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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강화산성

[20170219]강화산성 성곽일주(남문-남장대지-석수문-서문-북문-북장대지-동문-현충탑-남문) - 1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17. 2. 19.


2017년 02월 19일(일)

강화산성 성곽일주(남문-남장대지-석수문-서문-북문-북장대지-동문-현충탑-남문)를 다녀오다
 


 '강화산성 성곽일주(남문-남장대지-석수문-서문-북문-북장대지-동문-현충탑-남문)' 이야기


 

 맥가이버의 '김포 문수산성 성곽일주 後 강화대교 건너서 강화산성 성곽일주 하기' 코스


성동검문소→조강철책길 아치→모란각 삼거리→전망대→팔각정 전망대→팔각정 삼거리→홍예문→중붕 문수제단→문수산성 장대

→OP CURLY(관측초소)/전망대→소나무연리근/전망대→용강리 갈림길→동아문(암문)→동막골 갈림길→북문→남문→성동검문소

→강화대교 도강강화고려인삼센터중식강화대교 교차로강화청소년수련관강화병원 삼거리알미골 사거리→목화웨당홀

→남문(안파루)→선화골약수터 갈림길→청하동약수터 갈림길→남산 남장대→암문→강화문예회관/운동장→석수문→서문(첨화루)

강화정수장→은수물 갈림길→북문(진송루)→북장대→원불교 강화교당→동문(망한루)→견자산 현충탑→목화웨딩홀→강화터미널


▲ '김포 문수산성 성곽일주 後 강화대교 건너서 강화산성 성곽일주 하기' 코스도


▲ 김포 문수산성 성곽일주 코스도


▲ 강화산성 성곽일주 코스도


 


오늘은 '김포 문수산성 성곽일주 後 강화대교 건너서 강화산성 성곽일주 하기'를 나선다.

이전에 '문수산성'과 '강화산성'을 다른 테마로 따로 걷기는 했었는데 오늘은 두 곳을 이어서 걸어본다.



먼저 성동검문소(舊 모란각)를 들머리로 하여 김포 문수산성을 시계반대방향으로 성곽일주하고 모란각으로 원점회귀한 후,
강화대교를 도강하여 강화고려인삼센터 부근 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강화산성 성곽일주의 들머리로 남문 부근 '舊목화웨딩홀'에서 남문(안파루)을 시작으로 시계방향으로 진행하여
남산 남장대-서문-북문-북산 북장대-동문-견자산 현충탑을 거쳐 '舊목화웨딩홀'에서 강화산성 성곽일주를 마친다.
☞ '강화산성 성곽일주(남문-남장대지-석수문-서문-북문-북장대지-동문-현충탑-남문)'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누군가가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臥死步生)'고 했다.
맥가이버는 '산 따라 강 따라 길 따라' 걷는 것을 죽고사는 차원이 아닌 즐기는 차원에서 걷는다.
즉, 좋은 길을 걷다가 새로운 환경이나 상황,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되고, 느끼고, 감동 받고, 깨닫는 것을 즐긴다.
 

 


'모든 만남은 걷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길을 걷다보면 새로운 풍광을 보게 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맥가이버가 '때론 함께, 때론 홀로' 산행이나 여행, 도보를 하면서 후기를 주로 사진으로 작성함은
인간의 만남이 또한 유한함을 알기에 어떤 연유로 비록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추억 속에서 함께 하고자 함이고,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걸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하는 무능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든다면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자 할 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 '강화산성 성곽일주(남문-남장대지-석수문-서문-북문-북장대지-동문-현충탑-남문)' - 1부를 시작하며...



강화청소년수련관/강화군 캐릭터 앞에서...




강화풍물시장이 보이네...


알미골사거리를 지나...


강화 KT


舊목화웨딩홀 앞 횡단보도를 건너...


강화나들길 안내목


강화산성 '하수문지' 부근을 지나...

강화도 행렬도



강화산성 남문


남문앞 강화나들길 안내








강화산성의 강도남문(안파루)



강화산성(江華山城)


사적 제132호.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할 당시 축조되었다.

원래 내성·중성·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234년에 규모있는 궁궐의 내성으로 축조되었다.

중성과 외성은 그 이후에 축조되었다.


고려시대의 강화 내성에는 고려 궁궐과 관청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 규모나 배치를 모두 송도와 비슷하게 하였다.

1259년 몽고의 요구로 내성이 헐리게 되었고, 외성도 허물었고 1270년)에는 궁궐도 헐렸다.

1627년 정묘호란에 인조 잠시 피난했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봉림대군 등이 피난했다.

이후 수차에 걸쳐 강화성을 개축하여 화강암의 석성으로 바꾸고 여장도 설치하여

4개의 성문과 4개의 암문, 남·북·서쪽의 장대와 2개의 수문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사적 제132호.

고려가 몽고의 침입으로 인해 강화도로 천도할 당시 궁궐과 함께 축조되었다.

원래 내성·중성(中城)·외성(外城)의 3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성이 규모있게 궁궐의 내성으로 축조된 것은 1234년(고종 28) 1월부터였고, 당시의 성은 토석혼축(土石混築)이었다.
  
그리고 이 내성을 방어하기 위한 중성이 축조된 것은 1250년(고종 37)으로, 둘레가 약 7㎞에 달하는 토성이었다.

또 중성을 둘러싸는 외성은 1233년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여 1235년에 전국 주(州)·현(縣)에서 일품군(一品軍)을 징발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벌인 결과 동쪽 육지를 바라보는 선을 따라 3만 7,070척에 달하는 성이 1237년에 일차 완성되었다.


고려시대의 강화 내성에는 고려 궁궐과 관청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 규모나 배치를 모두 송도(松都 : 지금의 개성)의 것을 옮겨놓은 듯이 비슷하게 하여

왕족과 귀족들은 송도에서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생활을 영위했다.


궁궐의 정문은 정남향의 승평문(昇平門)이었다.

한편 중성에는 모두 8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송도의 것을 그대로 본떠 동에 선인문(宣仁門), 서에 선기문(宣祺門),

남에 태안문(泰安門), 북에 북창문(北昌門)을 두었고,

동남에 장패문(長覇門), 서남에 광덕문(光德門), 서북에 선의문(宣義門), 동북에 창희문(彰熙門)이 있었다.

그러나 고려와 몽고의 강화가 성립되어가던 1259년(고종 46) 몽고의 요구로 내성이 헐리게 되었고, 외성도 허물었다.

그리고 고려정부가 완전히 송도로 환도하는 1270년(원종 11)에는 궁궐도 헐리어 현재는 궁궐터마저 불완전하게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있자 인조가 잠시 피난했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봉림대군을 비롯한 빈궁(嬪宮)들과 신하들이 피난했으나

청군에 의해 강화성이 함락되면서 포로가 되었다.

이렇게 외침이 잦자 조선정부는 이후 수차에 걸쳐 강화성을 개축하여

화강암의 석성으로 바꾸고 여장(女墻 : 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도 설치했다.

이렇게 하여 강화성은 4개의 성문과 4개의 암문(暗門), 남·북·서쪽의 장대(將臺)와 2개의 수문(水門)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현재 북악과 남산을 연결하는 지역에 남아 있는 성벽의 일부와 성문은 거의가 조선시대에 축조되어 1970년대에 보수된 것이다.

동문은 망한루(望漢樓)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그리고 서문은 첨화루(瞻華樓)로 1711년(숙종 37)에 건립되어 그동안 퇴락되었다가 1977년에 개축되었다.


남문은 안파루(晏波樓)로 1711년에 건립되었으나 1955년 홍수 때 무너진 것을 1975년에 복원한 것이다.

북문은 1783년에 건립하여 진송루(鎭松樓)라 했으나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했다.

조선시대에는 성내에 많은 관아가 들어서 있었으나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당시 많은 건물이 소실되어

현재는 고려 궁터에 동헌과 이방청(吏房廳) 등이 복원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서문 근방에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조인되었던 연무당(鍊武堂)터가 있다.


출처 : 백과사전 편찬위원회  | Daum 백과


강화산성 안내문


강화산성( 江華山城 )


시대 : 고려후기 
문화재 지정 : 사적 제132호 
건립시기 : 고려시대 
성격 : 산성 
유형 : 유적 
면적 : 30만 7576㎡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 일원 


개설

강화도를 방어하기 위해서 쌓은 산성으로, 강화읍과 내가면, 하점면 일대에 걸쳐 있으며,

성문 4곳과 첨화루(瞻華樓)·안파루(晏波樓)·진송루(鎭松樓) 등의 문루,

암문(暗門)·수문(水門)·장대(將臺) 등의 방어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현재 강화읍 동쪽의 성벽은 없어졌지만 남쪽과 북쪽의 성벽은 잘 보존되어 있다.

몽골군의 침입,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수많은 외세 침략의 현장으로 알려져 있다.
 

내용

1232년(고종 19) 6월에 최우(崔瑀)는 몽골군 침입에 맞서 강화로 천도하면서 궁궐을 짓고 도성(都城)을 축조하였다.

다만 이 때 왕궁과 도성 시설을 모두 갖추지는 않고,

1234년 1월부터 송도(松都)의 것과 비슷하게 도성과 궁궐, 각 관청을 건립하였다.


산성은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졌다.

내성은 둘레가 약 1.2㎞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하여 1250년에 둘레 약 9㎞로 쌓은 토성인데,

선원면의 토성터가 이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중성에는 8곳의 성문이 있었는데, 모두 송도에 있던 성문의 이름을 본따서 동쪽의 선인문(宣仁門),

서쪽의 선기문(宣祺門), 남쪽의 태안문(泰安門), 북쪽의 북창문(北昌門), 동남쪽의 장패문(長覇門),

서남쪽의 광덕문(光德門), 서북쪽의 선의문(宣義門), 동북쪽의 창희문(彰熙門) 등으로 불렀다.


외성은 중성을 수비하려고 1233년부터 쌓기 시작한 뒤,

1235년 12월에는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실시하여 각 주현(州縣)의 일품군(一品軍)을 징발하고서

강화의 동쪽 해안을 따라 3만 7,070척의 길이로 쌓았다.

 토성인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강화를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위시설이자

강화로 천도한 고려 정부가 39년 동안 육지로부터 보급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었다.


1259년에 고려가 몽골과 강화하자,

몽골은 그 조건으로 주자(周者)와 도고(陶高) 등을 보내 내성을 헐고 외성까지도 모두 헐었다.

당시 역사(役事)는 몽골의 지나친 독촉으로 인해 동원된 백성의 고통이 매우 심하였다고 한다.

강화산성은 조선 초기에 다시 축조되었는데, 이 때 고려 때의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였다.

러나 1637년(인조 15)에 병자호란이 일어난 뒤 청나라 군사에 의해 다시 파괴되어,

1677년(숙종 3)에 강화유수(江華留守) 허질(許秩)이 고려 때의 내성 규모로 크게 고쳐 쌓았다.


1709년(숙종 35)에 강화유수 박권(朴權)이 중수한 뒤에도 조선 말기까지 계속 보수하였다.

이 때 성벽은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성벽 위에 낮게 쌓은 여장(女墻)도 두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무너진 상태이다.

성 안에는 남장대(南將臺)·북장대(北將臺)·서장대(西將臺) 등이 있고, 수문도 2곳 있다.

1966년에 서문을 해체하여 복원하였고, 1974년에는 남문 문루를 복원하였으며,

1975년에는 성곽을 보수하였으며, 1977년에도 북문을 복원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화산성(江華山城 )


사적 제132호. 고려가 몽고의 침입으로 인해 강화도로 천도할 당시 궁궐과 함께 축조되었다.

원래 내성·중성(中城)·외성(外城)의 3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성이 규모있게 궁궐의 내성으로 축조된 것은 1234년(고종 28) 1월부터였고, 당시의 성은 토석혼축(土石混築)이었다.
   
그리고 이 내성을 방어하기 위한 중성이 축조된 것은 1250년(고종 37)으로, 둘레가 약 7㎞에 달하는 토성이었다.

또 중성을 둘러싸는 외성은 1233년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여 1235년에 전국 주(州)·현(縣)에서 일품군(一品軍)을 징발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벌인 결과 동쪽 육지를 바라보는 선을 따라 3만 7,070척에 달하는 성이 1237년에 일차 완성되었다.


고려시대의 강화 내성에는 고려 궁궐과 관청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 규모나 배치를 모두 송도(松都 : 지금의 개성)의 것을 옮겨놓은 듯이 비슷하게 하여

왕족과 귀족들은 송도에서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생활을 영위했다.


궁궐의 정문은 정남향의 승평문(昇平門)이었다.

한편 중성에는 모두 8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송도의 것을 그대로 본떠 동에 선인문(宣仁門), 서에 선기문(宣祺門), 남에 태안문(泰安門), 북에 북창문(北昌門)을 두었고,

동남에 장패문(長覇門), 서남에 광덕문(光德門), 서북에 선의문(宣義門), 동북에 창희문(彰熙門)이 있었다.

그러나 고려와 몽고의 강화가 성립되어가던 1259년(고종 46) 몽고의 요구로 내성이 헐리게 되었고, 외성도 허물었다.

그리고 고려정부가 완전히 송도로 환도하는 1270년(원종 11)에는 궁궐도 헐리어 현재는 궁궐터마저 불완전하게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있자 인조가 잠시 피난했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봉림대군을 비롯한 빈궁(嬪宮)들과 신하들이 피난했으나

청군에 의해 강화성이 함락되면서 포로가 되었다.

이렇게 외침이 잦자 조선정부는 이후 수차에 걸쳐 강화성을 개축하여

화강암의 석성으로 바꾸고 여장(女墻 : 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도 설치했다.

이렇게 하여 강화성은 4개의 성문과 4개의 암문(暗門), 남·북·서쪽의 장대(將臺)와 2개의 수문(水門)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현재 북악과 남산을 연결하는 지역에 남아 있는 성벽의 일부와 성문은

거의가 조선시대에 축조되어 1970년대에 보수된 것이다.

동문은 망한루(望漢樓)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그리고 서문은 첨화루(瞻華樓)로 1711년(숙종 37)에 건립되어 그동안 퇴락되었다가 1977년에 개축되었다.

남문은 안파루(晏波樓)로 1711년에 건립되었으나 1955년 홍수 때 무너진 것을 1975년에 복원한 것이다.

북문은 1783년에 건립하여 진송루(鎭松樓)라 했으나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했다.

조선시대에는 성내에 많은 관아가 들어서 있었으나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당시 많은 건물이 소실되어

현재는 고려 궁터에 동헌과 이방청(吏房廳) 등이 복원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서문 근방에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조인되었던 연무당(鍊武堂)터가 있다.


출처 : 다음백과





▼ 강화유수 민진원의 송덕비


강화산성 성곽을 따라 오르면서...


남문을 돌아보니...













선화골약수터 갈림길



청하동약수터 갈림길




성곽 따라 오르다가...


문수산 방향을 보니...


북산 방향을 보니...


고려궁지를 살짝 당기니...


강화 고려궁지 [江華 高麗宮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官廳里)에 있는 고려의 궁궐터.

 

지정종목 사적

지정번호 사적 제133호

지정일 1963년 06월 10일

소장 강화군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743-1

시대 고려

종류/분류 궁궐터

  

사적 제133호로 지정되었다.

1232년(고려 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도를 강화로 옮긴 후

1270년(원종 11) 화의를 맺고 개성(開城)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 동안의 왕궁터이다.

이 자리에는 당시의 건물 기단(基壇)과 3단으로 된 돌계단이 남아 있었으나 후에 강화유수부(江華留守府) 건물이 세워졌으며,

1976년에는 3문의 출입문을 세우고, 돌담을 돌려 국방유적으로 정화하였다.

 

고려 궁정의 건물로는 본궁인 연경궁(延慶宮), 그 북동쪽 언덕에 강안전(康安殿),

소동문을 들어가 성마루터 북쪽에 경령궁(景靈宮), 옥림리 자문고개 서쪽에 건덕전(乾德殿),

그 동쪽에 장녕전(長寧殿), 뒤쪽에 만녕전(萬寧殿),

그리고 북창문 밖의 대묘동에 태묘전각(太廟殿閣)으로 대관전(大觀殿)과 신격전(神格殿)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모두 없어졌고,

이 밖에 이궁(離宮)과 가궐(假闕)도 곳곳에 세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방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다시 김포 문수산 방향을 보니


남산의 남장대와 산불감시초소가 보이네...











남산 정상에 올라...





남산 남장대












강화산성 남장대 안내문

 

사적 제132호.

강화산성은 고려 고종(1232) 때 토성으로 만들어 졌다가 몽골의 요구로 헐리게 된다.

이후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도가 부각되면서 조선숙종(1710) 때 현재와 같은 규모로 개축되었다.

길이는 7.1km,에 이르며 4대문, 암문, 수문, 그리고 북장대, 남장대를 비롯한 장대가 있었다.

2008년 발굴 조사 및 기술자문회를 거쳐 2010년 남장대를 복원하였다.








성너미데크계단


성너미데크계단으로 강화나들길 14코스 강화도령첫사랑길이 이어진다.


성곽너머로 강화도령첫사랑길이 이어지고...




고려산이 보이네...언젠가 고려산으로 이어가봐야지...


▼ 남장대를 돌아보고...


성곽을 따라 서문으로...





▼ 암문을 통해 강화나들길 15코스 공려궁성곽길이 이어지고...














▼ 강화석수문(상수문)


강화 석수문[江華石水門]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신문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수문.

 

지정종목 : 시도유형문화재

지정번호 : 인천유형문화재 제30호

지정일 : 1995년 03월 31일

소장 : 국유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883

시대 : 조선

종류/분류 : 성곽 건축

크기 : 길이 18.2m, 높이 2.7m, 폭 4.7m

 

1995년 3월 31일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었다.

 

강화 석수문은 강화산성(江華山城)의 내성에 연결되어 강화읍을 통하여 흐르는 동락천(東洛川)을 가로지르는 수문으로

1711년(숙종 37)에 축조되었으며 길이 18.2m, 높이 2.7m, 폭 4.7m이다.

 

3개의 월단(月團) 수문으로 되어 있는데,

각 수문은 화강암을 다듬은 선단석(扇單石)을 4∼5단으로 쌓아 이를 교각으로 삼고,

그 위에 매끄럽게 다듬은 월단석을 반원형으로 잇대어 아치를 이루도록 하였다.

아치와 아치 사이에도 다듬은 무사석으로 메워 올려서 아치석 윗돌과 평평하게 한 다음 그 위에 흙을 깔았다.

 

1910년 갑곶리(甲串里) 선착장을 신설하고 그 옆 동락천 하구(河口)의 교량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옮겨 시설하였다가

 1977년에 다시 지금의 위치에 옮겨 복원하였다.

 

강화에는 또 1676년(숙종 2) 축조한 갑곶리 석수문(인천유형문화재 67)도 있는데,

역시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4단의 기단 위에 11개의 각석으로 홍예(虹霓)를 틀고,

홍예 사이에는 직사각형 대석으로 8층을 쌓아 단단히 축조한 것으로 갑곶진(甲串鎭)의 통로였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 강화산성 서문(첨화루)





▼ 우백호







▼ 남산 남장대와 성곽길, 그리고 서문을 돌아보니...






▼ 강화정수장









▼ 강화정수장 아래 갈림길에서...



▼ 강화여고숲길 방향으로...



☞ 여기서 '강화산성 일주(남문-남장대지-석수문-서문-북문-북장대지-동문-현충탑-남문)' - 1부를 마치고...


 

 


2017년 02월 19일(일)

김포 문수산성 성곽일주 後 강화대교 건너서 강화산성 성곽일주 하기 中

김포 문수산성 성곽일주(성동검문소-중봉-홍예문-문수산 정상-북문-남문-성동검문소)
  
-▥☞ 1부[성동검문소→조강철책길 아치→모란각삼거리→팔각정→홍예문→문수제단→문수산성 장대→OP CURLY]는 여기를 클릭.☜▥-
 
-▥☞ 2부[OP컬리→소나무연리근→용강리갈림길→동아문→동막골갈림길→북문→남문→강화대교→강화청소년수련관]는 여기를 클릭.☜▥-
 
강화산성 성곽일주(남문-남장대지-석수문-서문-북문-북장대지-동문-현충탑-남문)

-▥☞ 1부[강화청소년수련관→남문(안파루)→남산 남장대→암문→강화문예회관→석수문→서문(첨화루)→강화정수장]는 여기를 클릭.☜▥-
 
-▥☞ 2부[강화정수장→북문(진송루)→북장대→원불교교당→동문(망한루)→견자산 현충탑→목화웨딩홀→강화터미널]는 여기를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