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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2] 혈액형 성격설

by 맥가이버 Macgyver 2022. 4. 22.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2] 혈액형 성격설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A형은 온화하고 반성적이며 진중하고, B형은 조잘거리고 의지가 약하다.
독일에는 A형이 흔하고 식민지인과 집시에게는 B형이 많다.’
‘공장 노동자 중에 O형과 AB형이 주로 사고를 낸다.
A형과 B형은 사고를 치는 경우가 적다.’
1932년,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에 소개된 혈액형과 성격에 관한 기사 내용이다.
 

20세기 초에 ABO 혈액형이 알려지면서 우생학자들은 민족 전체의 혈액형을 검사해 통계를 내기 시작했다.

폴란드 생물학자 히르슈펠트는 병사들의 혈액형 중 유럽인에게는 A형이, 비유럽인에게는 B형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이 비율이 유럽인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지표라고 주장했다.

 

일본 심리학자 후루카와 다케지는 이 연구를 접하고 혈액형을 성격과 연관해 A형은 진중하고, B형은 활동적이고, AB형은 모순적이며, O형은 호기심이 많다고 보았다.

 

그래서 O형과 B형이 많은 도쿄는 활동적 도시였고, A형과 AB형이 많은 교토는 활기가 없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네 가지 혈액형에 맞는 직장 목록이 만들어졌고, 구직자는 이력서에 혈액형을 적어야 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혈액형에 근거한 우생학과 혈액형 성격론이 모두 유행했다.

경성제대 교수인 기라하라는 마치 유럽인처럼 일본인에게는 A형이 많지만,

조선인은 A형이 적다는 통계를 들먹이면서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열등하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혈액형을 인종적 우월성과 연결하는 우생학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지만 역시 사이비 과학인 혈액형 성격설은 일본과 한국에서 살아남았다.

혈액형 성격설을 믿지 않는 호주나 대만 젊은이에게 테스트해 보면, 혈액형 성격이 근거가 없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런데 일본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테스트는 이 둘의 상당한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혈액형 성격설을 받아들이면 이에 맞추어 자기 성격을 정의하고 조금씩 바꿔나가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이 ‘자기 충족적 예언’이라고 불렀고,

과학철학자 이언 해킹이 정신 과학의 ‘루핑(looping) 효과’라고 명명한 현상이다.

 

혈액형만 그럴까?

과학계가 사이비 과학이라고 비판하지만 MBTI, 별자리 사주, 관상, 풍수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도 비슷하다.

 

출처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