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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현충원·사육신묘

[20070227]노량진 사육신묘에서 동작동 국립묘지(국립현충원)까지 다녀오다 - 1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07.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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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27일(화) 노량진 사육신묘에서 동작동 국립묘지(국립현충원)까지 다녀오다.

 

 오늘은 그간 숙제로 남겨둔 곳을 찾아나서기로 하고 디카를 들고 집을 나선다.
대략의 일정은 노량진역에서부터 사육신묘를 들러보고 흑석동을 지나
국립묘지(국립현충원)까지 걸어가서 국립묘지를 한바퀴 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하면 한강으로 나가던지 동작대교를 건너던지 하려한다.
 
다녀온 이야기는 사진으로 대신한다.
 

 

☞ 1부 - '노량진역에서 한강대교 남단까지'

 

▼ 노량진역

 

▼ 육교에서 내려서서... 

 

 

▼ 소방서 건물을 지나...

 

▼ 사육신묘 입구

 

▼ 현재의 사육신묘가 있는 곳이 '사충서원' 터라고....

 

☞ 사충서원[四忠書院]

 

옛날 노량진 동사무소가 있던 사육신묘 입구 동산에 건립된 사액서원.

조선 영조 때 (1725) 건립된 것으로, 경종 원년에 신임사화(1721)로 희생된 노론 4대신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조태체(趙泰采), 이이명(李命)을 모신 곳이다.


숙종때 남인세력을 제거하고 장기집권하던 서인세력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려 경종이 즉위하자 후손이 없던 경종의 후계문제를 놓고 격돌했다.

 

경종을 옹립해 세를 잡은 소론이 왕제 연잉군(영조)을 세자로 세운 노론 4대신 등을 역모로 몰아 죽였으나 경종이 곧 병사하고 영조가 즉위하자 영조는 당쟁을 근절하기 위해 4색을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썼다.

 

그리고 영조를 세자로 옹립하려다 희생당한 4대신을 즉시 복권시키고 사충서원을 세워 모셨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를 모면했으나 1927년 철도용지로 수용되어 용산구 보광동 28번지로 이전, 6·25때 소실되었다.

 

▼ 사육신공원 

 

 

▼ 홍살문

 

☞ 홍살문(紅-門)

능(陵)·원(園)·묘(廟)·궁전·관아 등의 정면 입로(入路)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지붕이 없이 붉은 살을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 박았다.

 

 

 ▼ 불이문 앞에서...

 

 

☞ 사육신묘[死六臣墓]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다.

사육신묘는 조선의 6대 임금인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1456년(세조 2) 목숨을 바친 6명의 신하인 사육신의 무덤이다.

 

1681년(숙종 7) 숙종이 이곳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곳에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웠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神道碑)를 세웠으며 1955년 5월 육각의 사육신비(死六臣碑)를 세웠다.

 

후에 서원은 철폐되었으며, 1978년 묘역을 확장하고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義節祠), 불이문(不二門), 홍살문, 비각(碑閣)을 새로 지어 충효사상의 실천도량으로 정화하였다.

 

사육신묘에는 원래 이곳에 있던 성삼문·이개·박팽년·유응부의 묘와 하위지ㆍ유성원ㆍ김문기의 가묘(假墓)가 있다.
 
7개의 묘가 있는 이유는 <조선왕조실록>과 <추강집> 등 사료의 내용이 달라 육신에 대한 논란이 있은 후, 김문기를 현창(顯彰)하고 그의 가묘도 추가했기 때문이다.
 
의절사 안의 위패와 마찬가지로 그 뒷편의 묘소는 동쪽으로부터 김문기ㆍ박팽년ㆍ유응부ㆍ이개ㆍ유성원ㆍ성삼문ㆍ하위지 순서로 모셔져 있다.

 

 

☞ 생육신[生六臣]
 

조선시대 단종(1452~55 재위)이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뒤의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관직에 나가지 않고 절의를 지킨 6명의 신하.
 

김시습(金時習:1435~95)·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조려(趙旅:1420~89)·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1454~92)을 말한다.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죽음을 당한 사육신에 비해서 살아서 절개를 지켰다는 의미에서 생육신으로 불렀다.
 

세종은 정도전의 재상중심 정치운영론이나 태종의 왕권강화론을 절충하면서 유교적 이상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그리고 집현전의 설립·육성을 통해 왕권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학문연구기관을 만들어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런데 유교의 정치론은 왕이 중심이 되는 정치론보다는 신하 중심의 정치운영론을 지향함으로써, 현실의 정치는 자연히 신하의 발언권이 강해지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말년에 세종이 병으로 정치운영에 참여하는 기회가 적어지자 신하의 발언권은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세종이 죽자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신하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그런데 세종에 이어 즉위한 문종도 곧 죽자, 김종서·황보인 등 세종 이래의 유신들이 재상이 되어 정치운영을 독점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소수의 재상이 전권을 독단하는 현상을 초래하게 되어, 많은 신하의 의견을 존중하며 공론을 실현하는 신하 중심의 정치론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한편 태종 이래 강력해진 왕실은 소수의 재상에 의한 정치운영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특히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재상에 의한 권력독점에 반발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결과 중앙정치에서 전권을 장악한 김종서·황보인 등에 반발한 수양대군의 왕실과 집현전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정치적 변란을 도모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계유정난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계유정난에 의한 김종서·황보인 등의 축출과 수양대군에 의한 왕위찬탈은 집현전 출신의 학자들이 추구하는 유교정치와 상이한 점이 많았다. 물론 집현전 학자들은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뜻을 같이 하여 김종서·황보인 등 재상 중심의 정치운영 방식에 불만을 갖고 있었고, 그런 점에서 계유정난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조가 즉위하면서 왕권중심의 정치운영론을 지향하게 되었는데, 이는 집현전 출신의 유학자가 지향하는 신하 중심의 정치운영론과 다른 것이었다.
 

그 결과 이 두 세력은 충돌하게 되고, 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정변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단종복위운동이다. 이 사건은 사전에 발각되어 많은 집현전 출신의 유학자가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고 유학자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살기도 했다.
 
이 가운데 죽음을 당한 사람을 사육신이라 부르고,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유랑생활을 하며 초야에 묻힌 사람을 생육신이라고 불렀다. 중종반정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이들의 절의 또한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고, 그후에 빚어진 정치운영상의 변화 속에서 그들의 위치가 자주 바뀌었다.(→ 사육신)

 

 ▼ 불이문 

 

 

 ▼ 불이문을 들어서며...

 

 ▼ 불이문에서 바라본 의절사

 

 ▼ 좌측에는 신도비각이 있고...

 

 

 

 ▼ 우측에는 육각의 사육신비가 있고...

 

 

 

 

 

 

 

 

 ▼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義節祠)

 

 

 ▼ 사육신의 위패

 

▼ 정(鼎)

 

☞ 정(鼎)

 

법전 어귀에서는 다리가 셋이고 귀가 둘 달린 둥근 청동 솥을 보게 되는데, 이를 정이라 한다. 처음에는 흙을 구워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청동으로 만들었고, 주로 고대 종교 의례나 국가의 큰 잔치 때 사용되었던 예식용 그릇 가운데 솥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는데, 중국의 옛 기록에 따르면 천자는 9개의 정, 제후는 7개의 정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 구정(九鼎)은 왕권과 중국의 아홉 개의 주를 상징하며 또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고 하늘의 복을 받기를 기원하는 상징물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역시 왕권의 상징물로 보여진다.

 

 ▼ 사육신묘가 있는 곳으로 나가는 문

 

 

 

 ▼ 이름모를 비

 

 

 ▼ 길 아래에 있는 저 나무는...

 

 ▼ 뽕나무

 

 

 ▼ 몸을 꼬고 있다.

 

 ▼ 우측에 있는 4개의 묘는...

 

 ▼ 이개

 

 ▼ 유응부

 

 ▼ 박팽년

 

 ▼ 김문기

  

 ▼ 위에서 내려다보니...

 

  

 ▼ 좌측에서 보니...

 

 ▼ 좌측에 있는 3개의 묘에는...

 

 

 ▼ 유성원

 

 ▼ 성삼문

 

 ▼ 하위지

 

 ▼ 묘 위에 넓은 터에 있는 일렬로 선 주춧돌의 용도는?

 

 ▼ 한강대교가 보이고...

  

 ▼ 언덕 아래에는 그을린 문인석이... 

 

 

 ▼ 이 문인석은 가슴까지 흙이 차서...

 

 ▼ 계단으로 이어지는 길아닌 길로...

 

 

 

 

 ▼ 계단을 따라 내려서서...

 

 ▼ 계단 한쪽에는 봄을 알리는 들꽃이...

 

 ▼ 좁은 골목길을 따라 나오니...

 

 ▼ 시민공원과 연결이 되고...

 

 ▼ 예전에 노량진 정수장을 이렇게 공원으로 만들어서...

 

 

 

 

 

 

 ▼ 때를 기다리는 꽃들...

 

 

 

 

 

 

 

 

 

 

 

 

 ▼ 꽃피는 계절에 다시 올 것을 다짐하며...

 

 

 

 

 

 ▼ 한강대교 남단이 보이고...

 

☞ 여기서 1부를 마치고...

 

 
▣ 2006년 2월 27일(화)에
 

['노량진 사육신묘에서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다녀온 이야기] 中

 

--▥☞ 1부(노량진역에서 한강대교 남단까지)는 여기를 누르세요.☜▥--
 
--▥☞ 2부(한강대교에서 국립묘지 정문까지)는 여기를 누르세요. ☜▥--
 
--▥☞ 3부(국립묘지 정문에서 경찰충혼탑까지)는 여기를 누르세요.☜▥--
 
--▥☞ 4부(경찰충혼탑에서 동작역까지)는 여기를 누르세요. ☜▥--