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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서울한양도성

[20060430]서울성곽(한양성곽) 일주 이야기 1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06. 5. 1.

30086

 

2006년 4월 30일(일) 서울성곽(한양성곽) 일주를 하다.

 

3월 2일자 조선일보 주말매거진에 게재된 황두진씨의 '서울성곽 하루에 돌기'를 보고,

3월 5일 맥가이버 홀로 9시간 20분에 걸쳐 '서울성곽 일주'를 위한 사전답사를 하였고,

오늘(4월30일) 함께 하겠다는 님들과 11시간 20분에 걸쳐 '서울성곽 일주'를 다녀왔다.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이번 '서울성곽 일주'의 시작점을 '남대문'으로 정하고,

서울역 5번출구 밖에서 모여 남대문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돌아 남대문으로 돌아오는

'서울성곽 일주'는 약한 황사와 비 올듯 말듯한 흐린 날씨로 인해 조망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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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설명글들은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저기서 찾아 편집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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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지난 3월 2일자 조선일보 주말매거진에 게재된

황두진씨의 '서울성곽 하루에 돌기'에 대한 코스 및 여정을 담은 개념도입니다.

 




 

 ☞ 서울성곽에 대하여 알아봤더니...

 

서울성곽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태조는 한양 천도 후 일차적으로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다음 태조 4년(1395) 9월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성터를 살피게 하였다.

정도전은 백악(白岳)·인왕(仁王)·목멱(木覓)·낙산(駱山)에 올라 실측하여 네 산을 연결하는 5만 9,500척의 성터를 결정하였다.


이듬해 정월부터 전국에 걸쳐 무려 11만 8,000여명이 동원되어 600척을 한 단위씩으로, 축성구역을 97지구로 나누어 정하였다. 구역마다 천자문의 글자를 표시하여 백악 동쪽에서부터 천(天)자로 시작하여 낙산·남산·인왕산을 거쳐 백악 서쪽에 이르러 조(弔)자까지 구획하여 공사를 하였다. 공사는 구역마다 책임자를 두어 책임진 부분에 해당하는 성벽에 관직과 축성한 고을의 이름을 새겨 넣어 책임을 분명하게 하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높고 험한 산에는 15척 높이의 돌로 쌓게 하였는데, 돌로 쌓은 성벽의 길이는 1만 9,200척이었다. 평지는 아래 부분이 25척, 윗부분이 18척 되는 너비로 높이 25척의 규모로 흙을 쌓았는데, 그 성벽의 길이는 4만 3,000척이었다. 동대문 부근 청계천에 있는 수구(水口)에는 구름다리를 쌓고 그 좌우에는 돌로 성을 축조하였다. 홍예의 높이는 16척, 석성 등을 포함한 길이는 1,050척이었다.


이해 가을에도 8만명의 정부(丁夫)를 동원하여 흙으로 쌓은 부분을 돌로 고치고, 4대문과 4소문을 완성하였다. 4대문이란 동쪽의 흥인문(興仁門),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북쪽의 숙청문(肅淸門)을 말하고, 4소문이란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서남의 소덕문(昭德門)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흥인문에만 옹성(甕城)을 쌓았다. 대략의 공사는 이렇게 끝났지만 숭례문은 1396년에, 흥인지문의 옹성은 이듬해 4월에야 완성되었다.


세종 4년(1422)에 이 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바꾸면서 더 높게 쌓고, 석재를 약 2 : 1 길이 비율의 장방형으로 많이 다듬어 쌓았다. 또한 여장(女墻)도 쌓았고 수문도 2개 더 만들었다. 전국에서 약 32만 2, 000명의 인부가 동원된 이때의 개축으로 도성은 둘레 8만 9,610척,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군데로 되었으며, 곡성(曲城) 1군데, 성랑(城廊) 15군데를 갖추게 되었다. 그 뒤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고 관리를 전담케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광해군 때 수축이 있었고, 숙종(肅宗) 30년(1704) 3월부터 약 5년간에 걸쳐 3군영(三軍營)에 분담하여 둘레 9, 975보, 성첩(城堞) 7, 081개로 만드는 대대적인 수축을 하였다. 또한, 영조 19년(1743)에도 부분적인 보수를 하였고, 성첩도 회분(灰粉)으로 단장하였으며, 고종 6년(1869) 동대문의 개축이 있었다.


이처럼 서울성곽은 태조 때 처음 축조되어 세종 때 개축되고 숙종 때의 수축이 있었는데, 세 차례의 축조는 축조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세 시기의 성벽이 쉽게 구분된다. 즉 태조 때의 것은 1척 정도의 다듬지 않은 네모꼴의 작은 돌을 불규칙하게 쌓았으나 벽면은 수직이다. 세종 때는 2×3척의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을 아래 부분은 비교적 큰돌로, 윗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왔으나, 철과 석회를 사용하여 축성 기술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준다.

숙종 때의 것은 가로와 세로가 2척 규모의 정방형 돌을 정연하게 쌓아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이다. 이러한 축조술의 변화는 조선시대 축성술의 전반적인 변화와 관계된 것으로, 지방의 읍성(邑城)과 산성(山城)에도 적용되어진 모범이었다.


1915년 일제는 근대 도시로의 발전을 방해한다고 하여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그 결과 현재 삼청동·장충동 일대의 성벽과 숭례문·흥인지문·숙청문ㆍ창의문ㆍ광희문 등이 전체 또는 일부 남게 되었다. 광복 후 1963년에 인왕산 방면과 북악산의 돌로 된 성벽을 보수하였으며, 1972년과 1976년에 부분 보수와 개축을 하였다. 이후 혜화문이 복원되고 숙청문ㆍ광희문의 문루가 복원되는 등 계속적인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서울성곽에는 4大門과 4小門에 대하여 알아봤더니...

 

▣ 4大門은

-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종로구 종로6가 69),

-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중구 남대문로4가 29),

-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서대문-강북삼성병원 부근 - 현재 멸실됨)

- 북쪽에 숙정문(肅靖門, 肅淸門, 종로구 삼청동 , 76년 門樓復元)이 있고,

 

▣ 4小門에는

- 동북쪽에 혜화문(惠化門, 弘化門, 東小門-종로구 혜화동 34

(혜화동로타리에서 삼선교로 가는 종로 성북구 경계), 94년 門樓復元),

- 남동쪽에 광희문(光熙門-중구 광희동2가 105-24, 75년 門樓復元)

(지하철 2호선 동대문운동장역 3번출구 20m),

- 서남쪽에 소의문(昭義門, 昭德門, 西小門-중구 서소문동 589)

(中央日報社 정원길 마루턱 언덕, 멸실됨),

- 서북쪽에 창의문(彰義門, 紫霞門-종로구 부암동)

(지하철3호선 경복궁역 3번출구 50m전방 버스이용 경복고 다음에 하차)

 

풍수지리에 입각한 서울 즉 한성은 음양오행에 따라 만들어 졌는데, 그 성의 각 대문에는 인(흥인지문), 의(돈의문), 예(숭례문), 지(숙정문, 숙청문), 신(보신각)을 두었다. 그런데 북대문에 해당하는 숙정문 이름에는 "지"가 없다. 그것은 북쪽은 음기가 많은데 만약 이 문을 열어두면 도성에 음기가 들어와 문란해지므로 그 위쪽에 있는 홍지문으로 이를 대신하고 사실상 북대문은 여는 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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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성곽(한양성곽) 일주' -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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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역 5번출구 밖


 

▼ 만남 장소


 


 

▼ 舊 '세브란스병원'이있던 이곳이...


 

▼ 서울성곽 일주의 시발점인 '남대문(숭례문)'으로 이동하며...


 

▼ 남대문 앞에서...


 


 

☞ 숭례문(남대문)에 대해 알아봤더니...

 

▲ 서울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국보 제1호)

 

중구 남대문로 4가 29번지에 있다.

서울 숭례문은 한양 도성의 정문으로 남대문은 그의 속칭이다.

태조5년(1396)에 창건되었던 것이지만 현존 건물은 세종30년(1448)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성종 10년(1479)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건평 53.79평, 정면 5간(間), 측면 2간의 남대문은 현존하는 한국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우리나라 건축사상 가장 중요한 건물의 하나라 할 수 있다.

 

★ 좀더 자세히...

 

 

서울 숭례문은 조선시대 서울 도성(都城)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ㆍ수리하는 과정에서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62년 숭례문을 중수할 때 나온 숭례문 상량일자를 묵서(墨書)한 대들보가 세개 발견되었다. 첫째는 태조 때 창건 당시의 대들보요, 둘째는 세종 때 개수시의 대들보요, 셋째는 성종 때 개수시의 대들보이다.

 

창건 당시인 태조 때의 대들보에는 "홍무이십구년병자시월초지일상량(洪武二十九年丙子十月初之日上樑)"이라고 묵서되어 있으니, 홍무 29년은 태조 5년(1396)에 해당하므로 이 해 10월6일에 상량하고 2년 후인 태조 7년 2월 8일에 준공하였다.


따라서 숭례문은 태조5년에 창건하였고 2년 후에 다시 고쳐지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4년(1422) 도성을 개축할 때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고, 세종 30년(1448)에 개축하였다. 이때 개축한 이유는 숭례문이 기울거나 퇴락하여 개축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지대가 낮아서 볼품이 없고 또 당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구애되어 숭례문의 지대를 높여서 남산과 인왕산의 산맥에 연결시켜 경복궁이 포국을 아늑하게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사정으로 개축공사는 뒤로 미루어지다가 15년 후인 세종 29년(1447) 8월에 착공하였는데, 숭례문이 문루와 석문을 완전히 헐어내고 기지를 높게 돋우어 양쪽 산맥에 연결시킨 다음 그 위에 새로 석문을 쌓고 문루를 건축하였으므로, 보수나 중수가 아니라 완전한 개축이었다.


1962년에 발견된 대들보 가운데 "정통십삼년무진삼월십칠일손시입주상량(正統十三年戊辰三月十七日巽時立柱上樑)"이라고 묵서한 것이 곧 이때의 대들보로서, 세종 30년 3월 17일에 상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그 후 32년이 지난 성종10년(1479)에 이르러 숭례문이 기울어졌기 때문에 또다시 개축하였다. "성화십오년기해사월초이일묘시입주상량成化十五年己亥四月初二日卯時立柱上樑)"이라고 묵서한 대들보에 의하여 성종 10년 4월 2일에 기둥을 세우고 상량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채수(蔡壽)와 좌승지 김승경(金升卿)등이 숭례문을 증수할 때 중국의 예에 의하여 문 밖에 옹성(甕城)도 쌓자고 하였으나, 성종이 "우리나라는 국력이 부족하여 일일이 중국을 본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적이 숭례문까지 쳐들어온다면 그 때는 이미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이니 옹성이 있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답하여 흥미롭다.


지금은 숭례문 중앙이 문이 아니라 양옆으로 난 도로가 지난날 성문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서울성곽이 동쪽의 남산에서 내려와 오늘날의 힐튼호텔 앞을 지나 숭례문에 연결되었고, 서쪽에서는 서소문으로부터 상공회의소 앞을 지난 성벽이 숭례문에 직접 연결 되어있었기 때문에, 사람과 가축은 이 성문을 통하지 않으면 도성을 출입할 수 없었다.


숭례문 주변의 성벽이 결정적으로 훼손된 것은 광무(光武) 3년(1899) 서울 시내 전차(電車) 노선 공사와 개통으로 인하여 동대문ㆍ서대문이 주변과 함께 헐리게 되면서부터이다. 더욱이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이라는 미명하에 파괴가 가속화되었고, 특히 숭례문 남쪽으로부터 남산이 정상에 이르는 성벽은 남산광장에 일제가 소위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전연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현재는 남산광장에서 정상에 이르는 도보 길에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숭례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정면 5칸ㆍ측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굴곡이 심하지 않다.


'崇禮門'이라는 현판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의하면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하여 세로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썼다고 한다. 이 문은 임진왜란 때 성내의 대부분 건물이 소실된 가운데 불과 몇 채 안 남은 건물 중의 하나로 비교적 고려말 이래의 다포(多包)집 양식을 충실히 남기고 있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 남대문 앞에서...

 

 


 

▼ 단체사진을 찍고...


 

▼ '남대문시장'쪽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 남대문을 다른 각도에서 보니...


 

▼ 성 안에서 본 남대문


 

▼ 남대문과 건너편 상공회의소 건물의 좌측으로 성곽이 이어졌었으나...


 

▼ 상공회의소쪽으로...


 

▼ 상공회의소를 좌측으로 돌면...


 

▼ 이런 곳을 만나고...


 

▼ 서울성곽 복원 안내가...


 

▼ 옛 성돌과 복원된 성돌을 비교하며...


 


 


 

▼ 중앙일보 사옥


 

☞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태어난 곳

 

인현왕후 민씨(閔氏)가 태어난 곳은 지금의 중앙일보사 사옥 맞은편 순화빌딩의 주차장 터이다.

인현왕후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딸로 15세 때 숙종의 계비가 되었는데 20세까지 왕자를 낳지 못해 숙종에게 장희빈(張禧嬪)을 후궁으로 천거하였으나 장희빈의 모함으로 6년동안 안국동 감고당(感古堂)에서 칩거하였다.


 

 

▼ 순화빌딩 주차장을 지나서...

 


 

▼ 중앙일보사옥 앞에서 고가 밑을 지나...


 

▼ 우측 도로 어딘가에 있었을 서소문(소의문, 소덕문)을 상상하며...


 

▼ 평안교회 앞에서...


 

▼ 수렛골에 대하여...


 

▼ 배재학당이 있었 곳에 들어선 배재빌딩 앞을 지나...


 

▼ 성곽은 정면으로 이어졌었으나 '러시아공사관'이 길을 막아서...


 

▼ 우측 배재공원으로...


 


 


 

▼ 배재공원을 지나 정동길을 나오면...


 

 

 

☞ 정동교회에 대하여 알아봤더니...

 

정동교회(貞洞敎會, 사적 제256호)

 

중구 정동 32-2번지에 있다.

개신교의 교회당으로는 국내 처음으로 지어진 것으로서 고종 23년(1896) 12월에 준공되었다.


 

▼ 정동교회가...

 



☞ 이문세의 '광화문연가' 중 일부에서..

 

 ♪ ♬ 이젠 모두 세월따라 흔적도 없이 떠나가지만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에 아직 남아있어요 눈덮힌 조그만 교회당


 

▼ '광화문연가'에 나오는 조그만 교회당이...정동교회?



 

▼ '정동교회'를 나와 '정동극장'옆을 지나...


 

▼ '이화여고' 정문(동문)으로 들어서서...


 

▼ '유관순 빨래터'를 찾아서..


 

▼ 저기가 바로...


 

▼ '유관순 빨래터'에서...


 

▼ 이화여고 '원형극장'을 찾아서...


 


 

▼ 이 꽃의 이름은?


 

▼ 이화여고 원형극장


 

▼ 원형극장의 상단곡선부를 따라 성곽이 이어졌었다고...


 


 

 


 


 

▼ 잠시 '라일락향기'에 취해 보고...


 


 

▼ 이화여고 후문(서문)으로 나와서...


 

▼ 우측담을 따라가다가...


 

▼ 담이 끝나는 곳에 있는 좁은 골목길로...


 

▼ 앞에 보이는 창덕여중의 담이...


 

▼ 성곽이 지나던 곳이고...


 

▼ 마우스 왼쪽을 클릭하면 사진이 확대됨.


 

▼ 창덕여중 담을 따라...


 

▼ '신문로'로 나와서...


 

▼ '정동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 강북삼성병원 가는 길 언덕 위에...


 

▼ 강북삼성병원 앞을 지나...


 

▼ 경희궁터 일부에 지어진 '서울시교육청'앞을 지나...


 

☞ 경희궁에 대하여 알아봤더니...

 

경희궁(慶熙宮, 사적 제271호)

 

종로구 신문로 2가 1-126번지 일대이다.

경희궁의 원이름은 경덕궁(慶德宮)으로 광해군 8년(1616)에 지었다. 숙종이 이 궁에서 나서 승하하였고, 경종과 정조, 헌종이 모두 이 궁에서 즉위하였으니 원래 이궁(離宮)이었던 이 곳이 한동안은 본궁과 다름없이 쓰였다.

 

광해군이 이 궁을 짓게 된 동기는 음양지리설과 깊은 관계가 다. 즉 새문동(塞門洞:돈의문 부근)에 왕기(王氣)가 있다 해서 그 왕기를 누르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새문동에는 광해군의 동생이자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定元君)의 사삿집이 있었는데, 광해군은 바로 그곳을 빼앗아 궁궐을 지었지만 8년이 채 못 되어 광해군 15년(1623)에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 서울시교육청


 

▼ 사라진 성곽을 상상하며...


 

▼ 담쟁이덩굴이 드리워진 저 집이...


 

▼ '봄처녀', '고향의 봄' 작곡가 홍난파가 살던 집이라고...


 

▼ 갈림길에서 연립주택 앞을 지나...


 

▼ 양의문교회 앞을 지나...


 


 

▼ 다시 나타난 성곽을 따라...


 

▼ 이곳에서 좌측(성밖)으로 가야...


 

▼ '서울성곽' 안내문을 읽는 님들...


 

▼ 성곽을 따라...


 


 


 

▼ 이곳에 올라서니 인왕산자락이 보이고...

 

▼ 아파트 뒤로 '인왕산 선바위'가 보이고...

 

 

☞ 선바위에 대하여 알아봤더니...

 

禪바위


선바위는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이므로 '禪'자를 따서 이름하였다. 사람들은 석불님ㆍ관세음보살님, 또 이 두 개의 바위를 양주(兩主)라고 부르기도 한다. 임신을 원하는 부인들이 이 바위에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정성을 드리는데 작은 돌을 붙이면 효험이 크다고 하여 돌을 문질러서 붙인 자국이 남아있다. 이를 붙임바위라고 한다.

 

선바위는 높이가 7∼8m, 가로 11m 내외, 앞뒤의 폭이 3m 내외로 두 개의 큰 바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형상이다. 바위 아래에는 가로 약 10m, 높이 70∼80cm의 제단이 시멘트로 단장되어 있다.

 

이 바위는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상이라는 전설과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는 전설이 있다. 또 무학대사가 태조의 명을 받고 천도할 곳을 찾다가 현재의 서울을 찾아냈으나 국운이 500년밖에 유지 못 할 것을 알게 되자 이 선바위에서 천일기도를 하였다고 하며 그 뒤부터 이 바위가 유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태조가 도성을 쌓을 때 왕사(王師)인 무학대사와 문신인 정도전(鄭道傳)이 이 바위를 성 안으로 하느냐 성밖으로 하느냐로 크게 의견이 대립되었다.

 

태조는 결정을 미루고 돌아와 잠을 자는데 꿈에 4월인데도 눈이 쌓이고 있었다. 밖을 내다보니 낮에 회의하던 곳이 보이고 안쪽으로 들여쌓은 쪽의 눈이 녹아 버렸다. 태조는 이것이 하늘의 계시임을 알고 정도전의 주장대로 선바위를 성밖으로 두게하자 무학대사는 크게 한숨을 쉬면서 "이제 중들은 선비 책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탄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양도성(서울성곽)을 설성(雪城)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제일(祭日)은 개인별로 와서 치성을 드리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불교 신자들은 4월 초파일, 7월 칠석날 같은 경우는 많은 사람이 다녀간다고 하며, 영산제(靈山祭) 때에는 여러 스님과 신도들이 이곳에 와서 제를 지낸다고 한다.

 

제의(祭儀)는 개인치성을 드리고 사람들이 정화수ㆍ백설기ㆍ메ㆍ과실 등 저마다 간단한 제물을 준비해 와서 제단에 차려 놓고 절을 하며 기원한다. 절은 보통 3번하고 반절하며 방향을 돌려가며 절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많이 할수록 좋다고 하며 108염주를 하나씩 돌려가며 절을 하기도 하고 3천번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인등(引燈)은 개인의 기복(祈福)을 위해 선바위 관리사무소에서 원하는 사람에게 액수에 따라 반년이나 일년씩 켜준다. 인등은 옛날 등잔불 모양이며 위의 심지 부분에 작은 전등이 달려 있다.

 

선바위는 암석숭배(岩石崇拜)의 일종으로 이것이 전설화되고 또 불교와 무속신앙(巫俗信仰)이 밀착되면서 무속신앙의 중요지가 되어 있다.


 

▼ 선바위를 당겨보니...

 


 

 

[참고자료] 2005년 9월 24일(토) 인왕산 선바위 주변을 헤매고 다니면서...

 

▼ 선바위(禪岩) - 중이 장삼을 입은 듯한 선바위=서울 종로구 무악동 인왕산 산 3-4에 위치한 선바위는 마치 그 모습이 중이 장삼을 입은 듯해 붙여진 이름. 조선 태조가 성을 쌓을 때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이 바위를 성 안으로 하느냐 밖으로 하느냐로 크게 대립했다고 한다. 결국 성 밖으로 나가게 되자 무학대사가 “이제 중이 선비의 책 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게 됐다”고 탄식했다는 일화가 있다.


 

▼ 선(禪)바위 앞에 절하는 이들이 보이네..


 

▼ 선바위 오르는 계단


 

▼ 선바위를 조금 당겨 보니...


 

▼ 선바위 안내문


 

▼ 선바위가 인왕사 석불각


 

▼ 선바위 위에는 수많은 비둘기가...




 

 

[참고자료] 2005년 9월 24일(토) 인왕산 선바위 주변을 헤매고 다니면서...

 

▼ 국사당으로 오르는 계단길...


 

▼ 국사당 앞에 있는 바위와 솟대


 

▼ 국사당 


 

▼ 국사당 - 인왕산 국사당은 무속신당(巫俗神堂)으로,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무학대사(無學大師), 그리고 여러 호신신장(護身神將)을 모시고 있으며, 특히 무학대사를 모시는 데에서 국사당이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원래 이 당은 남산 꼭대기 곧 팔각정 자리에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5년(1396)에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태종 4년에는 호국의 신으로 삼았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목멱신사(木覓神祠)라고도 불렀다.


이 당은 1925년에 남산에서 이곳으로 이전되었는데, 이것은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저들의 신사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국사당이 높은 곳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전 장소를 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태조와 무학대사가 그곳에서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전할 때 그 재료를 그대로 옮겨 원형대로 복원하였다고 하며, 당의 전면 3칸에 왼쪽에 한 칸이 붙어 있었으나 뒤에 오른쪽 한 칸을 붙였다. 따라서 전면은 약 20여m이고 측면은 9m정도의 크기이다. 기둥 칸살은 전면 어간(御間) 약 2.6m에 협간(夾間)과 측간(側間)은 모두 2.4m로, 내부 넓이는 모두 11평이고 바닥은 마루이다. 또 마루 좌우에는 온돌방이 있는데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마루 전면과 좌우 일부에는 무신도(巫神圖)가 걸려 있고 무신도 앞에는 제상이 있으며 마루는 굿을 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일반건물보다 단순한 구조이긴 하나 구조는 큰 편이며 집 전체적인 구성은 견실하고 간소하면서도 방주(方柱)의 실귀〔?刻〕이나 문살문의 새김 등과 같은 세밀한 부분에서는 최소한의 세련미가 가해져서 우아한 면도 엿보인다. 또 대들보의 후림이나 서까래의 배흘림, 규격 설정 등에서 경공(京工)의 솜씨를 엿볼 수 있어서, 영조(英祖)·정조(正祖) 이래의 견실과 간결을 위주로 지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국사당은 굿만 하는 곳이 아니라 신도들이 개인적으로 찾아와 참배하고 기도도 드린다. 참배객은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방에서도 찾아오는데, 정월에 가장 많이 찾아온다. 이 당에서 주로 행하는 굿은 사업 번창을 비는 경사굿과 병(病)굿 또는 우환굿 그리고 부모의 사령(死靈)이 극락왕생하기를 비는 진오귀굿이다. 그러나 이 당은 무당이 상주하는 곳이 아니고 당주(堂主)가 관리하면서 무당의 요청이 오면 당을 빌려주기 때문에 1년 내내 굿을 하나 하루에 보통 3건, 많을 때는 4∼5건을 하는데 특히 3월과 10월이 가장 많고 음력 섣달은 굿이 거의 없는 편이다. 당주는 신령님을 위해 2년마다 동짓달에 날을 잡아서 '마지'라는 제사를 올리는데 무녀를 초치해서 굿을 한다.

 

이 당 주위에는 기자암(祈子岩)으로 이름난 선(禪)바위가 있고 암자가 여러채 있으며 또 일반주택과 격리되어 있어 굿장소로 적합한 위치에 있다. 따라서 이 국사당은 쇠잔해 가는 서울 무속의 집결처로서 무속신앙 연구에 도움이 되고 있다.

 

▼ 인왕산 국사당 안내문


 


 

▼ 다시 성곽을 따라 가다가...


 

▼ 이곳에서는...


 


 

▼ 색다른 집을 보고...


 

▼ 양팔을 벌려 보니...

▼ 이곳은 공사 중이라...


 

▼ 이렇게 돌아서...


 

▼ 이 계단을 올라서서...


 

▼ 얼굴바위(좌)와 모자바위가 보이고...


 

▼ 이 길을 따라 조금 가면...


 

▼ 이곳이 인왕산으로 오르는 들머리...


 

▼ 인왕산 오르는 계단길


 

▼ 인왕산 범바위와 정상이...


 

▼ 얼굴바위


 

▼ 선바위


 

▼ 성곽을 따라...


 

▼ 성곽 위로 놓인 계단을 밝고...


 

▼ 철계단을 올라...


 

▼ 범바위 옆을 지나...


 

▼ 성곽길을 걸어 가는 님들...


 


 

▼ 인왕산 정상으로...

 

 

☞ 인왕산에 대하여 알아봤더니...

 

인왕산

 

서대문구의 홍제동과 종로구의 무악동, 누상동, 옥인동, 부암동에 걸쳐있는 인왕산은 정상의 높이가 338.2미터이다.

북한산에서 볼 때, 북악산을 중심으로 좌측에 낙산, 우측에 인왕산이 있어 좌청룡 우백호를  이룬다.

특이한 형태의 암석과 암벽의 웅대함이 등산객의 감탄을 자아내며, 정상에 서면 서울  중심가의 빌딩들과 청와대 부근의 녹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월요일과 공휴일 다음날은 등산진입이 통제된다.


 

▼ 인왕산 정상에서 왕언니님


 


 

▼ 기차바위와 성곽길


 

▼ 인왕산을 내려서고...


 

 

 

☞ 치마바위 전설에 대하여 알아봤더니...

 

치마바위 전설

 

서울 인왕산 병풍바위 밑에 우뚝한 바위 하나가 있으니 그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한다.  이 바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지금으로부터 4백여 년전, 조선 중종반정 때, 당시 국구인 신수근이 이에 몰리어 죽자,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은 중종에게 죄인의 딸을 대궐 안에 둘 수 없다며, 종묘 사직의 대계를 위하여 왕비의 폐위를 수차 요청하매, 중종도 어쩔 수 없이 왕비 신씨를 폐하여 자기 집에 있게 하였다. 그러나 10여 년이나 화락하게 지내던 그 지극한 정분을 잊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왕께서 가끔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기슭의 신씨 집을 멀리 바라보곤 하였다.

 

한편 폐비 신씨는 폐비는 되었지만 중종에 대한 깊은 사랑의 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자 상감께서 늘 경회루에 올라 자기 집을 바라본다는 소문을 듣게 되자, 신씨는 지난날 대궐 안에서 입던 자기의 치마를 경회루에서 바라볼 때 눈에 잘 뜨이도록 인왕산 높은 바위 위에다 아침에는 내다 걸고 저녁에는 거둬들였다고 한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뒷날 사람들이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 치마바위 



 

▼ 상곽을 따라...


 

▼ 성곽길과 북악산이 황사와 연무로 인해...


 

▼ 성곽 옆으로 난 군용계단?을 따라...


 

▼ 이곳에서 다시 성밖으로...


 

▼ 뒤돌아보니...


 

▼ 계단을 내려가서...


 


 

▼ 다시 계단을 올라...


 

▼ 성 안으로 와서...


 


 

▼ 이곳에서 우측으로 가면...


 

▼ 인왕산길(인왕스카이웨이)를 만나고...


 

▼ 인왕스카이웨이를따라 내려가면...


 

▶ 여기까지가 1부 끝....다음 여정은 2, 3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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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30일(일)에 다녀온 '서울성곽(한양성곽) 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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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숭례문)' 에서 '인왕산 성곽끝' 까지 --▥☞ 1부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인왕산 성곽끝' 에서 '동대문'까지 --▥☞ 2부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동대문' 에서 '남대문(숭례문)' 까지 --▥☞ 3부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그리고
 2006년 3월 05일(일)에 맥가이버 홀로 답사를
다녀 온 모습과 풍광을 보시려면 --▥☞ 여기를 누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