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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경기 도보후기☞/☆ 염하강변일주

[20170226]염하강변 일주(강화나들길 中 호국돈대길 & 김포평화누리길 中 염하강철책길 이어걷기)를 다녀오다 - 2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17.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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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02월 26일(일)

염하강변 일주(강화나들길 中 호국돈대길 & 김포평화누리길 中 염하강철책길 이어걷기)를 다녀오다.


  '염하강변 일주(김포평화누리길 中 염하강철책길 & 강화나들길 中 호국돈대길 이어걷기)' 이야기

 

 맥가이버의 '염하강변 일주(강화나들길 中 호국돈대길 & 김포평화누리길 中 염하강철책길' 코스

 

성동검문소→舊강화대교 전망대쉼터→舊강화대교 도강→갑곶성지→강화역사관주차장→호국돈대길아치→갑곶교→강화외성

→강화 더리미포구→용진진→용당동대→화도돈대→화도수문 개축기사비→오두돈대→강화전성→쌍철탑길→강기운 의교비

→광성보(쌍충비각→신미순의총→용두돈대→광성포대)→덕진진(덕진돈대→남장포대)→덕진교→초지진→강화초지대교 도강

→대명항종점→호동천배수문→김포함상공원→염하강철책길 아치→덕포진쉼터→덕포돈대→파수청터→손돌묘→신안리 주택

→부래도(덕포나루)→부래도쉼터→쇄암리 출렁다리→고란초삼거리→쇄암리전망대쉼터→할머니매점→원머루나루(고양포)

→고양리쉼터→김포시사이드CC→해병대상륙훈련장→포내배수펌프장→포내천수문→구강화대교 전망대쉼터→성동검문소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안내도를 클릭하면 확대됨.

▼ 김포평화누리길 1코스염하강철책길 안내도를 클릭하면 확대됨.


 

 

[염하강 鹽河江] - 강화해협 or 김포강화해협
인천광역시 강화군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의 해협(海峽)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강화도)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에 있는 남북 방향의 좁은 해협(海峽)이다.
마치 강(江)과 같다 하여 염하(鹽河)라고 부르며 강화해협 또는 김포강화해협이라고도 한다.
폭이 좁은 곳은 200~300m, 넓은 곳은 1km 정도이고, 길이는 약 20km이다.
 
밀물 때의 최대 유속은 약 3.5m/sec로 물살이 거세고 수심이 얕아서 썰물 때에는 곳에 따라 바닥이 드러나기도 한다.
염하의 북쪽으로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강물이 흘러들어 오는데,
염하 북쪽의 월곶과 남쪽 황산도 간에는 물높이(해수면 높이) 차이가 아주 커서 물살이 빨라지게 된다.
 
염하는 예로부터 우리나라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서해를 북상해 온 세곡선(稅穀船)이 염하를 통해 한강으로 진입하여 한양으로 들어갔다.
염하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외세를 막는 군사적 요충지였는데
개항기 때에는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를 치른 격전지였다.
염하를 따라 군대 주둔지인 진(鎭)과 보(堡), 초소인 돈대 등 수많은 방어유적이 산재해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초지진(草芝鎭, 사적 제225호), 덕진진(德津鎭, 사적 제226호),
덕포진(德浦鎭, 사적 제292호), 광성보(廣城堡, 사적 제227호), 갑곶돈(甲串墩 갑곶돈대, 사적 제306호) 등이 있다.
 
염하는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북한 신의주까지 오가던 뱃길이었는데
전쟁 후 뱃길이 봉쇄되었다가 2007년부터 민간어선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염하를 가로질러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가 놓여 있다.
 
[출처 : 두산백과]

 

 오늘은 '염하강변 일주(강화나들길 中 호국돈대길 & 김포평화누리길 中 염하강철책길 이어걷기)'를 위해 길을 나선다.

지난 2015년 1월에 걸었던 '염하강(김포강화해협) 일주'를 역방향으로 다시 하게 된다.
                                                      바로가기 ☞ http://blog.daum.net/macgyver/16155936
 
염하강(鹽河江)이란 김포시와 강화도 사이의 바다를 달리 이름이고,
'염하강 일주'란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를 도강하며 '강화도 해안길'과 '김포 해안길'을 따라 걷는 것을 말한다.
 
오늘 걷는 '염하강변(김포강화해협) 일주'의
강화도 해안길은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로, 김포 해안길은 '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이라는 이름이 있다.
 그 두 길을 위 '염하강변 일주 코스도'처럼 성동검문소에서 시작하여 시계반대방향으로 걸어서 원점회귀하는 코스로 진행한다.

원래는 성동검문소버스정류장에서 걷기 시작하여 '강화대교'를 도강하며 '염하강변 일주'를 하였는데...
오늘 '舊강화대교'가 사람과 자전거가 통행이 가능함을 알게 되어 처음으로 '舊강화대교'가 걸어서 건넌다.
'舊강화대교'를 건너니 바로 갑곶성지가 나오고 갑곶돈대를 휘돌아 강화역사관주차장에서부터 '강화나들길 호국돈대길'을 걷고,
초지대교를 도강하여 김포함상공원을 거쳐 '김포평화누리길 염하강철책길'을 따라 성동검문소로 원점회귀하는 코스로 진행했다.

오늘 걸은 거리는 김포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14km와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17km를 합하고,
두 길을 잇기 위한 舊강화대교와 강화초지대교의 도강거리 등 3km 정도를 더하면 34km 이상일 듯...
 

08시 51분에 성동검문소를 출발하여 '염하강변(김포강화해협) 일주'를 하고, 18시 15분에 성동검문소로 원점회귀하였다.

 

☞ 맥가이버의 염하강변 일주(강화나들길 中 호국돈대길 & 김포평화누리길 中 염하강철책길)를 다녀오다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누군가가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臥死步生)'고 했다.
맥가이버는 '산 따라 강 따라 길 따라' 걷는 것을 죽고사는 차원이 아닌 즐기는 차원에서 걷는다.
즉, 좋은 길을 걷다가 새로운 환경이나 상황,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되고, 느끼고, 감동 받고, 깨닫는 것을 즐긴다.
 

 

 
 
'모든 만남은 걷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길을 걷다보면 새로운 풍광을 보게 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맥가이버가 '때론 함께, 때론 홀로' 산행이나 여행, 도보를 하면서 후기를 주로 사진으로 작성함은
인간의 만남이 또한 유한함을 알기에 어떤 연유로 비록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추억 속에서 함께 하고자 함이고,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걸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하는 무능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든다면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자 할 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 염하강변 일주(강화나들길 中 호국돈대길 & 김포평화누리길 中 염하강철책길)를 다녀오다 - 2부를 시작하며...

 

 

오두돈대에서...












강화전성[江華塼城]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오두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전축성.
 
지정종목 시도기념물
지정번호 인천기념물 제20호
지정일 1995년 03월 01일
소장 강화군
시대 고려
종류/분류 성지
크기 길이 약 270m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 563 외 6필지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었다.

이 성은 다듬은 돌을 쌓아 기초를 마련한 위에 전돌을 쌓아올려 만든 전축성(塼築城)이다.
축성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고종 때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으로, 강화의 내성(內城)·중성·외성 가운데

강화 동쪽 해협을 따라 지어진 길이 3만 7070자(1만 1232m)의 외성에 속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영조 때 비가 오면 성의 흙이 빗물을 따라 흘러내렸는데,

청나라에서 번벽법을 보고 온 당시의 강화유수(江華留守) 김시혁이 나라에 건의하여 1743년(영조 19)부터 이듬해까지 전돌로 개축했으며,

김시혁은 그 공으로 1744년 한성부 판윤(判尹)이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성의 길이는 약 270m에 달한다.

 

[출처 : 두산백과]




강화전성[江華塼城]

 
강화전성인천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

길이 270m, 높이 0.9∼1.2m.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0호.

이 성은 강화도에 축조된 고려 외성 중의 하나이다.

 

유형 유적
시대 고려/고려 후기, 조선/조선 후기
성격 성곽, 전성(塼城)
건립시기·연도 고려 후기(토성), 1744년(전성)
크기(높이, 길이, 둘레, 깊이) 높이 0.9∼1.2m, 길이 270m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 563
소유자 국(재정경제부)외 4인
관리자 강화군
문화재 지정번호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0호
문화재 지정일 1995년 3월 1일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성.

 

내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0호. 길이 270m, 높이 0.9∼1.2m.

이 성은 강화도에 축조된 고려 외성 중의 하나로 밑 부분은 돌로 쌓고 윗부분은 벽돌로 쌓았다.

 

원래 이 성은 1231년(고종 18)에서 1270년(원종 11) 사이에 토성으로 축조되었다고 하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1742년(영조 18)에 강화유수 김시연(金時緛)이 벽돌을 구워

이 성을 개축할 것을 왕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아 이듬해 공사를 시작하여 1743∼1744년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래쪽은 돌로 쌓고 위쪽은 벽돌로 쌓았는데, 벽돌은 강회붙임으로 연결하고 어긋매김 공법으로 축조하여 허물어짐을 방지하였다.

원래 전체 높이 약 4m에 약 10리에 해당하는 부분은 벽돌로 개축하고 나머지 부분은 삼군문(三軍門)에서 축조하였는데,

현재는 약 270m 가량만이 군데군데 허물어진 채 남아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강화고지도> 18c후반 76.5*119cm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강화산성을 비롯하여 동쪽 해안의 강화외성, 정족산성, 문수산성 등이 검정색 굵은 선으로 강조되어 있다.

면 단위의 행정구역과 호구수, 강화부까지의 거리가 표시되어 있고, 상단의 지리지에는 강화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다.








































광성보[廣城堡]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진보로서 강화 12진보 가운데 하나이다.


유형 : 유적
시대 : 조선/조선 후기
성격 : 성곽시설, 진보
건립시기·연도 : 1679년(숙종 5)
규모(면적) : 6,102㎡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소유자 : 국유, 사유
관리자 : 강화군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227호
문화재 지정일 : 1971년 12월 28일

 

강화 12진보 가운데 하나이다.

사적 제227호. 지정면적 6,102㎡.

1658년(효종 9)에 강화유수 서원이(徐元履)가 설치하였는데,

1679년(숙종 5)에 축조된 오두(鰲頭)·화도(花島)·광성 등 세 돈대(墩臺)와 1874년에 축조된 오두정포대를 관할하였다.

 

이곳은 1871년(고종 8)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해에 통상을 요구하며 침입한 미국함대가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광성·초지(草芝)·덕진(德津)·덕포(德浦) 포대에서

일제사격을 가하여 물리쳤으나, 4월 23일에 450명의 미국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여 진을 점령하였다.

이튿날 미군이 북상하여 덕진진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광성보를 지키던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 이하 전장병은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중상으로 기동이 어려운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다.

 이때 성첩과 문루가 파괴된 것을 1976년에 복원하는 동시에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어재연의 쌍충비각(雙忠碑閣)을 보수, 정비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쌍충비각[雙忠碑閣]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비각.

비각 안에는 신미양요(辛未洋擾)의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조선 후기의 무신 어재연(魚在淵)과

그의 아우 어재순(魚在淳) 등의 전적을 기리는 전적비가 있다. 


지정종목 : 향토문화재
지정번호 : 강화향토유적 제10호
지정일 : 1986년 04월 01일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
시대 : 조선
종류/분류 : 비각

 

1986년 4월 1일 강화군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어재연, 어재순을 비롯한 전 수비군은 인원과 무기의 열세를 딛고

미국함대와 치열한 격전을 벌였으나 결국 대패하여 부상자 몇 명을 제외하고 전군이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비각은 후에 어씨 문중에서 이들의 충절을 기려 건립한 것으로

광성보 안에 있으며 1976년 광성돈대 복원작업의 일환으로 정비, 보수되었다.
해마다 음력 4월 24일이면 어씨 형제의 충절을 기리는 제를 올린다.


[출처 : 두산백과]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광성보 내에 있는 조선 말기 무명용사들의 무덤이다.
 

쌍충비각 맞은편 아래쪽에 있다.

1871년(고종 8) 4월 23일 광성진(廣城津)에서 벌어졌던 미해군 육전대(陸戰隊)와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용사들의 무덤이다.
당시 군사를 이끌던 어재연 장군과 동생 재순, 군관, 사졸 등 53명의 전사자 중 어재연 형제는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신원을 알 수 없는 나머지 51명의 시신은 7기의 분묘에 나누어 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호랑이를 사냥하던 포수 출신들로서 용맹함이 뛰어났다고 한다.

 

[출처 : 두산백과]




손돌목 돈대[孫乭─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강화53돈대의 하나.
덕진돈대와 함께 덕진진에 소속되어 있으며 뱃사공 손돌의 전설에서 돈대의 이름을 땄다. 


1679년(숙종 5)에 축조하였는데, 강화도의 다른 돈대들이 사각 모양인 것과는 달리 원 모양으로 만들었다.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외국 함대들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서,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파괴되었던 성벽을 복원하였다.
돈대 입구에는 서해안 지역의 북한계선 식물인 탱자나무가 자라고 있다.
손돌목돈대에서 동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용두돈대가 있는데,

그 앞의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를 뱃사공 손돌이 왕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고 한다.
염하 건너편 동남쪽에 덕포진이 있는데, 덕포진 언덕 위에 손돌의 묘가 있다.


[출처 : 두산백과]





용두돈대[龍頭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강화 53돈대의 하나.
광성보에 소속되어 있으며 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 암반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시되었으며 1679년(숙종 5)에 돈대가 세워졌다.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치르면서

외국 함대들과 벌인 치열한 전투로 성벽이 크게 파괴되었으나,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다시 복원하였다. 


당시 돈대 안에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를 세웠는데,

앞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돈대 앞을 흐르는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는 손돌풍으로 잘 알려져 있는 손돌목이다.
염하 건너편 덕포진 언덕 위에는 손돌풍 전설의 주인공 손돌의 묘가 있다.


[출처 : 두산백과]

























































덕진진 공조루(控潮樓)


강화 덕진진[江華 德津鎭]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덕진진은 조선시대 때 덕포진과 더불어 강화도해협의 관문을 지키던 강화도 제1포대였다.


지정종목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226호
지정일 : 1971년 12월 28일
시대 : 조선
종류/분류 : 요새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46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며, 덕진진은 덕포진과 더불어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강화도 제1의 포대였다.
덕진진은 본디 수영(水營)에 속하여 첨사(僉使)를 두고 있었는데,
1666년(현종 7년)에 강화유수 서필원(徐必遠)이 임금에게 청하여 첨사를 경기 김포시 덕포로 옮기고 이곳에 별장을 두었다.

1677(숙종 3년)에는 유수 허질(許秩)이 임금에게 청하여 만호(萬戶)로 승격시켰다.
1874년(고종 11년)에 축조한 남장 포대는 15문의 포대가 남아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梁憲洙)의 부대가 밤의 어둠을 타서 이 진을 거쳐

삼랑성(三郞城:일명 정족산성, 鼎足山城)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파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J.로저스 중장이 이끄는 미국 극동함대와 이곳에서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한 미국해병대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때 성첩(城堞)과 문루(門樓)가 모두 파괴되고, 문루터만 남게 되었다.
1976년에 문루를 다시 세우고 돈대(墩臺)를 보수하였으며 남장 포대도 개축하였다.


[출처 : 두산백과]




















덕진돈대[德津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강화 53돈대의 하나.

손돌목돈대와 함께 덕진진에 소속한 2개 돈대 중 하나로서 북쪽의 광성보와

남쪽의 초지진 중간에 있어 강화수로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 역할을 한다.
 
1679년(숙종 5)에 축조하였으며 덕진진 안에 있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을 때 남장포대,

덕포포대와 함께 미국의 아시아 함대와 이틀에 걸친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신미양요 때 크게 파괴되었으나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 당시 새롭게 복원하였다.

돈대의 남쪽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가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당시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짐작하게 하는 '강화 덕성리의 경고비'가 세워져 있다.

 

[출처 : 두산백과]





덕진진 경고비[德津鎭警告碑]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덕진진에 있는 비석. 

 

강화해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요새 덕진진(德津鎭, 사적 제226호) 앞 바닷가에 있는 경고비이다.

강화군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바다의 척화비’라고도 불린다.

1876년,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세웠으며 높이는 147cm, 폭은 54.5cm, 두께는 28cm이다.

비석 정면에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는 문장이 음각되어 있는데,

‘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으므로, 외국 선박은 통과할 수 없다’는 뜻으로 결연한 쇄국의지를 담고 있다.

경고비 우측 상·하단부에는 탄흔이 남아 있다.

 

[출처 : 두산백과]





염하강에서 / 김병중 詩

 

강이 아닌 바다에 서서

바다가 아닌 강을 바라본다

강이 바다의 할아버지인지

바다가 강의 어미인지 알 수 없지만

이름은 강이라 하고

몸은 바다라고 한다

거북처럼 머리 처들고

초지대교로 돌아오는 만선의 배는

흰 갈매기가 호위하고

덕포진에서 불어오는 손돌바람은

강비늘을 세우는데

못난 삼식이를 대명리 주인이라 한들

누가 그를 탓하는가

호랑이가 입벌린 모습이면 어떠하고

해마가 물밖으로 나오는 모양이면 무엇하리

문수산 아래

강이 있어 바다가 있고

바다가 있어 염하강 물길이 있는

우린 대명천지에 한배를 탄

노아의 외밧줄 목숨이다

















☞ 여기서 염하강변 일주(강화나들길 中 호국돈대길 & 김포평화누리길 中 염하강철책길)를 다녀오다 - 2부를 마치고...

 

 

 

2017년 02월 26(일)

 맥가이버의 염하강변 일주(강화나들길 中 호국돈대길 & 김포평화누리길 中 염하강철책길)를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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