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4일(토)
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 답사 순례(역사문화관ㆍ재실ㆍ수릉ㆍ현릉ㆍ건원릉ㆍ목릉ㆍ휘릉ㆍ원릉ㆍ경릉ㆍ혜릉ㆍ숭릉ㆍ숭릉연지)를 다녀와서...
'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 답사 순례(역사문화관ㆍ재실ㆍ수릉ㆍ현릉ㆍ건원릉ㆍ목릉ㆍ휘릉ㆍ원릉ㆍ경릉ㆍ혜릉ㆍ숭릉ㆍ숭릉연지)' 코스
동구릉역 3번 출구→동창교→동구릉 주차장→조선왕릉 구리 동구릉 매표소→동구릉 역사문화관→동구릉 석물부재/동구릉 외금천교→홍살문→재실→수릉(추존 문조와 신정왕후)→현릉(문종과 현덕왕후)→건원릉(태조)→목릉(선조와 이인왕후ㆍ인목왕후)→건원릉 초소→휘릉(인조비 장렬왕후)→원릉(영조와 정순왕후)→경릉(헌종과 효현왕후ㆍ효정왕후)→혜릉(경종비 단의왕후)→숭릉초소→숭릉(현종과 명성왕후)→숭릉연지→왕의숲→홍살문→구리 동구릉 출입구→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 굴다리→해모로아파트→왕숙길벗교
오늘은
'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 답사 순례(역사문화관ㆍ재실ㆍ수릉ㆍ현릉ㆍ건원릉ㆍ목릉ㆍ휘릉ㆍ원릉ㆍ경릉ㆍ혜릉ㆍ숭릉ㆍ숭릉연지)'를 위해 길을 나선다.
▼ 구리 동구릉의 목릉(선조와 이인왕후ㆍ인목왕후) 정자각에서...
구리 동구릉 - 휘릉(徽陵, 인조비 장렬왕후)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조성 연도 : 1688년(숙종 14)
왕릉 형식 : 단릉
▷ 휘릉(徽陵) 이야기
휘릉은 조선 16대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능침 봉분에는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에는 십이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다. 석상(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은 5개로 배치하였다. 조선 전기 왕릉(건원릉~헌릉)의 고석은 모두 5개였다가 세종의 영릉 이후에는 4개로 줄었는데, 휘릉에 와서 다시 초기의 형식을 따르게 되었다. 이는 태조 건원릉의 예를 잠깐 따른 것으로, 휘릉 이후의 왕릉에는 다시 고석을 4개씩 배치하였다. 휘릉 정자각은 동구릉에 있는 다른 정자각과 달리 정전 양옆에 익랑(翼廊)을 추가하여 웅장함을 더하였다.
▷ 장렬왕후(莊烈王后) 이야기
장렬왕후 조씨(재세 : 1624년 음력 11월 7일 ~ 1688년 음력 8월 26일)는 본관이 양주인 한원부원군 조창원과 완산부부인 최씨의 딸로 1624년(인조 2)에 직산현(충남 천안) 관아에서 태어났다. 1635년(인조 13) 인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638년(인조 16)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649년 인조가 세상을 떠나고 효종이 즉위하자 자의왕대비(慈懿王大妃)가 되었으며, 효종, 현종, 숙종 대에까지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다. 1688년(숙종 14) 창경궁 내반원에서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 나이에 인조의 두 번째 왕비가 된 장렬왕후는 인조가 세상을 떠난 후 자의왕대비라는 호칭으로 효종, 현종, 숙종 대에까지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상복을 입는 기간으로 예송(禮訟)의 대상이 되어 서인과 남인의 붕당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성리학에 근거한 상례에 따르면 장자(맏아들)의 상에는 부모가 3년복을 입고, 차자 이하의 상에는 기년복(1년)을 입도록 되어 있다. 1659년(효종 10)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계모)가 되는 자의왕대비의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게 된다. 이 사건을 제1차 예송논쟁(기해예송)이라고 하는데, 이때 서인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아들이기 때문에 기년복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효종이 인조의 장자는 아니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자의 대우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은 결국 장자와 차자의 구별 없이 기년복을 입게 한 『경국대전』의 예로 정하였고, 이로인해 기년복을 주장했던 서인이 승리하여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후 15년 뒤인 1674년(현종 15)에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 논쟁이 다시 나오게 되었다. 이를 제2차 예송논쟁(갑인예송)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서인은 인선왕후가 인조의 둘째며느리이기 때문에 대공복(9개월)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왕비였기 때문에 첫째며느리의 대우로 하여 기년복(1년)을 주장하였다. 이때 현종은 남인의 주장을 받아들여 서인 정권을 몰락시키고 남인 정권이 세력을 잡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출처 : 국가유산청 조선왕릉 궁능유적본부
구리 동구릉 - 원릉(元陵, 영조와 정순왕후)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조성 연도 : 1776년(정조 즉위), 1805년(순조 5)
왕릉 형식 : 쌍릉
▷ 원릉(元陵) 이야기
원릉은 조선 21대 영조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다. 원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영조, 오른쪽(동쪽)이 정순왕후의 능이다.
이곳은 원래 효종의 옛 영릉(寧陵) 자리였으나, 영릉 조성 직후부터 석물에 문제가 생겨 계속 보수를 하다가 1673년(현종 14) 여주로 옮기게 되면서 터만 남아 있었다. 이후 1776년(영조 52)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옛 영릉 자리에 원릉이 조성되었다. 원래 영조는 1757년(영조 33)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홍릉을 조성하면서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들어 쌍릉으로 조성되기를 원하였지만,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영조의 능자리로 대신들의 의견이 나누어지자, 정조는 지금의 자리를 영조의 능자리로 결정하였다. 이후 1805년(순조 5)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의 능 동쪽에 능을 조성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원릉은 영조 대에 편찬된 『국조상례보편』의 예를 따랐는데,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왕과 왕비의 능 앞에 각각 석상(혼유석) 1개씩 배치하였다. 영조의 원릉을 시작으로 중계와 하계 사이의 단을 없애고 문석인과 무석인을 한 단에 같이 배치하였다.
능침 아래의 비각에는 총 3기의 표석을 세웠는데, 가장 왼쪽의 표석(1비)은 1776년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원릉을 조성할 때 세운 ‘영종대왕’ 표석, 가운데 표석(2비)는 고종 대에 영조로 추존하고 세운 ‘영조대왕’ 표석, 가장 오른쪽의 표석(3비)는 1805년(순조 5)에 세운 ‘정순왕후’ 표석이다.
▷ 영조(英祖) 이야기
영조(재세 : 1694년 음력 9월 13일 ~ 1776년 음력 3월 5일, 재위 : 1724년 음력 8월 30일 ~ 1776년 음력 3월 5일)는 숙종과 숙빈 최씨의 아들로 1694년(숙종 20) 창덕궁 보경당에서 태어났다. 1699년(숙종 25)에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지고, 경종이 즉위한 후에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당시 왕세제 책봉을 주장한 노론과 반대한 소론 간의 정쟁이 극심했으며, 영조 자신도 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경종을 시해하려는 시도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받기도 하였다. 이런 치열한 경쟁과 우여곡절 끝에 1724년에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창덕궁 인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영조는 재위기간 동안 붕당의 대립 자체를 완화 및 해소하는 것을 큰 과제로 삼아 왕위에 오름과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균형 있는 인재 등용을 통하여 탕평 세력을 구축하였다. 영조는 탕평 정치로 조정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여러 가지 폐단을 고치는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특히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온 군역을 감소한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고, 노비 신공(身貢)을 혁파하였다. 또 청계천 건설과 여러 사치풍조를 금지하고, 법제도를 개편하여 『속오례의』를 간행하였고, 장례에 관한 일을 개편하여 『국조상례보편』 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붕당정치의 폐단으로 즉위 초에 경종 독살설에 휘말려 옥사가 일어났고, 1762년(영조 38)에는 왕세자(사도세자, 추존 장조)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과도한 경계심으로 왕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등 붕당정치의 혼란을 완전히 잠재우지 못하였다. 1776년(영조 52) 경희궁 집경당에서 83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조선 역대 국왕 중 가장 오래 재위(52여년)하였고, 가장 오래 살았다. 세상을 떠난 후 묘호(廟號, 종묘에 붙여지는 이름)를 영종(英宗)이라 하였다가 1890년(고종 27) 영조로 추존하였다.
▷ 정순왕후(貞純王后) 이야기
정순왕후 김씨(재세 : 1745년 음력 11월 10일 ~ 1805년 음력 1월 12일)는 본관이 경주인 오흥부원군 김한구와 원풍부부인 원씨의 딸로 1745년(영조 21) 여주 사저에서 태어났다. 1757년(영조 33) 영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 15세의 나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된 정순왕후의 대담하고 당찬 성격을 나타내는 일화는 왕비 간택 때에서부터 전해진다. 간택 시 영조가 왕비 후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고 대답했지만,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개가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보릿고개라는 인상적인 답을 하였다고 전한다. 왕비로 간택된 후에는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하여 잠시 돌아서 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왕비의 품위를 잃지 않은 일화이다.
정순왕후는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1800년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11세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수렴청정 기간 동안 정조 시대의 정책을 일부 계승하였고, 무리하게 행해졌던 정책들을 다시 정리하였다. 이후 1804년(순조 4)에 수렴청정을 거두었고, 다음 해인 1805년(순조 5)에 창덕궁 경복전에서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출처 : 국가유산청 조선왕릉 궁능유적본부
구리 동구릉 - 경릉(景陵, 헌종과 효현황후·효정황후)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조성 연도 : 1843년(헌종 9), 1849년(철종 즉위), 1904년(광무 7)
왕릉 형식 : 삼연릉
▷ 경릉(景陵) 이야기
경릉은 조선 24대 헌종과 첫 번째 왕비 효현황후 김씨, 두 번째 왕비 효정황후 홍씨의 능이다. 경릉은 세 개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三連陵)의 형식으로 조선왕릉 중 유일하다. 앞쪽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헌종, 가운데가 효현황후, 오른쪽이 효정황후의 능이다. 세 봉분은 모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난간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 봉분 앞에는 석상(혼유석)을 따로 배치하였다.
원래 이곳에는 1608년(광해군 즉위) 선조의 목릉(穆陵)이 조성되었으나 1630년(인조 8) 목릉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이후 효현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경릉이 조성되었고, 6년 뒤에 헌종이 세상을 떠나자 13곳의 왕릉자리를 간심(답사)한 끝에 ‘십전대길지(十全大吉地)’의 명당이라고 주장한 효현황후의 경릉 오른쪽에 능을 조성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4년(광무 8) 효정황후가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 헌종(憲宗) 이야기
헌종(재세 : 1827년 음력 7월 18일 ~ 1849년 음력 6월 6일, 재위 : 1834년 음력 11월 18일 ~ 1849년 음력 6월 6일)은 황제로 추존된 문조(효명세자)와 신정황후 조씨의 아들로 1827년(순조 27)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1830년(순조 30)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1834년 순조가 세상을 떠나자 8살의 어린 나이에 경희궁 숭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 할머니 순원황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외척 세도정치와 두 차례의 역모 사건이 일어나 정치적으로 혼란하였고,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으로 사회적으로도 혼란하였다. 또 두 차례의 천주교 탄압(기해박해, 병오박해)으로 인해 외국 군함이 처음으로 조선 근해에 나타나 민심이 흉흉하였다. 재위 말년에는 『동문휘고』, 『열성지장』, 『동국사략』, 『삼조보감』 등을 편찬하였고, 각 도의 제방(堤防)을 수축하게 하였다. 이후 1849년(헌종 15) 창덕궁 중희당에서 23세로 세상을 떠났고, 대한제국 선포 후 1908년(융희 2)에 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로 추존되었다.
▷ 효현황후(孝顯皇后) 이야기
효현황후 김씨(재세 : 1828년 음력 3월 14일 ~ 1843년 8월 25일)는 본관이 안동인 영흥부원군 김조근과 한성부부인 이씨의 딸로 1828년(순조 28) 안국방(현 서울 안국) 외가 사저에서 태어났다. 1837년(헌종 3)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헌종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1843년(헌종 9) 창덕궁 대조전에서 16세로 세상을 떠났고, 대한제국 선포 후 1908년(융희 2)에 효현성황후(孝顯成皇后)로 추존되었다.
▷ 효정황후(孝定皇后) 이야기
효정황후 홍씨(재세 : 1831년 음력 1월 22일 ~ 1904년 양력 1월 2일)는 본관이 남양인 익풍부원군 홍재룡과 연창부부인 안씨의 딸로 1831년(순조 31) 함열현(현 전북 익산) 관사에서 태어났다. 1843년(헌종 9) 헌종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년 뒤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헌종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헌종이 세상을 떠나고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명헌대비가 되었고, 1859년(철종 10)에 왕대비가 되었으며, 1897년(광무 1)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대한제국 최초의 태후가 되었다. 1904년(광무 7) 양력 1월 2일에 경운궁(현 덕수궁) 수인당에서 73세로 세상을 떠났고, 1908년(융희 2)에 효정성황후(孝定成皇后)로 추존되었다.
출처 : 국가유산청 조선왕릉 궁능유적본부
구리 동구릉 - 혜릉(惠陵, 경종비 단의왕후)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조성 연도 : 1718년(숙종 44), 1722년(경종 2)
왕릉 형식 : 단릉
▷ 혜릉(惠陵) 이야기
혜릉은 조선 20대 경종의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이다. 단의왕후는 처음 왕세자빈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이전의 순회세자묘(순창원)와 소현세자묘(소경원)의 예를 참고하여 묘를 조성하였다. 1720년(경종 즉위)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단의왕후로 추존되어 능의 이름을 혜릉이라 하였고, 1722년(경종 2)에 왕릉의 형식에 맞게 무석인, 난간석, 망주석 등의 석물을 추가로 조성하였다. 능침의 석물은 숙종의 명릉(明陵) 이후의 양식에 따라 작게 조각하였다. 능침의 장명등은 없어져 터만 남아 있고, 정자각은 광복 후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95년에 새로 복원하였다.
▷ 단의왕후(端懿王后) 이야기
단의왕후 심씨(재세 : 1686년 음력 5월 21일 ~ 1718년 음력 2월 7일)는 본관이 청송인 청은부원군 심호와 영원부부인 박씨의 딸로 1686년(숙종 12)에 회현동(현 서울 회현동) 우사에서 태어났다. 1696년(숙종 22)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는데, 실록에는 하루 종일 단정하게 앉아서 잠시라도 함부로 기대거나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시녀들이 궁궐 구경하기를 청해도 따르지 않고 『소학(小學)』을 읽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타고난 의젓함과 총명함으로 궁궐의 어른들과 병약한 왕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1718년(숙종 44) 창덕궁 장춘헌에서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경종과의 사이에서 소생은 없으며, 1720년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단의왕후로 추존되었다.
출처 : 국가유산청 조선왕릉 궁능유적본부
구리 동구릉 - 숭릉(崇陵, 현종과 명성왕후)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조성 연도 : 1674년(숙종 즉위), 1684년(숙종 10)
왕릉 형식 : 쌍릉
▷ 숭릉(崇陵) 이야기
숭릉은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이다. 숭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현종, 오른쪽(동쪽)이 명성왕후의 능이다.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였다. 봉분 앞에는 석상(혼유석)이 각각 1개씩 놓여 있고, 그 밖의 석양, 석호, 망주석, 문석인, 무석인, 석마 등은 일반적인 조선왕릉의 형태로 배치되었다.
숭릉의 석물은 현 동구릉 내 원릉(영조) 자리에 있던 효종의 옛 영릉(寧陵) 석물인데, 영릉을 여주로 옮길 때 땅에 묻었던 석물을 숭릉을 조성할 때 다시 꺼내 다듬어서 사용한 것이다.
▷ 현종(顯宗) 이야기
현종(재세 : 1641년 음력 2월 4일 ~ 1674년 음력 8월 18일, 재위 : 1659년 음력 5월 9일 ~ 1674년 음력 8월 18일)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아들로 1641년(인조 19) 청나라 심양 관사에서 태어났는데, 조선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봉림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는 동시에 현종은 원손이 되었고 1648년(인조 26)에 왕세손이 되었다. 이후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세자가 되었고,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창덕궁 인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 동안 함경도 산악지대를 개척하고,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된 북벌정책을 중단시켰으며, 호남 지방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두 차례의 청나라 침략의 피해로부터 국가체제를 회복하기 위해 힘썼다. 또 동철활자 10만 자를 주조시켰으며, 천문 관측과 역법 연구를 위하여 혼천의를 다시 제작하게 하였다. 그러나 두 차례의 예송논쟁으로 붕당의 싸움이 치열하기도 하였다. 1647년(현종 15) 창덕궁 재려에서 34세로 세상을 떠났다.
▷ 명성왕후(明聖王后) 이야기
명성왕후 김씨(재세 : 1642년 음력 5월 17일 ~ 1683년 음력 12월 5일)는 본관이 청풍인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덕은부부인 송씨의 딸로 1634년(인조 12)에 장통방(현 서울 종로2가 관철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651년(효종 2)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현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현종과의 사이에서 1남(숙종) 3녀(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를 낳았다. 1683년(숙종 9)에 창덕궁 저승전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九里 東九陵 崇陵 丁字閣)
정자각은 제향을 지내는 건물로 지붕 위에서 봤을 때 ‘丁(고무래 정)’자 모양으로 보여 정자각이라 한다. 숭릉 정자각은 1674년(숙종 즉위)에 지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팔작지붕의 정자각이다. 『산릉도감의궤』 등의 기록에 의하면 세종의 영릉(英陵), 명종의 강릉(康陵), 인조의 장릉(長陵) 등의 정자각이 팔작지붕으로 지어졌으나 후대에 모두 맞배지붕으로 바꾸었는데, 현재는 숭릉만이 팔작지붕 형태로 남아 있다. 숭릉 정자각은 17세기 왕릉 정자각 건축제도를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출처 : 국가유산청 조선왕릉 궁능유적본부
☞ 이것으로 '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 답사 순례(역사문화관ㆍ재실ㆍ수릉ㆍ현릉ㆍ건원릉ㆍ목릉ㆍ휘릉ㆍ원릉ㆍ경릉ㆍ혜릉ㆍ숭릉ㆍ숭릉연지)' 이야기를 마친다.
세계유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 답사 순례(역사문화관ㆍ재실ㆍ수릉ㆍ현릉ㆍ건원릉ㆍ목릉ㆍ휘릉ㆍ원릉ㆍ경릉ㆍ혜릉ㆍ숭릉ㆍ숭릉연지)를 다녀오다.
▣ 1부[동구릉역→동구릉 매표소→역사문화관→홍살문→재실→수릉→현릉→건원릉→목릉 정자각]
는 http://macgyver-dct.tistory.com/16164202 ☜클릭
▣ 2부[목릉 정자각→건원릉 초소→휘릉→원릉→경릉→혜릉→숭릉→숭릉연지→매표소→왕숙길벗교]
는 http://macgyver-dct.tistory.com/16164203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