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4일(토)
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 답사 순례(역사문화관ㆍ재실ㆍ수릉ㆍ현릉ㆍ건원릉ㆍ목릉ㆍ휘릉ㆍ원릉ㆍ경릉ㆍ혜릉ㆍ숭릉ㆍ숭릉연지)를 다녀와서...
'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 답사 순례(역사문화관ㆍ재실ㆍ수릉ㆍ현릉ㆍ건원릉ㆍ목릉ㆍ휘릉ㆍ원릉ㆍ경릉ㆍ혜릉ㆍ숭릉ㆍ숭릉연지)'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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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 답사 순례(역사문화관ㆍ재실ㆍ수릉ㆍ현릉ㆍ건원릉ㆍ목릉ㆍ휘릉ㆍ원릉ㆍ경릉ㆍ혜릉ㆍ숭릉ㆍ숭릉연지)'를 위해 길을 나선다.
▼ [8호선] 동구릉역 3번 출구에서...
구리 동구릉(東九陵)
동구릉(東九陵)은 ‘동쪽에 있는 9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약 450여 년간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잠들어 있는 조선 최대의 왕릉군이다. 1408년(태종 8)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이 처음으로 조성되고 이후 문종의 현릉(顯陵), 선조의 목릉(穆陵), 현종의 숭릉(崇陵), 장렬왕후의 휘릉(徽陵), 단의왕후의 혜릉(惠陵), 영조의 원릉(元陵), 헌종의 경릉(景陵)이 차례로 조성되었다. 능이 조성될 때마다 동오릉(東五陵), 동칠릉(東七陵) 등으로 불리다가 문조의 수릉(綏陵)의 옮겨지면서 지금의 동구릉이 되었다.
동구릉은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의 왕릉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으로, 왕이나 왕후의 능을 단독으로 조성한 단릉, 나란히 조성한 쌍릉,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 한 능에 왕과 왕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 왕과 두 왕후의 능을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 등 다양한 형태로 조성된 능이 모여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조선왕릉 궁능유적본부
구리 동구릉 - 수릉(綏陵, 추존 문조와 신정황후)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조성 연도 : 1830년(순조 30), 1834년(헌종 즉위), 1846년(헌종 12), 1855년(철종 6), 1890년(고종 27)
왕릉 형식 : 합장릉
▷ 수릉(綏陵) 이야기
수릉은 황제로 추존된 문조와 신정황후 조씨의 능이다. 수릉은 한 봉분 안에 황제와 황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이다. 일반적인 왕릉은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에 따라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왕(황제)이 왼쪽, 왕비(황후)가 오른쪽에 모셔지지만, 수릉은 반대로 모셔져 있다.
문조는 처음 효명세자의 신분으로 1830년(순조 30)에 세상을 떠나, 묘를 경종의 의릉(懿陵) 왼편에 연경묘(延慶墓)라는 이름으로 조성되었다. 1834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익종(翼宗)으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수릉(綏陵)이라 하였으며, 1846년(헌종 12) 풍수상 불길하다 하여 양주 용마봉(현 광진구 용마산)으로 옮겼다. 그러나 1855년(철종 6) 다시 풍수상 불길하다 하여 현재의 동구릉에 마지막으로 조성되었다. 이후 1890년(고종 27)에 신정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수릉에 합장되었다.
수릉의 문석인은 기존의 복두관복 대신 금관조복의 형태인데 이는 연경묘 시절에 만들어진 문석인으로, 동구릉 중 유일한 형태이다. 능침 아래에 있는 비각에는 총 2개의 표석이 있는데, 1비는 익종대왕과 신정왕후의 표석이고 2비는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의 표석이다.
▷ 문조(文祖) 이야기
문조(재세 : 1809년 음력 8월 9일 ~ 1830년 음력 5월 6일)는 순조와 순원황후 김씨의 아들로 1809년(순조 9)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났다. 1812년(순조 12)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827년(순조 27)에 아버지 순조를 대신하여 정사(대리청정)를 돌보았다.
왕세자는 외척 세도정치가 극에 달한 시기였으나 대리청정을 통해 강인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그동안 소외되어 있던 인재들을 고루 등용하였으며, 백성을 위하는 선정을 펼쳤다. 또한 실학파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와 교류하며 견문을 넓히고, 타문화 수용에 긍정적인 자세를 보였다. 예악진흥을 위해 궁중연회에 쓰이던 춤과 노래인 정재(呈才)를 발전시켜 악장, 치사, 전문 등을 직접 지었고, 춘앵전을 편곡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30년(순조 30) 창덕궁 희정당에서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시호를 효명세자(孝明世子)라 하였다. 이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익종으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존되었다.
▷ 신정황후(神貞皇后) 이야기
신정황후 조씨(재세 : 1808년 음력 12월 6일 ~ 1890년 음력 4월 17일)는 본관이 풍양인 풍은부원군 조만영과 덕안부부인 송씨의 딸로 1808년(순조 8)에 두포 쌍호정 사저에서 태어났다. 1819년(순조 19)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827년(순조 27)에 헌종을 낳았다. 효부라는 칭찬을 듣던 왕세자빈은 불행히도 헌종을 낳은지 3년 만에 남편 효명세자를 잃었다. 1834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고, 1857년(철종 8) 순조의 왕비 순원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종친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고종)을 양자로 입양시켜 왕위에 올렸으며, 고종 즉위 후 수렴청정을 하여 흥선대원군과 함께 정국을 주도하였다. 수렴청정 기간에 남편 문조가 이루지 못한 뜻을 이어 받아, 흥선대원군과 함께 경복궁 중건과 서원 철폐 등의 개혁을 실시하였다. 1866년(고종 3) 수렴청정을 거두고 왕실 최고의 어른으로 살다가 1890년(고종 27) 경복궁 흥복전에서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로 추존되었다.
출처 : 국가유산청 조선왕릉 궁능유적본부
구리 동구릉 - 현릉(顯陵, 문종과 현덕왕후)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조성 연도 : 1452년(단종 즉위), 1513년(중종 8)
왕릉 형식 : 동원이강릉
▷ 현릉(顯陵) 이야기
현릉은 조선 5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현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문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문종이 1452년(문종 2)에 세상을 떠나자 수양대군(세조), 황보인, 김종서, 정인지 등의 대신들이 여러 왕릉 자리를 답사하여 지금의 자리에 현릉을 조성하였다. 앞서 1441년(세종 23) 현덕왕후가 왕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경기 안산에 묘(소릉昭陵)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세조 즉위 후 단종 복위 사건에 친정어머니와 남동생이 연루되는 바람에 폐위되었다. 그러다가 1512년(중종 7) 다시 왕비로 복위되어 다음 해에 문종의 현릉 동쪽 언덕으로 사후 72년만에 왕의 곁으로 능을 옮기게 되었다. 이때 두 능 사이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이유 없이 저절로 말라 죽어 죽은 나무를 베어보니 두 능 사이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는 일화가 『중종실록』에 전해진다.
현릉은 조선시대 기본 예전인 『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랐다. 문종의 능침 봉분 병풍석의 문양은 이전(태조 건원릉, 태종 헌릉)의 영저(금강저)와 영탁(금강령) 대신 구름무늬로 바뀌었고, 석상(혼유석) 받침대인 고석의 수도 4개로 줄었다. 현덕왕후의 능침은 문종의 능침과 같은 모습이나 봉분의 병풍석을 생략하였다.
▷ 문종(文宗) 이야기
문종(재세 : 1414년 음력 10월 3일 ~ 1452년 음력 5월 14일, 재위 : 1450년 음력 2월 23일 ~ 1452년 음력 5월 14일)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첫째 아들로 1414년(태종 14)에 사저에서 태어났다. 1418년 아버지 세종이 즉위하자 1421년(세종 3)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세종 재위 말년에 아버지를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기 시작하였다. 이 기간에 문무 관리를 고르게 등용하고 민생파악에 힘쓰는 등 나라의 안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문종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말이 적고, 학문을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문종은 천문에 능통하였으며, 측우기도 발명하였다. 1450년 아버지 세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이어 동별궁 빈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 동안 『동국병감(東國兵鑑)』과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 역사서가 편찬되었고, 군사제도를 정비하여 병력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1452년(문종 2) 재위 2년만에 경복궁 천추전에서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 현덕왕후(顯德王后) 이야기
현덕왕후 권씨(제세 : 1418년 음력 3월 12일 ~ 1441년 음력 7월 24일)는 본관이 안동인 화산부원군 권전과 해령부부인 최씨의 딸로 1418년(태종 18)에 홍주(충남 홍성) 합덕현 사저에서 태어났다. 1431년(세종 13) 세자 후궁으로 승휘(承徽, 종4품)가 되었고, 양원(良媛, 종3품)을 거쳐 1437년(세종 19) 왕세자빈이 되었다.
문종은 왕세자 시절 김오문의 딸을 왕세자빈(휘빈)으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휘빈 김씨는 문종의 사랑을 얻기 위해 술법을 쓰다가 발각되어 폐위되었다. 이후 1429년(세종 11)에 봉여의 딸을 두 번째 왕세자빈(순빈)으로 맞이하였다. 하지만 순빈 봉씨도 문종과의 갈등과 왕세자빈으로서 품위를 잃어 폐위되었다. 세종은 이미 자식이 있고 후궁의 서열 중에 가장 높은 양원 권씨를 왕세자빈으로 올려야 한다는 뜻을 밝혀 권씨를 왕세자빈으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1441년(세종 23) 원손(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경복궁 자선당에서 24세로 세상을 떠났고, 1450년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후로 추존되었다.
출처 : 국가유산청 조선왕릉 궁능유적본부
구리 동구릉 - 건원릉(健元陵, 태조)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조성 연도 : 1408년(태종 8)
왕릉 형식 : 단릉
▷ 건원릉(健元陵) 이야기
건원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건원릉은 1408년(태종 8)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지금의 구리시인 양주 검암산에 왕릉 자리를 정하였다. 왕릉공사를 위하여 충청도에서 3,500명, 황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 등 총 6,000여명의 군정(軍丁)이 참여하였다. 원래 태조는 생전에 두 번째 왕비 신덕황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하여 신덕황후의 능인 정릉(貞陵)에 본인의 능자리를 미리 마련해 두었으나, 태종은 태조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건원릉은 기본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현릉(玄陵)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왕릉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능침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는데,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과 영저(금강저) 및 영탁(금강령) 등을 새겼다.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 무석인,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각 2쌍씩 배치하였다. 석상(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5개가 놓여 있고, 양 무석인 가운데에는 정중석이 있다. 특히 봉분에는 다른 왕릉과 달리 잔디가 아닌 억새가 덮여있는데, 『인조실록』과 『건원릉지』에 태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함흥의 청완(靑薍, 억새)을 덮었다는 기록이 있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수복방, 수라간, 홍살문, 판위 등이 배치되어 있고, 비각 안에는 태조가 세상을 떠나고 다음해에 세운 신도비와 대한제국 선포 후 태조고황제로 추존된 표석이 세워져 있다.
▷ 태조(太祖) 이야기
태조(재세 : 1335년 음력 10월 11일 ~ 1408년 음력 5월 24일, 재위 : 1392년 음력 7월 16일 ~ 1398년 음력 9월 5일)는 추존 환조와 의혜왕후 최씨의 아들로 1335년(고려 충숙왕 복위 4)에 화령부 사저에서 태어났다. 태조는 고려 공민왕대에 쌍성총관부를 함락시켜 벼슬길에 올랐고,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의 난을 진압하여 공민왕의 총애를 받았다. 고려 우왕 즉위 후 명나라에서 철령 이북의 땅을 지배하겠다는 통보를 보내오자, 고려 조정은 요동을 정벌하여 이를 견제하고자 했고, 최영 중심의 찬성파와 이성계 중심의 반대파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최영의 주장에 따라 1388년(고려 우왕 14) 요동정벌이 결정되었고, 태조는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를 제거하고 우왕을 왕위에서 폐위한 뒤 창왕을 옹립하였다. 이후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였으나, 신진사대부의 추대로 1392년 음력 7월 16일에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태조는 다음 해에 국호를 조선이라 정하고, 1394년(태조 3) 수도를 한양으로 옮겨 새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다졌다. 그러나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으로 아들들의 권력 다툼을 보게 되자 둘째 아들 정종(定宗)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1400년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엔 태상왕이 되었으며,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하였다. 1408년(태종 8)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태조고황제로 추존되었다.
*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九里 東九陵 健元陵 丁字閣)
정자각은 제향을 지내는 건물로 지붕 위에서 봤을 때 ‘丁(고무래 정)’자 모양으로 보여 정자각이라 한다. 건원릉 정자각은 1408년(태종 8)에 처음 지어졌고,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치다가 1764년(영조 40) 중수청(重修廳)을 설치하여 크게 보수하였다. 전체적으로 조선왕릉 정자각의 전형적인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어 201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九里 太祖 健元陵 神道碑)
신도비는 왕과 왕비 등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비신(碑身, 몸통)과 귀부(龜趺, 거북이 받침), 이수(螭首, 용을 새긴 머릿돌)를 갖추고 있다. 건원릉 신도비는 1408년(태종 8) 태조가 세상을 떠나고 건원릉을 조성한 이듬해(1409년)에 세운 것으로 앞면의 비문은 권근이 짓고, 전액(篆額, 전서체로 쓴 머리글)은 정구의 글씨이며 뒷면의 비문은 변계량이 지었다. 앞뒷면은 성석린의 글씨이다. 조선 초기 신도비 연구 자료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출처 : 국가유산청 조선왕릉 궁능유적본부
구리 동구릉 - 목릉(穆陵, 선조와 의인왕후·인목왕후)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조성 연도 : 1600년(선조 33), 1630년(인조 8), 1632년(인조 10)
왕릉 형식 : 동원이강릉
▷ 목릉(穆陵) 이야기
목릉은 조선 14대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목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선조, 가운데 언덕이 의인왕후, 오른쪽 언덕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처음 목릉 자리에는 의인왕후의 능(유릉裕陵)이 조성되었다. 8년 뒤 1608년 선조의 능(목릉)을 건원릉 서쪽 언덕(현 헌종 경릉)에 조성하였다가 1630년(인조 8)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로 의인왕후의 능 서쪽 언덕으로 옮기고 능의 이름을 목릉으로 고쳤다. 이후 1632년(인조 10) 인목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목릉 동쪽 언덕으로 능자리가 결정되었고 능의 이름을 혜릉(惠陵)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목릉과 능역이 가까워 따로 능의 이름을 정하지 말고, 목릉 능역으로 합치자는 논의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선조의 능은 『국조오례의』의 예에 맞게 조성되어 병풍석과 난간석, 석상(혼유석), 망주석 등을 배치하였다. 의인왕후의 능과 인목왕후의 능은 선조의 능과 비슷하지만 병풍석이 생략되었다. 특히 의인왕후 능의 망주석과 장명등에 새겨진 꽃무늬는 임진왜란 이후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이후에 조성된 조선왕릉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 선조(宣祖) 이야기
선조(재세 : 1552년 음력 11월 11일 ~ 1608년 음력 2월 1일, 재위 : 1567년 음력 7월 3일 ~ 1608년 음력 2월 1일)는 중종의 아들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 정씨의 셋째 아들로 1552년(명종 7)에 인달방(현 서울 사직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바르고 용모가 빼어나 순회세자(명종의 아들)를 잃고 자식이 없었던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 처음에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가, 1567년(명종 22) 명종이 세상을 떠나자 인순왕후의 명으로 명종의 양자로 입양되어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명종은 아들 순회세자를 잃고 자식 잃은 슬픔을 달래려고 여러 왕손들을 궁궐에 자주 불러,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곤 했다. 하루는 명종이 여러 왕손들을 궁중에서 가르칠 때 익선관을 벗어 왕손들에게 주며 써보라고 하였다. 다른 왕손들은 돌아가면서 익선관을 써보았지만, 제일 나이가 어린 선조는 머리를 숙여 사양하였다 “이것을 어찌 보통 사람이 쓸 수 있겠습니까?” 선조는 이렇게 아뢴 뒤 두 손으로 관을 받들어 어전에 도로 가져다 놓았다. 이를 본 명종은 매우 기특하게 여기며, 그에게 왕위를 전해줄 뜻을 정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선조는 재위 초반에는 양어머니인 인순왕후의 수렴청정을 8개월 동안 받았으며, 매일 경연에 나가 토론하고 밤늦도록 독서에 열중하였다. 훈구세력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 이황, 이이 등의 유학자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다. 『유선록』, 『근사록』, 『심경』, 『소학』, 『삼강행실』 등을 편찬케 하여 유학을 장려하는 한편,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 등의 신분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명종 말년부터 일어난 붕당정치의 시작으로 정여립의 모반사건과 세자책봉 문제로 옥사가 일어났으며, 국력이 쇠약해져 국방대책을 세우지 못하던 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에 이어서 정유재란까지 두 차례에 걸친 7년 동안 전쟁을 치르며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선조는 전쟁 전후 복구작업을 하였으나 거듭된 흉년과 정치의 불안정으로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1608년(선조 41)에 경운궁(현 덕수궁) 석어당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 의인왕후(懿仁王后) 이야기
의인왕후 박씨(재세 : 1555년 음력 4월 15일 ~ 1600년 음력 6월 27일)는 본관이 반남인 반성부원군 박응순과 완산부부인 이씨의 딸로 1555년(명종 10)에 태어나, 1569년(선조 2)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성품이 온화하여 자애로운 면모를 지녔으나, 선조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못하여 후궁의 자식들을 친자식처럼 보살폈다. 특히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을 친아들처럼 대해주었고, 훗날 왕세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해군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종결된 후 1600년(선조 33) 황화방 별궁(경운궁, 현 덕수궁)에서 46세로 세상을 떠났다.
의인왕후의 장례는 임진왜란 이후에 치른 첫 번째 장례였다. 원래 왕과 왕비의 능자리로 결정된 곳은 일반묘지나 민가가 있으면 옮겨야 했다. 하지만 이때는 전쟁 이후의 수습 상황 단계였기 때문에 묘를 옮기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의 이유로 의인왕후의 능 자리는 5개월 동안 정하지 못하였다가 겨우 포천 신평에 장지를 정하고 공사를 하였다. 하지만 불길론이 일어나면서 공사를 중단하고, 건원릉 동쪽으로 장지를 다시 정하였다. 세상을 떠난 지 7개월이 지난 1600년(선조 33) 음력 12월에 겨우 장례를 마쳤다.
▷ 인목왕후(仁穆王后) 이야기
인목왕후 김씨(재세 : 1584년 음력 11월 14일 ~ 1632년 음력 6월 28일)는 본관이 연안인 연흥부원군 김제남과 광산부부인 노씨의 딸로 1584년(선조 17)에 반송방(서울 아현동 일대) 사저에서 태어났다. 1600년에 선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인 1602년(선조 35)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606년(선조 39)에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낳았다. 당시 소북정권의 유영경(柳永慶)은 적자인 영창대군을 왕위에 추대하려 하였으나,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소북정권이 물러나고 대북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왕대비가 되었으나, 1613년(광해군 5)에 계축옥사로 친정아버지와 영창대군이 연루되어 처형당하는 일을 겪었다. 결국 1618년(광해군 10)에는 왕대비의 자리에 폐위되어 경운궁에 유폐되고 그 호칭을 서궁이라 하였다. 1623년 서인세력이 광해군을 폐위하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인조)을 옹립한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다시 대왕대비의 지위에 올랐다. 인목왕후는 그 후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의 장(長)의 위치에서 국정에 관심을 표하여 한글로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1632년(인조 10)에 인경궁 흠명전에서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九里 東九陵 穆陵 丁字閣)
정자각은 제향을 지내는 건물로 지붕 위에서 봤을 때 ‘丁(고무래 정)’자 모양으로 보여 정자각이라 한다. 목릉 정자각은 원래 건원릉 서쪽에 있던(현 헌종 경릉) 선조의 목릉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함께 옮겨진 것이다. 이때 새로 옮겨온 정자각에서 의인왕후 능침까지 신로(神路)를 연결하였다. 이후 인목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에도 능침에서 정자각까지 신로만 연결하여 3기의 능이 하나의 정자각을 사용하였다. 목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다포식 공포로 지어져 있고, 17세기의 건축 연구 자료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출처 : 국가유산청 조선왕릉 궁능유적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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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 답사 순례(역사문화관ㆍ재실ㆍ수릉ㆍ현릉ㆍ건원릉ㆍ목릉ㆍ휘릉ㆍ원릉ㆍ경릉ㆍ혜릉ㆍ숭릉ㆍ숭릉연지)를 다녀오다.
▣ 1부[동구릉역→동구릉 매표소→역사문화관→홍살문→재실→수릉→현릉→건원릉→목릉 정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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