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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궁궐·왕릉·묘ㆍ원

[20070808]도심나들이(경복궁-북촌한옥마을-인사동-조계사-보신각) - 1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07. 8. 9.

 

18937

 

2007년 8월 8일(수) 도심나들이(경복궁-북촌한옥마을-인사동-조계사-보신각)를 다녀오다.

 

오늘은 많은 비가 내린다기에 산보다는 도심나들이를 공지하고...

'경복궁역'에서 만나 비에 젖은 '경복궁'을 관람하고 나서, 삼청동길을 걸어 감사원앞에서 '북촌한옥마을'으로...

'북촌한옥마을'의 기와집을 구경하며 그 골목길을 걸어보고,

안국동 '종로경찰서' 부근에 있는 어느 음식점으로 가서 '삼합'을 먹어보고...

'인사동 쌈지길'을 구경하고, 인사동을 거닐다가 '조계사'로 향하고...

'조계사' 관람을 마치고, 청진동으로 가서 그 유명한 집에서 특★해장국을 먹고...

'종로 보신각'을 둘러보고 예정시각인 18시 30분에 '종각역'에서 해산하였다. 

  

☞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 블로그의 사진으로 대신한다.

 

 

☞ 1부를 시작하며...

▼ 오늘 여정에 참고...

 

☞ 경복궁

사적 제117호.

현재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5대 궁궐 중 正宮에 해당하는 것으로 북쪽에 자리하고 있어 북궐(北闕)로도 불린다.

조선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경복궁을 만드는 일이었다.

1394년(태조 3) 12월 4일 시작된 이 공사는 이듬해 9월 중요한 전각이 대부분 완공되었다.

 

궁의 이름은 〈詩經〉에 나오는 왕조의 큰 복을 빈다는 뜻으로 '군자만년개이경복'(君子萬年介爾景福)에서 따왔다.

5대 궁궐 중 가장 먼저 지어졌으나 이곳에 왕들이 머문 기간은 1405년(태종 5) 지어진 일종의 별궁인 창덕궁(昌德宮)에 비해 훨씬 짧다.

세종·문종·단종이 이곳에 주로 기거했으며, 왕자의 난으로 인한 개성천도 기간 동안 빈 궁궐이었다.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경복궁을 기피해 창덕궁에 기거하면서 임금이 살지 않는 궁이 되었다.

 

1543년(중종 38) 동궁에서 일어난 화재와 1553년(명종 8)에 일어난 내전일곽의 화재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이듬해 복구되었다.

38년 뒤 임진왜란으로 인해 모든 건물이 불탄 후 270여 년간 폐허상태로 있다가 1865년(고종 2) 대규모 재건공사가 시작되었다.

1868년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왔으나, 1876년에 일어난 대규모 화재로 다시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1888년 재차 옮기는 등 여러 차례의 피해와 복구가 거듭되었다.

1904년 이곳에 통감부가 들어섰고 1917년 11월에 일어난 창덕궁의 대규모 화재 뒤 이를 복구하기 위해 1918~20년 원래 있던 건물을 해체했다.

또 이곳에서 나온 건축자재의 방매와 국립중앙박물관이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의 건립 등으로 본래의 모습을 잃었으나 1996년 12월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 등으로 일부가 복구되고 있다.

 

 ▼ 경복궁역 內 지하통로에 있는 '불로문'

  

 

▼ 5번 출입구 쪽으로...

  

경복궁

경복궁(景福宮)은 조선의 정궁(正宮)이다.

조선의 태조는 1392년 7월 개성의 壽昌宮에서 왕위에 즉위하여 조선을 건국하고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3년(1394)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겨 왕궁을 창건하기 시작하였다.

태조 3년 12월 4일 개토(開土)를 시작하여 태조 4년(1395) 9월 경복궁이 조성되었다.


광화문의 해태조각상과 근정전의 기단에 조각된 방위신상들과 경회루 다리 및 영제교의 석교에 설치된 석조조각물들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조각미술품들이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회루의 루원과 향원지의 연못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조선의 대표적인 명원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집현전을 두어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의 서북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현재 궁궐 안에 남아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숙향당·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정 등이 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都城)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인데, 이러한 형식은 이 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정궁의 모습을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경복궁은 뒤에 백악(白岳)과 삼각산(三角山)을 등지고 한성(漢城) 중심 좌우에 6조관아(六曹官衙)가 있는 대로광장에 조영(造營)된 궁궐로서 중국의 고대 궁궐을 만드는 법식인 하늘의 별자리를 본뜬 오성좌 배치를 그대로 따랐다.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을 중심으로 남북축선상에 주요건물을 좌우대칭으로 배치하면서 정전과 편전은 앞부분에, 침전과 후원은 뒷부분에 배치하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직4각형에 가까운 대지 주위를 담장으로 둘러싸고 동문 건춘문(建春門), 서문 영추문(迎秋門), 남문 광화문(光化門), 북문 신무문(神武門) 등 4개의 문을 만들었다.

 

궁궐 안은 정문인 광화문으로부터 홍례문(弘禮門)과 금천(禁川)을 가로지른 영제교(永齊橋)와 근정전을 둘러싼 회랑의 정문인 근정문과 정사를 보던 사정전 뒤의 향오문(嚮五門)을 일직선 상에 배치했다.

이 사이의 공간은 나랏일을 보고 의식을 행하는 업무공간이다.

향오문 뒤쪽에는 침전과 궁궐 내에 필요한 제반시설이 자리한 영역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광화문과 향오문 사이에는 근정문을 경계로 다시 2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이는 중국에서 궁궐을 구성하는 방법인 삼문삼조(三門三朝)의 구성법을 따른 것으로 2단의 월대 위에 자리한 중층의 근정전과 이를 둘러싼 회랑을 중심으로 한 이곳은 치조(治朝)에 해당된다.

주로 신하들의 조례를 받던 곳으로 바닥에는 넓다란 박석을 깔고 좌우대칭을 이루어 보다 강한 권위를 보여준다.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의 공간은 외조(外朝)에 해당된다.

침전으로 통하는 노문(路門)인 향오문 뒤에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과 왕후의 침전인 교태전(交泰殿)을 비롯해 그 동쪽에 왕대비가 살던 자경전(慈慶殿) 등 많은 침전들이 있었다.

이 건물들은 1918~20년 사이에 해체되어 창덕궁의 희정전(熙政殿)과 대조전(大造殿) 등을 보수하는 데 건축자재로 사용되고 일부는 일반인에게 판매되기도 하는 등 대부분 없어졌다.

 

현재는 자경전과 교태전 뒤뜰의 아미산(峨嵋山)과 벽돌로 쌓은 굴뚝만이 남아 있다.

이곳에 자리한 많은 보물급 탑들은 조선의 정기를 억압하려는 일본인들에 의해 해체되어 옮겨진 것으로, 현재는 이들을 다른 장소로 옮기고 옛 모습을 되찾고자 복원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근정전(국보 제223호), 경회루(국보 제224호), 자경전(보물 제809호), 근정문 및 행각(보물 제812호), 사정전, 천추전, 수정전, 집경당, 함화당, 재수각, 향원정, 집옥재, 협길당 등의 건물과 경천사10층석탑(국보 제86호)을 비롯하여 일제강점기에 옮겨놓은 많은 국보·보물급 석조문화재가 있다.

조선시대의 궁궐 중 으뜸인 곳으로 다른 궁궐에 비해 전체모습이 정연한 비례체계를 갖추고 있어서 궁궐건축의 배치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 지하통로를 따라...

 

▼ 통로 끝에는...

 

▼ 국립고궁박물관이...

 

 

▼ 국립고궁발물관은 휴관 中...

 

경복궁

사적 제117호.

현재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5대 궁궐 중 正宮에 해당하는 것으로 북쪽에 자리하고 있어 북궐(北闕)로도 불린다.

조선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경복궁을 만드는 일이었다.

1394년(태조 3) 12월 4일 시작된 이 공사는 이듬해 9월 중요한 전각이 대부분 완공되었다.

 

궁의 이름은 〈詩經〉에 나오는 왕조의 큰 복을 빈다는 뜻으로 '군자만년개이경복'(君子萬年介爾景福)에서 따왔다.

5대 궁궐 중 가장 먼저 지어졌으나 이곳에 왕들이 머문 기간은 1405년(태종 5) 지어진 일종의 별궁인 창덕궁(昌德宮)에 비해 훨씬 짧다.

세종·문종·단종이 이곳에 주로 기거했으며, 왕자의 난으로 인한 개성천도 기간 동안 빈 궁궐이었다.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경복궁을 기피해 창덕궁에 기거하면서 임금이 살지 않는 궁이 되었다.

 

1543년(중종 38) 동궁에서 일어난 화재와 1553년(명종 8)에 일어난 내전일곽의 화재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이듬해 복구되었다.

38년 뒤 임진왜란으로 인해 모든 건물이 불탄 후 270여 년간 폐허상태로 있다가 1865년(고종 2) 대규모 재건공사가 시작되었다.

1868년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왔으나, 1876년에 일어난 대규모 화재로 다시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1888년 재차 옮기는 등 여러 차례의 피해와 복구가 거듭되었다.

1904년 이곳에 통감부가 들어섰고 1917년 11월에 일어난 창덕궁의 대규모 화재 뒤 이를 복구하기 위해 1918~20년 원래 있던 건물을 해체했다.

또 이곳에서 나온 건축자재의 방매와 국립중앙박물관이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의 건립 등으로 본래의 모습을 잃었으나 1996년 12월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 등으로 일부가 복구되고 있다.

 

▼ 경복궁 흥례문과 회랑이...

 

 ▼ 북악산은... 

 

 ▼ 경복궁 흥례문으로...

 

▼ '경복궁 광화문 제모습 찾기' 현장은...

 

▼ 흥례문 앞에는...

 

 

 ▼ 흥례문

 

 

흥례문

흥례문 일곽은 1910년경부터 훼손되기 시작하여, 일제가 조선총독부 시정 5주년기념 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상당부분 철거 변형되었으며 1916년 조선총독부 청사건립으로 완전 철거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1915년 물산공진회 개최시에는 경복궁의 전반부를 전시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상당수의 전각이 변형 철거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흥례문 일곽과 담장도 훼철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97년에 흥례문과 주변행각, 유화문, 영제교 등을 복원하기 시작하여 1998년 9월 23일 상량하여 2000년에 준공하였다.

광화문과 근정문의 남북중심축선상에 위치하며 2층 건물로 상하층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중앙어칸이 좌우 변칸보다 2척이 더 넓은 18척으로 근정문과 비슷하다.


중층 다포계 겹처마 우진각지붕으로 마루는 양성을 하고 용마루 양단에는 취두를 상하층의 추녀마루에는 용두와 용두아래로 7개씩의 잡상을 배치하고 사래끝에는 토수를 끼웠다.

동측면의 내부쪽으로는 이층으로 오르는 목조계단이 설치되었다.


중앙기둥열에는 두짝씩의 판문을 달았다. 공포는 다포계 공포를 구성하고 있다.

하층간포는 도리통에는 어칸은 3구, 좌우협칸에는 2구씩, 양통 2칸에는 1구씩의 간포를 설치하였다.


상층간포는 도리통 어칸은 3구, 양협칸에는 2구씩, 양통 2칸에는 1구씩의 간포를 설치하였다.

공포구성은 하층은 내3출목7포작 외2출목5포작이고, 상층은 내외 모두 2출목5포작이다 

 

 

▼ 근정문으로...

 

 

 

 

▼ 영제교를 건너...

 

 

 

▼ 근정문

 

 

근정문

광화문을 들어서서 수문장청을 지나면 남행각 중앙에 자리 잡은 흥례문에 이른다.

흥례문을 지나면 서쪽에서 동편으로 흐르는 어구가 있고 보도에 이어 돌다리 영제교가 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근정전일정과 행각 중앙에 중문으로 높이 솟은 근정문이 있다. 


고종 4년에 중건한 것이다.

정면에서 보면 3칸인데 아래층엔 문얼굴을 내고 큼직한 문짝을 달아 여닫게 하였고, 위층은 사방에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는 시설을 하였다.


평소엔 문을 닫아 두고 대소의 신료들은 문무반에 따라 동쪽의 일화문과 서편의 월화문을 이용하였다.

현존하는 조선왕궁의 정전 정문 중 유일하게 중층 건물로 남아 있다.

 

 

근정전

경복궁의 정전(正殿). 국보 제223호.

1395년(태조 4) 지은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현재의 건물은 1867년 중건된 것이다.

2층의 목조건물로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던 곳이다.

근정전은 이단으로 된 월대(月臺) 위에 자리하며, 월대 주위의 돌난간에 새겨진 12지상(十二支像)은 정전 수호의 의미가 있다.

 

월대의 주위를 둘러싼 회랑은 홍례문의 좌우에서 시작해 향오문의 좌우로 연결되면서 근정문(勤政門)과 사정문(思政門)의 좌우에도 이어져 직사각형의 회랑은 모두 3개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근정전의 좌우 회랑에는 동쪽에 융문루(隆文樓), 서쪽에 융무루(隆武樓), 그 북쪽에 동서행각문인 계인문(啓仁門)과 협의문(協義門)을 두었다.

 

근정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문루인 근정문의 좌우에 일화문과 월화문을 두어 권위성을 보여준다.

앞면 5칸, 옆면 5칸의 팔작지붕으로 아래층의 고주가 위층의 변주가 되는 구조이며, 창방·평방 위에 놓인 다포계의 공포는 외삼출목(外三出目)·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기둥머리마다 직각방향으로 튀어나온 안초공(安草工)을 두었다.

공포의 전체조형은 판재화하는 조선 후기 다포계 건물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천장은 대들보 윗부분부터 우물천장으로 천장 중앙에는 다포계의 천개를 설치하고, 개판에 운룡(雲龍)을 부조했다.

팔작지붕의 지붕마루는 모두 양성(兩城)을 했고,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鷲頭)를,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龍頭)와 잡상(雜像)을 올려놓았고,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달아 위엄을 더했다.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 중에서 가장 높고 규모가 크며, 조선 후기 다포계 건축의 특징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 근정전

 

☞ 근정전

경복궁의 수조정전이며 문무백관의 조하를 비롯한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법전으로, 태조 3년(1394)에 창건하였다.

그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에 재건하였다.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등 여러 국왕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근정전은 상·하 월대 위에 이층으로 지은 거대한 건물이다.

건물 내부는 아래 위층의 구분을 없이 하여 넓고 높다. 중앙에 임금이 좌정하던 어좌가 있다.

실내에 가득 의장기물이 장치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근정전 둘레에 이간통의 행각이 있고 남행각 중앙에 다락문인 근정문이 있다.

옛날엔 근정문 남쪽에 흥례문, 그 남쪽에 정문인 광화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동행각에서 남행각으로 꺾이면서 두 번째칸 기둥 앞에 서서 약간 굽힌 자세로 바라다보면, 근정전의 우람한 자태와 처마곡선이 북악산의 흐르는 선과 조화되어 선율을 이룬다.

근정전을 바로 이 자리에 자리잡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근정전의 월대(月臺)

월대(越臺)라고도 한다.

근정전을 높직하게 올려세우기 위하여 상하 이층으로 돌기단을 구성했다.

근정전은 이 월대에 다시 첨계라는 외벌대 댓돌을 구성하고 건축되었는데, 월대의 뒷부분 넓이보다 앞쪽이 훨씬 넓게 되어 있다.


월대는 박석을 깔아 포장하였는데, 배수를 고려하여 물매를 세게 두어서 근정전이 서 있는 부분보다 돌난간이 설치된 가장자리가 현저하게 낮다. 


위치도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근정전 월대 남쪽면 중앙 상하에 각각 답도를 설치하였다.

답도 좌우로 좁은 계단석이 놓이고 그 끝에 큼직하게 소맷돌을 설치하여 큰 계단은 세 구역을 이루게 되었다.

소맷돌은 해태가 허리를 펴고 길게 엎드린 듯한 형상으로 조각되었고, 답도에는 게풍 사이에 구름속에서 여의주를 희롱하며 노니는 봉황이 새겨져 있다.


답도 좌우 층계석 전면에는 당초무늬가 부조(浮彫)되었다.

좌우로 해태와 같은 벽사의 신이 강역을 수호하여 주는 가운데 넝쿨같이 어울려 사는 백성들이 봉황 같은 왕족을 중심으로 떠받들고 있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 근정전 내부

 

 

 

▼ 일월오봉도

 

▼ 정鼎

 

 

 

 

▼ 사정문을 들어서서...

 

 ▼ 사정전

 

사정전

정전(正殿)인 근정전 뒤에 있는 편전(便殿)으로 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면서 정사를 보던 건물.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1429년(세종 11) 중수했다고 한다.

다른 전각들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1865년(고종 2) 중건되었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마당보다 약간 높게 원주(圓柱)를 세웠으며, 사면의 기둥 사이에 토벽(土壁)을 치지 않고 4분의 광창(光窓)과 문짝[門扉]을 짰다.

기둥 윗몸에 창방과 평방을 두고 내·외이출목(內外二出目)의 공포를 놓았다.

지붕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을 배열했다.

내부는 우물천장이며 작은 내부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특별한 가구법(架構法)을 썼고, 어좌(御座)를 치한 뒷벽에는 운룡(雲龍)이 활달한 필치로 그려져 있는데, 경복궁 내의 유일한 벽화이다.

 

서배쪽에는 천추전(千秋殿)이, 동쪽에는 만춘전(萬春殿)이 있는데 만춘전은 6·25전쟁 때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편전은 정전의 측면에 있는데, 이 건물은 정전의 정북방에 있어 정궁(正宮)으로서의 질서정연한 배치원칙을 따랐음을 보여준다.

 

▼ 사정전 앞에 전시된 '앙부일귀'

 

▼ 사장전 내부

 

 

▼ 외국인 관광객들...

  

▼ 강녕전 앞에는...

 

강녕전

경복궁 안에 있던 왕의 침전(寢殿). 1395년(태조 4) 사정전(思政殿) 북쪽에 세워졌는데 〈서경 書經〉의 홍범편(洪範篇)에서 오복(五福) 중 강녕(康寧)을 당호(堂號)로 삼았다.

1433년(세종 15) 중수했으며 1553년(명종 8) 불탄 것을 이듬해 중건했다.

임진왜란 때 전화(戰禍)로 다시 불타 없어진 것을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었다.

내전(內殿)의 으뜸 전각으로 앞면 11칸, 옆면 5칸의 단층팔작집이며, 장대석 바른쌓기한 높은 기단 위에 다듬은 돌초석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우고, 쇠서 2개를 둔 이익공집이다.

특히 뒤에 있던 왕비 침전인 교태전과 함께 지붕에 용마루를 양성하지 않음으로써 침전임을 상징했다.

1920년까지는 제자리에 있었으나 1917년 화재로 불타버린 창덕궁의 내전을 재건한다는 구실로 일본인들에 의해 헐리어 건축부재로 사용되었다.

 

 

▼ 잡상

 

 

 

 

▼ 교태전

 

교태전

경복궁 안에 있던 왕비의 침전(寢殿).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년(태조 4)에는 없었으나 1443년(세종 25)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1553년(명종 8) 불탄 것을 이듬해 중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다시 불타버렸다.

1865년(고종 2)에 중건되었는데, 1876년 다시 불탄 것을 1888년 재건했다.

1920년 창덕궁 대조전을 짓는다는 구실로 왕의 침전인 강녕전과 함께 일본인들에 의해서 헐려 건축부재로 사용되었다.

현재 이 자리에는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강제로 옮겨온 석탑·부도 등의 석조물들이 있다.

교태전은 뒤뜰의 아미산에 남아 있는 굴뚝에 새겨진 십장생·매란국죽과 길상(吉祥)의 무늬로 보아 150여 채의 궁궐건물 가운데 가장 화려하게 치장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에 1920년 당시의 사진과 평면도가 실려 있어 원형추정이 가능하다.

 

 

 

 

▼ 아미산 굴뚝

 

아미산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의 후원이다.

아미산이란 중국의 명산을 상징하는 이름인데, 여기서는 산이 아니라 사방에 장대석으로 단을 쌓아 만든 것이며, 남쪽에는 4단의 화계가 조성되었다.


이 화계의 단에 괴석, 방형석지, 연화형 수조, 해시계대, 돌절구, 화전장식 굴뚝 등이 배치되고, 매화, 모란, 앵두, 반송, 철쭉 등의 화목을 심었으며, 단 위에는 배나무, 뽕나무, 느티나무, 말채나무 등이 원림(苑林)을 이루고 있다 


아미산의 굴뚝(보물 제811호)

아미산 화계에 설치된 이 육각형 굴뚝들은 화계 앞에 있었던 교태전의 굴뚝이다.

굴뚝의 높이는 지붕을 제외하고 2.6미터쯤 되며, 육각 한 벽면의 폭이 88센티미터쯤 된다.

지붕 위에는 네 개의 연가가 배치되어 있다.

굴뚝 최상단 벽면에는 당초문이 새겨졌고, 그 밑에 용, 학, 박쥐 등의 문양전이 배치되었으며, 정남에는 용문전을 배치하였다.

문양전의 밑 벽면에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 모란, 국화 조형전이 배치되고, 북쪽면에는 희(囍)자 등 글씨가 새겨졌다.

이들 조형전의 밑 벽면에는 호랑이, 해태, 박쥐, 학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 문양은 군(君), 신(臣), 절의(節義), 부귀, 장수, 벽사를 상징한다.

이 네 개의 굴뚝은 모두 붉은 벽돌로 축조하였는데, 화계의 조형물처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 맥문동꽃이...

 

 

▼ 향원정으로...

 

▼ 옛국립중앙박물관

 

 

 

 

▼ 향원정

 

향원정

경복궁 안에 있는 2층 정자. 향원정은 보통 이층이라 하지만 누마루 밑의 구조까지 치면 삼층이 된다.

고종이 건청궁(乾淸宮 :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에 기거하던 1867년 경회루 서북쪽에 연못을 파고, 그 안에 섬을 만들어 이층의 육모정인 향원정을 지은 것이다.

건청궁과 향원정 사이에 나무로 구름다리를 걸어 취향교(醉香橋)라 했는데, 이 다리는 6·25전쟁 때 파괴되고 현재의 다리는 1953년 남쪽에 새로 놓은 것이다.

정자는 정육각형으로 장대석으로 된 낮은 기단 위에 육각형의 초석을 놓고 그 위에 1·2층을 관통하는 육각기둥을 세웠다.

1층에는 평난간을, 2층에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가 있다.

겹처마이며,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지붕의 중앙에 절병통(節甁桶)을 얹어 치장했다.

 

 

 

▼ 취향교

 

향원지와 취향교

경복궁의 후원에 속하는 향원지는 세조 2년(1456)에 조성되어 취로정(翠露亭)이란 정사를 짓고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 「세조실록」에 보인다.

못의 넓이는 4,605평방미터이며, 모를 둥글게 죽인 방형의 연지에는 연꽃과 수초가 자라고, 잉어 등 물고기가 살고 있다.

 

연못가에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굴참나무, 배나무, 산사나무, 서어나무, 버드나무, 느릅나무, 말채나무가 숲을 이루고, 향원정이 있는 섬에는 철쭉, 단풍 등 관목류가 심어졌다.

이 연못 남쪽의 함화당 후원에는 '하지(荷池)'라 새긴 석지와 석상(石床)이 배치되어 있다.

이 연못의 수원은 북쪽 언덕 밑에서 솟아나는 지하수와 '열상진원'이란 샘물이다.

연지 속에 북악의 산영이 잠겨들고 오색 아롱진 단청의 정자와 취향교가 그림자를 드리우면 한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

 

취향교는 목교로서 1873년에 설치되었다.

원래는 건청궁에서 향원정으로 들어가도록 북쪽에 있었던 다리인데, 1953년 남쪽으로 옮겨 놓았다.

조선시대 원지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길이 32미터, 폭 165센티미터) 

 

 

 

 

 

▼ 저곳은?

 

☞ 여기서 1부를 마치고...

 

 

 2007년 8월 18일(수)    
'도심 나들이(경복궁-북촌한옥마을-인사동-조계사-보신각)를 다녀오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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