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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 백제 첫 도읍인 위례성… 2개의 王城 만들어 썼죠

by 맥가이버 Macgyver 2023. 1. 19.

[뉴스 속의 한국사] 백제 첫 도읍인 위례성… 2개의 王城 만들어 썼죠

 

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

 ①풍납동토성 전경. ②몽촌토성 전경. 노란 점선 안쪽이 토성 내부를 가리켜요. ③풍납동토성 성곽 바깥쪽에서 발견된 육각형 주거지. ④풍납동토성에서 출토된 중국산(産) 청자. ⑤한성시기에 유행한 수막새(목조 건축 지붕의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기와)로, 기하학적 무늬가 돋보입니다. ⑥풍납동토성에서 출토된 시유도기(施釉陶器·유약을 표면에 인공으로 입힌 도기).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보여요. /한성백제박물관·도원문화재연구원
 
 
서울시 송파구에 자리한 한성백제박물관에서는 개관 1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으로 '왕도 한성, 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 전시회를 오는 29일까지 열고 있어요.
백제의 한성 시기는 온조가 도읍을 정한 다음 475년 공주로 천도하기 전까지를 말하죠.
백제사 전체의 3분의 2 이상의 시간을 차지하지만 문헌 자료가 부족해 그동안 왕성의 위치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어요.
다행히 1983년 몽촌토성이 발굴되고 1990년대 후반부터 풍납동토성에 대한 발굴이 진행되면서 한성 시기 왕성의 위치와 도성 사람들의 흔적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어요.
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에서 어떤 중요한 발견이 있었는지 좀 더 알아볼까요.

500년 백제 왕도 위례성의 발견

삼국사기에 따르면 기원전 18년 백제의 시조(始祖) 온조(재위 기원전 18년~기원후 28년)는 한강 남쪽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주변 세력을 통합해 백제라는 나라를 건국했어요.
'위례성(慰禮城)'의 '위례'는 울타리나 우리를 뜻하는 말로 '울타리로 둘러싸인 큰 성'이란 뜻이죠.
위례성은 '한성(漢城)'으로도 불렸는데 '한'은 '크다'는 뜻이 있어요.
백제의 왕권이 강화되고 그에 따라 도성의 규모가 커지자 새롭게 붙여진 명칭으로, 5세기 때에는 '왕도 한성'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했어요.

과거에는 위례성의 위치를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이나 충남 천안시 직산읍 일대로 추정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서울 송파구 일대에서 발굴이 진행되면서 한성 시기 백제왕과 귀족들이 거주한 왕성이 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 일대라는 것이 거의 확실해졌지요.

풍납동토성은 1925년 대홍수 때 서쪽 성벽 일부가 유실됐지만 북벽과 동벽·남벽 등 2.1㎞ 정도가 지금까지 남아 있어요.
유실된 서쪽 성벽을 포함하면 원래 둘레 약 3.5㎞ 규모의 거대한 성곽이에요.
몽촌토성은 남한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나지막한 구릉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체 길이 2285m로 풍납동토성보다 작죠.

3세기 후반 풍납동토성부터 축조

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 중 어느 것이 더 먼저 축조됐을까요? 연구자들은 풍납동토성이 먼저 축조됐고 몽촌토성이 나중에 만들어졌다고 추정해요.
그럼 풍납동토성은 언제 만들어졌을까요? 풍납동 일대에는 토성이 만들어지기 전에 3중 환호(環濠)가 있었어요.
방어용 큰 도랑인 환호는 토성을 쌓기 전 사용한 간단한 시설로, 내부에서 발견된 토기들은 기원 전후부터 3세기 이전에 속하는 것들이 많아요.
3세기 이전 풍납동 일대에 3중 환호로 둘러싸인 대규모 마을이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죠.
풍납동토성은 이런 백제 초기의 환호, 주거지를 파괴하고 그 위에 새로 축조한 것입니다.

둘레 약 3.5㎞에 달하는 풍납동토성은 성벽 너비 43m, 높이 11m 이상의 대규모 방어시설로 판축(板築) 공법을 이용해 축조됐어요.
판축법은 나무판 안에 흙이나 모래 등을 층층이 부은 다음 공이로 찧어가며 단단하게 쌓아 올리는 토목 기술을 말해요.
구조물을 견고하게 만들 수 있고 수직에 가까운 성벽을 높게 축조하는 데 유리한 기술이지요.
풍납동토성은 우리나라에서 판축법이 적용된 가장 오래된 사례에 속해요.
토성의 성벽 안에서 발견된 토기 파편을 분석해 보니 이 시설은 3세기 후반이나 4세기 전반 처음 축조됐다가 몇 차례 증축 과정을 거쳐 5세기에 최종 완성된 것으로 드러났어요.
이러한 조사 결과는 백제가 고이왕(재위 234~286) 시기를 전후해 고대국가로 성장했다는 역사적인 사실과 잘 들어맞아요.

몽촌토성 완공으로 2개 왕성 공존

몽촌토성은 풍납동토성보다 조금 늦게 지어졌어요.
아마도 4세기 전반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풍납동토성 내부에서는 초기에 속하는 백제 토기가 다수 발견됐지만, 몽촌토성에서는 그런 토기가 발견되지 않고 그보다 더 늦게 정형화된 굽다리접시와 세발토기가 주로 출토됐거든요.

4세기 중엽을 전후해 몽촌토성이 만들어지면서 한성에는 2개의 왕성이 공존하게 돼요.
평지에 위치하며 규모가 큰 풍납동토성은 평상시 왕이 머무는 정궁(正宮), 구릉지에 자리하며 규모가 작은 몽촌토성은 비상시에 사용하기 위한 별궁(別宮)의 역할을 했지요.
475년 한성이 함락될 때 고구려가 먼저 북성(北城)을 공격해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다시 남성(南城)으로 옮겨 공격했다는 기록을 보면 백제는 풍납동토성을 '북성', 몽촌토성을 '남성'으로 부르며 상호 보완적으로 운영했음을 짐작할 수 있어요.

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은 직선거리로 7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요.
두 왕성 사이에는 많은 민가와 경작지, 도로가 있었겠지만 구체적인 모습은 최근에야 조금씩 드러나고 있어요.
풍납동토성에서 남동쪽으로 110m 떨어진 한 유적에서는 한성 시기의 전형적인 육각형 주거지를 비롯해 구덩이, 기둥 구멍, 도로 등 93기의 다양한 생활 흔적이 발견됐어요.
내부에서는 그릇받침과 세발토기, 굽다리접시, 유리구슬을 비롯해 가야토기, 중국제 도자기처럼 다른 나라에서 들여온 유물도 함께 출토됐고요.
향후 토성 바깥쪽을 발굴하다 보면 왕성 외곽에 만들어진 주거지와 시설, 도로망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기획·구성=안영 기자
 
 
출처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