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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강화산성

강화산성 안내도 / 강화산성( 江華山城 )의 역사

by 맥가이버 Macgyver 2013. 1. 18.

 강화산성 안내도 / 강화산성( 江華山城 )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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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산성(江華山城)의 역사


요약
사적 제132호.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할 당시 축조되었다.

원래 내성·중성·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234년에 규모있는 궁궐의 내성으로 축조되었다.

중성과 외성은 그 이후에 축조되었다.


고려시대의 강화 내성에는 고려 궁궐과 관청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 규모나 배치를 모두 송도와 비슷하게 하였다.

1259년 몽고의 요구로 내성이 헐리게 되었고, 외성도 허물었고 1270년)에는 궁궐도 헐렸다.

1627년 정묘호란에 인조 잠시 피난했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봉림대군 등이 피난했다.

이후 수차에 걸쳐 강화성을 개축하여 화강암의 석성으로 바꾸고 여장도 설치하여

4개의 성문과 4개의 암문, 남·북·서쪽의 장대와 2개의 수문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사적 제132호.

고려가 몽고의 침입으로 인해 강화도로 천도할 당시 궁궐과 함께 축조되었다.

원래 내성·중성(中城)·외성(外城)의 3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성이 규모있게 궁궐의 내성으로 축조된 것은 1234년(고종 28) 1월부터였고, 당시의 성은 토석혼축(土石混築)이었다.
  
그리고 이 내성을 방어하기 위한 중성이 축조된 것은 1250년(고종 37)으로, 둘레가 약 7㎞에 달하는 토성이었다.

또 중성을 둘러싸는 외성은 1233년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여 1235년에 전국 주(州)·현(縣)에서 일품군(一品軍)을 징발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벌인 결과 동쪽 육지를 바라보는 선을 따라 3만 7,070척에 달하는 성이 1237년에 일차 완성되었다.


고려시대의 강화 내성에는 고려 궁궐과 관청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 규모나 배치를 모두 송도(松都 : 지금의 개성)의 것을 옮겨놓은 듯이 비슷하게 하여

왕족과 귀족들은 송도에서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생활을 영위했다.


궁궐의 정문은 정남향의 승평문(昇平門)이었다. 한편 중성에는 모두 8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송도의 것을 그대로 본떠 동에 선인문(宣仁門), 서에 선기문(宣祺門), 남에 태안문(泰安門), 북에 북창문(北昌門)을 두었고,

동남에 장패문(長覇門), 서남에 광덕문(光德門), 서북에 선의문(宣義門), 동북에 창희문(彰熙門)이 있었다.

그러나 고려와 몽고의 강화가 성립되어가던 1259년(고종 46) 몽고의 요구로 내성이 헐리게 되었고, 외성도 허물었다.

그리고 고려정부가 완전히 송도로 환도하는 1270년(원종 11)에는 궁궐도 헐리어 현재는 궁궐터마저 불완전하게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있자 인조가 잠시 피난했으며, 1

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봉림대군을 비롯한 빈궁(嬪宮)들과 신하들이 피난했으나 청군에 의해 강화성이 함락되면서 포로가 되었다.

이렇게 외침이 잦자 조선정부는 이후 수차에 걸쳐 강화성을 개축하여

화강암의 석성으로 바꾸고 여장(女墻 : 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도 설치했다.

이렇게 하여 강화성은 4개의 성문과 4개의 암문(暗門), 남·북·서쪽의 장대(將臺)와 2개의 수문(水門)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현재 북악과 남산을 연결하는 지역에 남아 있는 성벽의 일부와 성문은 거의가 조선시대에 축조되어 1970년대에 보수된 것이다.

동문은 망한루(望漢樓)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그리고 서문은 첨화루(瞻華樓)로 1711년(숙종 37)에 건립되어 그동안 퇴락되었다가 1977년에 개축되었다.


남문은 안파루(晏波樓)로 1711년에 건립되었으나 1955년 홍수 때 무너진 것을 1975년에 복원한 것이다.

북문은 1783년에 건립하여 진송루(鎭松樓)라 했으나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했다.

조선시대에는 성내에 많은 관아가 들어서 있었으나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당시 많은 건물이 소실되어

현재는 고려 궁터에 동헌과 이방청(吏房廳) 등이 복원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서문 근방에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조인되었던 연무당(鍊武堂)터가 있다.


출처 : 백과사전 편찬위원회  | Daum 백과



▼ 강화읍 상세도



강화산성( 江華山城 )의 역사


시대 : 고려후기 
문화재 지정 : 사적 제132호 
건립시기 : 고려시대 
성격 : 산성 
유형 : 유적 
면적 : 30만 7576㎡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 일원 


개설

강화도를 방어하기 위해서 쌓은 산성으로, 강화읍과 내가면, 하점면 일대에 걸쳐 있으며,

성문 4곳과 첨화루(瞻華樓)·안파루(晏波樓)·진송루(鎭松樓) 등의 문루, 암문(暗門)·수문(水門)·장대(將臺) 등의 방어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현재 강화읍 동쪽의 성벽은 없어졌지만 남쪽과 북쪽의 성벽은 잘 보존되어 있다.

몽골군의 침입,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수많은 외세 침략의 현장으로 알려져 있다.
 

내용

1232년(고종 19) 6월에 최우(崔瑀)는 몽골군 침입에 맞서 강화로 천도하면서 궁궐을 짓고 도성(都城)을 축조하였다.

다만 이 때 왕궁과 도성 시설을 모두 갖추지는 않고, 1234년 1월부터 송도(松都)의 것과 비슷하게 도성과 궁궐, 각 관청을 건립하였다.


산성은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졌다.

내성은 둘레가 약 1.2㎞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하여 1250년에 둘레 약 9㎞로 쌓은 토성인데, 선원면의 토성터가 이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중성에는 8곳의 성문이 있었는데, 모두 송도에 있던 성문의 이름을 본따서 동쪽의 선인문(宣仁門),

서쪽의 선기문(宣祺門), 남쪽의 태안문(泰安門), 북쪽의 북창문(北昌門), 동남쪽의 장패문(長覇門),

서남쪽의 광덕문(光德門), 서북쪽의 선의문(宣義門), 동북쪽의 창희문(彰熙門) 등으로 불렀다.


외성은 중성을 수비하려고 1233년부터 쌓기 시작한 뒤,

1235년 12월에는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실시하여 각 주현(州縣)의 일품군(一品軍)을 징발하고서

강화의 동쪽 해안을 따라 3만 7,070척의 길이로 쌓았다.

 토성인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강화를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위시설이자

강화로 천도한 고려 정부가 39년 동안 육지로부터 보급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었다.


1259년에 고려가 몽골과 강화하자, 몽골은 그 조건으로 주자(周者)와 도고(陶高) 등을 보내 내성을 헐고 외성까지도 모두 헐었다.

당시 역사(役事)는 몽골의 지나친 독촉으로 인해 동원된 백성의 고통이 매우 심하였다고 한다.

강화산성은 조선 초기에 다시 축조되었는데, 이 때 고려 때의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였다.

러나 1637년(인조 15)에 병자호란이 일어난 뒤 청나라 군사에 의해 다시 파괴되어,

1677년(숙종 3)에 강화유수(江華留守) 허질(許秩)이 고려 때의 내성 규모로 크게 고쳐 쌓았다.


1709년(숙종 35)에 강화유수 박권(朴權)이 중수한 뒤에도 조선 말기까지 계속 보수하였다.

이 때 성벽은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성벽 위에 낮게 쌓은 여장(女墻)도 두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무너진 상태이다.

성 안에는 남장대(南將臺)·북장대(北將臺)·서장대(西將臺) 등이 있고, 수문도 2곳 있다.

1966년에 서문을 해체하여 복원하였고, 1974년에는 남문 문루를 복원하였으며,

1975년에는 성곽을 보수하였으며, 1977년에도 북문을 복원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