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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과 깨달음☞/♡ 좋은 시 모음

저녁길을 걸으며

by 맥가이버 Macgyver 2005. 12. 9.

 
저녁길을 걸으며 - 이정하

해질 무렵,
오늘도 나는 현관문을 나섰습니다.
그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대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아니,
또 어찌 보면 아무것도 없기도 합니다.
아픈 우리 사랑도 길가의 코스모스처럼,
한송이의 꽃을 피워 올릴 수만 있다면
내 온 힘을 다 바쳐 곱게 가꿔 나가겠지만,
그것이 또 내 가장 절실한 소망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이렇듯 무작정 거리에 나서
그대에게 이르는
수천 수만 갈래의 길을
더듬어보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여름,
무던히 내리쬐던 햇볕도 마다 않고
온몸으로 받아내던 잎새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 한송이의 꽃이 피어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내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저 꽃잎들도 언젠가 떨어지겠지만,
언젠가 떨어지고 말리라는 것을
제 자신이 먼저 알고 있겠지만,
그때까지 아낌없이 제 한 몸을
불태우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생각한
내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떨어진 꽃잎 거름이 되어
내년에 더더욱 활짝 필 것까지 생각하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생각했던
내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내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위 사진은 2005년 8월 23일(화)에 
관악산 칼바위봉에서 찍은 낙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