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 30일(일) 서울성곽(한양성곽) 일주를 하다.
3월 2일자 조선일보 주말매거진에 게재된 황두진씨의 '서울성곽 하루에 돌기'를 보고,
3월 5일 맥가이버 홀로 9시간 20분에 걸쳐 '서울성곽 일주'를 위한 사전답사를 하였고,
오늘(4월30일) 함께 하겠다는 님들과 11시간 20분에 걸쳐 '서울성곽 일주'를 다녀왔다.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이번 '서울성곽 일주'의 시작점을 '남대문'으로 정하고,
서울역 5번출구 밖에서 모여 남대문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돌아 남대문으로 돌아오는
'서울성곽 일주'는 약한 황사와 비 올듯 말듯한 흐린 날씨로 인해 조망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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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설명글들은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저기서 찾아 편집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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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지난 3월 2일자 조선일보 주말매거진에 게재된 황두진씨의 '서울성곽 하루에 돌기'에 대한 코스 및 여정을 담은 개념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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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성곽에 대하여 알아봤더니...
서울성곽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태조는 한양 천도 후 일차적으로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다음 태조 4년(1395) 9월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성터를 살피게 하였다. 정도전은 백악(白岳)·인왕(仁王)·목멱(木覓)·낙산(駱山)에 올라 실측하여 네 산을 연결하는 5만 9,500척의 성터를 결정하였다. 이듬해 정월부터 전국에 걸쳐 무려 11만 8,000여명이 동원되어 600척을 한 단위씩으로, 축성구역을 97지구로 나누어 정하였다. 구역마다 천자문의 글자를 표시하여 백악 동쪽에서부터 천(天)자로 시작하여 낙산·남산·인왕산을 거쳐 백악 서쪽에 이르러 조(弔)자까지 구획하여 공사를 하였다. 공사는 구역마다 책임자를 두어 책임진 부분에 해당하는 성벽에 관직과 축성한 고을의 이름을 새겨 넣어 책임을 분명하게 하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높고 험한 산에는 15척 높이의 돌로 쌓게 하였는데, 돌로 쌓은 성벽의 길이는 1만 9,200척이었다. 평지는 아래 부분이 25척, 윗부분이 18척 되는 너비로 높이 25척의 규모로 흙을 쌓았는데, 그 성벽의 길이는 4만 3,000척이었다. 동대문 부근 청계천에 있는 수구(水口)에는 구름다리를 쌓고 그 좌우에는 돌로 성을 축조하였다. 홍예의 높이는 16척, 석성 등을 포함한 길이는 1,050척이었다. 이해 가을에도 8만명의 정부(丁夫)를 동원하여 흙으로 쌓은 부분을 돌로 고치고, 4대문과 4소문을 완성하였다. 4대문이란 동쪽의 흥인문(興仁門),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북쪽의 숙청문(肅淸門)을 말하고, 4소문이란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서남의 소덕문(昭德門)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흥인문에만 옹성(甕城)을 쌓았다. 대략의 공사는 이렇게 끝났지만 숭례문은 1396년에, 흥인지문의 옹성은 이듬해 4월에야 완성되었다. 세종 4년(1422)에 이 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바꾸면서 더 높게 쌓고, 석재를 약 2 : 1 길이 비율의 장방형으로 많이 다듬어 쌓았다. 또한 여장(女墻)도 쌓았고 수문도 2개 더 만들었다. 전국에서 약 32만 2, 000명의 인부가 동원된 이때의 개축으로 도성은 둘레 8만 9,610척,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군데로 되었으며, 곡성(曲城) 1군데, 성랑(城廊) 15군데를 갖추게 되었다. 그 뒤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고 관리를 전담케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광해군 때 수축이 있었고, 숙종(肅宗) 30년(1704) 3월부터 약 5년간에 걸쳐 3군영(三軍營)에 분담하여 둘레 9, 975보, 성첩(城堞) 7, 081개로 만드는 대대적인 수축을 하였다. 또한, 영조 19년(1743)에도 부분적인 보수를 하였고, 성첩도 회분(灰粉)으로 단장하였으며, 고종 6년(1869) 동대문의 개축이 있었다. 이처럼 서울성곽은 태조 때 처음 축조되어 세종 때 개축되고 숙종 때의 수축이 있었는데, 세 차례의 축조는 축조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세 시기의 성벽이 쉽게 구분된다. 즉 태조 때의 것은 1척 정도의 다듬지 않은 네모꼴의 작은 돌을 불규칙하게 쌓았으나 벽면은 수직이다. 세종 때는 2×3척의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을 아래 부분은 비교적 큰돌로, 윗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왔으나, 철과 석회를 사용하여 축성 기술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준다. 숙종 때의 것은 가로와 세로가 2척 규모의 정방형 돌을 정연하게 쌓아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이다. 이러한 축조술의 변화는 조선시대 축성술의 전반적인 변화와 관계된 것으로, 지방의 읍성(邑城)과 산성(山城)에도 적용되어진 모범이었다. 1915년 일제는 근대 도시로의 발전을 방해한다고 하여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그 결과 현재 삼청동·장충동 일대의 성벽과 숭례문·흥인지문·숙청문ㆍ창의문ㆍ광희문 등이 전체 또는 일부 남게 되었다. 광복 후 1963년에 인왕산 방면과 북악산의 돌로 된 성벽을 보수하였으며, 1972년과 1976년에 부분 보수와 개축을 하였다. 이후 혜화문이 복원되고 숙청문ㆍ광희문의 문루가 복원되는 등 계속적인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
☞ 서울성곽에는 4大門과 4小門에 대하여 알아봤더니...
▣ 4大門은 -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종로구 종로6가 69), -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중구 남대문로4가 29), -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서대문-강북삼성병원 부근 - 현재 멸실됨) - 북쪽에 숙정문(肅靖門, 肅淸門, 종로구 삼청동 , 76년 門樓復元)이 있고,
▣ 4小門에는 - 동북쪽에 혜화문(惠化門, 弘化門, 東小門-종로구 혜화동 34 (혜화동로타리에서 삼선교로 가는 종로 성북구 경계), 94년 門樓復元), - 남동쪽에 광희문(光熙門-중구 광희동2가 105-24, 75년 門樓復元) (지하철 2호선 동대문운동장역 3번출구 20m), - 서남쪽에 소의문(昭義門, 昭德門, 西小門-중구 서소문동 589) (中央日報社 정원길 마루턱 언덕, 멸실됨), - 서북쪽에 창의문(彰義門, 紫霞門-종로구 부암동) (지하철3호선 경복궁역 3번출구 50m전방 버스이용 경복고 다음에 하차)
▣ 풍수지리에 입각한 서울 즉 한성은 음양오행에 따라 만들어 졌는데, 그 성의 각 대문에는 인(흥인지문), 의(돈의문), 예(숭례문), 지(숙정문, 숙청문), 신(보신각)을 두었다. 그런데 북대문에 해당하는 숙정문 이름에는 "지"가 없다. 그것은 북쪽은 음기가 많은데 만약 이 문을 열어두면 도성에 음기가 들어와 문란해지므로 그 위쪽에 있는 홍지문으로 이를 대신하고 사실상 북대문은 여는 법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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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곽(한양성곽) 일주' -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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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대문과 탑처럼 솟은 '두타'건물
☞ 동대문 서울興仁之門(東大門)은 서울성곽의 동쪽 문으로서 인(仁)은 오행의 목(木)에 속하고 목은 동(東)에 해당하므로 흥인(興仁)은 곧 동방을 의미한다고 하며, 흔히 동대문(東大門)이라고 부른다. 또한 '흥인문'이 '흥인지문'으로 언제 개칭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철종 말까지의 ≪실록≫에는 흥인지문이란 명칭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고종 때에 고쳐 짓고 흥인문을 흥인지문으로 개칭한 것으로 짐작된다. 흥인지문은 문을 창건한 지 50여 년이 지난 문종 원년(1451)과 단종 원년(1453)에 일부 보수가 있었고, 그 후 400여년이 지난 고종 5년(1868)에 개축한 기록이 있다. 당시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공사를 완료한 다음 광화문 밖 좌우편에 나열되어 있는 의정부·호조·이조·중추부·사헌부 등의 관아를 중수하는 동시에 흥인문을 개수하였는데, 《고종실록》에는 동대문 전체가 썩고 상하여 지탱하기 어렵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개수하였다고 한다. 1958년 동대문 보수공사를 할 때 문루 천장에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훈련도감(訓練都監)에서 공사를 담당, 고종 5년(1868) 10월 2일에 착공하여 고종 6년(1869) 2월 20일 정초(定礎), 3월 11일에 상량하고 같은 달에 완공하였는데, 문루가 매우 낮아 문지(門址)를 8척 돋우고 그 위에 새로 홍예(虹霓)를 쌓고 초루(譙樓)를 중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고종 5년의 흥인문의 공사는 완전히 개건한 공사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옹성도 고종 5년의 문루 건축 때에 새로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 흥인지문은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에서 볼 때 사다리꼴 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그 형태가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내부는 중앙에 높은 기둥을 일렬로 배치하고 위·아래층의 큰 들보는 모두 이 기둥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천장은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架構材)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흥인지문은 다른 문과는 달리 옹성(甕城)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옹성은 곡성(曲城) 또는 치성(雉城)이라고 하며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게 성문을 둘러쌓은 작은 성으로서 적을 방어하고 지키기에 편리한 것이다. 동대문의 옹성은 태조 6년 1월에 착공하여 4월에 완공하였다. 태조가 동대문에 한하여 옹성을 쌓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대문 부근의 지형이 낮을 뿐만 아니라 동대문 북쪽의 낙산도 낮고 평탄하여 적을 방어하기에는 부적당한 곳이므로 이 옹성을 쌓아서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려고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흥인지문 주변의 성벽은 일제가 도시계획이라는 미명하에 융희 2년(1908) 3월부터 동대문 북쪽과 남쪽의 성벽을 철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보다 앞서 광무 3년(1899) 5월 서대문∼청량리간 전차가 개통되면서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
▼ 이스턴호텔 앞을 지나...
▼ 동대문은 지형특성상 옹성 구조를 갖췄다고...
▼ 청계천 '오간수교' 앞 횡단보도를 건너...
☞ 오간수문(五間水門)에 대해 알아봤더니...
청계천은 도성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흘러 중량천과 합류한 다음 한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따라서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남쪽 성벽 아래에 개천 물이 도성 밖으로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수문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오간수문이었다.
오간수문 조금 남쪽에는 이간수문(二間水門)라고 하는 수문이 있었는데, 이것은 남산 남소문동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성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하기 위하여 만든 수문 이었다. 오간 또는 이간이라고 하는 것은 수문의 수를 말하는 것이다.
오간수문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정확하지 않으나, 조선 초기 한양에 도성을 수축할 때 물길을 고려하며 성벽 아래 수문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오간수문은 크기가 5척이나 되었으며, 각 수문마다 쇠창살로 만든 철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것은 물이 잘 빠져나가도록 함과 동시에 외부에서 이 수문을 통해 함부로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명종 때의 의적(義賊)으로 알려진 임꺽정이 이 오간수문을 통하여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오간수문은 외부사람들이 도성을 몰래 드나들 때 이용하던 주요 통로가 되었던 모양이다.
오간수문은 튼튼한 철문으로 되어 있었지만, 오랜 기간동안 제대로 준설을 하지 않았으므로 거의 제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쇠창살에 나뭇가지 등 부유물이 걸리고 거기에 토사가 쌓여 수문을 거의 막아 버린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임시방편으로 2척의 나무문을 별도로 만들어 사용하였으나 영조 때에 이르러서는 이것마저도 개폐를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오간수문의 기능을 회복하는 일은 개천 준설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1760년 영조는 개천을 준설하면서 먼저 수문 앞에 쌓여 있는 토사를 걷어내었다. 그리고 나무문도 다시 철문으로 교체하여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하였으며, 주변에 버드나무를 심어 토사가 쓸려 내려와 다시 수문을 막는 일이 없도록 영구적인 조치를 하였다.
이로써 오간수문은 원래 기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조는 이 오간수문에 여러 차례 행차하여 역군들이 준설하는 것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영조가 이 오간수문에 행차하여 개천바닥을 처내는 일꾼들의 모습을 그린 「준천도」(1760년)를 보면 다섯 개의 수문과 수문마다 설치된 철문, 그리고 수문 앞에 놓여 다리의 모습이 선명하다. 또 주변에 심어 놓은 버드나무도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버드나무가 우거진 오간수문은 이후 도성 안에서 이름난 봄놀이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오간수문이 수난을 당하게 된 것은 1907년이었다. 1907년 중추원 참의 유맹(劉猛) 토목국장은 청계천 하천수가 원활하게 소통되고 토사가 쉽게 흘러 내려가도록 한다는 명문으로 수문(水門)을 뜯어버렸다.
또 다음 해인 1908년 3월에는 훼손되어 방치된 성벽을 처리하고, 시가교통을 원활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동대문 부근 성벽과 함께 오간수문 (五間水門)의 성벽까지 헐어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콘크리트로 근대식 다리를 놓았다. 이로써 오간수문의 원형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오간수문'이라는 이름 대신 '오간수교' 또는 '오간수다리' 라고 부르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맞지 않다. 성벽을 지키거나 수문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물을 건널 수 있도록 수문과 수문 사이에 긴 돌을 놓아 사람들이 건너다닐 수 있도록 하였으나, 오간수문의 원래 기능은 이름 그대로 물이 빠져나가는 수문이었으며 다리가 아니었다.
명칭 또한 조선왕조 500년 동안 '오간수문'이라고 불렀지 '오간수교'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 오간수문을 오간수교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일제에 의해 오간수문이 헐리고 콘크리트로 된 근대식 다리가 놓인 다음부터였다.
일제강점기에 오간수문은 시내 전차의 주요통로였다. 1921년 6월 동대문에서 광희문간 전차 노선이 신설되면서 오간수교 위에 전차가 다릴 수 있는 철교가 놓이게 되었다. 더욱이 오간수교 바로 옆, 즉 지금의 동대문종합시장 자리에 전차차고가 자리하고 있어서 오간수교는 다른 어떤 곳보다도 전차의 왕래가 많았다.
1926년 6월 오간수교는 다시 한번 확장되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장례행렬이 장지인 유릉(裕陵,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갈 때 이 오간수교를 건너가게 되었다. 따라서 장례행렬이 건널 수 있도록 두 간 반(약 4.5m)이던 다리를 네 간 반(약 8.2m)로 확장하였다. |
▼ '오간수교'에서 바라본 '청계천'과 '오간수문'
▼ 동대문시장길을 지나...
▼ 동대문운동장 '풍물벼룩시장'은 다음에 구경하기로 하고...
▼ 서울 고지도
▼ '부처님오신날' 연등행사를 위해 모인 각종 연등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
▼ 산자연님
▼ 동대문운동장역 3번 출구 밖에 대표적 건축가인 김중업의 (구)서산부인과 건물
(지금은 요리학원 등이 있다)
▼ 건너편에는 보이는 성문이...
▼ 광희문
광희문 역시 다른 도성문들과 마찬가지로 1396년(태조 5)에 도성이 완성될 당시 그 동남문(東南門)으로 건립되었다. 그 위치가 청계천이 도성과 만나는 부근이었기 때문에 광희문은 수구문(水口門)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광희문과는 별개의 문으로 목멱산 기슭, 지금의 장충단에서 국립극장 앞을 지나 한남동으로 나가는 고개 마루에 남소문(南小門)이 있었다. 이 문은 경복궁을 기준으로 보아 불길한 방향에 있다 하여 폐문하였었는데 16세기 중엽부터 여러 차례 이 문을 다시 열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 문은 끝내 도성문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광희문이 도성의 동남문으로 계속 쓰였다.
광희문은 숙종 연간에 도성을 다시 고쳐 쌓을 때 그 석축을 고치고 나중 언젠가는 문루도 지어 문으로 온전한 모양을 갖추어 내려 왔다. 그 광희문은 일제초기에 들어와 문루는 없어지고 홍예문이 뚫린 석축만 남게 되었다. 그것을 1966년에 문 북쪽의 성곽을 헐고 도로를 확장하면서 그나마 문으로서 기능을 잃었다.
1975년에는 도성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광희문을 남쪽으로 한 15m 옮겨 복원하면서 없어진 문루를 다시 지음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띄게 되었다. 광희문은 또 시구문(屍口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도성에서 장례가 나갈 때 도성의 여덟 문 가운데 소의문(서소문)과 이 광희문으로 나가는 것이 원칙이었던 듯하다. 광희문 바로 바깥의 신당동 일대는 지형이 나즈막한 야산인데 그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장례 행렬이 많이 나가다보면 미처 문을 나가지 못한 상태에서 인정(人定)―통행금지 시간에 걸려 밤새 시신을 그곳에 모셔 놓을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요, 전염병이나 전란으로 사람들이 많이 죽는 시절에는 주인 없는 시신이 이 문 근방에 내다 버려진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구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는지 모르겠으나,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공식 기록에는 시구문이라는 이름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시구문이라는 이름은 그야말로 속칭이요, 그것도 일제시기 이후에 가서야 그런 이름이 널리 쓰인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더구나 '이 문에는 늘 시신이 쌓여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사실로 믿어지지 않는다. 일본인들의 악의적인 설명이 아닌가 생각된다. |
▼ 광희문의 바깥 성벽은...
▼ 광희문 앞에 핀 작약
▼ 광희문 옆 성벽 아래에서 봄나물을 뜯는 아낙네들
▼ 성당길을 따라가다가...
▼ 고 이병철씨의 집 - 국내에서 세 번째로 비싼 집이라네요.
▼ 길 건너 성벽이 보이고...
▼ 이 성벽은 이곳 장충체육관 뒤에서부터 신라호텔을 지나 타워호텔까지 이어진다.
▼ 겨울연가처럼...
▼ 다시 성벽을 따라...
▼ 잠시 휴식...
▼ 다시 성벽을 따라...
▼ 둥굴레
▼ 여기서부터 배터리를 3조나 준비해 갔는데 마지막 배터리까지 경고표시가 들어온다.
▼ 성곽이 끝나는 저곳에서...
★ 일단 디카 배터리 부족으로 절제된 사진으로 진행을 하다가 꼭 필요한 곳에서는
지난 3월 5일 '서울성곽 일주 답사'때 찍은 사진으로 보충하기로...
▼ 담을 따라 내려서서...
▼ 타워호텔 뒤로...
▼ 'N서울타워'에 걸린 석양을...
▼ 이 고개마루에...
▼ 남소문이 있었다네...
▼ 국립극장 앞 횡단보도를 건너...
▼ 디카 배터리 구입을 위해 '국립극장 內 매점'을 다녀오는 중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그러나 배터리를 구하지 못하였다.)
▼ 남산 성곽을 찾아서...
▼ 성곽이 있었던 곳을 표시한 도로에서 '남산산악회' 철문으로 들어서야...
☞ 지난 3월 5일에 찍은 사진으로 대체...
▼ 성곽을 따라 오르니...
▼ 위로는 철망이 둘러쳐져 있고 옆으로 난 이 길을 따라가니...
▼ 남산산악회 본부 건물이...
▼ 남산산악회 본부 지킴이?
▼ 이 길을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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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순환도로로 내려와서...
▼ 전망대에서 약간의 시간차로 낙조?를 놓치고...
☞ 지난 3월 5일에는 아래와 같은 모습을 찍었었는데...
▼ '남산타워' - 이제는 'N서울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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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점에서 배터리를 구입하고 '남산 팔각정'으로...
▼ 남산 팔각정에서...
☞ 지난 3월 5일에 찍은 사진
▼ 남산 봉수대
▼ 봉수대에서 본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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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토아일랜드'에서...
▼ 남산식물원에서...
▼ 백범광장에 있는 백범동상
▼ 남산을 내려와서 복원 성곽을 걷다가...
▼ 남대문에 도착
▼ 09시 00분에 남대문에서 출발하여 서울성곽 일주를 하고 20시 20분에 도착
▼ 남대문공원 '수선전도' 위에서...
▼ 단체사진 - 플래시 X
▼ 단체사진
▼ 남대문 야경
▼ 뒤풀이
▼ 시청앞에서 전철을 타기 전에...
▶ 이것으로 '서울성곽 일주'를 모두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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