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광부들 떠난 빈집이 호텔로, ‘폐탄광 마을’에 체크인 했다,
강원 정선 고한18리 폐광촌 마을의 변신
강원도 정선 고한읍 '마을호텔18번가'에 있는 구공탄시장 벽화. 지금은 사라진 탄광촌의 역사와 스토리가 담겨 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높은 건물도, 화려한 로비도,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문도 없다. 호텔 하면 으레 떠오르는 풍경 대신 숙박객을 맞아주는 건 아기자기한 골목이다. 강원도 정선 고한읍 마을호텔18번가. 폐광촌 작은 마을이 호텔로 변신했다.
호텔의 고정관념을 깨는 공간이다. 커다란 빌딩에 각종 시설이 들어있는 게 아니다. 동네 집들과 가게 전체가 호텔로 바뀌었다. 로비 격인 골목길을 따라가면 숙소와 안내 센터, 마을회관, 회의실, 라운지, 식당, 사진관, 이발관, 세탁소 등이 나온다. 이들 마을 상점은 호텔로 치면 부대시설인 셈이다.
빈집을 리모델링해 만든 숙소에 짐을 풀고 동네 카페에서 조식을 먹는다. 폐광촌에 들어선 마을 호텔에 ‘체크인'해봤다.
◇페광촌의 변신은 무죄
'마을호텔18번가'로 변신한 거리. 아기자기한 골목 따라 모여 있는 숙소와 식당, 마을회관, 사진관, 세탁소 등이 호텔 역할을 한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고한은 1960년대 탄광 개발이 시작되면서 탄광촌이 됐다. 1980년대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인구가 최대 4만명에 달했다. 하지만 1989년 정부가 석탄 산업 합리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위기가 왔다. 탄광이 대거 문 닫고, 일자리를 잃은 광부들은 썰물처럼 고한을 빠져나갔다. 2001년 10월 삼척탄좌 정암광업소가 문을 닫으며 탄광과 함께한 이 마을의 역사도 막을 내렸다.
2000년 들어 강원랜드와 하이원리조트가 문을 열었지만 폐광촌의 쇠락은 계속됐다. 이제 인구는 채 5000명이 되지 않는다. 빈집이 나날이 늘어간다. 그중에서도 고한파출소에서 구공탄시장까지 고한18리가 가장 심각한 상태였다. 몇 해 전만 해도 빈집과 쓰레기 천지였다. 어둡고 지저분한 골목을 오가는 인적이 드물 정도였다.
고한18리의 변화를 이끈 김진용 마을호텔18번가 협동조합 상임이사.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마을호텔18번가 협동조합 김진용(46) 상임이사는 2017년 고한18리의 빈집을 고쳐 자신이 운영하는 하늘기획의 사무실로 썼다. “어릴 땐 이곳에 사는 게 창피하고 불편했어요. 하지만 마을이 계속 망가져 가는 걸 보고 있을 수 없더라고요.” 얼마 후엔 맞은편 폐가에 공유 오피스 공간인 이음플랫폼이 입주했다. 작은 변화를 시작으로 마을 주민과 골목을 바꿔나갔다. 골목에 쌓인 쓰레기와 폐전선을 치우고 화단을 가꾸는 등 주민들이 스스로 집 앞을 단장하면서 마을의 풍경이 바뀌었다. 국토교통부, 강원도 등에서 시행하는 재생 사업에도 참여해 지원을 받아 마을을 바꾸기도 했다.
‘마을 호텔’은 새로운 아이디어였다. ‘스쳐가는 마을'이 아니라 ‘머무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모이면 호텔이다.” 빈집을 리모델링해 숙소를 만들고 호텔에 필요한 부대시설은 기존의 마을 상점을 활용했다. 한 건물이 아니라 마을 전체에 걸쳐 있는 호텔이 만들어졌다.
빈집을 고쳐 만든 마을호텔18번가의 숙소.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마을호텔18번가의 3인용 객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마을호텔18번가는 지난해 5월 문을 열었다. 객실은 총 3개. 2인실(최대 3명) 2개와 3인실(최대 4명) 등이다. 1일 숙박비는 8만~12만원. 고급호텔·리조트급 시설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지만 방 크기나 시설 등은 호텔이란 이름에 맞게 쾌적하다. 소박하고 조용한 숙소와 여행을 원한다면 만족할 만하다. 숙박객에겐 바로 옆 카페수작에서 조식을 제공한다. 식당과 카페 등 부대시설 할인 쿠폰도 준다.
마을호텔이 생기면서 골목에 활기가 살아났다. 골목도 더 깨끗해지고 화사해졌다. 마을호텔이 신기해서, 아기자기한 골목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늘었다. 앞으로 고한 18번가엔 마을호텔 2호점, 3호점도 문을 열 예정이다. 폐광촌의 변신은 현재진행형이다. 마을호텔18번가 예약과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에서. 3월 한달 간 숙박비 20% 혜택을 준다.
◇마을 호텔에서 먹고 즐긴다
마을호텔18번가 입구에 자리잡은 '국일반점'의 '짜장면'(6000원). 고한 토박이 셰프가 만드는 다양한 요리를 맛볼 수 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마을호텔18번가는 식당과 카페, 이발관, 사진관, 세탁소 등 부대시설을 따져봐도 여느 호텔에 뒤지지 않는다. 취향 따라 먹고 즐기다보면 마을 주민과는 친구가 되고 여행의 추억은 늘어난다. 식당 선택 폭이 넓다. 중식이 당길 땐 마을 입구에 있는 국일반점이 답. 고한 토박이인 김명환(53) 사장이 17년간 운영해온 동네 맛집이다. 신선한 재료로 만드는 푸짐한 요리가 자랑이다. 마을호텔이 생기면서 동네가 깨끗해지고 찾는 사람이 많아진 만큼, 입구를 지키는 가게답게 매장을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한단다. 마을 주민들도 자연스레 호텔리어가 되는 모양이다. 짜장면(6000원), 짬뽕(7000원), 탕수육(2만~2만8000원), 깐쇼새우(3만8000원) 등이 대표 메뉴다. 매주 마지막 화요일에는 짜장면을 반값에 제공하는 ‘짜장면 데이’ 행사를 열었지만 현재는 코로나로 중단한 상태다. 화요일 휴무, 오전 11시30분에서 오후 8시까지.
'예촌돌솥밥'의 '돌솥곤드레정식'(1만4000원). 20여 가지의 푸짐한 반찬이 나온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든든한 한식이 당길 땐 구공탄 시장에 있는 예촌돌솥밥을 추천한다. 정선 곤드레로 만든 돌솥곤드레정식(1만4000원)과 돌솥영양정식(1만4000원)이 대표 메뉴. 솥밥과 함께 나오는 밑반찬이 푸짐하다. 고등어 구이와 된장찌개까지 20여 가지 밑반찬을 든든하게 맛볼 수 있다. 매일 오전 10시에서 오후 9시까지. 구공탄구이는 광부도 즐겨먹던 연탄구이를 전문으로 하는 고깃집이다. 구공탄구이 입구와 식당 내부에 탄광 관련 소품과 사진이 있다. 삼겹살(1만4000원), 항정살(1만5000원), 한우갈빗살(3만원), 한우꽃등심(3만원) 등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정오에서 오전3시까지.
탄광의 갱도처럼 만들어놓은 정선 구공탄시장.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구공탄시장에도 먹거리가 많다. 1, 6일 5일장이 서는 날은 볼거리가 많아진다. 갱도처럼 만들어놓은 시장에는 연탄이나 광부를 테마로 만든 조형물도 많다. 지나가는 개도 1만원 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탄광의 역사와 애환을 그려놓은 벽화도 구공탄시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이다.
40년째 골목을 지키고 있는 영주이발관의 박대우 사장.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이발소 영주이발관은 40년째 같은 자리에서 영업 중이다. 한자리에서 골목의 변화를 지켜본 박대우(74) 사장은 행인 하나 없던 골목에 호텔이 생기면서 사람이 늘어나고 이발관 앞에 사진을 찍으러 오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얼마 전엔 가수 폴킴이 뮤직비디오를 찍기도 했다. 박 사장이 고한에서 이발관을 시작한 건 1973년이다. 그는 고한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 “광산 붐 있을 땐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이발관이 아니라 이발공장이라고 할 정도였어요.” 베테랑 이발사가 들려주는 옛 이야기가 재미있다. 이제는 단골만 찾는 오래된 이발관이 됐지만 매일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 부지런히 이발관 문을 연다. 이발이나 면도는 안 해도 이발관 앞에서 기념 사진은 남겨보길 권한다. 기념 사진을 제대로 찍고 싶을 땐 들꽃사진관을 찾으면 된다. 마을의 오래된 슈퍼마켓을 리모델링한 동네 사진관에서 이미지, 프로필, 가족 사진 등을 찍을 수 있다. 일·월 휴무.
◇문화예술공간으로 변신한 폐광
정선 고한읍 옛 삼탄광업소를 문화예술공간으로 바꾼 삼탄아트마인.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고한에는 정선에서도 손꼽히는 여행 코스가 많다. 그중에서도 마을호텔18번가를 찾는다면 삼탄아트마인은 꼭 가보길 권한다. 동원탄좌 사북 광업소와 삼척탄좌 정암 광업소는 한때 국내 최대 민영 탄광으로 석탄 산업을 이끌었다. 그중 1964년 운영을 시작해 2001년 10월 문 닫은 삼척탄좌 정암 광업소는 고한의 흥망성쇠를 함께했다. 폐광 이후 버려진 시설은 삼탄아트마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폐광과 어우러진 작품들은 예술을 어렵지 않게 접하게 해준다.
삼탄아트마인 레일바이뮤지엄에는 옛 탄광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예술 작품이 어우러져 색다른 느낌이 든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4층 규모의 삼탄아트센터는 삼척탄좌의 종합사무동 건물이다. 3층 삼탄자료실과 박물관에는 광부들의 급여 명세서와 작업 일지 등의 기록도 볼 수 있다. 장화를 세척하는 세화장과 샤워실은 예술 작품과 어우러져 색다른 느낌을 준다. 레일바이뮤지엄으로 변신한 조차장에선 수직갱과 탄차, 컨베이어, 레일, 광차 등 탄광 시설도 볼 수 있다. 중앙 압축기실을 리모델링한 원시미술관에서 만나는 작품도 색다르다. 월요일 휴관, 오전 9시30분에서 오후 5시30분까지. 입장료 성인 1만3000원, 청소년 1만2000원, 소인 1만1000원. 마을호텔18번가 숙박객은 제공받은 쿠폰으로 50% 할인받을 있다 .
해발 1330m 만항재는 드라이브 하기에도 산책을 즐기기에도 좋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만항재는 국내에서 차를 타고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다. 고한읍에서 차로 10㎞ 거리다. 해발 1330m 만항재로 오르는 길은 ‘S자’ 커브가 많지만 드라이브 코스로 손꼽힌다. 고개를 오르는 길에는 낙엽송 군락이, 내려갈 때는 태백산 봉우리가 눈을 즐겁게 한다. 고갯길 꼭대기에 야생화 산책로, 하늘숲공원 등이 있다. 눈 덮인 낙엽송 사이를 걸으며 사색에 잠기기 좋다. 만항재에서 함백산 정상까지 트레킹도 도전할 만하다. 해발 1573m 함백산은 국내 여섯 번째로 높은 산이다. 만항재에서 1시간 남짓이면 정상에 닿는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정암사의 수마노탑(국보 제332호). /문화재청
만항재로 향하는 길에 정암사가 있다. 정암사는 평창 상원사와 양산 통도사, 영월 법흥사, 인제 봉정암과 함께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 중 하나다. 적멸보궁 앞 산비탈에는 지난해 국보(제332호)로 승격된 수마노탑이 있다. 정암사는 신라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진신사리를 들고 돌아와 643년 창건한 사찰이며, 수마노탑은 진신사리와 함께 가져온 마노석을 쌓아 만든 높이 9m 7층 모전석탑이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 볼 수 있지만 햇빛에 반짝이는 수마노탑의 신비한 자태는 눈에 담아볼 만하다.
강정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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