 접근하기는 어렵지만 풍광은 수려하기 그지없는 곳이어서 1990년대 오지 여행가들에게는 낙원 같은 곳이었다. 풍광은 변함없어서, 지금도 삼둔은 비경을 찾는 여행객들로 붐빈다.
그 달둔 계곡에서 지난주 잔치가 벌어졌다. 30년 전인 1985년 이곳으로 들어온 서울 사내 유기춘과 김영옥 부부가 벌인 잔치다. 삼겹살과 소고기로 주민 100명을 대접한 잔치가 끝나고, 다음 날 부부가 사는 은행나무숲이 문을 열었다. 5년째다.
아내는 위무력증을 앓았다. 병이 악화되면서 수술도 여러 번 했다. 고통받는 아내를 위해 사업가 남편은 이곳 삼봉 약수를 떠서 아내를 간호했다. 병세는 호전됐고, 남편 유기춘은 너른 터를 사서 은행나무를 심었다. 세월이 흘러 400원짜리 묘목 2000그루가 울울창창하게 자라더니 가을만 되면 황금빛 물결을 허공에 퍼뜨려댔다.
2010년 가을 주인 유기춘이 숲을 대중에게 열었다. 주민들만 즐기던 비밀스러운 가을을 만인이 즐기게 되었다. 해마다 10월이 되면 은행나무 숲이 치유와 은둔과 휴식을 희구하는 사람들을 부른다. 정감록을 새로 쓴다면 은행나무 숲은 영혼의 피난처로 기록돼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근처에 있는 살둔과 월둔과 달둔은 정감록 권위 없이도 충분히 아름답고 방문할 가치가 있는 곳들이고.
▶▶ 자은리에서 은행나무 숲까지
자은리 용소계곡과 달둔 은행나무 숲은 아홉사리길로 연결된다. 한 시간 반 걸린다. 유럽 어느 전원마을을 닮은 물골안 계곡 풍광도 멋있거니와, 그 풍광 속에 숨어 있는 별장들도 영화 같다. 길은 상남면으로 이어지고, 살둔 계곡을 지나 56번 국도와 만난다. 길섶에 있는 칡소폭포에서 포말 속 가을 잎들을 구경하며 한숨을 돌린다. 심호흡을 하고 길을 이으면 은행나무 숲이 개방되기 훨씬 전부터 조성된 펜션촌이 나온다.
주말이라면 길 양쪽은 나들이 차량으로 붐빌 것이고 계곡 입구는 주민들이 장터를 만들어놓았을 것이다. 번잡하다고 짜증 내지 말자. 선계(仙界)로 가려면 늘 거쳐야 할 절차가 있는 법. 다들 가족 먹여 살리려고 새벽부터 음식 장만해온 사람들이 벌인 장터니까. 우리 또한 그들처럼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기대어 사는 사람들이니까. 바야흐로 우리는 아내를 지키는 방랑자의 자은리를 떠나, 또 다른 순애보의 땅으로 틈입하려는 참이다.
[홍천 여행수첩]
1. 자은리 정무진 부부 (033)433-8783. 출발 전에 미리 집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할 것. 위치는 내비게이션으로 '두촌중학교' 검색해 도착 후 전화로 물어볼 것. 원두커피와 각종 차. 찻값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알아서 낸다. 부부에게 인생을 물어보면 얻을 수 있는 지혜가 많다. 실내에 작은 작품이 많으니 애완동물과 어린이는 사절.
2. 은행나무 숲 최적 감상 기간은 이달 20일까지. 주차 공간 따로 없음. 인적 드문 이른 아침 추천.
3. 맛집 ①오대산내고향: 두부전골(7000원), 산채정식(1만2000원), (033)435-7787 ②약수식당: 막국수(6000원), 편육(2만원) 광원1리 778-5, (033)435-7838
4. 칡소폭포 살둔계곡으로 빠지는 원당삼거리에서 5분 거리. 넓은 주차장.
5. 추천 숙소 ①펜션 티롤: 칡소폭포에서 조금만 더 가면 나오는 펜션촌에 있다. 은행에서 은퇴한 노부부 운영. 12만원부터. 기독교 신도들은 3층 예배당 참고. (033)435-5470 ②살둔산장: 여러 나라 산악형 가옥 장점을 결합한 친환경 숙소. (033)435-5984, www.saldun.co.kr
6. 홍천군청 숙소 및 기타 정보 문의. www.great.go.kr, (033)430-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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