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걷기] 어머니 품 같은… 모악산 마실길을 가다
모악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고여 있는 금평저수지 둘레에는 한 바퀴 산책할 수 있는 데크길이 조성되어 있다.
어머니의 산, 모악산에 만들어진 모악산 마실길은 모악산의 경관과 더불어 한적한 시골마을을 걷는 아름다운 도보길이다. 김제시·전주시·완주군의 3개 시·군에 걸쳐 총 7개 코스가 있다.
전주시 2개 코스, 김제시 2개 코스, 완주군 3개 코스로 총길이는 약 75km. 그중 김제시에 속하는 구간은 백제의 천년고찰 김제 금산사와 금산사를 품고 있는 모악산의 경관과 함께 한적한 시골마을을 걷는 아름다운 도보길이다.
1코스는 유각재에서 시작해 배재까지 21km, 2코스는 금산사주차장에서 시작해서 백운동계곡을 돌아서 다시 금산사주차장으로 돌아오는 13km. 최소한 이틀은 필요한 코스이다. 겨울의 끝자락에 눈을 밟고 걸을 수 있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모악산 마실길로 향한다.
서강사의 현판에 쓰여 있는 ‘백세청풍’. 영원토록 변치 않는 맑고 높은 선비가 지닌 절개를 의미한다.
1코스 유각재~배재 21km
1코스의 시작지점인 유각재에서 임도를 따라 내려오니 귀신사로 들어서는 해탈교이다. 이 다리만 넘어서만 누구나 해탈할 수 있을까? 처음 듣는 순간 귀신을 연상했는데 ‘믿음으로 돌아간다’는 뜻의 귀신사歸信寺이다. 금산사가 본사로 676년에 의상이 창건했고, 임진왜란 중에는 승병을 양성하기도 했다. 산속 깊은 곳이 아닌 마을 바로 곁에 있는 친구처럼 편안한 모습이다. 종교도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니 사람 곁에 머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 흔한 일주문조차 없다. 계단에 올라서니 바로 경내이다. 단아하고 정갈한 모습이 참으로 정겹다.
보물로 지정된 대적광전의 단청은 나무색깔 그대로 색을 입힌 고색古色 단청이다. 오래된 사찰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있는 대적광전의 뒤쪽에는 명부전, 영산전 등이 있다. 명부전 뒤 계단에 올라서면 삼층석탑과 석수가 있고 대적광전 지붕 위로 평화로운 청도마을이 펼쳐진다. 마을을 품고 있는 귀신사가 엄마의 품처럼 느껴진다. 삼층석탑은 귀신사가 창건될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석수는 사자상으로 사자 등 위에 구멍을 파고 대나무 모양의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40cm 높이의 남근석을 세웠다. 사찰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희귀한 모습이다. 귀신사의 역사가 점점 궁금해진다.
귀신사를 나와서 조금 길을 걸으니 청도리삼층석탑이 있다. 귀신사가 한때는 9개의 암자를 거느리며 번성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삼층석탑을 지나서 싸리나무가 많은 싸리재로 향하는 길은 고즈넉한 산사로 향하는 길처럼 조용하고 한적하다. 지난주에 내렸던 눈이 아직 그대로이다. 눈을 밟으러 온 내 마음을 귀신사의 부처님이 알고 계셨나보다. 사각사각 소리 내며 눈을 밟고 휘어진 길을 따라서 걷는다. 아무도 없는 시골길은 무섭기보다는 한적한 쓸쓸함으로 다가선다. 홀로 걸을 때의 고독을 가끔 즐기고 싶을 때가 있다. 바로 지금이 그때이다. 지금 이 공간에는 나 혼자뿐! 조금은 싸늘한 산바람이 코로나로 우울했던 마음도 시원하게 날려 준다.
신아대숲길로 들어서니 곳곳에서 대나무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나뭇잎들이 떠는 소리가 어린아이들 재잘거림처럼 들린다. 대나무 사이로 명주실처럼 비집고 들어오는 빛에 눈을 뜨기 어렵다. 지그시 눈을 감고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도통사에서 높은 산기슭에 자리해서 항상 흰 구름에 둘러싸여 있다는 백운동 마을로 가는 한적한 길에서는 사람조차 만나기가 쉽지 않다.
서강사부터는 시골 마을을 걷는 마실길이다. 서강사는 구한말 애국지사였던 장태수 선생을 배향하는 곳이다. 바로 곁에는 장태수의 생가인 남강정사가 있다. 서강사로 들어서면 현판에 써 있는 ‘백세청풍’이라는 글귀는 구한말 그가 지니고 있던 절개를 보여 준다. “나라를 빼앗긴 고위직 신하가 일본 천황의 은사금을 받을 수 없다”며 일본 헌병의 온갖 협박과 회유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충절을 지켰다. 망국의 슬픔을 탄식하면서 27일 동안 단식을 단행하다가 남강정사에서 순국했다.
금평저수지가 2km도 채 남지 않은 곳에 있는 쌍용사는 법성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법성스님은 전국 명산을 돌며 산신기도를 하던 중 병마에 시달리는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구도의 길로 들어섰고 많은 신도들이 그를 따랐다. 1995년에 조선최대의 역모사건인 기축옥사 때 죽은 정여립의 문중 사당 터에 쌍용사를 중건했다. 쌍용사는 여느 절과는 겉모습부터 다르다. 외벽에 정성스레 그려진 그림을 유심히 바라보니 대부분 민화와 관련된 그림들이다. 내부로 들어선 순간 이곳이 사찰임을 의심할 정도로 많은 토속신앙과 관련된 석조물들이 가득하다. 그중에 가장 특이한 것은 당산 할아버지와 할머니. 쌍용사는 토속 신앙인 당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신 사찰로 부처님보다 더 웅장한 모습으로 경내 중앙에 자리하고 계신다. 놀랍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다.
엄마의 품처럼 포근하게 청도마을을 품고 있는 귀신사.
금평저수지에 도착하니 일몰을 맞이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다. 호남평야의 젖줄인 금평저수지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금평저수지 바로 곁에 있는 캠핑장 겸 카페인 모꼬지에서 따뜻한 커피 한잔 마시며 해가 기울기를 기다린다. 해가 어느 정도 기울었을 때 금평저수지 계단으로 오르니 햇님은 화사한 오렌지빛으로 저수지를 물들이고 있다.
모악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모이는 금평저수지는 오리알 터로도 불린다. 풍수지리에 밝았던 도선이 장차 오리가 알을 낳는 곳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홀로 걸으며 저수지로 떨어지는 햇님과 친구하며 보내는 시간은 참으로 따뜻하고 감미롭다.
귀신사에서 싸리재로 넘어가는 고갯길은 조용하고 한적해서 사색하며 걷기 좋다.
금평저수지를 지나니 왼쪽은 원불교 원심원 방향이고, 오른쪽은 증산교의 증산교 창시자 강증산이 연 동곡약방 자리로 가는 갈림길이다. 마실길 1코스는 동곡약방, 2코스는 원심원 방향으로 이어진다. 동곡약방은 강증산이 1908년 마을에 살던 김준상 아내의 발가락 종창을 고쳐 주고 방 한 칸을 얻은 후에 문을 연 약방이다. 모악산 일대는 청룡사, 도통사, 귀신사 등 10여 개의 사찰과 증산교, 원불교 등의 신흥종교 단체가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영험한 기운이 있는 듯하다.
다음 목적지는 금산교회. ㄱ자 모양의 한옥으로 1905년 미국 선교사 데이트가 설립했다. 내부 한가운데 커튼이 쳐 있어서 남녀가 따로 앉아 예배를 보았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코로나로 내부에 들어갈 수 없어서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금산사로 향한다.
산사에 도착하니 산사에는 불이 켜져 있다. 금산사는 모악산 마실길의 가장 큰 볼거리. 여유롭게 돌아볼 시간이 없으니 내일 다시 찾기로 한다. 청룡사, 배재까지 갈 길이 먼데 해는 완전히 떨어지고 온 세상은 이미 어둡다. 여유롭게 걷던 발걸음이 속도를 낸다. 마음도 몸도 바빠진다. 어두워진 산사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지나가는 이들의 앞을 밝혀 준다.
귀신사의 석수상. 석수 위에 남근석이 서 있는 모습은 사찰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금산사를 지나고 청룡사 앞에 이르니 길 찾기가 어렵다. GPS트렉으로 표시된 길은 산으로 올라가는 길. 산으로 올라 걸었지만 그 길이 아닌 듯하여 다시 내려오길 두 차례. 청룡사가 가로 막아서 길이 끝났으니 아무리 보아도 다른 길이 없다. 다시 산으로 들어선다. 앞서 걸은 어떤 등산객의 발자국이 눈 위에 선명해서 길 찾기가 수월하다. 계속된 오르막은 배재에서 끝났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인 삼층석탑은 귀신사 창건 당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사귀환, 배재~ 탑선 1.3km
안도의 숨을 쉰다. 지도상으로는 불과 1km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배재에서 안덕마을로 내려가는 길표시를 찾을 수 없다. 배재에 있는 이정표는 ‘모악산 정상 2.9km, 탑선 1.3km, 화율봉 2.5km, 청룡사 1.0km’ 만이 쓰여 있다. 화율봉 방향으로 오르면서 내 위치를 확인해 보니 날머리와는 점점 멀어진다. 다시 배재로 돌아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심하고 미끄러워 밧줄을 잡고서도 내려오기 힘들다.
배재로 돌아와서 이번에는 탑선으로 향하는 길을 선택한다. 탑선까지는 1.3km. 내리막길이어서 20여 분이면 충분한 거리이다. 내리막길로 들어서니 발걸음에 탄력이 붙고 흘렸던 땀도 적당히 말랐다. 마음도 조금 평온하다. 자락길로 들어섰나 싶었는데 이내 계곡을 건너기를 몇 번. 조금씩 긴장된다. 인도 정글에서 길을 잃었을 때도 한밤중이었는데. 그때를 생각하니 지금은 너무나 좋은 상황이다. 내 나라에서, 높지도 않은 산이고 언제든지 연락하면 도움을 청할 수 있다. 단지 나의 방심이 자초한 상황일 뿐이다. 안덕마을에서 기다리던 일행은 걱정이 되는지 수시로 전화를 한다. 모악산은 다녀갔지만 안덕리로 향하는 계곡 길은 초행, 게다가 지금은 밤이다. 지도상으로는 바로 옆인데 길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길 곳곳에는 멧돼지 흔적이 남아 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발걸음이 더욱 바빠진다. 20여 분이면 날머리인 안덕리에 도착할 거란 생각은 잊기로 한다. 가능한 빨리 무엇보다 안전하게 도착하길 바라면서 한발 한발 길을 걷는다. ‘모악산 마실길’이란 팻말을 보는 순간, 안심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계곡길에서 벗어나 마실길로 들어선다. 청룡사 입구에서 한 시간 정도 지난 시간이다. 한 시간은 마치 수십 시간처럼 느껴진다.
멀리 불빛이 보이고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모악산 마실길이 끝났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늦은 시간까지 기다려 준 일행을 보는 순간 너무 미안하다. 높지 않은 산이라고, 이름이 ‘마실길’이라고 너무 안이하게 진행한 나 자신을 책망한다.
해발 217m에 있는 닭지붕. 시작부터 가파른 오르막길인 모악산 마실길 2코스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쉼터이다.
2코스 금산사주차장~귀신사 4.7km
마실길이란 단어에 방심했던 어제의 내 모습을 밤새 반성하고 오늘은 2코스를 걷는다. 두 번째 코스는 금산사를 출발해서 다시 금산사로 돌아오는 약 13km 여정. 금산사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모악산관광안내소 옆의 계단을 따라 오른다. 솔향이 가득한 숲길은 생각보다 울창하다. 처음부터 심한 업힐. 마실길이란 이름이 무색하지만 운동 삼아 조금 빨리 걸으니 몸이 후끈해지면서 목덜미에서 땀이 흐른다. 이 맛에 산을 오르는데 최근에는 올레길, 둘레길을 걷는다는 핑계로 살방 산행만을 하고 있다. 다시 종주산행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종주산행은 요즘처럼 날씨가 선선할 때가 적기이다.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겠다.
1905년 세워진 한옥 형태의 금산교회.
숲길과 나무계단을 따라 오르는데 딱 쉬어가고 싶은 산비탈에 정자가 있다. 바로 닭지붕이다. 닭지붕에서 잠시 땀을 식힌다. 내리막길로 들어서는가 싶었는데 다시 오르막길이다. 숨을 몰아쉴 정도는 아니다. 용화사 삼거리로 가는 길의 조망대에서 조금씩 높아진 고도 덕에 금산사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난다.
모악산의 품속에 안겨 있는 금산사의 모습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금산사 위쪽으로는 어제 지나쳤던 청룡사도 보인다. 금산사는 백제 때 창건된 사찰로 역사가 1400년이 넘는 고찰이다. 후백제의 견훤이 금산사에 유폐된 적이 있었고 긴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오르막은 모악산 정상과 백운동마을 갈림길까지 계속되었다. 모악산 마실길은 백운동마을 방향으로 이어진다. 임도길을 따라 길을 걸으니 산비탈에 뽕나무가 가득한 백운동마을이 나타난다. 1960년대부터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쳤지만 지금은 뽕나무 열매인 오디가 주 수입원이 다. 임도가 끝나니 바로 앞에 귀신사가 보인다. 이후 코스는 1코스와 겹치는 구간이 많아서 2코스를 귀신사에서 마친다.
한겨울의 조용한 시골길을 걷고 싶어 선택한 모악산 마실길에서 김제의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모악산의 품에 안긴 금산사의 매력에 푹 빠졌지만 무엇보다 아무리 쉽고 편한 길이라도 안전하고 여유 있게 시간을 고려해야 함을 다시 느낀 길이었다.
글·사진 김영미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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